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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신화다 - 기독교의 신은 이교도의 신인가
티모시 프리크 & 피터 갠디 지음, 승영조 옮김 / 미지북스 / 2009년 9월
평점 :
원제는 [THE JESUS MYSTERIES]이다. 예수는 신화일까 역사일까 미스테리다라는 의미와 그 당시 존재하던 이교의 가르침과 의례들을 ‘미스테리아’로 칭하면서 논하는 서이기에 중의적인 의미가 담겨있는 제목이다. [예수는 신화다]라는 한국어 제목 자체가 도발적이기에 이후 [예수는 역사다]와 [예수 신화? 예수 실화!] 등에 제목의 저작이 잇따라 출간되기도 한 모양이다. 나로서는 본서가 있다는 사실을 안 시일이 얼마 되지 않아 그런 내용을 알지 못하다가 본서를 검색하다 보니 여러 유사 제목의 책들이 출간되어있는 걸 알게 되었다.
본서는 예수 이전 시대부터 예수의 수태와 탄생과 생애, 죽음과 부활, 그 가르침까지 예수라는 존재의 전부가 예수 탄생 이전부터 존재하던 이교의 신적 존재의 역사와 가르침과 일치한다는 것을 근거로 해서 예수는 실화가 아닌 신화였다는 내용이 근간을 이루는 책이다. 본서를 보면 예수라는 존재의 전승 하나하나의 원본 텍스트를 제시하고 있고 본문에서는 매끄러운 서술을 하기 위해 빠르게 전개하고 있지만 (본문만 390쪽에) 120쪽에 이르는 후주가 존재하는 책으로 그 하나하나의 근거가 무언지 깊이 천착하며 공부하기에도 부족함이 없을 내용이다.
이미 [성서의뿌리 구약편]과 [성서의 뿌리 신약편], [법화경과 신약성서] 등을 통해 예수를 믿는 종교가 그 이전부터 오랜 역사를 통해 존재해온 다른 종교의 내용과 가르침을 표절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과거에도 [제2의 성서 아포크리파], [숨겨진 복음서 영지주의], [이것이 영지주의다], [유다복음서, 진실 혹은 거짓?] 등의 책과 방송을 통해 영지주의와 그 원류가 되는 가르침에 대해 낯설지만은 않았다. 그럼에도 이토록 예수는 표절이며 신화일 뿐이다라는 논지를 전개하는 책이 참 새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마도 긴 세월을 예수는 실존했고 그의 생은 역사이며 실제라고 믿어왔었기에 그런 게 아닌가 싶다.
무엇보다 본서는 예수를 믿는 종교의 전제인 예수 자체가 신화의 짜깁기이지 실체가 없다는 데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교의 초기에서부터 신약성서가 갖춰지며 교세가 안정되기까지의 역사도 서술하고 있다. 예수의 생존 당시 예수와 동시대를 살았던 시대의 문장가들, 학자들은 누구 하나 예수를 언급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현재의 그리스도교도들이 주장하는 예수의 실존 증거라며 내세우는 기록들은 모두 그리스도교의 교세가 확장된 이후 로마의 학자들이 그리스도교의 주장을 그대로 옮겨 적어 남긴 것뿐이라고 한다. 이는 실제로는 총독이었던 적이 없고 로마에서는 그저 사령관이었던 본디오 빌라도를 그리스도교가 로마에서 확산한 이후 그리스도교도들의 주장을 그대로 옮겨 총독으로 기록했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예수 사후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나 본디오 빌라도가 사령관이 아니라 총독으로 기록되었다는 말이다. 예수에 대한 기록도 당시 이적을 보이며 이스라엘 지역에서 선동을 하던 사람들 중 아주 많은 사람들이 예수라는 이름을 사용했지만, 로마 기록에는 그들 중 십자가형을 받은 이가 있었다는 기록이 없다.
처녀 수태, 생존시에 보여주는 이적,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 등은 예수 이전 몇백 년 전부터 존재하던 타종교들에 신적 존재들의 내용을 그리스도교가 그대로 표절했으며, 그 가르침의 내용 역시 타종교 텍스트에서는 미스테리아로 옮기는 영지주의의 원류가 되는 이교의 가르침을 그대로 표절한 것이라는 것이 저자들의 주장이다. 이를테면 원래 복음서 중 하나에서 예수의 부활에 대해 동굴에서 시신이 없어진 것을 막달라 마리아와 몇몇 여성들이 목격했다고 부활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도록 열린 결말로 마무리했었다고 한다. 그러다 후대로 오면서 예수가 부활하고 제자들이 확인하는 과정이 추가되었고 다른 복음서들도 그 복음서를 텍스트로 이야기를 확대 재생산한 것이라고 한다. 본서의 저자들은 예수를 실존했던 인물이 아니라 다른 신화의 내용을 표절하며 창조된 인물로 영지주의자들이 그를 동물적 자아의 죽음과 함께 신적 자아의 각성을 은유하는 존재로 상징하려 한 것과는 다르게 문자주의자들(현재의 기독교를 전승하게 한 초기의 ‘예수는 역사다’ 주의자들)이 그를 무리하게 역사적 인물로 확정하려 갖은 모략을 써서 현재의 기독교가 존재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초기에 베드로의 편지 등의 기록 등에서도 예수의 생애는 전혀 언급되지 않고 그의 죽음만이 회자되고 있다는 것도 저자들이 그들 주장의 근거로 삼고 있다. 그리고 본서의 제목마따나 미스테리아라는 예수 시대 이전부터 존재했다는 영지주의의 원류가 영지주의로 계승된 후 문자주의자들과의 격돌이 있었고, 이 둘은 무수한 종파로 나뉘었는데 콘스탄티누스 시대부터 반강제적으로 이들 전체를 정치적인 목적으로 하나로 통합하려 했다는 것이다. 당시 그리스도교 주교의 기록으로는 ‘내 안에 있는 상대의 교리를 찢어발겼으며 상대 안에 있는 나의 교리를 찢어발겼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교리상 합의될 수 있는 내용조차도 종교회의라는 그 격돌에서 살아남기 위해 파괴되고 난자되고 만 것이라는 말이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남아있는 그리스도교는 살과 피와 신경을 모조리 해체당하고 뼈대만이 남아있는 앙상한 종교라는 말이 된다.
기독교도도 인정하는 내용 중 하나는 바울이 초기 그리스도교가 성립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와 그의 후대에도 이단을 징죄하며 그리스도교의 본체를 확립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고 말이다. 문제는 바울이 상당히 영지주의를 중시했으며 바울이 남겼다는 영지주의 문서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CE 160~220년 생존했던 테르툴리아누스라는 문자주의자의 이단을 비판하는 기록은 후대에도 줄곧 인용되리만치 명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적극적인 문자주의자이며 이단비판자였고 여성차별주의자여서, 당시에 주교와 예식 주도자와 일반교인의 역할을 집회할 때마다 제비뽑아 결정하며 여성과 남성의 무차별까지 모든 방면에서 전혀 차별없이 진행되는 종교모임을 갖던 영지주의자들을, 주교의 권위와 남성우월주의를 유지하는데 적대적으로 보았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문자주의자들과 테르툴리아누스는 영지주의자들 전체를 적으로 간주했다고 한다. 하지만 논란이 될만한 것은 그도 그의 생애 후반기에는 영지주의자로 전향했다는 것이다.
본서는 예수가 실제했느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성립과정과 예수라는 인물이 설정되는 과정까지를 보여주고 있으며 정치적 목적으로 그리스도교가 강제적으로 통합되는 과정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영지주의가 어떤 역할을 했으며 그 영지주의가 그 당시까지 존속했던 타민족의 미스테리아를 표절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저자들의 표현으로는 차용하고 수용한 것이겠지만 말이다. 문자주의자들은 이후 자신들 이전에 예수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과 이적과 똑같은 내용을 보여주는 그 미스테리아와 예수 이전 시대의 전승을 모두 ‘악마의 모방’이라고 부르고 있다. 예수가 태어나서 어떻게 살고 죽을지 알고 있던 악마들이 그 이전에 그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과 이적을 모방해 예수의 이미지를 깎아내려 했다는 것이다. 악마들이 성스러운 대상을 전도시키려던 것이라는 주장인데 이 문자주의자들의 주장을 이 시대에 대입하자면 500년 전 곡을 그대로 모방한 작곡가가 (예전의 아름다운 곡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싶었다고 말하면 될 것을) “내가 이 곡을 작곡하려는 걸 500년 전에 미리 안 악마가 나를 표절한 것이다”라고 앙탈과 억지를 부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말이다. 이런 수준의 억지라면 도둑이 따로 없어 보이고 이걸 믿는 것도 바보가 따로 없는 것 같다.
본서는 한국어 제목을 주지하고 읽으면 예수는 실제했는가 그리스도교는 신앙할 만한 가치가 있는 종교인가라는 데 주의하며 독서하게 되고, 영문 제목에 관심이 꽂히면 미스테리아란 무엇인가 영지주의란 무엇인가에 주의하며 읽게 된다. 나그함마디 문서에 대한 이해와 고대 이교의 종교들에 대한 연구에 비교종교학적 견해가 더해져 집필된 저작이라 크리스찬이 읽게 되면 영지주의에 대한 관심까지 확장될 테고 비신앙인과 무신론자들이 읽는다면 그리스도교의 실상을 알게 된 것 같을 수 있다. 하지만 저자들의 주장이 사실이라 해도 카톨릭과 개신교 역시 그 역사 속 불법과 범죄들과 함께 신앙인들에게 준 마음의 평화 또한 없지 않다고 생각된다.
본서에서 그리스도교 초기에 영지주의자는 구약성서는 신이 인간에게 저지른 범죄를 나열한 목록서라고 했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문제 많은 신이 문제 많은 인간을 창조했고 그렇기에 인간 세계가 문제투성이라고 한다고 해도 그 문제들을 양산하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인류 문명이 발전해 온 것 역시 사실일 것이다. 나도 한때는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단순한 주지만 시키고 인간을 세계로 내보낸 것은 바이러스나 암처럼 증식만 하라는 것과 무엇이 달랐나 싶었지만, 인간이 성장하고 성숙하고 성취하고 의미를 찾으라고 했다고 한다 해도 그 모든 의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존재 자체에서 만끽하는 자체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생육하고 번성하는 과정(살아가는 과정)에서 인간은 살아있음을 만끽할 수도 있었지 않은가 생각이 이르니 일자(신)가 문제가 많다는 생각을 접게 되었다. 문제 많은 신이라는 관점도 인간이 자신의 문제 많음을 신에게 투영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저자들의 주장으로는 구약과 신약의 연결고리를 지은 것은 그리스도교 초기의 문자주의자들이 예수의 존재함의 가치를 신앙인들이 수긍하게 하기 위해 구약을 이용할 필요와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문제 많은 시대에 문제 많아 보이던 신의 이미지가 이용되었던 것이 구약이라면 그 신을 빛이자 사랑으로 진화시킨 것이 미스테리아와 영지주의와 예수라는 상징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본서는 예수가 실제했느냐 신화였느냐에 관한 의문에 대답을 얻기 위해 읽기보다는 무엇이 인간과 일자(신)를 이어주어 왔고 이어줄 수 있는지를 궁금해하며 읽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된다. 사실 예수의 실존을 믿는다고 바보라기 보다는 예수라는 상징이 이미 바보였던 인간들을 지혜의 길로 인도해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 책은 신앙인에게도 신앙이 강화되건 무화되건 간에 읽어볼 가치는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