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카인드 - 감춰진 인간 본성에서 찾은 희망의 연대기
뤼트허르 브레흐만 지음, 조현욱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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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서는 이제까지 대중적 상식이 되어온 인간은 폭력적이며 이해타산적이고 이기적 본성에 압도되는 악한 존재라는 정의에 정면 반박하는 저작이다. 물론 그러한 주장을 전개하는 과정에 편향적으로 여겨지는 면도 없지는 않으나 이제까지 인간의 폭력성과 이해타산적인 면모, 이기적인 성향 등에 너무나도 치우친 주장들이 상식으로 대중화되어 왔기에 이런 인간의 선한 면모에 주목하는 저작이 신선하게도 다가왔다. 


다만 인간의 선함과 악함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데 그간의 악함에 주목하는 대중화된 상식들도 본서의 저자처럼 인간의 선함에만 주목하는 신선한 주장들도 너무 한쪽 면만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저작이다.


스탠리 밀그램의 복종 (전기충격)실험과 스탠포드 교도소 실험, 모두가 외면했다는 주택가 대로에서의 살인인 캐서린 제노비스의 죽음 또 깨진 유리창 이론까지 그간의 정설로 굳어져 전해온 상식이 되어버린 심리 실험들과 이론 그리고 사건에 대해 저자는 모두가 편향된 조작이 있었다거나 오보였다고 부정하고 있다. 더욱이 전쟁터에서 총격을 안한 군인들이 30%가 넘는다는 전 세계 군사기관들이 염려할만한 정보도 사례로 들고 있다. 


그러면서 이러한 그간의 인간의 악한 본성에 주목하던 상식들을 편향적인 오류로 단언하며 그 증거를 제시한다. 자연상태의 인간은 그리 악하지 않다는 그의 근거는 과거 러시아에서 여우를 브리딩 하여 가축인 개처럼 인간에게 친화적인 성향을 띠게 되는 과정을 연구한 결과를 인간에 대입하며 인간은 그 여우처럼 좀 더 자신이 속한 집단에 친절하고 배려하는 친화적인 존재로 진화해 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건 기본적인 그의 주장의 과학적인 결론의 하나이나 이 외에도 일반적인 상식을 깨는 근거라는 주장들을 세세히 들고 있다. 


하지만 그가 인간은 원시사회에서도 자신이 속한 집단에 친화적이기 위해 집단 내 소속 동료에게 해를 끼친 이기적인 존재들에게는 너나 할 것 없이 화살을 쏘아 고슴도치 같은 모습으로 죽게 만들었다고 말하는 역사적 사실도 달리 생각하면 인간의 폭력성이 달리 발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과연 저자의 말처럼 인간은 이타적이며 친절하고 배려하는 존재일까? 

그렇다면 역사로 남아있는 인간 잔인성과 야만적인 학살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중국의 진나라 시대 백기라는 장군은 포로 40만 명을 생매장했으며 루마니아 발라히아의 영주 블라드 3세 드라쿨레아가 보인 잔인성이나 중세시대 흑사병보다도 더욱 잔인했던 50만 명을 재판이라는 명분으로 학살한 마녀사냥의 사례 등은 이미 인간의 악한 본성을 보여주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20세기에만 보더라도 홀로코스트, 난징 대학살, 관동(간토) 대지진 당시의 조선인 학살, 일본 종군 위안부(라는 이름의 일본군의 여성 성노예 사건), 인간을 마루타라며 나무토막으로 보며 생체실험을 자행했던 일본군 731부대의 사례, 유고슬라비아 전쟁과 코소보 전쟁에서의 인종청소라 불리던 민족 대학살 등 인간의 사라지지 않은 야만성을 보여주는 사례들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21세기라고 다른가? 미얀마의 로힝야족 학살과 자하드를 외치는 이슬람 급진주의 테러단체들이 자행하던 학살과 참수 등은 한국인 피해자도 있기에 많은 국민들이 기억이 생생할 것이다. 


그에 대해서 저자는 무엇이라 할까? 저자는 분명 이런 반론이 나올 것을 예상했던지 인간이 정치적 집단과 같은 권위에 의해서 선한 본성이 왜곡될 때가 있다는 식으로 발언하고 있다. 스탠리 밀그램의 실험과 스탠포드 교도소 실험을 부정했으나 그런 경향이 인간에게 있다는 것을 저자 자신도 인간의 예외적 경우로 상정하여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1,2차 세계대전 당시 적군과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군인들이 보여준 너무도 인간적인(?) 사례를 들기도 하지만 이미 위에서 예를 든 인간의 야만성을 보여준 사례들과 함께 보자면 어느 쪽이 더 예외적인 경우일까? 그리고 군사적인 충돌 같은 피치 못할 (군대에 징집되거나 전쟁으로 내몰려 적을 죽이지 않을 수 없도록 권력자가 명령해 벌어지는) 권력의 압제 속에서 야기되는 인간의 잔인성 외에는 인간의 이런 부정적 성향이 더는 없는 것일까? 


19세기 영국의 잭 더 리퍼, 20세기 미국의 테드 번디 같은 살인자들 등 해외에서도 셀 수도 없는 연쇄살인이 일어났으며 20세기 한국만 하더라도 인육을 먹었다는 지존파 사건, 정두영, 유영철, 강호순, 그리고 그렇게나 알려진 이춘재 등의 연쇄살인범들이 있다. 살인은 인간의 악한 본성에 대한 근거로 들기에는 유별난 예외의 경우이니 제외해야 한다고 한다면... 인간이 남의 나라 땅에서 일면식도 없는 외국인을 위해 죽어가는 그런 유별난 예외의 경우는 인간의 선함을 증거하는 사례로 들지 못해야 한다는 것인가? 어느 경우나 인간이 한 행동이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의 악함을 조우하는 순간에 일상적인 친절을 경험하는 순간 보다 더욱 강렬한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런 살인자들과 직면해 피해자가 되어 죽어가는 순간에 "어제 고기집에서 소스가 떨어졌는데 '그거 좀 주실래요'라는 단순한 말 한마디에 옆 테이블에 손님이 소스통을 건네줬어. 인간은 선한 존재야!" 이러고 죽을 희생자가 있을까? 인간의 선함을 확신하더라도 처참하게 유린 당하며 죽어가면서도 가해자를 동정하며 인간은 선하다고 할 이들이 몇이나 될까?


정, 이런 유별난 경우를 제외하자면 한국 스포츠계에 만연한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 군대 내 구타 등의 폭력 등은 어떡할 것인가? 몇 해전까지도 전투경찰들에게 자행되던 군 가혹행위가 문제시되었던 적이 있지 않은가? 이것 역시 집단 내에서의 예외적인 경우라는 말인가? 그럼 요즘 그토록 문제시되고 있는 학폭이나 왕따 같은 문제들은 어떤가? 이것이 집단 내의 권위에 의해 자행되는 것일까? 물론 소위 짱이라는 아이들이 주도하는 경우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을 집단에서의 권위에 의한 폭력으로 볼 수만은 없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선한 본성이 내재하고 있듯 악한 본성도 동시에 장착되어 있는 것이다.


게임처럼 해보고 싶었다며 초등학생 친동생을 침대 위에서 난자해서 죽인 중학생 형에 대한 21세기 초반 보았던 뉴스 기사가 난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고 있다. 그 아이는 만기 출소를 했더라도 진작에 출소했을 것이고 평범한 소시민들 사이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본서는 인간의 선함에 대해 이야기하며 인간의 그늘진 부분을 예외시 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인간이 악하다고 아니다 인간은 선하다. 이런 논리가 아니라 인간은 물론 악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선함도 내재해 있다. 이런 주장이었더라면 더욱 설득력 있지 않았을까 싶다. 


저자는 인간의 선함을 증명하고 인간의 집단 이기주의나 잔인성, 집단에서 누군가를 배격하고자 하는 심리를 완화하여 얻을 수 있는 이익을 노르웨이의 감옥과 미국의 감옥의 운영 사례를 보여주며 예를 들고 있다. 자유롭고 평화롭고 편안한 감옥 생활을 하는 노르웨이의 감옥과 폭력과 규율만을 강조하는 미국의 감옥 생활을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노르웨이의 감옥은 수감자 1인당 7000의 비용이 든다면 미국의 경우 수감자 1인당 5000의 비용이 든다고 한다. 하지만 수감자들이 재범을 하고 다시 재수감되는 경우가 대다수인 미국에 비해 노르웨이는 재범율이 그 절반에도 미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노르웨이는 미국보다 두 배 가까운 비용을 절감하고 있고 출소한 사람들이 취업을 해서 내는 세금까지 계산하면 사회적으로 절감되는 비용이 상당하다고 한다. 강압과 제도를 이용해 행사하는 폭력이 아니라 수감자가 자연스럽게 치유받을 수 있는 환경 속에서 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게 할 때 사회는 우리가 알게 모르게 변화하는 것이다.


또 넬슨 만델라와 인종차별 노선의 남아프리카 전직 장군의 만남을 예로 들며 저자는 접촉이 국면을 전환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원양 선박에서 인종 간의 접촉이 없는 운항을 했을 때와 인종 간의 접촉이 있는 상태 즉, 타 인종과 함께 운항을 했을 때의 인종차별 수치를 비교하며 그는 접촉이란 것이 차별에 대한 대안인 듯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이 견해에 대해 반은 수긍하지만 반은 공감할 수 없다. 


인종 백화점이라는 미국에서 해마다 헤아리기 쉽지 않을 만큼 일어나는 인종차별적 범죄와 혐오 범죄들을 보며 접촉만으로 해답일 수 있다는 것이냐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나름 이 책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편향적인 정의에 다른 대안을 내놓기 위해 선방하고 있다는 생각은 든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그건 틀렸다 이것이 맞다가 아니라 그런 면과 함께 이런 면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되새겨야 하며 이런 면에 대한 상식도 대중화해야 할 것이다라는 주장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자신의 아이를 때려죽이는 부모도 있고 입양아에게 그러는 양부모도 있다. 자신의 손주로 속이고 자신이 낳은 딸을 2층에 다 놓고 1층에 살면서도 굶겨 죽이는 엄마도 있다. 반면에 안타깝게 어린 나이에 병으로 죽은 자기 아이가 눈에 밟혀 해외 봉사활동을 하고 나눔을 실천하는 이광기씨 같은 아버지도 있다. 사람은 그렇다. 악하기도 하고 선하기도 하다. 악한 사람도 있고 선한 사람도 있으며 한 개인을 봐도 악할 때도 선한 선택을 할 때도 누구에게나 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니다.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그것이 문제이다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둘 다 부정할 수 없다는 것 하나만 수긍해선 안된다는 것 그것을 먼저 인정해야 하지 않나 싶다. 


이 책은 이것이 정답이니 그저 수긍하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저자 자신도 사랑의 호르몬이라는 옥시토신도 자신이 속한 집단에게는 우호적으로 외부자에게는 배격하는 성향을 강화한다고 짚고 있으니 말이다. 또 인간이 자신과 닮은 사람에게 더욱 우호적이고 자신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이에게는 배격하고 공격적이 된다고 인정하고 있기도 하다. 


본서를 통해 정답은 이것이다라고 수긍하려고 선택하는 분들은 없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 한 쪽으로 기울어진 인지적 오류를 바로잡아 보겠다고 선택하는 분들이 대다수일 것이다. 그러니 저자의 어투가 맞는 건지도 모른다. 한쪽으로 기울어진 나무는 반대쪽으로 기울여 바로잡아야 하니 말이다. 


그리고 잠시지만 본서가 말하는 이런 주장들이 상식이 되는 세상, 행위의 동인이 되고 신념의 내적 근거가 되는 세상을 꿈꿔 봤다. 지금의 세계보다는 정말 아름다울 것 같다. 그럼 AOA 민아나 에이프릴 현주 같은 왕따 피해자들도 없는 그런 세상이 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지민이나 나은이, 진솔이가 왕따를 시키는 것이 아니라 친절한 미소를 민아와 현주에게 건넸을 테니... 세상의 많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상식으로 전할 수 있는 그런 날이 온다면 정말 지금보다는 아름다운 세상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게 된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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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초자연적이 될 수 있다 - 나는 어떻게 원하는 내가 되는가?
조 디스펜자 지음, 추미란 옮김 / 샨티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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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과학 저작들, 양자물리학 저작들을 통해 누구나 이르렀을 정리들에 대한 최종적 실천적 방법론... 그렉 브레이든님의 [디바인 매트릭스]라는 저작이 기본적인 질문들을 하고 있는 책이라면 본서는 좀더 폭넓으면서 치유와 수행의 원리와 체계를 잡아주는 근간이 되는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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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긴밤 - 제2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83
루리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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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문학이라지만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작품이다. 


아동문학 수상작을 간혹 읽어봤는데 최근에는 아동문학의 수준이 획기적으로 전환된듯한 감동이 인다. 


긴긴밤이라는 이 소설 속의 노든과 치쿠, 윔보, 앙가부, 아기 펭귄 등의 등장 동물들 하나하나가 모두 소수자들을 대변할 뿐 아니라 고요 속에서 분투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을 대변하는 것만 같았다. 


"여기, 우리 앞에 훌륭한 한 마리의 코끼리가 있네. 하지만 코뿔소이기도 하지. 훌륭한 코끼리가 되었으니, 이제 훌륭한 코뿔소가 되는 일만 남았네 그래."


코끼리 고아원에서 자란 코뿔소 노든의 이야기로 시작해.  동물원에서 태어나 자신의 처지에 안주하며 살다가 노든을 만나 동물원 밖으로 떠나는 꿈을 안고 죽어간 코뿔소 앙가부. 다른 펭귄들이 모두 꺼려하는 얼룩 알을 품은 두 마리의 수컷 펭귄 치쿠와 윔보.. 전쟁 중 치쿠와 동물원을 벗어나 밀림을 헤매며 부화된 아기 펭귄을 바다로 데려다 주려 방랑하는 노든의 이야기가 무척이나 가슴에 묵직한 의미를 던져주는 듯 했다. 모든 여정은 결국 아기 펭귄을 바다로 인도한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동물들이 한 존재를 양육했으며 인도했다고 여겨진다. 


이 이야기는 동물들이 등장하지만 아이뿐만이 아니라 성인까지도 성장시키고 성숙시킬 이야기가 아닌가 한다. 이야기는 짧지만 매혹적이고 나는 아마도 [긴긴밤]이라는 이 소설을 몇 번이고 다시 펼쳐볼 것이다. 오랫만에 깊은 여운을 남기는 소설과 함께했다. 동물들의 이야기지만 자신의 짐을 지고도 다른 이들과 어우러지고 다른 이를 제 길로 가도록 함께하고 인도하는 많은 사람들의 삶을 다시 바라보게 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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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8 12: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하라 2021-03-08 13:18   좋아요 1 | URL
어린이 문학도 인간관계에서의 고단함을 그리며 쉽게 교훈을 담아내던 시절이 있었는데 최근에는 깊이와 다가가는 과정이 섬세해진 면이 있습니다. 이 소설은 많은 분들에게 권해 드리고 싶을만큼 감동적입니다.
 
몸은 기억한다 - 트라우마가 남긴 흔적들
베셀 반 데어 콜크 지음, 제효영 옮김, 김현수 감수 / 을유문화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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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지 않은 트라우마 저작들을 읽고난 후 본서를 접했다. 정서를 울리는 실제 치유 사례들도 있고 트라우마의 작동과 기능을 뇌생리학적으로 상세히 풀어내어주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다른 저작들과의 차별성이라면 트라우마 치유를 위한 방법들이 명쾌히 제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The body keeps the score]라는 영어 제목을 의역해 [몸은 기억한다]라는 제목을 갖게 되었다. 우리의 몸이 트라우마에 어떤 기능을 잃게 되고 어떤 기능이 악화되는지 등을 그리고 있기도 하고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우리의 뇌가 쉬고 있을 때 우리 자신의 몸을 감각하고 있는데 트라우마 상태일 때는 해리되어 우리 자신의 몸을 자각하고 있지 못함도 지적하고 있다. 

 

저자가 말하는 트라우마의 많은 문제점들도 알아가야 할 바이겠지만 무엇보다 안구운동 민감소실 및 재처리 요법(EMDR), 뉴로피드백 치료, 내적가족치료, 공동체가 함께하는 연극치료와 음악치료, 맛사지, 요가, 태극권, 무에타이, 무술, 춤 등의 치료가 얼마나 극적인 효과를 불러오는지가 너무도 인상적이었다. 

 

트라우마도 치유의 길이 있는 거라는 것이 그것도 우리 자신의 몸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의미있는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진정으로 치유될 수 있다는 대목은 인상 깊으면서도 안타깝기도 했다. 의미있는 관계, 사람을 통한 치유라는 것이 바란다고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기에 그저 사람을 만난다고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기에 안타까웠다.  

 

하지만 트라우마의 치유를 바란다면 또 가족이나 지인의 트라우마를 이해하기 위한 목적에서도 읽어보면 좋을 책이다.

 

밑줄긋기 ☞ 

몸은 기억한다 / 베셀 반 데어 콜크 (2)

몸은 기억한다 / 베셀 반 데어 콜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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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8 1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3-08 1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는 죽으려고 했던 심리학자입니다 - 죽고 싶다는 생각은 어떻게 인간을 유혹하는가
제시 베링 지음, 공경희 옮김 / 더퀘스트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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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살려고요. 살겠습니다" 2009년 초가을 나는 자살을 시도하던 무인모텔에서 도망쳐나와 잡아탄 택시 안에서 나를 만류하는 핸드폰 너머의 그녀에게 그렇게 말했다. "살겠습니다"를 외쳤지만 나는 살고 싶었던 걸까? 자살을 시도하던 장소에서 도망쳐 나왔지만 나는 과연 진정으로 삶을 선택했던 것일까? 또 하나의 선택을 망쳐버리며 길고 지루한 우울의 늪과 같은 삶으로 다시 나를 던져넣은 것은 과연 살고 싶다는 의지의 발로였을까? 


그녀와 그 그리고 나는 수원에서 만나기로 했다. 자살 모의를 하느라 챗팅은 몇 주간 해왔지만 실물을 대면하는 건 서로가 처음이었다. 어쨋건 그렇게 수원역에서 만나 우리는 바로 계획대로 택시를 타고 무인 모텔로 향했다. 무인 모텔에서 시스템을 통해 방 두개를 대실하려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카운터로 오라고 해서 카운터에서 사람을 통해 방 두개를 잡았다. 나는 무인모텔도 모텔도 당시에 처음 가보는 곳이었다. 무인모텔이라기에 당연히 사람은 없을 줄 알았는데 카운터에서 접수를 하니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그렇게 그들과 나의 계획은 초반부터 엇나가는 느낌이었다. 모텔 방으로 들어서자 예상 보다 규모가 있었고 설비도 깔끔했다. 여자분이 자기 방에서 남자방 쪽으로 넘어왔고 그렇게 그들과 나는 발빠르게 문틈과 창틈 마다 꼼꼼하게 청테이프를 붙였다. 그리고 나서야 다들 앉아서 서로 자살을 선택하게 된 사연을 이야기했다. 남자분은 사는 게 너무 어렵다고 살기가 힘들어서 자살을 선택했다고 이야기 했다. 여자분은 자살한 남자 친구 이야기를 하며 그 이후 사는 것이 괴로워졌다고 했다. 하지만 남자분의 말은 그렇다해도 여자분의 말은 믿기가 어려웠다. 메신저로 채팅을 하며 이야기했던 그녀의 자살을 선택한 이유와 내용이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그녀의 사연 중 둘 중 하나는 진실이거나 둘 다 진실이 아니거나 했겠지만 나는 그녀에게 왜 이야기가 다르냐고 따져묻지 않았다. 죽음 앞에서도 사람은 타인과 자신을 기만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나는 살아있다는 게 아무 의미가 없어졌고 사는 게 너무 가치없다고 여겨진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남자분이 가지고 온 연탄난로(난로라고는 했지만 난로같이 부피가 크지 않고 연탄불을 지필 수 있게 만든 기구 같이 생겼다)에 연탄을 하나 넣고 욕실에서 번개탄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연탄난로와 연탄과 번개탄은 그 남자분이 구하기로 했다. 그분은 다 완벽히 준비하기는 했지만 연탄집게를 구하지 못해 고기집 집게를 가져왔다. 집게... 거기서 부터 일이 틀어진 거다. 집게로 번개탄을 집고 불을 붙이자 처음 불이 잘 붙지 않나 싶더니 뒤이어 불꽃이 일어 나며 불길이 치솟는데 번개탄이란게 그렇게 화력이 좋은지 몰랐다. 남자분이 집게에 잡힌 번개탄을 떨어뜨렸다. 욕실 바닥에서 불이 붙은 번개탄은 불길이 치솟으며 이미 집게의 높이를 불길이 넘어섰고 바라보고 있던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모르다 물을 조금 뿌려 화력을 낮춰보기로 했다. 집게가 너무 달아오르면 연탄난로에 번개탄을 넣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물을 뿌린 번개탄의 불길은 잡히긴 했지만 번개탄이 완벽하게 불이 붙지는 못했다. 어쨋건 우리는 그걸 연탄난로에 넣고 연탄을 얹었다. 뭔가 일이 틀어지는 건가 싶기도 했고 함께 모여 만반의 준비는 다한 것 같은 애매한 심정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사전에 각자 약국을 돌며 사둔 수면유도제를 소주와 함께 여러알을 먹고 자리에 누웠다. 난 술은 먹기 싫었지만 술기운과 약기운이 섞이면 잠든 채 연탄가스로 고통없이 가게 된다는 말에 술과 함께 약을 먹었다. 약을 한웅큼을 먹었는데도 잠이 쉽게 들지 않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 다음날 아침이 되어 눈을 떴다. 여전히 살아있었다. 제대로 불이 붙지 않은 번개탄과 연탄은 매캐한 냄새는 나기는 했지만 심각할 정도의 일산화탄소는 내뿜지 않았던 것 같다. 머리가 몹시 아프고 어지러웠지만 아무도 죽지는 않았다. 가장 먼저 일어난 내가 창틈에 붙인 청테이프를 대강 떼고는 창문을 열었다. 죽고는 싶었지만 일산화탄소로 뇌에 장애를 입고 장애자로 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도 일어났다. 우리는 밤이 오면 다시한번 시도하자며 각오를 다지고는 여자분이 자기 방으로 갔다. 그리고 남자분이 욕실로 가 샤워를 하는 틈에 나는 도망나왔다. 내가 나가면 그들도 단둘이만 동반자살을 하지는 않을 것이란 걸 알았지만 나로선 애써 실행한 자살시도가 망쳐져버리고 죽는 것도 뜻대로 되지 않는데 분개해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온거다.


-세계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은 국가에 속하는 대한민국에서 (2015년 인구 10만 명 중 24.1명) 동반자살은 전체 자살의 3분의 1 가량을 차지 한다.


위의 저자의 말보다도 2009년 당시에는 동반자살률이 더 높았을 것이다. 그해까지 영화배우 고 이은주, 가수 고 유니, 배우 고 최진실 등이 연이어 자살하며 대한민국 자살률이 최고로 치솟고 있었던 때니까. 당시까지만 해도 뉴스검색을 하기만 하면 자살기사가 이어지던 때였고 자살자들 대다수가 동반자살을 하던 때다. 


-자살 전염 증거에 '완수된' 자살만이 아니라 '시도된' 자살 비율을 포함하여 본다면, 언론의 자살 보도가 모방을 유도하는 것은 분명하다. 달리 말해 자살 보도가 늘 실제 자살을 증가시키지는 않지만, 자살 행위를 크게 증가시킨다. 


그리고 자살자들 보다도 더 많은 것은 자살시도자들이었을 것이다. 나만 해도 수원에 가기 전 이미 고 유니의 자살기사를 보고는 그녀처럼 옷장에서 목을 매는 시도를 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옷장에 앉아서 목을 맨다는 것은 기사내용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는 혼자서는 어렵다고 생각하고 당시 뉴스기사들을 보고는 동반자살을 기대하게 됐다. 당시 네이버에 죽고 싶다는 글을 지식인에 올리자 어느 여성이 메신저로 들어오라고 했고 거기서 자살을 왜 하고 싶은지 꼭 죽고 싶은지를 확인했다. 그런 후 다음메신저로 들어오라고 해서 다른 자살을 기도하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도록 해줬다. 며칠을 그들과 대화를 하다가 문득 처음 그들을 소개해준 그녀에게 "○○님은 왜 자살하지 않고 소개만 해주는 거냐?"고 묻자 그녀는 자신도 자살시도를 해봤지만 실패했고 아버지가 엄해서 그 이후 밖으로 나갈 수 없다고 항변했다. 자살을 할 수 없어서 그녀는 자살 플랫폼 같은 역할로 만족하고 있는 것이었다. 수원에서 자살시도를 실패하고 도망쳐나와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다시 다음 메신저에 들어갔으나 내가 망친 동반자살 모임의 사람들이 이미 그들에게 말을 했던지 모두 메신저상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그즈음부터 네이버에서 자살을 하고 싶다던가 동반자살을 하자는 내용은 올릴 수 없도록 네이버 지식인 등록 검증이 강화되었다. 당시가 동반자살 사례와 동반자살 시도가 가장 엄청났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본서에 의하면 일본에서도 넷-지사츠라고 해서 동반자살이 심각하던 시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은 연탄가스로 인한 자살이 대다수인데 대만 같은 경우는 숯불을 지펴 일산화탄소로 자살하는 경우가 유행했단다. 언제 즈음엔가엔 일본 대만 등 동아시아 동남아시아에서는 특정 화학성분을 이용한 흡입 자살도 붐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왜 자살하는 걸까? 저자는 VEN세포라는 뇌세포의 영향을 이야기 하고 있기도 하지만 명확히 그에 대해 답하지는 못하고 있다. 왜 자살하느냐 보다는 '어떻게 자살하고자 하는 심리에 까지 이르느냐'를 몇 단계의 과정으로 풀어주고 있기는 하다. <1단계 역부족, 2단계 자신을 탓하기, 3단계 고도의 자기의식, 4단계 부정 정서, 5단계 인지의 붕괴, 6단계 탈억제>의 과정을 거쳐 자살에 이른다고 말하고 있다. 일견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기도 했다. 자신부터가 자살욕구를 느꼈던 심리학자인 그이기에 공감할만하다고 여겨지는 이론을 제시한 것일 거다. 하지만 자살을 왜 할까 하는 의문은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이지 자살 충동에 휩싸인 사람에게는 별로 소용없는 이론이다. 그리고 자신의 가족이나 지인이 자살한 사람에게는 그들의 행동이 왜 일어난 것일까하는 의문에 답은 줄 수 있어도 왜 죽어야만 했는지 다른 방법은 없었는지에 대한 대답도 될 수 없는 이론이다. 


자살을 시도 할 때는 모든 것이 의미를 잃는다. 극도의 고통 속으로 몰리기도 하지만 정작 자살을 결심하고 시도할 때는 오히려 고요해진다. 고요라기보다는 적막해진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른다. 자살을 시도하기 전까지 대부분 저자가 말하는 '삶이 천천히 한 방울씩 떨어지는' 지루한 시간의 지연 상태 속에 지내게 된다. 지루하다고는 말했지만 그건 달리 알맞은 다른 표현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루가 천년 같이 느껴지는 이런 현상은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쓴 빅터 프랭클님도 언급한 적이 있다. 홀로코스트의 현장인 나치의 수용소에서의 일상을 말하며 언급한 부분이다. 죽음을 앞둔 상황 아니 그 죽음과 함께하는 상황에서 인간은 하루가 천년 같은 현실을 겪는 것이다. 자살 시도를 앞둔 사람들은 삶이 죽음 같고 죽어야 살 것 같은 심정에 놓인다.


그러다보니 자살을 시도하며 다시 삶이 이어지는 것 같은 죽음이라는 새로운 삶의 선택에 반가운듯한 심정이 된다. 물론 이것은 사후에 대한 개인 마다의 관념의 차이에 따라 다른 해석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나로선 죽음 이후의 지속을 믿기에 죽음이 이후 영으로서의 새로운 삶을 선택하는 길이라고 여겼다. 사후에 영면이라던가 의식이 완전히 사라진다고 믿는 이들에게는 새로운 삶이 아니라 영원한 안식을 선택하는 것이겠지만 말이다.


기독교 등의 종교에서는 자살을 악으로 치부한다. 고대에는 그렇지 않았다는데 중세에 들어 심각해진 것이다. 


-성서에 자살에 대한 뚜렷한 언급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몇몇 명석한 신학자들은 이 독특한 빈자리를 발견했다. 예를 들어 1637년 스코틀랜드 출신 존 심이라는 열렬한 칼뱅파 사제는, "인간은 본래 자기 보존을 최우선으로 삼기에 자살은 너무도 끔찍한 일인지라, 그 행위 자체를 불가능하다고 봤는지 금지하는 법조차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드물게 성서 속 인물이 목숨을 끊는 경우 그런 짓을 했다고 심판받은 흔적은 없다. 예를 들면 유다(수치심과 예수를 배반한 후회로), 사울 왕(적에게 잡혀 강제로 다른 신을 섬기는 꼴을 피하려고), 삼손(그 과정에서 복수하느라 피리스티아 인들을 죽인) 등인데, 오히려 그들의 자살은 담담하게 묘사되고 죽는 방법은 일화의 교훈과 무관한 듯하다.


-5세기 초 아우구스티누스.. 그는 성서에 나온 제 6계명, 즉 '살인하지 말라'를 지목해 살인 대상에 타인만이 아니라 본인도 적용된다고 말했다. 1485년 자살 담론이 가열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 대전]에서 이 문제를 논했고, 이 책이 출판되면서 교회의 엄격한 자살 무관용 주의가 신앙의 상징이 되었다.


-영국에서 자살자의 재산은 왕에게 귀속되었다. 하지만 아퀴나스 시대에도 검시관이 non compos mentis(정신 이상) 상태라는 지옥 탈출 진단서를 주면 이 수모를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1487년에서 1660년까지 자살자들은 그런 행운을 누리지 못했다. 이 기간에 총 1.6퍼센트만 '논 콤포스 멘티스' 판결을 받았고 나머지는 '펠로 데 세'(자살)였다.


-할라카(유대교 율법서)는 자살한 유대인은 유대식으로 매장할 자격이 없다고 규정한다.


-유대교와 기독교 경전들처럼 코란에 자살과 관련된 명료한 설명은 없지만, "불 켜진 초는 날이 밝을 때까지 타야 한다" 같은 시적인 암시가 나온다.



자살자는 지옥에 간다는 게 카톨릭에서는 상식적인 답변이다. 사울 왕이나 삼손도 지옥에 갔을 거냐고 묻고도 싶지만 그들에게도 예외는 있다고 하지 않나! 미쳐서 죽었다면 지옥에 대한 면벌부가 주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 정상적인 상태라고 한다면 죽음을 선택하는 비정상적인 선택을 하는 이들은 모두가 미친 것 아니겠냐고 그러니 지옥에 갈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거 아니겠냐고 한다면 카톨릭 사제들은 뭐라고 할지 모르겠다. 이젠 중세처럼 자살자들의 재산을 모두 왕에게 귀속하는 것도 아닐텐데 더 이상 자살자들을 악마화하는 것이 무슨 소용일까 싶다.


자살을 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기본적으로 자신에게 포커스가 맞춰져 모든 대상이 자신을 과소평가하거나 비난한다고 믿는데서 시작해 자신의 고통만에 주목하게 된다는 것이 자살 과정을 다룬 6단계 중 4단계까지의 이야기다. 과연 사람은 타인 보다 자신에게 더 주목하는 존재가 아닌가 싶은 건 미 질병통제 예방센터의 2014년 발표를 보아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미 질병통제 예방센터는 2014년 총기에 의한 자살은 총 2만 1,334건, 살인사건은 1만 945건이라고 발표했다. 


타인의 시선과 판단이 인간에게 왜 그리 중요할까도 싶지만 인간은 그럼에도 분노 보다도 절망에 더 민감한 존재가 아닌가 싶다. 타인을 해치는 사람의 두 배가 자신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예민한 인류에게 종교는 나름 살아가라고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그에는 희망도 반, 절망도 반이 따른다. 종교가 있어서 자살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종교가 있어서 자살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종교와 자살의 관계는 복잡하다. 사후에 대한 믿음이 자살 결정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는 증거와 아니라는 증거가 다 있다. 통계는 종교가 자살 방지 완충제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연이은 연구에서 신자들은 비신자들보다 자살할 확률이나 자살할 생각이 현저히 낮았다.


-전반적으로 종교는 자살을 방지한다. 부인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구멍이 있다. 그것도 큼직한 구멍이. 몇몇 연구 결과를 보면, 신자들은 종교적 부담, 예를 들면 너무 큰 죄를 지어 용서받을 수 없다고 믿는 것 때문에 또래 비신자들보다 더 많이 자살한다.


종교적이 된다고 자살의 충동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자살은 과연 부정하고 기피해야만 하는 대상인가까지 본서는 담론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저자가 전면에 내세워 이야기 하고 있지는 않지만 로마시대의 남프랑스 지역의 노인인구에 대한 방대한 자살 용인과 장려의 사례나 그리스 스토아 학파의 자살에 대한 관점을 마무리에 가까워 풀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스토아 학파는 자살을 진보된 사상가의 빼어난 행위로 보았다. 세네카는 [줄에서 떨어질 적절한 때에 관하여]라는 담담한 제목의 글에서 "현자는 살 수 있는 만큼이 아니라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만큼 산다"라고 썼다.


-1500년 이상 지나 프라니우스는 자살이 '최상의 혜택'이며 신들도 해내지 못한 행위라고 주장했다. 대조적으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이 주제에 반감을 가졌던 듯, 자살이 인간을 동물 밑에 놓는 유일한 행위라고 말했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기원전 20년 경 로마의 역사가, 도덕주의자)의 [기념할 만한 업적과 기록]에 나오는 구절... 마실리아인들(현 남프랑스 지역의 1세기 당시 주민들)이 완벽한 정신으로 생을 마감는 관습을 묘사... 아직 건강이 양호한 연로자들은 원로원에 생을 마감할 수 있는 허가를 요청해 황폐한 노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 주로 독미나리가 혼합된 독극물이 주어졌다. 이 경우가 아니면 유의해서 보관하는 약물이었다.


-수많은 연구가 사회의 자살 수용과 자살률의 상관 관계를 파헤쳤다. 즉 신앙을 감안하더라도 자살을 개인의 권리나 선택으로 지지하는 국가에서 자살을 용납하지 않는 국가들보다 연간 자살 건수가 더 많다.


-수십 년 전 선동적인 반 정신의학자 토머스 사즈는 저서 [정신병의 신화]에서 자살 방지에, 혹은 자살하려는 이들을 강제 입원시켜 간섭하는 미국 전통에 반대하는 주장을 했다. 자살이 나쁘고 충동적인 결정이라 해도 "근본적으로 옳다"고 사즈는 말했다. 또 상담하고 오류를 깨닫게 도울 뿐, 우리의 의지를 자살하려는 이에게 강요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사즈는 1986년 [미국 심리학자]에 게재한 글에 이렇게 썼다. "'자살 방지'라는 표현 자체가 치료 만능 시대의 착오적인 표어다(...) 방지라는 표현은 특히 자살과 짝지어지면 강압을 의미한다."


-도덕론자라면 자살을 본래 잘못으로 인식해 무슨 수를 쓰든 막아야 한다고 느낀다. 자유론자는 정반대다. 사람은 살아야 할 사회적 의무가 없으며, 자유의사를 가진 인간으로서 선택지를 가늠해서 죽기로 결정한 사람을 강제로 살게 해선 안 된다고 본다.


자살은 포기일 수도 있지만 다른 선택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존엄사를 인정하는 국가들이 늘고 있는 것일테고... 자살을 방지해선 안된다 개인의 선택을 강압으로 막아서는 안된다는 논리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지만 자살자가 묵었던 호텔비용은 삭감해야 한다고 까지하는 전염성 질병으로까지 자살을 몰고가는 심리도 변화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본서는 자살심리에 대해 자살전반에 대해 담론하고 있지만 학술서라고 보기보다는 에세이라고 여겨지는 책이다. 무겁기 보다는 자살 전반에 대한 생리학, 심리학, 사회학, 철학적 담론을 경쾌한 논조로 이어가고 있다. 주제가 주제다 보니 이런 정도의 가벼움이 없었다면 너무 숙연한 저작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 대중들이 가까이하기 쉬운 자살 관련 저작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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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9 12: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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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9 18: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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