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카인드 - 감춰진 인간 본성에서 찾은 희망의 연대기
뤼트허르 브레흐만 지음, 조현욱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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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서는 이제까지 대중적 상식이 되어온 인간은 폭력적이며 이해타산적이고 이기적 본성에 압도되는 악한 존재라는 정의에 정면 반박하는 저작이다. 물론 그러한 주장을 전개하는 과정에 편향적으로 여겨지는 면도 없지는 않으나 이제까지 인간의 폭력성과 이해타산적인 면모, 이기적인 성향 등에 너무나도 치우친 주장들이 상식으로 대중화되어 왔기에 이런 인간의 선한 면모에 주목하는 저작이 신선하게도 다가왔다. 


다만 인간의 선함과 악함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데 그간의 악함에 주목하는 대중화된 상식들도 본서의 저자처럼 인간의 선함에만 주목하는 신선한 주장들도 너무 한쪽 면만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저작이다.


스탠리 밀그램의 복종 (전기충격)실험과 스탠포드 교도소 실험, 모두가 외면했다는 주택가 대로에서의 살인인 캐서린 제노비스의 죽음 또 깨진 유리창 이론까지 그간의 정설로 굳어져 전해온 상식이 되어버린 심리 실험들과 이론 그리고 사건에 대해 저자는 모두가 편향된 조작이 있었다거나 오보였다고 부정하고 있다. 더욱이 전쟁터에서 총격을 안한 군인들이 30%가 넘는다는 전 세계 군사기관들이 염려할만한 정보도 사례로 들고 있다. 


그러면서 이러한 그간의 인간의 악한 본성에 주목하던 상식들을 편향적인 오류로 단언하며 그 증거를 제시한다. 자연상태의 인간은 그리 악하지 않다는 그의 근거는 과거 러시아에서 여우를 브리딩 하여 가축인 개처럼 인간에게 친화적인 성향을 띠게 되는 과정을 연구한 결과를 인간에 대입하며 인간은 그 여우처럼 좀 더 자신이 속한 집단에 친절하고 배려하는 친화적인 존재로 진화해 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건 기본적인 그의 주장의 과학적인 결론의 하나이나 이 외에도 일반적인 상식을 깨는 근거라는 주장들을 세세히 들고 있다. 


하지만 그가 인간은 원시사회에서도 자신이 속한 집단에 친화적이기 위해 집단 내 소속 동료에게 해를 끼친 이기적인 존재들에게는 너나 할 것 없이 화살을 쏘아 고슴도치 같은 모습으로 죽게 만들었다고 말하는 역사적 사실도 달리 생각하면 인간의 폭력성이 달리 발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과연 저자의 말처럼 인간은 이타적이며 친절하고 배려하는 존재일까? 

그렇다면 역사로 남아있는 인간 잔인성과 야만적인 학살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중국의 진나라 시대 백기라는 장군은 포로 40만 명을 생매장했으며 루마니아 발라히아의 영주 블라드 3세 드라쿨레아가 보인 잔인성이나 중세시대 흑사병보다도 더욱 잔인했던 50만 명을 재판이라는 명분으로 학살한 마녀사냥의 사례 등은 이미 인간의 악한 본성을 보여주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20세기에만 보더라도 홀로코스트, 난징 대학살, 관동(간토) 대지진 당시의 조선인 학살, 일본 종군 위안부(라는 이름의 일본군의 여성 성노예 사건), 인간을 마루타라며 나무토막으로 보며 생체실험을 자행했던 일본군 731부대의 사례, 유고슬라비아 전쟁과 코소보 전쟁에서의 인종청소라 불리던 민족 대학살 등 인간의 사라지지 않은 야만성을 보여주는 사례들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21세기라고 다른가? 미얀마의 로힝야족 학살과 자하드를 외치는 이슬람 급진주의 테러단체들이 자행하던 학살과 참수 등은 한국인 피해자도 있기에 많은 국민들이 기억이 생생할 것이다. 


그에 대해서 저자는 무엇이라 할까? 저자는 분명 이런 반론이 나올 것을 예상했던지 인간이 정치적 집단과 같은 권위에 의해서 선한 본성이 왜곡될 때가 있다는 식으로 발언하고 있다. 스탠리 밀그램의 실험과 스탠포드 교도소 실험을 부정했으나 그런 경향이 인간에게 있다는 것을 저자 자신도 인간의 예외적 경우로 상정하여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1,2차 세계대전 당시 적군과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군인들이 보여준 너무도 인간적인(?) 사례를 들기도 하지만 이미 위에서 예를 든 인간의 야만성을 보여준 사례들과 함께 보자면 어느 쪽이 더 예외적인 경우일까? 그리고 군사적인 충돌 같은 피치 못할 (군대에 징집되거나 전쟁으로 내몰려 적을 죽이지 않을 수 없도록 권력자가 명령해 벌어지는) 권력의 압제 속에서 야기되는 인간의 잔인성 외에는 인간의 이런 부정적 성향이 더는 없는 것일까? 


19세기 영국의 잭 더 리퍼, 20세기 미국의 테드 번디 같은 살인자들 등 해외에서도 셀 수도 없는 연쇄살인이 일어났으며 20세기 한국만 하더라도 인육을 먹었다는 지존파 사건, 정두영, 유영철, 강호순, 그리고 그렇게나 알려진 이춘재 등의 연쇄살인범들이 있다. 살인은 인간의 악한 본성에 대한 근거로 들기에는 유별난 예외의 경우이니 제외해야 한다고 한다면... 인간이 남의 나라 땅에서 일면식도 없는 외국인을 위해 죽어가는 그런 유별난 예외의 경우는 인간의 선함을 증거하는 사례로 들지 못해야 한다는 것인가? 어느 경우나 인간이 한 행동이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의 악함을 조우하는 순간에 일상적인 친절을 경험하는 순간 보다 더욱 강렬한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런 살인자들과 직면해 피해자가 되어 죽어가는 순간에 "어제 고기집에서 소스가 떨어졌는데 '그거 좀 주실래요'라는 단순한 말 한마디에 옆 테이블에 손님이 소스통을 건네줬어. 인간은 선한 존재야!" 이러고 죽을 희생자가 있을까? 인간의 선함을 확신하더라도 처참하게 유린 당하며 죽어가면서도 가해자를 동정하며 인간은 선하다고 할 이들이 몇이나 될까?


정, 이런 유별난 경우를 제외하자면 한국 스포츠계에 만연한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 군대 내 구타 등의 폭력 등은 어떡할 것인가? 몇 해전까지도 전투경찰들에게 자행되던 군 가혹행위가 문제시되었던 적이 있지 않은가? 이것 역시 집단 내에서의 예외적인 경우라는 말인가? 그럼 요즘 그토록 문제시되고 있는 학폭이나 왕따 같은 문제들은 어떤가? 이것이 집단 내의 권위에 의해 자행되는 것일까? 물론 소위 짱이라는 아이들이 주도하는 경우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을 집단에서의 권위에 의한 폭력으로 볼 수만은 없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선한 본성이 내재하고 있듯 악한 본성도 동시에 장착되어 있는 것이다.


게임처럼 해보고 싶었다며 초등학생 친동생을 침대 위에서 난자해서 죽인 중학생 형에 대한 21세기 초반 보았던 뉴스 기사가 난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고 있다. 그 아이는 만기 출소를 했더라도 진작에 출소했을 것이고 평범한 소시민들 사이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본서는 인간의 선함에 대해 이야기하며 인간의 그늘진 부분을 예외시 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인간이 악하다고 아니다 인간은 선하다. 이런 논리가 아니라 인간은 물론 악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선함도 내재해 있다. 이런 주장이었더라면 더욱 설득력 있지 않았을까 싶다. 


저자는 인간의 선함을 증명하고 인간의 집단 이기주의나 잔인성, 집단에서 누군가를 배격하고자 하는 심리를 완화하여 얻을 수 있는 이익을 노르웨이의 감옥과 미국의 감옥의 운영 사례를 보여주며 예를 들고 있다. 자유롭고 평화롭고 편안한 감옥 생활을 하는 노르웨이의 감옥과 폭력과 규율만을 강조하는 미국의 감옥 생활을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노르웨이의 감옥은 수감자 1인당 7000의 비용이 든다면 미국의 경우 수감자 1인당 5000의 비용이 든다고 한다. 하지만 수감자들이 재범을 하고 다시 재수감되는 경우가 대다수인 미국에 비해 노르웨이는 재범율이 그 절반에도 미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노르웨이는 미국보다 두 배 가까운 비용을 절감하고 있고 출소한 사람들이 취업을 해서 내는 세금까지 계산하면 사회적으로 절감되는 비용이 상당하다고 한다. 강압과 제도를 이용해 행사하는 폭력이 아니라 수감자가 자연스럽게 치유받을 수 있는 환경 속에서 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게 할 때 사회는 우리가 알게 모르게 변화하는 것이다.


또 넬슨 만델라와 인종차별 노선의 남아프리카 전직 장군의 만남을 예로 들며 저자는 접촉이 국면을 전환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원양 선박에서 인종 간의 접촉이 없는 운항을 했을 때와 인종 간의 접촉이 있는 상태 즉, 타 인종과 함께 운항을 했을 때의 인종차별 수치를 비교하며 그는 접촉이란 것이 차별에 대한 대안인 듯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이 견해에 대해 반은 수긍하지만 반은 공감할 수 없다. 


인종 백화점이라는 미국에서 해마다 헤아리기 쉽지 않을 만큼 일어나는 인종차별적 범죄와 혐오 범죄들을 보며 접촉만으로 해답일 수 있다는 것이냐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나름 이 책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편향적인 정의에 다른 대안을 내놓기 위해 선방하고 있다는 생각은 든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그건 틀렸다 이것이 맞다가 아니라 그런 면과 함께 이런 면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되새겨야 하며 이런 면에 대한 상식도 대중화해야 할 것이다라는 주장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자신의 아이를 때려죽이는 부모도 있고 입양아에게 그러는 양부모도 있다. 자신의 손주로 속이고 자신이 낳은 딸을 2층에 다 놓고 1층에 살면서도 굶겨 죽이는 엄마도 있다. 반면에 안타깝게 어린 나이에 병으로 죽은 자기 아이가 눈에 밟혀 해외 봉사활동을 하고 나눔을 실천하는 이광기씨 같은 아버지도 있다. 사람은 그렇다. 악하기도 하고 선하기도 하다. 악한 사람도 있고 선한 사람도 있으며 한 개인을 봐도 악할 때도 선한 선택을 할 때도 누구에게나 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니다.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 그것이 문제이다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둘 다 부정할 수 없다는 것 하나만 수긍해선 안된다는 것 그것을 먼저 인정해야 하지 않나 싶다. 


이 책은 이것이 정답이니 그저 수긍하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저자 자신도 사랑의 호르몬이라는 옥시토신도 자신이 속한 집단에게는 우호적으로 외부자에게는 배격하는 성향을 강화한다고 짚고 있으니 말이다. 또 인간이 자신과 닮은 사람에게 더욱 우호적이고 자신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이에게는 배격하고 공격적이 된다고 인정하고 있기도 하다. 


본서를 통해 정답은 이것이다라고 수긍하려고 선택하는 분들은 없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 한 쪽으로 기울어진 인지적 오류를 바로잡아 보겠다고 선택하는 분들이 대다수일 것이다. 그러니 저자의 어투가 맞는 건지도 모른다. 한쪽으로 기울어진 나무는 반대쪽으로 기울여 바로잡아야 하니 말이다. 


그리고 잠시지만 본서가 말하는 이런 주장들이 상식이 되는 세상, 행위의 동인이 되고 신념의 내적 근거가 되는 세상을 꿈꿔 봤다. 지금의 세계보다는 정말 아름다울 것 같다. 그럼 AOA 민아나 에이프릴 현주 같은 왕따 피해자들도 없는 그런 세상이 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지민이나 나은이, 진솔이가 왕따를 시키는 것이 아니라 친절한 미소를 민아와 현주에게 건넸을 테니... 세상의 많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상식으로 전할 수 있는 그런 날이 온다면 정말 지금보다는 아름다운 세상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게 된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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