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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구약 역사서 영한대역 - 일상의 언어로 쓰여진 성경 옆의 성경 ㅣ The Message 시리즈
유진 피터슨 지음, 김순현 외 옮김, 김회권 감수 / 복있는사람 / 2012년 10월
평점 :
이전 모세오경에서 간략히 언급했던 왜 조선 시대에는 천주교를 넓게는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았는가를 다시 한번 짚고 이어서 조금 이야기하려 한다. 하긴 더 이야기한다고는 해도 모세오경에서 언급한 이야기의 연장선상의 이야기일 뿐이지만 말이다.
조선 시대 유학자들은 인의와 도덕을 중시했으며 그건 인간의 이해와 지성이 수용하는 방향에 따라서였다. 무속 신앙적인 맹신을 조선 시대 선조들께서는 즐기시지 않았다. 그런 방향에서 보면 왜 조선 시대 유학자들이 사람들(신앙인들)을 죽이면서까지 기독교를 멀리했는지를 알 수 있다.
삼강오륜이나 인의와 도덕, 덕의 다스림과, 신구약에 기록된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의 역사는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모세오경과 역사서만을 보더라도 하나님을 군주로 보던 창조자이니 아버지로 정의하던 하나님과 아담과 하와 이 셋 사이에는 임금과 신하의 벼리도 아버지와 자식의 벼리도 지아비와 지어미의 벼리도 없다. 하나의 금기만을 주고는 그것을 깨었다고 신하이자 자식을 저주하고 버렸으며, 아담과 하와 또한 자식이자 신하라고 보아도 그들에게도 신의와 도덕율이 없었다. 아담과 하와 사이에도 남편과 아내가 지켜야 할 기준이 없었다. 그들이 낳은 자식들도 서로 죽고 죽이는 관계였다. 아브라함의 둘째이자 유대인들의 선조인 이삭은 자신의 아비를 속여서 상속받았으며 룻의 딸들은 소돔과 고모라 이후 자신의 친부를 돌아가며 강간해서 대를 이었다. 심지어는 시아버지를 속여 잠자리를 가져 대를 잇는 이야기도 실려 있는 것이 구약이다. 그들의 신은 아비에게 그 가장 사랑하는 자식을 죽이기를 요구하는 신이기도 했다. 물론 심장을 찌르기 직전에 중단시키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룻의 경우도 그렇고 그 이후에도 그렇지만 신 혹은 신의 사자라고 판단하거나 죄 없는 객이라고 판단하는 경우 일부 사람들이 그 신 또는 사자, 죄 없는 객을 동성 강간하려 하면 자신의 남자 경험 없는 딸을 내어줄 테니 이들에게 무례하지 말라는 말도 안 되는 딜을 하기도 하는 작자들이다.
무엇보다 거룩한 진멸은 어쩔 것인가? 타국을 공격할 때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은 현재의 급진 이슬람 무장단체와 다름없이 성 노예로 삼을 성 경험 없는 어린 여성 몇몇만 살려두고 애, 어른, 남녀를 구분 안 하고 모조리 죽였다. 사람만이 아니라 가축까지 살아있는 모든 생물을 죽였다. ‘호생지덕’도 인간으로서의 ‘인지상정’도 더더욱 ‘덕’이라는 것도 찾아볼 수 없는 종자들이었다. 타국은 적이라고 규정되면 모조리 죽여 없애며 자신들의 혈통만을 확장한 것이다. 물론 이들의 지상의 규범은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기는 하다. 무조건 확산하고 보는 게 이들이 신으로부터 받은 지령이니 말이다. 하지만 규범도 원칙도 십계명이라는 단조로운 몇 가지만으로 번식하고 영토만 확장해 간다는 건 매트릭스의 스미스 요원과 [우리 문명의 마지막 시간들]에서 톰하트 만이 이미 정의했듯 암과 바이러스와 다를 바 없다. 구약만 보자면 이 종교는 인간이 따라서는 안되는 암이고 바이러스인 것이다.
구약에서는 어떠한 지성이나 합의에 의해 도출된 도리가 아닌 신탁을 통한 역사가 이어진다, 그들의 신은 생육하고 번성하면 한마디로 번식하고 확산만 하면 거룩한 진멸이라는 이름의 살육을 장려하고, 성 노예를 권장하며, 딸들이 제 아비를 며느리가 시아비를 강간하거나 속이고 자고는 애를 낳아야 하고, 늙은 아비를 속여 재산을 탐해도 되고, 신의 명령이면 인지상정도 무시하고 자식도 죽이려 해야 사랑을 주는 신이다.
이는 신약에서 이르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그들의 계명이 허울뿐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아무리 예수가 등장해 하나님이란 존재를 한껏 포장한다고 해도 하나님이란 존재가 사랑이었던 적은 없었다는 말이다. 그들 유대인의 하나님일 수는 있겠지만 우주 만물을 창조한 신이라면서 구약에서 보여주던 그런 잔혹함과 악랄함을 인간에게 보일 수는 없을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선택했기 때문이라 할 테지만, 인간을 게임 속 캐릭터나 전투용 게임의 소형 로봇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면 거룩한 진멸이라는 지시는 가당치도 않다.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인간으로 게임을 하는 것이라면 인간을 소모품으로 여길 뿐이라면 인간은 왜 그에게 굴종해야 하는가?
사실 깊이 들여다보면 성경을 읽고도 하나님을 신앙하는 자는 불균등한 무력차, 압도적인 힘이 하나님에게 있다고 여기기에, 굴종하면서라도 살아남고 그가 주는 단맛을 빨아 보고 싶은 게 다일 것이다. 무의식 깊이에서 이런 신에게 정서적으로 감동해서 섬기는 자가 어디있겠나? 압도적인 무력차가 아니라면 스스로가 전지와 전능과 편재와 불멸할 수 있다면 누가 그따위 신에게 굴종하겠는가? 그리고 전지할 수 없고 전능할 수 없고 편재할 수 없고 불멸할 수 없다고 해서 그런 신이라는 존재에게 굴종해야 할 이유도 없을 거다.
예수는 자신들의 신이 사랑이라며 빛의 자녀가 되라고 했지만, 그 사랑과 빛이라는 것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건 결국 순교라는 이름의 자발적인 죽음과 종교전쟁과 마녀사냥의 시대를 거쳐 홀로코스트에 이르렀다. 홀로코스트가 왜 기독교의 탓이냐 하겠지만 당시 유럽 인구는 절대다수가 종교인이었고 그 종교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종교였다. 크리스천이 유대교인들을 박멸하던 게 홀로코스트이기도 한 것이다. 알곡과 나락을 구분하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유전적 우성인자와 유전적 열성인자를 가르는 우생학과 다름없고 더 거슬러 자신들만이 선택받았다는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이 발전을 거친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근래에는 예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저작들도 있기는 하지만 그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해도 예수라는 사람은 행동과 말이 달랐고 그의 말에서도 일관성이 없었던 자이다. 유교에서는 공자의 ‘오도일이관지’라는 말을 깊이 여기며 가르침이 하나로 통하는 것 즉 일관되는 맥락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들은 예수의 행적이 표리부동한 인간의 분열적인 정신과 사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사랑을 이야기하며 겉옷을 벗어달라면 속옷까지 벗어 주고 잠시 같이 가자면 한참을 같이 가라던 이가 자기 어머니를 곁에 두고도 누가 내 어머니이고 누가 내 형제들이란 말이냐라는 선긋기를 시작할 때, 유학자들에게는 예수가 인간 말종으로 보였을 것이다. 어느 선비가 자신의 어머니를 부정하는 자를 성현으로 여기겠는가?
그리고 예수는 사랑을 말하다가 돌연 나는 너희에게 칼을 주러 왔다 불을 던지러 왔다며 아비와 아들이 서로 대적하고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대적하게 하려 왔다는 말을 한다. 아마도 이 지점에서 예수를 따르던 이들은 그가 ‘사회를 변혁시키려 하는구나’ ‘이 초능력자는 메시아인가 보다’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특히나 유다가 그리 믿었기에 “내가 떡을 찍어주는 자가 그이니 니가 할 일을 속히 행하라”는 말에 바로 일어나서 로마군에게 예수가 어디있는지 고발한 것으로 보인다. 유다 복음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아마도 유다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예수 사후에도 오랜 후 종교회의를 통해 삼위일체설만을 정설로 받들기 전까지 예수를 신격화해서는 안 된다는 종단들이 존재했었다. 하지만 예수를 신앙하는 대다수의 종단들은 대부분 예수를 메시아라고는 믿었다고 한다. 예수는 무력하게 죄수가 되어 형벌을 감당하다 죽었는데도 메시아로 추대되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생존해 있던 시기에 그에 대한 그의 추종자들의 시각은 어떠했겠는가? 이미 홀린 사람들에게는 분명 그가 사회를 변혁시키러 온 자로 보였을 것이고 그런 분위기에 휩쓸려 유다 역시 예수가 사회를 변혁시키려는 과정으로 유다 자신이 어떠한 역할을 해주면 죄수로 끌려가기 전에 폭동을 일으키던가, 예수의 초능력으로 폭동의 효시를 일으키리라 믿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유다 복음에서 말하듯 예수가 부추긴다고 해서 배신자가 되어 자살할 이유는 없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예수는 어떠한 혁명의 시도도 하지 않았고 그저 십자가에 매달리자 마자 “다 이루었다”를 외치고는 십자가에 오래 매달려 있게 되니 “엘리엘리 라마사박다니”라며 ‘신이여 신이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를 외친 후 비탄에 빠지다 죽었을 뿐이다.
그는 사랑을 외치면서 (당시 십일조 하려면 당연히 환전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환전상에게 테러를 했으며 ‘불을 던지러 왔다. 칼을 주러 왔다’면서 마치 사회 변혁을 이루려는 것처럼 바람을 잡아놓고는 무력하게 죽었다. 도무지 일관성이 없고 표리부동하지 않은가?
조선 시대 유학자들이 신구약을 두루 읽어 봤다면, 주님이라며 신에게 가축을 죽여 제를 올리고 그 주님의 뜻에 따라 사람들을 살육하고 가족 간에 죽이고 강간하며 그저 암이나 바이러스처럼 확산만 하면 된다는 종교 그리고 어느 시점 포장을 하고 사랑을 외치지만 알고 보면 순교라는 이름의 자발적인 죽음을 장려하고 서양사까지 보면 십자군 전쟁과 마녀사냥 등으로 피비린내 진동을 하게 하는 이 종교를 도대체 어떻게 정상적인 종교라고 판단했겠는가? 천주교 박해는 비단 조선뿐만이 아니라 어느 나라에서든 정당성이 너무나도 깊고 크게 있는 행동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 시대에도 사이비 종파만이 아닌, 이단으로 분류되지 않는 천주교와 기독교 대부분의 종파들의 해악은 그들 스스로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종교 자체가 이 세계에 뿌려진 악성 바이러스인지도 모르겠다. 이 바이러스를 치료할 치료제 같은 존재가 등장한다면 그가 바로 메시아이고 마이트레야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