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가면 1 : 원시 신화 까치글방 160
조셉 캠벨 지음, 이진구 옮김 / 까치 / 200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는 인류의 보수적 성향, 역사적 요인이면서 동시에 지역적 요인이랄 수 있는 것을 종족적 관념이라 정의했다. 또 인류 전체의 그 보다 더 광대하고 온전한 보편적 공유의식을 근본적 관념이라 정의했다.

 

이런 보편적 공유 의식인 근본적 관념은 역사적 요인과 지역적 요인이랄 수 있을 종족적 관념을 통해서야 구체화 된다고 한다. 저자는 ‘신화는 독립적 이미지들의 연속이 아니라 의미 있는 전체이며 그 안에 현실 세계의 특정한 면이 반영되어 있다’ 고 말한다.

 

이 말은 아마도 ‘근본적 관념은 종족적 관념 속에 반영되고 그를 통해서야 비로소 드러난다’ 는 설명일 수 있다. 각 문명권의 특색 또 각 국, 각 향토만의 관습, 윤리, 예절 등의 전통과 놀이, 예술, 제도 등 문화 전반을 통해서야 근본적 관념이 자신을 변용하며 스스로를 드러낸다는 말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근본적 관념은 종족적 관념을 통해 구체화된다고 말하면서도 인류 공통의 의식인 근본적 관념이라는 것은 한 시대나 특정 지역에 한정된 인류 즉 특정인종이나 특정국가 국민이거나 특정 민족의 독자적인 성향을 초월한다고 주장한다.

 

‘사회로 부터의 “이탈(disengagement)" 을 위해서 봉사’ 하는 상징, ‘지역 전통의 이미지가 전통의 범위를 넘어선 곳에서 분출되는 어떤 충격적 경험을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 ‘무한한 반복의 길을-종종 경멸의 태도를 가지고- 던져버린다’

 

이런 말들은 기존의 사회가 ‘정상적인 삶’ ‘정상적인 태도’ 로 한정한 규정화된 제도와 윤리, 상식 등을 깨는 여정이 샤먼이 걷는 길이라 주장하는 것이다.

 

저자는 초월적 존재에 순종하고 경외하면서 동시에 사회 동화적인 다시 말해 기존 사회의 제도와 윤리를 지지하는 보수적인 존재가 사제(성직자)라는 식의 논리를 펼쳤다. 반면 저자가 또 한층 줄곧 이야기하는 바는 샤먼은 ‘진보적 이탈자’ 라는 것이다. 그로 인하여 기존 사회에서 누구나 관행적으로 맹목적으로 따르던 가치들이 과연 문제없던 것일까 하는 의혹과 시험의 무대가 되는 것이라 한다.

 

 

전세계 누구라도 모를 이가 없을 역사상 가장 대중적인 인지도를 자랑하는 샤먼이라면 예수 그리스도가 있을 것이다. 그의 삶은 사제(성직자)적인 면모도 있었으나 그 누구 보다 샤먼 다웠다.

 

- 샤먼의 정의는 초월적 존재(각 문화권에 속한, 그 문화권에서의 유일신이나 계보를 지닌 신들)와 소통하며 병을 치료하거나 정신적 문제를 해결하고 위안하고 개인적 사회적 대안을 제시하며 이적을 보이고 과거와 미래를 알 수 있거나 그 시간들에 연결되는 이를 말한다. 여기서 예언은 그리 큰 가치를 지닌 그 또는 그녀의 속성도 아니다. 죽음마저도 초월하는 존재이니 말이다. 이러한 샤먼에 대한 정의에 모두 해당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샤먼이라 하는 것이다. -

 

예수님이 보인 이적과 부활은 샤먼의 정의에 완벽히 일치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주목해야할 측면은 그가 보인 진보적 이탈자 정신이다.

 

예수님은 유대문화에서 태어나 유대사회에서 사역을 하시면서도 유대의 종교와 사회를 정면반박하며 이의 제기를 하던 분이다. 외식하는 자들이라며 유대교 신앙인들을 비판하며 유대인들의 신앙생활 자체에 문제제기를 하셨다. 게다가 유대사회는 분명 성경에도 공정한 되와 공정한 저울이 등장하리만치 또 사후에 천국으로 향하는 심판에서 “너는 얼마나 사업을 공정하게 했느냐?” 라는 질문부터 받는다고 하는 경제를 중시하는 국가였다. 종교만큼이나 경제의 중요성을 높게 여기는 문화권에서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 며 부자는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확언하다시피 하신 분이다. 더더군다나 성전 앞에서 환전하는 환전상의 상을 엎으며 실제적 테러까지 서슴지 않으셨다.

 

이러한 사회 물의를 일으키는 행동들과 예수님을 믿는 교세의 확장이 더해지니, 유대 사회와 유대교 사제들 및 유대교 신앙인들에게 불안을 키웠던 것 같다. 물론 그렇기에 예수님의 죽음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교 사제들과 신앙인 등 유대사회 대다수의 탄원으로 예수님을 죽여야 할 수밖에 없을 때 예수님을 죽이고 싶지 않았던 본디오 빌라도는 유대인 민중에게 둘 중 하나는 살려주겠다며 “밧세바라는 도둑과 예수 중 누굴 풀어주랴?” 고 물었었다. 그런 제안에도 유대인 민중 대다수는 밧세바를 선택했다. 밧세바가 의적이었는지 어떤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도둑에게도 밀릴 정도였다면 예수님은 유대민족의 주류에게도 서민층 대다수에게도 받아들여지지는 못하셨던 게 확실한 것이다. 그래서 사망했던 것이다. 그래서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녕 죽으리라”고 실락의 날에 아담에게 하셨던 저주가 깨어지라고 있는 저주라는 것을, 사망은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증명할 수 있으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다 이루었다" 는 사역 완수의 기회는 외면받고 배신당하고 핍박과 고문을 거쳐 살해 당함으로써 갖을 수 있었던 것이다.

 

기존의 종교집단과 사회의 일상과 상식을 정면 반박하는 과정이, 동시에 하나의 신적 의지와 목적을 완수하는 여정이 되었던 것이다.



 → 이어서 계속됩니다

"정녕 죽으리라" 로 시작되어 "다 이루었다" 에 이르는 고독과 고통의 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