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주 작았을 때 - 김용택의 어른을 위한 토닥토닥 동시 필사 감성치유 라이팅북
김용택 지음 / 예담 / 2016년 1월
평점 :
품절


자신이 어른아이인 걸 잊어버린 채 참고 참던 인내가 언젠가 부터 괴팍하게 강퍅하게 세월을 겪어가게 한다면, 끝내 성탄절 밤이 절실할 스크루지 같은 노인네나 되어야 할테죠. 그게 싫다면 본서와 만나 보세요 101번의 크리스마스 유령과의 만남을 어느 계절에든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가져다줄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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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주 작았을 때 - 김용택의 어른을 위한 토닥토닥 동시 필사 감성치유 라이팅북
김용택 지음 / 예담 / 2016년 1월
평점 :
품절



동시... 어느 화장품 브랜드의 예전 광고 카피 마냥  그저 '깨끗하게 맑게 자신있게'  그렇게 깨끗하고 맑아서 예쁜 시절들만 영혼에 담고서 훈훈함만 돌아볼 사람들을 위한 것일거라 내심 치우쳐 있었어요. 그리고 '내가 아주 작았을 때' 라는 이 동시 필사집에 눈길이 가던 것은, 나 역시 그저 동시로라도 훈훈함을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했기 때문이고...

책을 받아든 날, 그 저녁 책을 읽으며 밑줄 긋던 흑심 뭉툭한 4B 연필을 들고서 동시를 필사해 보려 책장을 넘겼거든요. 한장 한장 지나치다 눈이 머무는 페이지 마다 흔적들을 남기면서 말이죠. 그러다 깨달았아요. 동시는 아이가 된 척 어른이 가식을 떠는 것이 아니라 어른아이가 노래하는 동심이라는 것을... 

읽다가 어린시절 음악시간을 지나며 익숙해진 동시들이 문득 문득 눈에 띠더군요. 그런 익숙한 기억 속의 동시도, 마냥 아기자기한 동시도 훑으며 지나치다가 부러움이 가득한 날을 노래하는 동시에, 아픔에 같이 아려지는 그런 동시에 흔적을 남겼습니다. 한줄한줄 따라쓰며 때론 부러웠고 때론 같이 아렸고 때론 휑한 채 멍해 있다가 그러다 어느새 책장을 덮게 되더군요.

어린마음을 물들이는 것은 '기쁨 즐거움 행복'만의 빛깔이 아니죠. 세상의 낮과 밤엔 무슨 색인지 모를 눈물빛이 어린마음에 젖어드는 날들이 많으니까...



봄 시내

이원수

마알가니 흐르는 시냇물에
발 벗고 찰방찰방 들어가 놀자.

조약돌 흰 모래 발을 간질이고
잔등엔 햇볕이 따스도 하다.

송사리 쫓는 마알간 물에 
꽃이파리 하나 둘 떠내려온다.
어디서 복사꽃이 피었나 보다.


☆ 이런 유년시절의 기억을 담고 살아갈 수 있는 이들이라면 자신이 얼마나 축복 받은 삶을 누렸던 건지 은혜와 사랑 속에 자라온 건지 깨달아야만 할거에요...



꽃씨를 따라간 햇살

권영상

아기가 
꽃씨를 
심을 때,

햇살도 
몇 조각
따라 묻혔다.

어두운 
흙 갈피서
꽃씨 눈을 틔워

파란 새싹으로
밀어올리기 위해

아무도
모르는 사이
꽃씨 곁에 묻혔다.


☆ 우리의 영혼이 꽃씨라면 우리 안에 햇살은 하나님이시고 사랑이고 희망일테죠? 어두운 흙 갈피 같은 세상이란 곳에서 어떻게든 우리는 파란 새싹이 되기 위해 꽃씨가 눈을 틔우도록 해야만 합니다. 아무도 모른다해도 "난 천사의 씨지만 넌 악마의 씨야!" 라며 선 긋고 몰아부칠 때라도 우리라는 꽃씨는 늘 햇살과 함께일테니까...




소라 일기장

함민복

뻘은 말랑말랑해
발자국이 다 남아
어디 갔다 왔는지
누구와 놀았는지
거짓말할 수 없어
뻘 마을은 정직해

☆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마태 10:26, 누가12:02]
자기 어깨 위의 짐이 또 자신의 선택들이 단하나도 수치스러울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는 이들이라면 하나님과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온, 내면의 빛과 사랑에 따라 산 축복받은 부럽고 존경할만한 사람들이겠죠. 하지만 부끄럽다고 수치스럽다고 숨길 수 있는 일은 이 어두운 세상에도 없는 것 같아요. 밤에 아파하며 어두움에 물들어 한 일들도 무작정 숨기려 해 보았자 더더 어두움 속으로 들어서며 스스로 어두움과 자신을 분별할 수도 없게 되니까... 감추지도 숨기지도 말아요. 마음만 더 무겁고 습하고 차가울거에요. 아무리 어둡던 날에도 때가 이르면 동녘으로 빛은 솟아오를테니까 태양을 피하겠다며 서쪽으로 서쪽으로 숨어들려해도 금새 밝아온 낮일 겁니다. 그러니 숨지 마세요. 숨을 수 없어요. 바보 같은 짓이에요.

아무리
숨었어도

한혜영

아무리 숨었어도
이 봄햇살은
반드시 너를 찾고야 말걸
땅속 깊이 꼭꼭 숨은
암만 작은 씨라 해도
찾아내
꼭 저를 닮은 꽃
방실방실 피워낼걸

아무리 숨었어도 
이 봄바람은
반드시 너를 찾고야 말걸
나뭇가지 깊은 곳에
꼭꼭 숨은 잎새라 해도
찾아내
꼭 저를 닮은 잎새
파릇파릇 피워낼걸

☆ 말했잖아요. 햇살과 함께라고 숨을 수 없다고...



하늘

최계락

하늘은 바다
끝없이 넓고 푸른 바다

구름은 조각배

바람이 사공되어
노를 젓는다.


☆ 하늘이 하나님, 우주, 세계라면 구름은 내가 되고 누구나가 되고 바람은 운명일지 숙명일지 모르겠군요. 어른이 되면 자유를 떠올리던 구름이 그저 바람에나 휘어잡혀 떠밀려다니는 녀석일 뿐이란 것을 깨닫는 순간이 오죠. 하늘 구름 바람에서 바다와 조각배와 사공을 그릴 수 있게 해준 시절이 있었다면, '사공이 노를 젓는 수고 정도의 한가로움이 삶인거라'는 감상을 가질 수 있게 해 준 시절들에 감사할 일입니다.



내 귀는 
앵두꽃처럼 
작아서

이준관


엄마,
내 귀는 앵두꽃처럼 작아서
작은 소리를 좋아해요.

봄비처럼 사근사근
말해 주세요.
봄비처럼 내 가슴에
사근사근 젖어 들게요.

별처럼 새록새록
말해 주세요
별처럼 내 마음 속에
새록새록 떠오르게요.

☆ 파인애플이 꽃이라는 말도 안될 것 같은 진실을 알게 된 순간, 사진 속 잎사귀도 줄기도 달린, 꽃으로 피어있는 파인애플을 보고 놀란 눈으로 보고 또 봤더랬죠. 그때 알게 되었습니다.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 말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애한테는 파인애플 던지면 안될테니까요. 아이가 말하네요. 사근사근 새록새록 말해 달라고... 



꽃씨

최계락


꽃씨 속에는
파아란 잎이 하늘거린다

꽃씨 속에는 
빠알가니 꽃도 피면서 있고

꽃씨 속에는 
노오란 나비 떼가 숨어 있다.

☆ 아이도 어른아이인 우리도 꽃씨입니다. 어두움 속에 있더라도 내면에 햇살을 담고 있는... 아무리 숨고 싶어도 언젠가 파란 새싹을 틔워낼 꽃씨요. 파아란 잎 하늘거리는 사이 빠알가니 꽃 피어오르면 우리 사이 숨어있던 노오란 나비 떼가 날아오를거에요.




가을 하늘

윤이현


토옥
튀겨 보고 싶은,

주욱
그어 보고 싶은,

와아
외쳐 보고 싶은,

푸웅덩
뛰어들고 싶은,

그러나
머언, 먼 가을 하늘.

☆ 하늘은 언제나 머리 위에 있죠. 그런데 그 하늘을 하루 몇번이나 올려다 보나요? 십대 후반과 20대 초반 매일 밤을 술에 절어 보냈습니다. 웃고 떠들고 있었지만 가슴 속에선 하나님과 운명에 대한 원망이 눈물로 흐르고 있었죠. 그 시절 어느 기억에도 밤하늘 별은 없습니다. 밤을 닮은 어두움이 웃는 가면 뒤 흐르는 내 눈물에나 어려있었죠. 

한영애님의 '조율'이란 노래 아시나요? '잠자는 하늘님이여, 조율 한번 해 주세요. 그 옛날 하늘빛처럼 조율 한번 해 주세요.' 하늘빛... 그렇네요. 하늘빛은 어둠만이 아니라 푸르름도 있었네요. 어두움이 12시라면 낮도 그만큼일테죠? 온 낮을 온 밤을 그리움으로 절망,상실감, 박탈감, 저항할 수도 없다는 무력감, 수치만으로... 원망과 잃어버린 꿈과 그녀로 아파 지낼 때도 분명 하늘은 제 머리 위로 푸르렀고 어두움 속에서도 반짝이고 있었겠죠. 그러니 살면서 한번은 도시가 전경이고 하늘이 배경인 날들만이 아니라 온전히 하늘이 전경인 나날도 보내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 하늘이 심장 안에서도 푸르르게 펼쳐져 있음을 그렇게 영혼을 조율하고 세상을 조율할 거라... 믿으면서...



사랑

서동수

나는 어머니가 좋다. 왜 그냐면
그냥 좋다.

☆ '그냥 친구가 진짜 친구다.' 라는 옛 광고 카피가 떠오르더군요. 하지만 생각해 보면 사람이 사람을 좋아할 때는 분명 이유가 있죠. 외로움과 아픔으로 헤멜 때 함께였다거나 힘겨운 날에 기댈 어깨였다거나 너무 아름다워서 다른 의미가 보이지 않더라던가 나의 이상을 완성하는 걸 지지해 줄 것 같다거나...
사람이 사람을 그냥 좋다라고 할 때는 이유가 없어서라기 보단 이유도 떠올리기 성가실 만큼 그 또는 그녀와의 시간이 아리고 두렵기 때문일 겁니다. 그렇지만 누구에게나 이유를 찾을 수 없을만큼 그냥 좋은 누군가는 분명히 있죠. 대개의 경우 그 이유없이 좋은 사람은 어머니일 겁니다. 세월을 거슬러 보면 누구나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와 하나였던 시절이 있죠. 어머니의 일부로 시작되어 어머니의 태내에서 인체를 갖추어 비로소 하나의 생명체로 태어납니다. 태어나서도 어머니의 품에서 온기를 느끼고 어머니의 젖으로 숨을 이어가는 때를 보내죠. 알고 보면 우리의 첫울음과 첫미소와 첫옹알이와 처음으로 기고 일어서던 그 모든 날에 어머니는 함께셨겠지요. 열나고 기침하고 코흘리고 똥오줌 못가리던 모든 시절을 함께하며 우리 웃음과 울음에 웃고 울던 분입니다. 감히 이유를 찾으려든다면 미안할 일이죠. 원망뿐인 것 같던 순간에 마저 진심은 사랑으로 향하던 그녀... 태양이 불타며 피부 마저 벗겨지고 있는데도 날 감싼 어두움을 끝내겠다면서 절벽 아래를 내려다 보던 순간... 그 순간에도 떠오르던 기억들 중 아리던 하나... 어머니 



살구꽃 지는 날

안도현

할머니, 살구나무가 
많이 아픈가 봐요

살구꽃 이파리 깜빡깜빡
저렇게 떨어지는데
우두커니 먼 산만 바라봐요
흰 머리카락 올올이 풀어져도
빗을 생각을 안 해요
참빗을 어디 두었는지
잊어먹었나 봐요

할머니, 살구나무가
할머니처럼 아픈가 봐요


☆ 아이야, 할머니는 아픈게 아니라 기다리고 계신거야. 
눈 내리고 꽃 피고 태양이 작렬하고 하늘이 높다가 다시 눈 내리고 
찬바람 화롯불 곁에서 도란도란 버텨가던 그 계절들을 많이많이 오래오래 보내셨잖니?
그런 오랜 변성을 거쳐 할머니께선 다음 계절을 맞이하시려 
완숙함으로 강을 건너 새로운 언덕에 이르려 기다리고 계신거야. 



뜨개질

권명희

꽁꽁 엉킨 가난을 풀어내어
엄마는 
긴 겨울을 뜨개질 한다.

두 평 남짓한 아가의 잠자리와
곤한 아빠의 머리맡을 덮어줄
발 고운 사랑을 짠다.

댓돌 쓸던 찬 바람이 
문풍지를 뚫고 
잔물결진 이맛살을
따갑게 보채도

코바늘에 꿰어 엮는
아가의 눈웃음이
어둡고 시린 가슴을
따뜻하게 덮혀 준다.

발돋움해 일어선
아가 얼굴
손 꼽으며

언밤 지펴
날 밝히는
여린 손끝에는

밤새도록
빛살 고운 사랑이
무늬져 짜인다.

☆ 꽁꽁 엉킨 가난도 이 가족의 긴 겨울 마저 품어버린 따스한 봄을 앗아갈 순 없을 겁니다. 
그 발 고운 사랑이 짜내는 것은 아가의 잠자리와 아빠의 머리맡을 덮고만 멈추지 않을거에요. 
아빠를 통해 동료에게로 이웃에게로... 
아가가 자라나며 연인에게로 친구에게로... 
그렇게 서로를 세상을 덮어줄테죠. 

이 시가 너무 아렸어요. 
너무 따듯해서 너무 포근해서 너무 아렸어요. 
세상엔 이런 따사로움만 있는게 아니란 걸 아니까요. 

분명 피가 도는 육신을 지닌, 귀신이 웃는 모습을 견뎌내야 하는 아이들도 있으니까요. 
그 귀신은 잘 웃고 잘 울고 달변가였습니다. 
그렇게 너무도 선명해서 사람들은 아무도 그가 귀신인 줄을 몰랐더랬죠. 
그를 버텨야 했던 아이는 되려 웃어도 울어도 말을 해도 사람들이 귀기라네요. 숨쉰 채 귀신이라네요. 

바닷가에서, 산골에서, 학교 옆 공터에서, 공사장에서, 도시 한 켠에서 그 어디서나 그 어느녁에나 
거센 바람도 모두 감당해내고 말았던 그 아이는 흐릿해지고 있습니다. 
얼어버린 계절에만 머물다가 찬이슬만으로 식어가는 몸뚱이 안에서 버거워 울고 있네요. 

그래서 알 것 같아요. 뜨개질이란 시 속 가족은 한번도 한순간도 시린 가슴 지닌 적 없더란 걸... 
아가의 눈웃음과 더불어 포근한 빛이 그 가슴 속에서 한결같이 반짝이고 있었음을...
이 가족이 짜는 빛살 고운 사랑이... 
그 따스함을 마을로 도시로 세계로 우주까지 데워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꽃샘추위

유강희

꽃이 피는 게
샘나서 추위가 
닥친 게 아냐

꽃들이 너희들도 한번
꽃향기에 취해 보라고
추위를 초대한 거야

얇은 잎이 찢겨지고
줄기가 갈라지는 것도
까마득 모르고 말야

꽃들이 반갑게 추위를 껴안은 거라고 


☆ 알고 보면 추위 속에서도 꽃향기에 풍요로울 수 있었어. 
잎이 찢겨지고 줄기가 갈라지는 속에서도 
서로의 향기로 따사로울 수 있었다구. 

누군가 안에 사랑이 너무 푹 잠들어 있어서 
또 다른 누군가 안의 사랑도 이젠 영면에 든거야. 

그들은 서로의 향기에 취할 수도 있었는데 말이야...




봄날

신형건

엄마, 깨진 무릎에 생긴 
피딱지 좀 보세요.
까맣고 단단한 것이 꼭
잘 여문 꽃씨 같아요.
한번 만져 보세요.
그 속에서 뭐가 꿈틀거리는지
자꾸 근질근질해요.
새 움이 트려나 봐요.

☆ 그러게 아이들에게 상처가 잘 여문 꽃씨처럼 무르익어가려면 
꼭 깨진 무릎에 생긴 피딱지 만큼만이어야 할 거에요.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패혈증으로 내면에서 
사랑이 앓지도 못한 채 숨이 멎어버리면, 
새 움을 트게 하는 근질거림이 꿈틀거리는 것은 
마주해 보지도 못한 채 눈 감고 말테니까요.



술래잡기 

양승진

술래잡기를 하려고 하니
갑자기 어디선가
예쁜 나비가 날아오네.
내가 나비를 잡으려니
나비가 자꾸 도망가네.
그런데 어디선가 속삭임이 들렸다.
뭐라고 하냐면
'내가 잡아줄까?'
바로 꽃이었네.
꽃이 나비를 잡아 주네.


☆ 나비를 잡아줄 나만의 꽃을 바라기 보다
나비를 잡아주겠다며 누군가의 꽃이 되길 꿈꾸기 보다

꽃과 나비가 어우러지는 들녘에서
바람과 햇살 마저
나 마저 아울러 머금을 수 있는

그런 한 때를 보내다 산을 건너고 강을 걸으면
속삭임도 지나쳐 갈 지 모르지



산 너머 저쪽

칼 붓세

산 너머 저쪽 하늘 멀리
행복이 있다고 말들 하건만
남 따라 행복을 찾아갔다가
눈물만 글썽이며 돌아왔네.
산 너머 저쪽 하늘 저 멀리
행복이 있다고 말들 하건만.

☆ 동시라기엔 너무 시린... 가진 자는 더 가질 거라며 가지지 못한 자는 그 지닌 것 마저 빼앗길 거라던 빛으로 오신 분께서 선언하신 차가운 방정식이 떠오르는군요. 행복은 행복한 사람들만 커가나 봅니다. 행복하지 않은 이는 행복한 사람들 구경만 해야하나 봅니다. 그러게 더 행복하라 기도나 드릴 걸 (행복) 없는 내가 마주대고 악을 써대 퍽이나 죄송하네요.




선인장

김륭


울고 싶으면 울어, 마음껏
울어 보래요 울 수 있다는 건
무슨 일이 닥쳐도 견딜 수 있다고
스스로 다짐하는 거래요
겁먹지 말래요
이글거리는 태양 머리에 이고
모래바람을 견디고 전갈도 물리친대요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어도
꽃을 피울 수 있대요
선인장에게 가시는 
눈물이래요


☆ 그래도 물 한 모금의 안식도 없이 가시뿐이라면
선인장도 목타고 아플거야




먼지

사이조 야소


눈으로 먼지가 들어갔네.
암만 비벼도 안 나오네.

뒷담에 기대섰는데
옆집 아저씨 하는 소리,
"아가, 아빠한테 꾸중 들었니?"

큰길로 나왔더니
앞집 누나 하는 소리,
"아가, 어떤 사람이 때렸니?"

아무도 모르는 눈 속의 먼지
암만 비벼도 안 나오네.

☆ 언젠가 자라나 늙고 
먼지로 돌아갈 날을 맞이한다 하더라도
눈 속의 먼지 그 작은 하나에도 
따스함이 깃들던 시절이 있었음을 담아갈 수 있다면
돌아가는 길이 서늘하지만은 않겠네...




하얀 눈과 
마을과

박두진


눈이 덮인 마을에
밤이 내리면
눈이 덮인 마을은
하얀 꿈을 꾼다.

눈이 덮인 마을에 
등불이 하나
누가 혼자 자지 않고
편지를 쓰나?
새벽까지 남아서
반짝거린다.

눈이 덮인 마을에 
하얀 꿈 위에
쏟아질 듯 새파란
별이 빛난다.
눈이 덮인 마을에
별이 박힌다.

눈이 덮인 마을에
동이 터 오면
한 개 한 개 별이 간다,
등불도 간다.

☆ 눈이 그저 하얀 쓰레기가 되어버린 순간 깨달아야 했어
하얀 꿈에 짧게나마 물들던 시절로도
반짝거리는 그리움이던 시절로도
그리고 그런 시절을 가져다 주었던 낮과 밤으로 
결코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하지만 
그 눈이 덮인 마을엔
하얀 꿈 위로 쏟아질 새파란 별들로
아름다운 밤이길 바란다

그 마을, 동이 터온다해도
하늘로 돌아가 별들은 거세게 빛날거라 기도하며...


무지개 뜨면
좋겠다

유강희

남쪽 마을과
북쪽 마을을 잇는
무지개 뜨면 좋겠다

토라진 네 마음과
내 마음 사이에
무지개 뜨면 좋겠다


☆ 무지개 같은 건 
무지 개 같은 건
곧 사라지고 마는 걸...

토라진 내 마음이
네 마음을 원망하는 건
아마도 내 마음 속
네 마음을 바란 
바람이 빛났던 
때문이겠지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정호승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
꽃잎에도 상처가 있다

너와 함께 걸었던 들길을 걸으면
들길에 앉아 저녁놀을 바라보면
상처 많은 풀잎들이 손을 흔든다
상처 많은 꽃잎들이
가장 향기롭다


☆ 어디가 풀잎이고
어디가 꽃잎인지

어느시절엔
정말 꽃이기라도 했던건지

상처투성이로
해체되어 버리면

그 향기는 시릴뿐
향기롭길 기대한들

아릿하고 시큰하게 흩어져 버릴 것을...




뒷걸음질

남진원


뒷걸음질하면
멀어지겠지

뒷걸음질하면 
네가 점점 작아 보이겠지

뒷걸음질하면
나중엔 네가 안 보일지도 몰라

그러나 발자국은
여전히 네게로 향해 있지


☆ 뒷걸음질하며
널 향하던 발자국을 짚어본다

그 걸음이 길게 이어질 수록 깨닫는다
난 한순간도 네게 가닿았던 적 없었음을

그리고 이 순간 흐르는 아릿한 눈물도
결코 네 손끝에 닿지 않을 것임을



아침 버스에서

권영상


추운 날 아침
아침 버스의
차가운 좌석에 앉다가

뜻밖에도
따스하게 밀려오는
그 누구인가의 체온을 느낀다.

이 자리에 앉았다가
따스한 체온만을 남겨 두고
내린 사람은 누구일까.

추운 겨울의
한 모퉁이를 녹여주는
이 의자에 앉아

나는
다음 사람을 위해
더 따스한 자리를 만든다.


☆ 누군가의 따스함이 데워둔 자리
추운 겨울의 한 모퉁이를 녹여준다는

겨울만 이어지는 이들을 위해
그 데워둔 따스함을 지고가 들러야 할까?

다들 그러려 할까?

그렇게 외쳤는데도 속삭임이라던데
넓은 들 어딘가 누군가
듣기는 했을까?

이러다 그 따스함
다 식어버리지 않을까?

할 수 있는게 
누가 속삭임이라는
외침뿐인데 

소리치다 잠겨버린 목으로

따스함 따라 
나도 식어 간다



꼬마 장갑

박목월


아기 손은 꼬마손
꼬마 장갑 껴야지

빨간 털실 한바람
살살 풀어서
하얀 털실 한바람
살살 풀어서

우리 아기 자는 틈에
한 코 짜고
우리 아기 노는 틈에
한 코 짜고

꼬마 장갑 꼬마 장갑
이내 짠다.


☆ 이봐! 꼬마 장갑이라도 짜보지 그래?




그러고 보니 도서의 커버에 감싸인 한켠에 ''아무도 모르게 숨어서 울고 싶은 날, 힘내라는 위로의 말 대신' 김용택 시인이 당신에게 보내는 101편의 동심'이라는 카피는 그냥 마구 지은 광고 문구가 아니었네요. 힘내라는 식상한 말 보다 누군가 어떻게든 공감해 주는 순간이 있어야만 할 겁니다. 누구 하나 진정으로 공감하는 이 없다면, 그 어디서든 어느 계절이든 날카론 바람이 시리게 뼛속까지 부수고 스며들테니까요. 

자신이 어른아이인 걸 잊어버린 채 참고 참던 인내가 언젠가 부터 괴팍하게 강퍅하게 세월을 겪어가게 한다면, 끝내 성탄절 밤이 절실할 스크루지 같은 노인네나 되어야 할테죠. 그런 날이 올까봐 두려운가요? 그렇다면 '내가 아주 작았을 때'란 이 동시필사집을 만나보는게 좋을 것 같아요. 아마도 101번의 크리스마스 유령과의 만남을 어느 계절에든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가져다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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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사실 죠셉 켐벨의 [신의 가면] 시리즈 1권인 [원시신화]의 리뷰를 몇편으로 분할해 쓰려면서 서론으로 전제 삼을 작정으로 쓴 글을 추려서 따로 올리는 것입니다. 도입부가 다소 맘에 들지않는 신앙인분들께 앞서 양해를 구합니다-


"삶의 충만성은 각자가 지니고 있는 신화의 깊이와 폭에 직접 비례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러 문화의 신화들은 ...중략... 삶의 동기와 방향을 제공하는 강력한 동인으로 분명히 작용하고 있다"

"신화 속 상징들은 가장 깊은 동기 부여를 가져온다"

"신화가 자신의 특질을 무의식으로 부터 꺼낼 때 삶은 그 속으로 흘러들어 간다"

"신화는 -따라서 문명은- 시적 초일상적 이미지이다. 모든 시가 그러한 것처럼, 신화는 깊은 차원에서 상상된 것이지만 다양한 수준에서 해석될 수 있다. 아주 피상적인 정신의 소유자는 신화에서 국지적인 배경을 보지만, 가장 심오한 정신의 소유자는 거기서 무의 세계로 통하는 입구를 본다." 

죠셉 켐벨은 우리의 삶을 충만하게 하고 삶의 동기와 방향을 부여하며 (아마도 신화적 이해를 통해) 삶이 흘러들어가야 할 대상을 신화라 말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신화가 다양한 수준에서 해석되어야 하며 가장 심오한 정신의 소유자는 거기서 무의 세계로 통하는 입구를 본다고 말합니다. 그가 말하는 무의 세계란 무엇일지 쉬이 가늠할 수 없지만 아마도 우리가 '이것이 실상이다' 라고 갖고 있는 삶과 세계, 우주에 대한 정의가 실체 없음을 깨닫는 바를 이르지 않나 싶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의미없다는 의미에 대한 이해로 삶과 세계와 우주가 정체하지 않고 끝내 무한으로 영원으로 향하는 첫걸음을 내딛게 할 것이기에, 무의 세계로 통하는 입구를 본다고 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류 모두는 삶과 세계와 우주가 새로운 차원으로 향하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그 심오한 정신의 소유자가 되어야만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무한과 영원이라는 상징의 본모습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실 겁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꿰뚫으며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였으며 함께이며 함께일 것임에 대해 신화만이 아닌 뇌과학-[신은 왜 우리를 떠나지 않는가?]참고-까지 유전공학-[슈퍼내추럴]참고-까지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죠셉켐벨이 말하는 그 무의 입구라는 것을 거쳐 이르러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며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은 하나님과 하나되는 과정입니다. 죠셉 켐벨은 삶의 충만성, 삶의 동기와 방향을 제공하는 것으로 신화를 보았습니다. 기독교인에게 죠셉 켐벨이 말하는 신화란 상징임과 동시에 지금까지의 역사이며 앞으로의 역사를 말하는 것일 겁니다. 우리는 지나온 그 역사와 그 가치와 의미 그리고 앞으로 만들어갈 역사의 이정표를 성경에서 찾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프롤로그가 우리 개개인의 내면에서 휴식하고 계신 하나님을 깨워 우리를 하나님과 하나되게 하는 것이라면 그 전개의 도입부(프롤로그도 전개도 '어찌 예수님이 아니시냐?' 할 분들이 있을까봐 말씀드리는데 예수님께서는 전개상의 도입부가 아니라 기독교인의 역사에 있어 주제이십니다)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스라엘을 지구 전체로 확장한 현재의 이스라엘을 태양계를 시작으로 우리은하를 너머 물질차원의 우주 전체로 확장해 그 물질차원 전체에 천국을 구현하는 것일 겁니다. -왜 물질차원의 우주 전체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땅을 정복하라'의 땅에 해당하는지 천국을 구현하라는 건 (연상하기 쉽겠지만) 어떤 말씀을 근거한 것인지 이야기 해나겠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 당연히 이 구절 부터 시작해야겠지요? 제가 히브리어를 아직 공부하지 못해 서균석 목사님의 [성경의 잣대] 라는 그 분 저서를 근거 삼자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천지'에 대한 원어인 해당 히브리어를 한글로 직역하면 '하늘들의 본체' '땅의 본체'라고 한다는군요. 서균석 목사님께서는 창세기를 1차적 해석이 아니라 영적 정신적 각성 과정을 이른다고 재해석하셨습니다. 그렇게 성경은 늘 여러 관점에서 바라보고 접근해 의미를 찾아야 할 필요가 있음을 저 역시 수긍하고 당연하다 여기지만 그런 중의적 재해석 이전에 1차적 전달하려는 의미가 성경 독해를 하며 최우선적으로 이해해야 할 대상이리라 봅니다. 그러니 영적 정신적 차원의 관점 이전에 그저 단순한 시각에서 접근해 보겠습니다.

 '하늘들'이라고 하늘이 복수로 쓰인 것과 '땅'만 단수로 쓰인 것으로 보아 '하늘들'이라며 특별히 복수로 기록한 것은 우리가 일상적 의식으로 바라보는 단순한 하늘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들'이 상징하는 공간 즉 우주가 여러 차원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말씀하는 것일 겁니다. 상위차원의 우주가 여럿 존재하며 단계를 거쳐 물질차원에서의 우주-땅-에 이르렀다는 것을 설명하려 '하늘들'이라며 복수를 '땅'이라며 단수를 사용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초끈이론에서도 차원은 다차원이며 우주는 중첩되어 존재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물론 차원의 숫자가 11차원이니 몇십차원이니 초끈이론의 변형 이론들 마다 다른 관점은 있지만 우리가 존재하는 태양계 그를 품은 우리 은하 다시 그가 속한 우주 이 하나의 차원에서의 우주만이 전부가 아니라 11차원 이상의 우주가 존재함은 과학도 주장하는 바이니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창세기 1장1절이 하나님께서 다차원으로 우주를 창조하신 것임을 성경과 과학 서로가 상호 근거 삼을 수 있음은 분명합니다. 특히 여기서 다차원 우주 중에서 하위차원의 물질차원 우주를 성경에서 '땅'이라 일렀을 거라는 정의는 앞으로 이야기의 후반부에서 중요하니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야기를 전개하자면 이전에 이미 언급했던 해석들은 간략히 하겠습니다만 짚고는 가야 할 것은 같군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창세기 1:26]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 지라. 창세기 2:07]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1:28] 


-이 구절들에 대해 이야기 하기에 앞서 이전 글의 내용 중 인용부분과 이후 내용 전개를 위해 필요 부분을 옮깁니다.  

<아리예 카플란의 [성경과 명상]에 의하면 생기生氣로 번역된 히브리어 Neshamah는 숨을 뜻하는 히브리어 Neshimah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생령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Nefesh는 휴식을 뜻하는 히브리어 어근 Nafash에서 온 것이라 한다. 결국 사람은 '하나님의 혼'이자 숨이 불어넣어져 '살아있는 영혼'이 된 존재라는 말이다. -그리고 네페쉬의 어원인 어근이 나파쉬라는 것에서 의미를 확장하자면 그 '살아있는 영혼'이라는 상태는 '하나님의 영(숨)이 휴식'하고 있는 상태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즉, 창세기에서의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구절들을 근거 삼자면 사람은 구조적으로 하나님의 부분인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숨이자 영이 물질차원의 껍데기 속에 잠시 휴식하고 있는 상태가 사람'이며 또한 '하나님 영의 부분인 것이 사람'이라는 말이다. 한마디로 구조로서는 '하나님을 닮게 창조되어 있는 하나님의 부분'이며 위상적으로는 '하나님을 담고 있는 상태'를 가르켜 사람이라 한다는 말이 된다.>-


하나님께서 다차원적 구조로 모든 세계를 창조하시고 생물들을 창조하신 후 자신을 닮은 구조와 자신을 담은 상태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축복하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물질 차원의 우주에 충만하라. 물질 차원의 우주를 정복하라. 고 하신 것입니다. 땅이 상징하는 것이 물질 차원의 우주 전체임은 이미 초반에 언급하였습니다. 


간략히 스킵을 살짝 거치자면 이 이후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단하나의 금기라는 깨어질 수 밖에 없을 유혹을 주셔서 원죄라 일컬어지는 과정을 거쳐 때때로 인간들이 저주라 해석도 하는 실락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죄이기만 하고 저주이기만 하였을까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난 이후에야 즉, 하나님께서 주신 단하나의 금기를 깨고 난 이후에야 인간은 지혜를 갖추었고 실락을 거치고서야 자신과 만물에 대한 이해의 길을 걸으며, 함께 생육하고 번성하는 중 갈등하고 충돌하고 자신들이 만들어내는 긍정성과 부정성을 두루 경험하고 때론 긍정성에 때론 부정성에 휩쓸리면서도 되도록이면 부정성은 잠재우고 긍정성을 키우며 살아가고자 하는 노력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모든 이해와 노력의 어우러짐이 인간이 건설한 제도와 문화 즉 문명이 아닌가요?


그렇다면 애초에 깨어질 수 밖에 없었을 유혹이라 해야 할 단 하나의 금기는 인간이 반드시 깨고말아야 할 과도기였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고나서야 하나님께서는 이후 인간의 삶에서 인간이 겪게 될 가장 원초적인 과정과 결론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시며 하나님께서는 하와에게는 잉태하는 고통(물론 그 잉태에 이르는 과정에서 고통만이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성인이 되면 남녀 대다수가 다 알게 되는 사실입니다만)과 수고와 출산하게 될 것임을 말씀하시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창세기 3:16]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과연 죄를 지었으니 판결을 내린다시며 하신 처벌이기만 할까요? 잉태의 고통이라하셨지만 이 시대의 성인여성이라면 미혼이더라도 잉태에 이르는 과정에 결코 고통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걸 거의들 알지 않나요? 이 시대 성인남성으로서 여성들이 그 과정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더 크게 느낀다는 걸 이 나이다 보니 어쩐지 알 것 같아서요...  상상해 보면 커다란 빛의 행성 하나에 수억 수십억개의 혜성이 뛰어들다가 단하나의 혜성이 그 빛의 행성과 합일하고 그 빛의 행성이 둘로 넷으로 여덟으로 64개로 분열하면서 그 분열이 셀수없는 재분열을 거쳐 제모습을 갖추며 성장해 가서는 생명체를 이루어 마지막으로 출산하는 것이 잉태에서 출산에 이르는 과정입니다.(출산 이전까지의 상징은 난자에 정자가 결합하고 세포분열하는 것을 파동적 차원에서 그려보았습니다.) 잉태하기까지 고통만 있는 것이 아니며 여성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들이 잉태와 출산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창조를 소우주로서 작게 나마 모방해 실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저주이겠습니까? 또 그러한 창조 후에 하나님께서 매번 보시기에 좋아하신 것처럼 우리 인류는 미술이던 음악이던 춤이던 연극이던 그외 다양한 예술로 창조 과정과 그를 감상하는 중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창조 과정과) 창조 이후에 느끼셨다는 그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마음을 비슷하게나마 느껴보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닮은 구조로 지음받아 하나님을 담은 상태로 존재하며 이렇게 하나님을 닮아가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성에게 하신 잉태, 수고, 출산이라는 전제가 이렇듯 저주 보다는 축복이였다면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다]라는 말씀이라고 어찌 저주이겠습니까?-  


이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표현이 이 시대 대다수 여성들에게 반감을 가져올지 모르겠으나 다스리다는 뜻의 히브리어 원어 '이르두'는 성경 히브리어 학자들에 의하면 문맥에 따라 '혹독한 훈련, 영향력, 통달하다'는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고 합니다. 


'이르두'의 문맥상 쓰임에 따른 의미를 되짚고 보면 '혹독한 훈련을 거쳐 통달하게 되고 그로하여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향력을 행사하리만큼 통달하기까지 혹독한 훈련에 뛰어들기 위해 무엇이 선행해야 하는걸까요? 특정 대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 열정이 그 대상에 뛰어들게 하고 그러한 관심과 애정과 열정이 지속될 때에야 비로소 부단한 노력이 이어지게 되는 것이지 않나요? 통달한다는 것은 혹독한 훈련이 끊임없이 이어져서야 이르는 것인데 이를 동양에서는 功 이라 합니다. 內功 外功 功夫 功力 등으로 나타나는 功 이란 것은 하나 같이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얻는 결실과 결실을 이루어나가는 과정 자체를 이릅니다. 문자적으로 二 자를 위아래로 이은 것은 천상의 원리를 지상의 원리(제도와 과학과 사상 등으로) 구현해내는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에 힘(力)쓰는 것이 즉 노력을 끊이지 않는 것이 공(工+力=功)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통달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한학 등의 학문적으로는 모르지만 상식적으로 이 문자가 쓰이는 어휘들이 적용되는 제가 아는 모든 경우에 功 은 결실인 통달과 과정인 혹독한 훈련 모두를 아우르는 말입니다. 사실 이러한 功을 이루기 위해 관심과 사랑과 열정이 전제된다고는 하였으나 때로는 살기 위해 생업에 종사하며 자신의 일에 달인이 되기도 하며 자의 보다는 타의로 하여 들어선 길에서 통달하는 경우도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맡은 바에 대한 관심도 사랑도 없이 더군다나 끊임없는 노력도 없이 무언가에 통달하는 경우가 과연 있을까요? 지긋지긋하다며 하는 일에서도 달인이 되려면 끊이지 않고 그 일에 전념하며 숙련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맡은 바에 대해 능률적이며 더 효율적으로 결과를 보이는 이들은 이러한 과정 속에서 사랑까지는 몰라도 자신이 맡은 바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고 그렇게 주의하고 몰입하니 당연히 전체적으로도 또 세밀하게도 맡은 바의 구조와 원리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맡은 바에 대해 이해하고 숙련되는 과정과 그 과정상에서 매순간 갱신되는 결과물이 功 입니다. 이것이 단지 생계를 위한 일임에도 그러하다면 사람이 사람에게 사람이 생명에게 사람이 만물에게 이러한 다스림을 실천하려할 때는 사랑과 관심과 열정이 함께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것일 겁니다. 이상적으로만 살 수는 없는 것이라지만 이상이란건 기대할만 한 것이고 추구해야 하는 것이라는데 많은 분들이 공감할거라 믿습니다.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하나님께서 주신 과제를 인간이 따르며 앞으로 거듭 갱신해 통달해야 할 과정 중 초반에 이룬 결실의 하나로 게놈프로젝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진작에 게놈프로젝트 연구의 성과가 있었다고 하니, 모든 생명의 유전적 결함을 치료하는 육신차원의 아픔과 상처를 보듬어 주는 일이나 생명연장이라는 희망도 희망에서 그치지 않을 조건은 갖춘 것입니다.)


[...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을 사모하는 아내에게 사랑과 관심을 지닌 채 열정적으로 남편이 아내를 위해 살아갈 것이라 말씀하신 거라고 봅니다. 아내를 이해하려 끊임없이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심은 사랑 안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이 아내를 향해 행사해야할 영향력이라 한다면 다름 아니라 이 세상에서 살아가며 한결 같이 아내의 편이 되어주는 것이 가장 우선적이어야 할 겁니다. 그리고 힘겨움 속에서 격려하고 때론 도덕적 영적 흔들림을 겪는 순간 마다 의지할 대상이며 자신을 바로잡을 수 있는 심정적 바탕을 일깨울 수 있을 대상, 이 사람을 위해서라도 흔들리지 말자는 내적 근거를 불러일으킬 자원이 되어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이상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은 기대할만한 정도가 아니라 당연히 기대하고 추구하는 것이 마땅한 이상입니다. 무엇보다 이러한 다스림은 남편이 아내에게만 향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 역시 남편에게로 향해야 하는 것입니다. 강조해도 지나칠 것이 없을 이 말은 서로가 서로의 편이 되어 두둔하고 지지하고 옹호하며 분발해야 할 순간과 힘겨운 순간 마다 격려를 아끼지 않고 흔들리는 순간 마다 내면의 도덕성이 효력을 할 자원이 되어 주는 존재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영향력은 나날이 서로를 알아가려는 관심과 서로가 서로의 아름다움과 부족함에 대해 이해하고 그것에 매료될 수 있고 칭찬해 줄 수 있고 부족함을 메워주거나 스스로 채워가려는 의지가 일어나서 열의를 다하도록 힘이 되어줄 때 가능합니다. 이것은 상대를 감싸안을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한자로 포용包容이라고도 하지만 순우리말로 품는다는 표현이 더 와닿을듯 합니다. 알을 품듯 서로를 품어 줄 때 서로는 알 속의 생명이 차츰 온전한 개체로서의 형체를 이루어가 제 생명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보이려 끝내 알을 깨고나와 갇혀있던 자신을 너머 진정 아름다운 생명으로의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아내와 남편은 서로에게 이러한 역할을 해주어야 할 이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역할은 사랑 안에서 가능하며 그 사랑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 요한일서 4:16]에서의 말씀을 창세기2:07 에 비추어 보면 좋을듯 합니다. 이미 말씀드렸듯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불어넣으신 생기(Neshamah)는 하나님의 숨(Neshimah)과 영을 뜻하는 중의적 표현이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숨)을 사람에게 불어넣으셔서 사람은 생령(Nefesh)이 된 바, 이는 하나님의 영(Neshamah,숨-Neshimah-)께서 사람의 내면에서 휴식(Nafash)하고 계신 것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요한일서 4:16의 말씀을 창세기2:07 말씀에 비추어 보자면 사람의 내면에는 하나님의 영께서 휴식하고 계시다는 이 해석은 사람의 내면에서 사랑이 잠들어 계신다 또는 사람의 내면에서 사랑이 쉬고 계신다는 말씀인 겁니다. 이렇게 우리 안에서 쉬고 계신 사랑을 우리 스스로 일깨우도록 지지하고 또 서로가 서로에게서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는 것 다시말해 사랑이 날개짓하려 나서도록 품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남편과 아내... 서로에게 서로일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다스림(부부에게 있어서는 사랑과 관심을 열정으로 지속하여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를 두둔하고 옹호하고 지지하며 격려하는 이가 되어주는 것, 도덕적 의지를 바로 세울 내적 바탕이 기능할 자원이 되어주는 것)을 위한 전제 조건이리라 봅니다.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다]라는 이 말씀은 이렇듯 결코 여성들이 자존심 상할 표현도 아니고 여성의 자긍심을 저버리는 의미도 아닙니다. 그렇게 아담에게 하신 말씀 역시 결코 저주일 수만은 없습니다... 


<다음 글에서 이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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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제자 원리 - 세종대왕님의 훈민정음
이성진 지음 / 한솜미디어(띠앗)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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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제자원리란 제목이지만 훈민정음 제자원리에 대한 것은 밑밥일뿐 언어철학, 동양역리, 상수역학체계, 인도철학과 동서양 각 종교경전과 동서양 신화에다 동양사, 민족사까지 얇으면서도 넓게 넘나드는 좋게 말하면 철학서 걍 까자면 잡학서다.


그냥 순수히 가림다 문자에서 선별해낸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 훈민정음 낱낱의 문자들(한글)에 발음 체계가 부여된 원리가 무엇인지 궁금해 훈민정음 제자 원리에 대한 저작물을 찾는 분들이라면 단언컨데 이 책은 피해가야 한다.


훈민정음 각 문자 당 해당 발음이 부여된 원리... 그에 대한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문자에 대한 의미 부여랄까 제자에 대한  해석에 당시 어떠한 동양철학적 또 순우리 겨레만의 뜻이 담겨 있는지가 궁금할 뿐이라면 이 저작은 돌아가도 될듯 싶다. 흠씬 넘치는 책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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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매일이거나 며칠에 한번 꼴로 한동안 수행에 도움이 될 법한 내용을 떠오르는데로 또 몇몇 저작물을 인용하고 해당 부분을 수행과 관련지은 내용들에 대해 정리하려 한다. 각 저작물의 페이지 여백마다 기록해 두었던 것을 그대로 옮기는 경우는 몰라도 기억나는대로 적는 것은 모든 정리가 끝나는 날 체계를 갖추어 다시한번 정리할테니 두서없더라도 이해를 바랍니다^^


우선 수행이란 무엇일까? 수행이 과연 무엇이기에 수행이란 걸 하여야 하나? 하는 의문에 대해 나 스스로 답을 찾으려 노력했던 바를 정리하며 시작하려 한다.


수행을 왜 하여야 하냐고 누가 묻는다면 아마도 이리 되물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수행은 잃어버린 또 잊고지낸 진정한 자신을 회복하는 길이기에 사람이라면 당연히 걸어야 할 길이지 않을까? 


우선 성경의 한 구절로 시작하려 한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 (중략)...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세기 01:26]


창세기의 이 구절을 근거하자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만들어진 존재다. 그렇다면 창세기의 해당 구절에서 이르는 형상과 모양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QT 라이프성경에서 해당 어휘의 해석부분을 보면 형상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형태'라, 모양에 대해서는 '추상적인 유사성'을 가르킨다며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인간의 육신과 정신을 합친 全人이 곧 하나님과 같이 지음 받은 것임을 암시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해당 어휘의 히브리어 원어 해석도 모르니 단지 QT라이프성경의 이 해석만을 근거로 보자면, 신학에서는 구체적인 형태와 추상적인 유사성을 육체와 정신이라 해석하고 있다고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헌데 형상과 모양을 그저 구체적인 형태에서 '구체적인'에 주목하고 추상적인 유사성에서 '추상적인'에 주목해서 '구체적인 건 육체고 추상적인 건 정신이다'라고만 단정짓고 마는 건 지나친 단순화가 아닌가 싶다. 


형상과 모양은 단순히 외양만을 말한다기 보다는 구조와 상태를 이르기 위해 선택된 어휘가 아닐까? 

왜 구조와 상태란 표현으로 설명하고자 하는가를 이르기 위해 다시 한번 성경의 구절을 더해 보아야 할 것 같다.


...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아리예 카플란의 [성경과 명상]에 의하면 생기生氣로 번역된 히브리어 Neshamah는 숨을 뜻하는 히브리어 Neshimah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생령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Nefesh는 휴식을 뜻하는 히브리어 어근 Nafash에서 온 것이라 한다. 결국 사람은 '하나님의 혼'이자 숨이 불어넣어져 '살아있는 영혼'이 된 존재라는 말이다. -그리고 네페쉬의 어원인 어근이 나파쉬라는 것에서 의미를 확장하자면 그 '살아있는 영혼'이라는 상태는 '하나님의 영(숨)이 휴식'하고 있는 상태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이해를 위해 [성경과 명상]에서 '카발리스트들은 혼의 3단계를 나타내는 단어가 있다'고 이르는 아리예 카플란의 말에 주목해 보자. 카발리스트들은 혼의 3단계를 나타내는 단어가 있다고 하는데, Nefesh, Ruach, Neshamah 이 3단계이다. 이것이 이르는 혼의 3가지 수준에 대해 카발라 성자 이삭 루리아는 유리공예가가 파이프를 불어 뜨거운 유리덩어리로 유리용기를 만드는 과정을 비유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고 한다. 유리공예가는 하나님이고 파이프의 끝에서 만들어지는 유리용기는 사람을 비유한다. 유리공예가가 파이프에 입을 대고 숨(Neshimah, 네샤마의 어원)을 불어넣으면 숨은 파이프의 끝에 있는 유리용기에 가닿기까지 파이프를 통과하는 바람(Ruach)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숨은 유리용기에 들어가 공예가의 목적한 바대로 유리용기를 만들고 휴식(Nafash, 네페쉬의 어원)하게 된다.-루아흐는 성령(그외 바람,혼,영)을 뜻하는 히브리어이다-


즉, 창세기에서의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구절들을 근거 삼자면 사람은 구조적으로 하나님의 부분인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숨이자 영이 물질차원의 껍데기 속에 잠시 휴식하고 있는 상태가 사람'이며 또한 '하나님 영의 부분인 것이 사람'이라는 말이다. 한마디로 구조로서는 '하나님을 닮게 창조되어 있는 하나님의 부분'이며 위상적으로는 '하나님을 담고 있는 상태'를 가르켜 사람이라 한다는 말이 된다.


이러니 형상과 모양이 그저 이건 육체고 이건 정신이다라고만 단순화해 정의하고 말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구조와 상태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닮게 그(그녀)의 구조대로 창조되어있으니 어떠한 구속도 한계도 없이 하나님과 같은 자유를 구현해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카발라 관련 저작들이나 서양신비주의에서 유태교 신화를 언급한 관련 저작들 마다 한결같이 인용하는 아담카드몬에 대해 주목해야 할듯 싶다. 이미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에 대한 QT라이프 성경의 해설을 이르며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인간의 육신과 정신을 합친 全人이 곧 하나님과 같이 지음 받은 것임을 암시한다'라는 내용을 짚었었다. 여기서의 '전인全人' 곧, '온전한 사람'이 카발라와 유태교 전승에서 말하는 '아담카드몬'이다. '아담카드몬'이 뜻하는 것은 실락하기전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대로의 최초 사람을 가르키는 것이다. '실락하기전의 아담'(아담카드몬)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대로이니 '온전한 사람'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취하고 (즉, 이것과 저것이라는 분별을 취하게 되며 그러한 분별 속에 사는 것이 자연스럽다 받아들이게 되고나서 부터) 실락하여 인간으로서의 구속과 한계를 경험해야 하는 '불완전한 인간인 아담'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한 '결박과 제한, 한계'를 안게 된 '아담'과 구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대로인 실락 이전의 온전한 사람을 '아담카드몬'이란 표현으로 이르는 것이다.


'온전한 사람'을 달리 칭하자면 '참사람'이라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참사람을 한자로 옮겨보면 眞人이다. 도교에서 이르는 바로 그 진인 말이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겪어야 하는 내적 외적 모든 구속과 한계를 초월한 존재를 아마도 참사람이라 해야 하지 않나 싶다. 이미 실락 이전의 존재를 아담카드몬이라 한다고 했으니 사실 참사람이 되는 것은 초월이라기 보다는 우리 자신을 회복하는 것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니 부도지에서는 본디 자신으로 돌아간다하여 복본復本이라 하지 않나? 


-즉, 우리의 본디 그대로는 하나님을 담고 있고 하나님을 닮아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러한 본디 그대로의 사람은 구속도 한계도 없어야 할 것이다. 구속과 한계를 벗어나는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임을 성경을 통해 부연설명하자면, 축복과 저주, 죄에 대한 히브리어 뜻과 어원에서 부터 접근해야 할 것 같다. 


창세기 1:26 부터 1:28 까지가 모두 중요하겠지만 특히 1:28에 주목해  보자.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닮은 구조로 자신을 담은 상태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나서 가장 먼저 그들에게 '복'을 주셨다. 이 축복하다는 내용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바라크'라고 하며 뜻은 '축복하다', '무릎꿇다' 라고 한다.  이와 반대 되는 히브리어 단어는 '아라르'인데 이는 '저주하다'라는 뜻으로 거의 '결박과 제한, 한계'를 뜻하는 어휘들과 자주 같이 쓰인다고 하여 축복하다는 뜻의 '바라크'는 '자유'와 '해방'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 성경 히브리어학자들의 말씀이다. 이러한 근거에서 말을 이어가기 전에 또하나 '죄'를 뜻하는 히브리어를 보자. '죄'를 뜻하는 히브리어는 '헤트'로서 이 단어는 '라흐티'라는 동사와 같은 어근에서 파생된 어휘라고 한다. '라흐티'는 '목표물을 놓쳐 빗나가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이 축복(바라크), 저주(아라르), 죄(헤트) 세가지 개념에서 사람과 삶과 삶을 통해 알아가야 하는 것 그리고 끝내 회복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의미를 확장해 보자.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 하실 때 이미 '자신의 구조를 닮고 자신을 담은 상태'로 지으셨다고 언급했고 창조 이후 가장 먼저 사람을 축복하셨음을 위에 창세기 각 구절을 기재해 주목했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가장 먼저 축복하셨음은 하나님의 구조와 상태 대로의 사람 그대로가 이미 자유와 해방 그 자체였음을 말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본다해도 아주 빗나간 것은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신 이후 동방의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사람을 거기두시고는 아담과 하와에게 (동산 가운데의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음에 그 중)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다. 이런 단하나의 금기라면 언젠가는 깨지고 말 금기였지 않은가? 모든 제약이 없는 중에 단하나의 제약을 주고 나면 그건 언젠가는 깨질 수 밖에 없는 악마적인 유혹이라 생각된다. 부부로서의 모든 역할은 다하며 살아가겠지만 동침만은 절대 안된다는 배우자와 뭐가 다른가? 그런 악마적인 제약이라면 그러겠다고 받아들이고 나서도 조만간에 깨지고 말 금기다. 이 깨지는 것이 당연스러운 금기를 깨었던 행위가 '죄'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이 죄로 인해 아담 이후의 인류가 죄인이 되어 살아왔다. 그런 '죄'의 계승이라는 천형을 가엾이 여기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이자 독생자인 예수님을 보내셔서 '인류에게 계승되어오던 죄'를 대속케 하셨다는 것이 기독교적 해석이다.


헌데 과연 '죄'이기만 한 것인가? 그 '죄' 라 상징되는 한 장면으로 인하여 인간은 분별하게 되었고 아마도 환희의 세계에서 갈등이 충만한 세계로 내몰려서는 수고로움과 갈등 속에서 그러한 갈등을 중재하고 수고로움을 줄이고자 하는 노력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들과 자신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관습, 도덕, 법률, 철학, 과학, 심리학, 종교, 예술, 수행 등등 제도와 문화로서 발전하게 된 것이 아닌가? 이미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후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하실 때 부터 사람에게 제도와 문화를 발전시키는 이러한 여정을 완수하라 사명을 주신 것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선악과를 통해 분별하게 된 그것을 왜 죄라 하는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취한 이후 하나님께서는 하와에게 잉태하고 수고하고 출산할 것이며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이 널 다스릴 것이라 하셨고 아담에게는 수고하여야 먹고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하시면서 사망할 것이라 선언하셨다. 마지막 선언은 거의 저주와도 같은데 이것은 축복(바라크)이라는 자유와 해방 상태에서 저주(아라르)라는 결박과 제한과 한계의 상태로 위상이 변화한 것을 이르는 것이다. 그러한 위상 변이랄까 상전이랄까는 죄(헤트)라는 선악과를 먹는 행위에서 비롯되었고 그것은 목표물을 놓쳐 빗나간 것이라고 해석 할 수 있다.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렇듯 목표물을 놓치고 빗나가고만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계획하신대로인 것이라 생각한다. 인류는 이후 갈등 속에서 성장해 왔고 환희의 세계를 벗어나 살아왔지만 환희의 세계와 그보다 더한 천국을 꿈꾸고도 살아왔다. 갈등과 천국도 함께 공존시킬 수 있는 존재로 성장하기를 하나님께서는 바라신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한가지 더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면,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계획하신 것은 인간으로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신 것이다. '다스리다(지배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이르두'는 문맥에 따라 '혹독한 훈련', '영향력', '통달'이란 뜻으로도 쓰인다고 성경 히브리어학자들은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구조를 닮고 자신을 담은 상태'로 창조하신 '온전한 사람'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생명에 대한 비밀을 혹독한 훈련을 거쳐 깨닫고 그에 대해 통달하여 정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바라셨음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이유인 것이라 본다해도 빗나가는 것은 아닐 것이다.(유전공학의 발달로 게놈프로젝트를 인간이 완료한 것이 그것을 실천하는 첫걸음이 아닌가 싶다.)


이제까지 우리는 갈등 속에서 갈등을 중재하려는 노력으로 수고로움을 통해 걸어왔다. 이젠 결박과 제한, 한계를 부숴버리고서 다시 자유와 해방을 향해야 한다. 그것이 너희 안에 천국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해내 우리 각자가 내 안의 천국으로 향하고 이 세계에서 서로와 함께 천국을 구현해내기 위한 첫걸음일 것이다. 분별의 길로 들어선 것이 죄가 아니라 다시 환희의 세계로 천국으로 향하려 하지 않고 천국을 이 세계에 구현해내려 노력하지 않는 그것이 목표물을 놓쳐 빗나가는 것이고 죄 그 자체일 것이다.


사람의 삶이란 그 놓쳐버렸던 목표물을 다시 향하는 과정인 것이여야 한다. 사람으로서 삶의 목표는 그 여정을 통해 본디 그대로의 스스로를 되찾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 사람이 삶을 통해 앎을 쌓아가는 까닭일 것이다. 하나님의 구조를 닮은 사람, 하나님의 부분을 담은 사람이기에 그러한 진정한 사람... 참사람을 회복해야 하는 존재 그것이 사람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본디 그대로의 사람 그 자체(아담카드몬:참사람)를 대변하는 존재를 성경 속에서 찾을 수 없을까? 누구나 예상하듯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는 예수님께서 계시다. 하지만 그분은 이미 태초부터 말씀으로 존재하셨고 하나님의 독생자, 성삼위일체로 상징되듯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분 아닌가? 그렇다면 그분께서 보여주신 모든 구속과 한계를 초월한 역사하심을 평범한 사람이 감히 구현할 수 있다고 한다면 너무 과한 바램이지 않은가?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른다. 그저 신앙하고 따를뿐... 닮아가고자 한다해도 그와 같은 존재가 되고자 한다면 불경하다 참람되다 이리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과연 '또다른 아담카드몬'이라 해석되리만치 예수님과 같은 초월적 경지를 보여준 이가 성경에서 등장한 적이 없는걸까? 아니다. 분명코 있으니 바로 구약성경 열왕기에 등장하는 엘리야다. 엘리야 역시 예수님께서 그러셨듯 죽은자를 부활시켰고(엘리야의 제자인 엘리사 역시 죽은자를 부활시켰었다) 어떤 면에서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시지 않은 파괴적인 힘을 행사하기도 했다. 게다가 살아있는 채로 하나님께서 데려간 몇 안되는 이들 중 한명이다.


성경 외에도 인도의 '르쉬'나 '싯다', 그외 인도의 여러 종교 마다 다른 명칭으로 불리우는 깨달은 이들 그리고 중국 한국 도가의 도사나 진인들이 보여주는 초월적 모습들이 모두 창조된 본디 스스로를 되찾은 인물들의 본모습이다. 이들은 모두 본디 그대로의 스스로를 되찾는다면 물질차원에서의 구속과 한계에 굴하지 않게 됨을 대중에게 증거하기 위해 스스로를 드러낸 것이지 않은가?  


-수행의 목적이 특이공능 또는 초능력을 획득하기 위해서라는 말이 아니다. 우선순위가 무엇이든 증득한 것은 어떻게든 드러나 보이게 되어있다. 그러니 수행의 과정에서 구속과 한계에 더이상 머물러 있지 않음을 보이는 이들을 예로 든 것이다.-


그들을 통해 우리는 사람이 구속과 한계 속에 휘둘리다 끝내 순환 속에 휩쓸려 어디로든 가고야 마는 그런 속박된 존재만이 아님에 안도할 수 있다. 그들처럼 사람이라면 누구나 진정한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다. 참사람이 되고자 열망하고 그 길을 걸을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걸어야 할 수행의 과정을 우리는 대략적으로 어떠한 과정이라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성경적으로는 창세기 2:09 에 의하면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에덴동산 가운데 함께 있었다. 그러나 창세기 2:16 ~ 2:17 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먹지 말라고 한 것은 선악과이다. 즉, '선악과'를 맛보기 이전까지는 생명나무의 열매는 애초엔 금기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취하고 난 이후에야 아담에게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세기 3:19>고 하셨다. '선악과' 라는 분별을 짓게 만드는 매개체를 거치기 전까지는 영생도 가능했어야 한다는 관점이 무리는 아니란 말이다. 사람이 분별 짓게 되고 나서야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영생을 꺼려하셨고<창 3:22>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창 3:24> 하셨다. 


이런 관점에서 카발라는 세피로트에 생명나무의 길을 더불어 논하며 이것을 멜카바 명상 등의 백마법 체계의 존재 의의라고도 한다. 그런 관점으로 수행에 창세기의 창조와 실락을 대입시켜 보면 분별 짓는 행위(저주,죄,결박과 제한과 한계)를 그치고 다시 에덴(축복,자유,해방)으로 향하는 것이 수행의 의의라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이것은 의식의 변화(변성의식) 즉, 사마디를 수행의 여정에서 관건으로 삼는 라자요가계열에서 주목해야 할 입장이다. 


그리고 인체 자체가 에덴이며 생명나무의 길은 인체에 갖추어져 있으니 그룹들과 화염검으로 상징되는 장애들을 관통해버리고 생명나무의 길을 통과해 결실을 취하여야 한다는 것은 쿤달리니요가계열에서 주목해야 할 관점일 것이다. 성경에서 이에 대한 근거를 찾자면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빌립보서 3:21>을 들 수 있을 것이다. 


仙道에서라면 性을 주력하는 수행이라면 전자를 命을 주력하는 수행이라면 후자를 수행의 의의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부도지의 내용을 대입하면 포도 열매를 통해 五味를 알게 되고 본성을 잃었으니 復本해야 한다는 관점과 같다. 포도 열매는 성경에서의 '선악과'와 마찬가지로 분별을 짓게 하는 매개체이며 다섯가지 맛은 분별 짓는 관성에 빠져 그로 인하여 외부의 대상들에 현혹되어 살고 있음을 상징한다. 즉, 진정한 본성(불가에서 말하는 自性)을 향하지 못하고 있는 인류의 상태를 상징하는 것이다. 복본해야 한다는 것은 그러니 수행의 길이... 자신의 본디 그대로를 되찾는 것(復本)이 인류의 가장 큰 목표라는 것을 상징하는 말인 것이다. 



이러한 스스로를 되찾는 길을 걸어가는 것이 수행이며 그래서 끝내 참사람이 되고야 마는 것... 그것을 위해 바로 우리에게 수행이 필요한 것이다. 




※ 이후 계속 이어가겠지만 신앙인들 중 일부 어떤 분들께서 수행을 성경에서 이르는 금기시하는 것들과 연관지어 생각할까 하는 걱정에 덧붙이는데 수행이란 정의가 아우르는 대개의 수행체계는 하나님께 향하는 기도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기도에 대해서는 맨 마지막에 수행에 대해 결론 지으며 마무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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