신의 가면 1 : 원시 신화 까치글방 160
조셉 캠벨 지음, 이진구 옮김 / 까치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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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보이신 이탈자적 면모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유교사회에서였더라면 용납되기 어려웠을 자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을 부정하는 발언도 서슴지 않으셨던 분이다. “누가 내 어머니이고 누가 내 동생들이냐?” 동양에서 태어나셨더라면 사회적 배척을 감당하셨다 해도 당연했을 발언 수위이다. 게다가 자신의 교인들에게 마저 “아비나 어미를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니라”고도 하셨다.

 

- 물론 모두, 갈등을 극대화해 문제를 인식하고 갈등을 중재하는 과정을 통해 발전을 이루라는 뜻이실 거라 생각한다. 또 가족이라 해도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이의 의도와 통제에 휘둘리는 삶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라는 말씀이기도 할 것이다. 그 과정을 통해 서로 이해하기도 하고 그릇된 길에서 벗어나게 하려 최대한 노력할 수도 있고 말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절대 아니다” 싶을 때는 (예수님께서 누군가 잘못한 형제는 어찌해야 하는지 물었을 때 용서하라던) 예수님 말씀 마따나 7번씩 7번은 용서하다가 정 아니라는 판단이 선다면 벗어날 일이다. -

 

게다가 기존의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성스러운 인물들은 대개 자신의 헌신이나 사역의 과정에서 개인적 만족과 여유 또는 보상을 거절하지 않았나?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사례들과 달리 의례와 같은 거절을 배격하셨다. 이전 포스팅들에서 거듭 언급했듯 예수님의 발을 향유로 씻고 자신의 머릿결로 닦아주던 여인이 있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걸 팔아 많은 이들을 보살필 수 있다는 식의 발언을 한 것으로 보아 상당한 고가였을 것이다. 예수님께선 자신이 스스로에게 허용하는 만큼의 여유는 헌신하는 이들도 누려야 한다는 모범을 보여주고자 하셨던 듯하다. 더욱이 가장 논란이 될지도 모를 해석을 하자면 예수님께서 과연 자신의 여정에서 그러니까 자신이 연기를 펼치신 무대에서 온전히 연출에 동참하여 연기를 펼치셨는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어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는 기도를 이어 가시긴 했다지만 분명 “이 잔이 제게 너무 무거우니 거두어 달라”는 기도를 하셨지 않았나? 게다가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라는 기도는 무언가? “하나님, 하나님 저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뜻이라던데... 자신의 죽음과 부활까지 모두 아시는 듯 그 자신의 사역 과정 중에서 늘 죽음을 연상할 발언들을 하셔 놓고는 자신이 감당해야할 여정을 거부하려던 기도도 하신데 이어 하나님께 왜 자신을 버리느냐며 원망하고 있지 않은가? 아무래도 십자가에 매달리시자마자 “다 이루었다”는 기도를 하신 것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며 모순되는 장면이 아닌가?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자신에게는 이루어야 할 목표가 있었고 그 목표를 완수했다는 게 분명할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계획과 연출로 목표를 완수했다는 이가 돌연 ‘도대체 왜 나를 버리는 거냐?’며 절규하고 있는 것이다. 개그콘서트에서 박성호씨가 연기하던 ‘다중이’ 캐릭터도 아니고 ‘킬미 힐미’나 ‘하이드 지킬, 나’에 주인공 역할을 노리고 오디션 보고 계셨던 것도 아닐 텐데 수긍도 납득도 쉽지 않은 모순된 연출을 하고 계시지 않은가?

 

이 모순되는 두 장면은 캐논과 아포크리파에서의 가르침들이 관점에 현격한 차이를 보이신 것과 같은 경우라고 생각된다. 한국에서 도마복음이라고 부르는 아포크리파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 이분법을 넘어서라 가르침 하신다. 그래야 왕국에 들어설 것이라고 말이다.

 

- 여기서의 왕국은 우리가 이 땅에 구현해야 하는 천국 즉 천년왕국을 말씀하신 것일 수 있다. 그리고 그 왕국은 우리 자신의 밖에 있는 것이기도 하겠으나 우리 자신이기도 할 것이다. 나와 너(감각이 인식하고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모든 것)를 초월하면서야 진정 온전히 이르러야 할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일 것이다. 애초에 찾아 나설 필요가 없던 파랑새를 찾는 여정처럼 그 자리로 다시 돌아오게 될 그 여정을 위한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왕국이 우리 자신이기도 하겠으나 우리들 낱낱의 ‘나’ 라는 왕국이 변화하면 나의 밖에 함께 만들어가고 살아가야 할 세상이란 왕국도 변화하는 것이다. 허나 우리들 낱낱의 나가 변화하면 세상이 변한다는 관점 자체도 이분법적인 것이다. 낱낱의 나를 변화시키는데 제도적인 도움도 필요한 것이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너가 변하면 세상이 변한다면서 개인의 성찰과 노력만을 강조해선 안될 일이다. 세상이란 변화는 그런 개인의 변화 이후라고 합리화하며 방치하기만 한다면 진정한 변화는 더딜 수밖에 없다. 교육을 통해 가치관의 변화를 가져 오는 안배가 없이 낱낱의 아이들에게 너희 스스로 바른 가치관을 지니고 세상의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는 건 무리한 요구라는 말이다. 개인의 변화와 세상의 변화는 상호 호혜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제도의 변화는 변화를 주도할 개인이 가져 올 수 있을 것이나 또 낱낱의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제도가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나와 너를 가르지 않는 변화는 나와 너가 동시에 서로를 향하며 가져와야 하는 것이다. -

 

반면에 정경에서는 부자들에게 적대적이셨고 부 자체에 대해 개인적인 편견이 있으셨던 것으로 보인다. 세리를 외식하는 자들과 엮어서 비판하시기도 했다. 물론 그 시대의 세리(세금징수원)들이 과도한 세금 정책과 세수를 통해 개인적 이익을 취하는 등 비판의 여지는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판은 변화를 가져오기 보다는 그저 물의를 일으키는데 머무는 비판이셨다. 무엇보다 성전에서의 환전상과 비둘기 판매상에게 행하신 테러행위(개인이나 집단이 의도를 가지고 개인이나 집단에게 폭력을 행사하여 사회 불안을 조장하는 경우가 테러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행위는 명백한 테러행위셨던 거다.)는 반박의 여지가 없는 폭력행위였었지 않은가?

 

- 이 시대의 어느 목사님이나 신부님이 술은 강간과 음주운전사고와 집단이나 개인 간의 폭력을 났는 악의 근원이라며 호프나 소주방이나 바나 주점 등을 급습해서 손님들이 술 마시고 있는 테이블을 엎고 소리치고 의자 집어던지면 바로 영업방해죄와 (흔히 기물파손죄라고 말하는) 손괴죄로 구속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테이블의 잔이나 접시에 손님이나 직원들이 살짝이라도 부딪친다면 특수폭행죄도 추가된다. 명백한 범죄행위인 것이다. -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보면 거의 대다수가 '사랑하라.(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듯 나도 너희를 사랑하니 너희 서로 사랑하라) 불쌍히 여기라.(긍휼히 여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 입고 먹고 마실 것을 걱정하지 마라.(공중의 새를 보라...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않느니라.) 재산을 지상에 쌓는데 연연하지 말고 천국에 쌓아라. 일곱 번씩 일곱 번 거듭 용서하라.(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리라.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하나를 달라면 거의 모든 것을 다 주어라.(...속옷을 가지고자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며 ...오리를 가게 하거든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그리고 욕망을 충족시키는 삶이 아니라 진리에 목말라 하라.(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너희는 빛의 아들이 되리라)' 는 말씀이다.

 

사랑과 용서, 무소유를 실천하라. 진리를 향해라. 아마도 이것이 신약에서는 가장 중요한 가르침들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이러한 언급을 한 것은 예수님의 상이 정경(캐논)과 외경(아포크리파)에서 상당히 대비가 되며 정경 내에서도 그런 대비가 있고 외경에서도 각 아포크리파들을 대조하면 그런 대비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정경의 주요 가르침이 사랑과 용서, 무소유, 진리의 중요성임에도 예수님의 삶은 그런 자신의 가르침과는 외견상 부분적으론 달랐다.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던 분이 시대 비판과 특정 계층을 비판하기만 하신 것도 아니라 위에서 언급했듯 실제적 테러도 서슴지 않으셨다. 게다가 어머니와 동생을 부정하신 것을 이미 언급했었다. 그에 더해 가족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이는 내게 합당치 않다는 말씀도 하셨다.(이런 양가적으로만 보이는 말씀이 과연 전혀 맥락 없이 하신 것일까? 과연 분열된 자아상을 보여주기 위해 연출하신 것이기만 한 걸까?)

 

- 솔직히 예수님께서는 그의 삶으로 양가적이며 분열적인 모습을 보이신 분이다. 살인자이면서(아포크리파 중 예수님 어린시절 토마스복음을 보면 어린 예수님이 어린이를 살해하고 피해유가족과 그 이웃의 눈까지 영원히 멀게 한 사례가 등장한다) 구원자셨으니 말이다. 그러나 가르침은 보고 또 보면 일관성 있는 가르침을 다양한 각도랄까 구도랄까로 펼치신 것이다. 그런데 아포크리파와 요한복음은 상충된다고 오해를 받고 있다. 부처님께서도 이렇듯 다각도로 가르침을 펼치셨다. 그래서 재가신도 중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오해하는 경우도 있었다. 중생들에게 거듭 자신의 전생들에 대해 말씀하시자 한 재가신도가 변하지 않는 내가 거듭 윤회하며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 말씀하셨다며 ''나' 란 것은 영원불멸하는 것이라 가르치시지 않았냐?'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곡해했던 적이 있다. -

 

‘가족을 나(빛이신 예수님 또 빛의 아들이어야 할 신앙인 자신) 보다 더 사랑하는 이는 내게 합당치 않다’

 

이 말씀은 심리학적으로도 중요한 가르침이다. 타인의 관점과 의도에 휘둘리며 살지 말고 자존감을 키우고 스스로의 의지로(나 자신의 인식과 관점과 판단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인 것이다. ‘가족보다 다시 말해 가족이 주는 안도감이나 가족이 '나'라는 한사람의 인식과 판단에 주는 영향력에 휘둘리지 말아라. 그들 보다 더 사랑해야하는 대상은 바로 나 자신이다.’ 는 관점에서 보자.

 

그럼 예수님께서 말씀 하신 ‘나’를 화자인 예수님 자신과 청자인 ‘신앙인’ 둘 다를 포함하는 경우로 볼 때 예수님께서 하신 “나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는 빛의 아들이 되리라” 로 근거해 보자면 나라는 존재는 근본적으로 빛이어야 한다. 또 빛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오르는 지식의 빛을 의미한다고 한다. 빛이 지식이고 그것이 알아야만 할 진리라 할 때 기독교인이 추구해야하는 진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 하셨고 자신을 믿고 따르는 이는 빛의 아들이 될 것이라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신 이유는 만민에게 영생을 주려함이라 하셨다. “영생은 곧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생은 육체가 영원하기를 바라라는 것이 아니다. 이미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라고 하셨지 않은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요한일서의 정의로 본다면,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를 아는 것이라는 ‘영생’은 결국 ‘사랑 속에 살아라.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라.’ 는 말씀이신 것이다. 그러게 "너희 안에 천국이 있다" 는 말씀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흙으로 상징된 물질원소로 사람의 육체를 만드시고 하나님 자신의 숨을 불어넣어 살아있는 존재로 창조하신 것이지 않은가? (개역개정판 성경에서 생기라고 번역한 네샤마 -아리예 카플란의 해설로는 하나님의 영향력<영혼>에 분류 중 하나이다- 는 숨을 뜻하는 네쉬마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하나님의 네샤마인 생기, 다시 말해 하나님의 숨이 불어넣어져 생령 즉, 살아있는 영혼이 되었다는 것이 사람이다. 생령은 네페쉬가 번역된 말로써 네페쉬는 휴식을 뜻하는 나파쉬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어원대로라면 하나님의 영혼의 다양한 영향력을 분류한 계통 중 하나인 '네샤마'는 '하나님의 혼이자 숨'인 것이며 그런 하나님의 혼과 숨이 내면에서 '네페쉬' 하고 있는 존재 즉 '휴식'하고 있는 존재가 사람인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가족을 나보다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는 말씀은 결국 가족이라 하더라도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이의 관점과 판단 더 나아가 통제에 휘둘려서는 안되는 존재가 자기 자신이라는 말씀일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는 말씀을 보면 깊이가 달라진다. 나 자신의 안에 천국이 있으며 나 자신의 안에 하나님의 부분이 휴식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신 까닭에 사랑은 늘 내 안에 잠자고(쉬고) 있었던 것이다. 잠자는 하나님을 깨울 수 있다면, 빛이며 또한 천국을 간직한 이들인 서로가 내 안의 하나님을 통해 이 땅에서 함께 천국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 하신 "나"를 화자인 예수님만이 아닌 청자인 사람들로 즉 누구나인 자기 자신으로 해석 하는데 문제를 제기 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봐 좀더 언급해야 할 것 같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너희 안에 천국이 있다" 고 하셨다. 그러시면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에게로 올 이가 없다" 고 하셨다. 


천국이 너희 안에 있다고 하신 후 말씀하시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 "나" 라고 하시는 말씀을 어찌 받아들여야 하겠나? 분명 '너는 나고 나는 너다' 는  블락비의 ZICO가 사랑하는 이에게서 느낀 감상과 같은 관점에서 하신 말씀일 것이라는 말이다. 


"내가 나를 증거하여도 참되고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만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에서 말씀하시는 '나'도 사람인 누구나의 자기 자신으로 이해하면 해석이 달라진다.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만 찾으며 자기 자신을 찾는 데 즉, 내면의 잠자는 하나님을 일깨우는 데 소홀히 한다면 죄 가운데서 죽게 될 것이라는 무서운 경고이실 것이다. 그러니 진정한 자기 자신이 가야할 곳을 소홀히 하며 외부에서 경배할 이만을 찾아헤매인다면, 사람들이 회복해야 할 인간상을 대표하는 예수님께서 가는 곳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르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너희는 아래서 났고(왔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왔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여기서 났다를 써서 낳다는 뜻인가 오해의 여지도 있을 듯하다. (내가 그리 오해해서 네이버 국어사전 검색을 했다.) 하지만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하신 발언이었고 헬라어로 기록되며 그런 의미를 살려서 쓰였다면 아마도 한국의 성경편찬자들도 그런 뜻을 살려 번역했을 것이다. 그 보다는 발생했다는 하나의 현상적인 상징으로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런 발생했다는 의미를 살려 번역해 옮긴 헬라어 기록이 다시 한국어로 번역되며 '났다'가 발생을 뜻하는 어휘로 쓰인 게 아닌가 싶다. 즉, 여기서 '너희는 '아래'서 났고'란 말은 지상에서의 삶을 경험하며 지니게 된 관념들로 "구속과 한계에 갇힌 인간상"을 갖추게 된 사람들을 상징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발생의 기원이 '위'인 '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구조)대로 지으시고 자신의 부분을 담아 완성하신 (실락과 그에 이르는 과정을 거치기 전의) 최초에 창조된 그대로의 "온전한 인간상"을 상징하는 것이리라. 즉 구속과 한계에 갇힌 인간은 지상에 한정되지만 진정한 사람의 실상인 온전한 인간은 결코 지상의 중력으로 구속할 수 없는 존재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리라.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사람이 구속과 한계에 갇힌 인간상만을 자신이라 여기고서 그 구속[늙고 병들고 죽는 생명체로써의 구속 또 자연의 힘들에 제한을 받는 물질 존재로써의 구속, 한정된 힘을 수긍하며 살아가야 하는 속박된 존재(피조물)로써의 구속]과 한계(관념과 관행, 제도 등)에 휘둘리는 삶만을 지속한다면 결국 죄가운데서 죽는 것과 같은 결말만 맞이할 뿐이다. 구속과 한계에 갇힌 인간상, 그에 한정되는 자체가 죄인 것이다. 자신의 진정한 근원과 합일하고 온전한 인간인 스스로를 회복할 때에야 진정으로 구속과 한계가 끝나는 것이다. 


"내가 그인 줄을 믿지 아니하면..." 이라는 대목은 '자신이 하나님을 닮은 구조로 지어져 하나님의 부분을 담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내면의 하나님을 잠에서 깨우지 못하면'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면 결국 구속과 한계 속에서 죽게될 뿐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구속과 한계란 게 도대체 뭐냐고 할 이들이 있을 듯하다. 생각해 보면 의문을 갖을 것도 없이 하나님께서 직접 저주와도 같이 선포하신 사람의 죽음이 첫번째일테고 늙고 병드는 것도 생물로써의 구속이다. 중력과 전자기력, 자외선, 물리력 등 으로 대표되는 자연계(물질계)의 힘들로 부터 물질존재로써의 구속을 받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런 한계들 속에서 속박된 존재(피조물)로써의 구속을 겪고 살아가야 한다. 엘리사 엘리야 예수님까지 레벨차가 있게 보여주신 바와 같이 온전한 인간상을 회복하면 행할 수 있는 것들을 하지 못하는 자체가 구속과 한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보았듯 예수님과 사람들을 창조주의 독생자와 신앙인의 관계로 이분법적으로 대비시킬 것이 아니라 닮아가야하고 따라가야 하며 결국에 완성해야 할 목표가 예수님이라는 관점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그 가르침들이 결코 분해되어 맞추기 어려운 퍼즐 조각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샤카무니 붓다의 가르침은 긴 세월을 거쳐 단계적으로 고난이도로 점진적 진도를 거칠 수 있었다. 그것을 고려한다면 예수님의 짧은 공생활 기간 즉 그의 짧은 생애 만큼 더 짧을 수 밖에 없었던 사역의 기간으로는 대중 모두에게 점진적인 이해력과 지식의 수준을 확장시키며 고수준의 가르침을 모두에게 폭넓게 전하지는 못하셨을 것이다. 제자들과 신도들의 지성과 감성 사교성 등 개성의 차에 따라 각기 다른 수준의 가르침을 펼치셨을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붓다께서도 36세인가 부터 80세가 넘으셨나(?)까지 가르침을 펼치면서도 성문 연각 보살이라는 삼승의 가르침을 펼치지 않으셨나? 게다가 밀교와 선불교에 종파도 폭넓은데다 가르침을 담은 경전들의 분류만으로도 가르침이 다각도로 철학적이기도 기복신앙적이기도 했다. 또 명상수행체계이기도 하고 인간 심리에 대해서 가르침하시기도 했다. 짧은 기간의 사역만을 계획하셨던 예수님께서는 단계적으로 제자들의 이해력을 신장시키며 가르침의 난이도를 상승시켜 나갈 수는 없으셨을 것이다. 부처님 보다 더더욱 다각도의 가르침을 각 제자들의 개성(이해력과 논리력, 형이상학적 관념들을 받아들이는 수준 등)에 맞게 다른 가르침의 수준으로 전해 줄 필요가 절실하셨을 것이다. 


그러니 정경과 아포크리파에서 모두 일관된 맥락을 찾으려고 하는 것도 무리인지는 모르겠다. 요한복음은 어쩌면 기복신앙적인 관점을 가지라고 설파한 경전이며 예수님은 보통사람이 절대 결코 이르를 수 없는 이인지도 모른다. 완성할 수 있는 목표가 되기에는 너무도 거룩한 분으로 그저 기도하고 신앙만 해야 하는 분으로 받아들이라고 요한복음을 가르침하셨던 건지도 모를 일이라는 말이다. 다소 비꼬는 투이기도 하고 그런 경향도 아주 약간은 없지 않다. 하지만 실제로 믿고 의지할 대상이 필요한 이들에게 경배의 대상도 있어야만 할 일이다. 


어떠한 형이상학적인 숭고한 가르침을 이해하기 보다는 바쁘고 힘겨운 하루 하루 속에서 무미건조하거나 아픈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들도 분명있을 테니까... 그런 시절 그런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겐 정말 신앙하며 의지하고 경배할 대상이 필요하니까 말이다. 힘이 되고 위안이 되고 경배와 헌신의 대상이 되어 스스로의 신앙심으로 인해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대상, 생각만 해도 심혼에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는 아주 길고 긴 세월 마다 한번씩은 존재해줘야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근데 그럴 수도 있지만 예수님이시라면 그렇게 한측으로 치중해 해석될 수 있을 가르침을 펼치시는 상황에서도 해석의 다양성을 안배하셔서 깊이있는 해석이 가능하도록 수준 높은 방식으로 가르침을 펼치셨으리라 여겨진다. 그래서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른 깨우침을 얻도록 하셨으리라 기대된다. 예수님이라면 그런 기대 해도 될 분이지 않나 싶다.】 

 

 

위에 설명한 바와는 달리 예수님께서 하신 어떤 말씀들은 곧이곧대로만 받아들인다면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왔는지 아느냐 화평이 아니요 나는 검을 쥐어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중략, 이 대목에서는 아주 짧게 가족관계를 나열하신다. 하지만 넓게 보면 ‘사람들 간에’ 라는 말씀이시다)...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처럼 사회 전복을 노리는 테러리스트의 말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말씀도 있다.

 

이러니 그 시대 유대사회의 주류계층은 가뜩이나 예수님께서 예수님 자신의 가족도 부정하는데다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면서도 당시의 종교와 (유대문화의 종교와 경제를 거의 대등하게 여기는 문화적 특성까지 비난한 것과 같은 관점의) 사회 비판에 맹렬한데다 실제 테러로 이행하기 까지 하는 예수님이 위선적이고 위험한 인물이라 우려되고 심각한 수위의 불안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던 신앙인들이 증가하며 교세가 확장되는 것이 실감되면 될수록 그런 그들의 불안과 우려는 심각한 경계를 넘어서고 있었을 것이다.

 

가까이 깊이 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극단적으로 양가적인 인물로 보이도록 연출하고 계셨던 것이다.

 




→ 이어서 계속됩니다

폭두인가? 현자인가? 살인자인가? 구원자인가? 운명이란 무대에서 휩쓸린 광인인가? 각본까지 써내려간 연출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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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인류의 보수적 성향, 역사적 요인이면서 동시에 지역적 요인이랄 수 있는 것을 종족적 관념이라 정의했다. 또 인류 전체의 그 보다 더 광대하고 온전한 보편적 공유의식을 근본적 관념이라 정의했다.

 

이런 보편적 공유 의식인 근본적 관념은 역사적 요인과 지역적 요인이랄 수 있을 종족적 관념을 통해서야 구체화 된다고 한다. 저자는 ‘신화는 독립적 이미지들의 연속이 아니라 의미 있는 전체이며 그 안에 현실 세계의 특정한 면이 반영되어 있다’ 고 말한다.

 

이 말은 아마도 ‘근본적 관념은 종족적 관념 속에 반영되고 그를 통해서야 비로소 드러난다’ 는 설명일 수 있다. 각 문명권의 특색 또 각 국, 각 향토만의 관습, 윤리, 예절 등의 전통과 놀이, 예술, 제도 등 문화 전반을 통해서야 근본적 관념이 자신을 변용하며 스스로를 드러낸다는 말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근본적 관념은 종족적 관념을 통해 구체화된다고 말하면서도 인류 공통의 의식인 근본적 관념이라는 것은 한 시대나 특정 지역에 한정된 인류 즉 특정인종이나 특정국가 국민이거나 특정 민족의 독자적인 성향을 초월한다고 주장한다.

 

‘사회로 부터의 “이탈(disengagement)" 을 위해서 봉사’ 하는 상징, ‘지역 전통의 이미지가 전통의 범위를 넘어선 곳에서 분출되는 어떤 충격적 경험을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 ‘무한한 반복의 길을-종종 경멸의 태도를 가지고- 던져버린다’

 

이런 말들은 기존의 사회가 ‘정상적인 삶’ ‘정상적인 태도’ 로 한정한 규정화된 제도와 윤리, 상식 등을 깨는 여정이 샤먼이 걷는 길이라 주장하는 것이다.

 

저자는 초월적 존재에 순종하고 경외하면서 동시에 사회 동화적인 다시 말해 기존 사회의 제도와 윤리를 지지하는 보수적인 존재가 사제(성직자)라는 식의 논리를 펼쳤다. 반면 저자가 또 한층 줄곧 이야기하는 바는 샤먼은 ‘진보적 이탈자’ 라는 것이다. 그로 인하여 기존 사회에서 누구나 관행적으로 맹목적으로 따르던 가치들이 과연 문제없던 것일까 하는 의혹과 시험의 무대가 되는 것이라 한다.

 

 

전세계 누구라도 모를 이가 없을 역사상 가장 대중적인 인지도를 자랑하는 샤먼이라면 예수 그리스도가 있을 것이다. 그의 삶은 사제(성직자)적인 면모도 있었으나 그 누구 보다 샤먼 다웠다.

 

- 샤먼의 정의는 초월적 존재(각 문화권에 속한, 그 문화권에서의 유일신이나 계보를 지닌 신들)와 소통하며 병을 치료하거나 정신적 문제를 해결하고 위안하고 개인적 사회적 대안을 제시하며 이적을 보이고 과거와 미래를 알 수 있거나 그 시간들에 연결되는 이를 말한다. 여기서 예언은 그리 큰 가치를 지닌 그 또는 그녀의 속성도 아니다. 죽음마저도 초월하는 존재이니 말이다. 이러한 샤먼에 대한 정의에 모두 해당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샤먼이라 하는 것이다. -

 

예수님이 보인 이적과 부활은 샤먼의 정의에 완벽히 일치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주목해야할 측면은 그가 보인 진보적 이탈자 정신이다.

 

예수님은 유대문화에서 태어나 유대사회에서 사역을 하시면서도 유대의 종교와 사회를 정면반박하며 이의 제기를 하던 분이다. 외식하는 자들이라며 유대교 신앙인들을 비판하며 유대인들의 신앙생활 자체에 문제제기를 하셨다. 게다가 유대사회는 분명 성경에도 공정한 되와 공정한 저울이 등장하리만치 또 사후에 천국으로 향하는 심판에서 “너는 얼마나 사업을 공정하게 했느냐?” 라는 질문부터 받는다고 하는 경제를 중시하는 국가였다. 종교만큼이나 경제의 중요성을 높게 여기는 문화권에서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 며 부자는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확언하다시피 하신 분이다. 더더군다나 성전 앞에서 환전하는 환전상의 상을 엎으며 실제적 테러까지 서슴지 않으셨다.

 

이러한 사회 물의를 일으키는 행동들과 예수님을 믿는 교세의 확장이 더해지니, 유대 사회와 유대교 사제들 및 유대교 신앙인들에게 불안을 키웠던 것 같다. 물론 그렇기에 예수님의 죽음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교 사제들과 신앙인 등 유대사회 대다수의 탄원으로 예수님을 죽여야 할 수밖에 없을 때 예수님을 죽이고 싶지 않았던 본디오 빌라도는 유대인 민중에게 둘 중 하나는 살려주겠다며 “밧세바라는 도둑과 예수 중 누굴 풀어주랴?” 고 물었었다. 그런 제안에도 유대인 민중 대다수는 밧세바를 선택했다. 밧세바가 의적이었는지 어떤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도둑에게도 밀릴 정도였다면 예수님은 유대민족의 주류에게도 서민층 대다수에게도 받아들여지지는 못하셨던 게 확실한 것이다. 그래서 사망했던 것이다. 그래서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녕 죽으리라”고 실락의 날에 아담에게 하셨던 저주가 깨어지라고 있는 저주라는 것을, 사망은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증명할 수 있으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다 이루었다" 는 사역 완수의 기회는 외면받고 배신당하고 핍박과 고문을 거쳐 살해 당함으로써 갖을 수 있었던 것이다.

 

기존의 종교집단과 사회의 일상과 상식을 정면 반박하는 과정이, 동시에 하나의 신적 의지와 목적을 완수하는 여정이 되었던 것이다.



 → 이어서 계속됩니다

"정녕 죽으리라" 로 시작되어 "다 이루었다" 에 이르는 고독과 고통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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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가면 1 : 원시 신화 까치글방 160
조셉 캠벨 지음, 이진구 옮김 / 까치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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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셉 켐벨은 그의 저서 《신의 가면1 원시신화》에서 신화가 주는 의의의 공시적 측면과 통시적 측면 둘 다를 깊이가 남다르게 전하고 있다.

 

한 시대를 살아가는 낱낱의 사람들에게 신화가 어떤 의미인지를 전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것이 인류사적인 측면에서 변화의 양상을 띠며 다가오는 순간마다 획기적인 국면 전환의 요소였음을 일깨우고 있다.

 

그러한 관점을 전하기 위해 수렵부족과 농경민족, 사냥꾼과 농경인, 남성심리와 여성심리, 완고한 마음과 부드러운 마음, 정직한 사냥꾼과 샤먼 등으로 상징들을 대비시켜 이해를 돕고 있다.

 

수렵부족은 남성심리로 완고한 마음을 지니는 정직한 사냥꾼이라 상징화하고 있다. 그 근본적 주제는 성취와 달성에 있다고 한다. 이는 농경민족으로 대변되며 여성심리로써 부드러운 마음이 상징하는 샤먼의 대칭인 것이다. 이들의 주제는 기도 즉 주술을 행하는 것이다.

 

사냥의 세계에서는 남성적 심리가 지배적이라 여성적 원리는 비교적 침묵을 지키며 남성적 덕목과 함께 어떤 유치한 순수성이 우세하게 드러난다고 한다. 농경의 세계에서는 여성의 경험이 지닌 전적인 신비가 드러나며 이것은 처녀의 신비 속에서 비극적이면서도 희극적인 방식으로 구체화된다고 한다.

 

-아마도 ‘처녀의 신비’ 라는 표현은 ‘처녀’ 라는 어휘가 지닌 순결과 순수를 상징하기 위해 쓰인 것은 아닐 것이다. 그 보다는 ‘처녀작’, 처녀비행‘ 의 표현들처럼 신비(일상에서의 경이)를 체험하는 이들에게 첫걸음과도 같을 신선함으로 다가갈 것이기에 더해진 표현이 아닌가 싶다.-

 

저자는 이분법적으로 나눈 이 속성이랄까 역할이 상호작용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완고한 마음의 소유자는 자기가 속한 지역적 세속적 조건에 애착을 보인다. 그러나 부드러운 마음의 소유자는 시간을 초월한 보편적인 것을 지향한다. 여기서 신화의 변형을 초래하는 자극은 남성과 여성의 상호 작용 및 상호 간의 영적 풍요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상징은 두 극에 의해서 경험되고 해석되지만 동시에 두 극 사이의 적대적 협력(antagonistic cooperation)을 이루어 낸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대칭의 중재나 통합만이 신화의 경험과 해석일 수 없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그런 투의 전개가 이 저작 전체를 꿰뚫으며 거듭 반복되니 말이다.

 

샤먼이 걷는 ‘고통의 길’ 은 ‘마르가’라고 하며 ‘심리학적 변형의 길’ 이라고 한다. 샤먼은 이 여정을 통해 ‘영적인 죽음과 부활’ 을 거치며 ‘개인적 경험의 지평이 확장되고 깨달음의 깊이가 심화’ 된다.

 

샤먼은 정신 그 자체의 신비와 접촉하여 영혼과 그 세계에 관한 지혜를 얻는다고 한다. 그리고 샤먼이 가는 ‘고통의 길’과 ‘그 길을 통해 얻는 지혜’가 ‘과거에 안주하여 창조성을 상실한 사회를 새로운 깨달음의 영역과 깊이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부드러운 마음을 소유한 자들의 ‘영적 위기와 깨달음’ 속에서는 ‘비역사적 요인이 지배적 역할’ 을 한다고 한다. 그들에게는 ‘지역 전통의 이미지’가 그 전통의 범위를 넘어선 곳에서 분출되는 ‘어떤 충격적 경험을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 에 불과하단다.

 

다시 말하면 관습이나 관행, 윤리나 제도, 상식 등 사회 구조를 이루는 견고함에 균열을 일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샤먼은 성직자들과 같이 ‘사회의 보수적 측면을 대변’ 하며 초월적 존재에 대한 ‘순종과 경외의 태도’ 를 보이지 않는다. ‘자기 충족적이며 비타협적인 태도’를 지닌다고 한다. ‘신의 분노에도 개의치 않는 바벨탑의 건설자’ 라 저자는 정의하고 있다.

 

‘바벨탑의 건설자’ 라는 것은 신에게 저항하고 아니 저항하는데 그치는 것만이 아닐 것이다. 그것을 너머 신에게 의존함으로써 자기 존재의 가치를 찾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가치는 나 스스로 쌓아올리고 스스로 검증하겠다는 것이 아닐까? 신은 그에게 굴종의 대상이 아니라 타협과 협상, 회유의 대상 정도일 것이다.

 

저자가 샤먼의 이런 독립성, 독자성, 일탈성 즉 진보적 이탈 성향만을 두둔하고 지지하느냐면 또 그건 아니다. 그와 동시에 집단의식이랄까 보수성향이랄까가 하는 제 역할의 중요성을 상당 부분 인정하고 있다.



→ 이어서 계속됩니다

사냥꾼들의 세상에서 `마르가`를 거치며 드러나는 `처녀의 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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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도 번역이 되나요 (선물용 특별판) - 다른 나라 말로 옮길 수 없는 세상의 낱말들 마음도 번역이 되나요 1
엘라 프랜시스 샌더스, 루시드 폴 옮김 / 시공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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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잔잔하기에 Grotesque http://blog.yes24.com/document/8616451


위에 이 책에 등장하는 어휘들을 사용하여 작문을 해보았습니다.

이 책에 수록된 모든 낱말이 다 쓰인 것은 아니나 나름 낱말이 주는 의미들이 어떤 감상을 가져다 줄 수 있을지 짐작해 볼 수 있을 거에요.


이 책에는 다양한 나라의 많은 어휘가 등장합니다. 

저는 무엇 보다 '구르파'라는 한줌의 물을 뜻하는 낱말이 심장을 채우는군요. 

설레임(킬릭)도 벅찬 사랑의 환희(포렐시에)도 아늑하고 포근한(헤젤리흐) 한 때도 나뭇잎 사이 드리우다 내리쬐는 한가로운 햇살(코모레비)도 물가에 찰랑이는 은은한 달빛(몽가타)도 자연과 맞닿아 충만히 홀로인 그런 심정(발다인잠카이트)을 가져다 주지 못할 것 같아서 입니다. 오아시스는 커녕 목마름을 채워 주지도 못할 신기루 사이만 헤매이다 보니 한줌의 물이 나름 더 소중하다 여겨지네요.


누군가 '와비사비'에 이르러야 한다 말한다해도 그저 흩어지고픈 심정과 달관하는 것은 다를 것입니다. '와비사비'란 말에 고추냉이 먹은듯 코가 시큰거립니다. 


이 책을 보며 깊고 훈훈한 감동을 기대한다면 좀 지나친 기대일 거라 말씀 드려야 할 것 같네요.

하지만 '바름두셔'들 말고 '루프트멘시' 같은 면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읽어 보세요. '사마르'에 지칠 때쯤, 어느 한가로운 날에 '마밀라피나타파이'가 하나인 이들과 함께하는 '피카' 자리에서 조용한 주제가 될 수 있을 책이니까요.


아니면 자신을 향해 '티암'을 보내는 그 또는 그녀에게 '카푸네' 해 주며 몇 마디 인용하거나 의미를 담아 읊조리는 것도 운치 있겠네요. 


편지 쓸 때나 시나 소설을 쓸 때 영감을 줄 수 있을 책임에는 분명합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낱말들의 의미가 어우러지며 독자가 느낀 감상이 보다 깊고 큰 감상을 품게 되는 글로 재탄생할지 모르니까요. 그것이야 말로 이 책이 '콤무오베레'를 더 깊고 더 오래도록 울리는 걸음이게 하는 것이겠군요.





와비사비 달관한 눈으로 바라보는 모든 것

바름두셔 뜨뜨 미지근한 사람

루프트멘시 눈을 반쯤 뜨고도 꿈꾸는 사람. 바람 속에 구름 속에 걷는듯 자유로운 공상가

사마르 친구들과 함께 빠이팅 넘치게 밤새 놀아재끼는 것

마밀라피나타파이 성향과 관점과 목표가 같아 의기투합하는 것

피카 친하거나 뜻 맞는 이들 끼리 한가로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 한담을 나누는 것

티암 처음 본 누군가를 향해 설레임어린 채 빛나는 눈빛

카푸네 사랑하는 이의 머리결을 쓰담쓰담하는 것

콤무오베레 깊고 훈훈한 감동

 

- 각 낱말에 대한 의미는 이 책의 내용과는 다소 다르게 의역을 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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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도 번역이 되나요 (선물용 특별판) - 다른 나라 말로 옮길 수 없는 세상의 낱말들 마음도 번역이 되나요 1
엘라 프랜시스 샌더스, 루시드 폴 옮김 / 시공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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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쓸 때나 시나 소설을 쓸 때 영감을 줄 수 있을 책임에는 분명합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낱말들의 의미가 어우러지며 독자가 느낀 감상이 보다 깊고 큰 감상을 품게 되는 글로 재탄생할지 모르니까요. 그것이야 말로 이 책이 `콤무오베레`를 깊고 오래도록 울리는 걸음이게 하는 것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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