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면 날마다가 아니라 해마다 한 번씩 찾아오는 푸코 읽(다 말)기는 <광기의 역사>를 읽다 말고 몇 달 전에 구매한 프레데릭 그로의 <미셸 푸코>로 재선정되었는데, 이 문장이 재밌어서 가져와 본다.
“(41) 고전주의 시대가 감금이라는 외적인 경계를 통해서 광기와 이성의 분리를 확립했다면, 근대의 심리학 기술은 광기와 이성의 분리를 광인과 그자신 사이의 내적 거리로 다시 전환하려고 한다. 광인은 더 이상 도시의 가장자리로 내쫓긴 배제된 자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에 죄의식을 느껴 그 자신으로부터 소외되는 존재이다. 결국 광인은 자신의 광기를 과오로 느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이해한 바를 거칠게 풀면 근대(푸코가 설정한 ‘근대’는 18세기 말~19세기 초로 대략 프랑스 혁명 전후부터의 시기에 해당한다. 그는 유럽의 역사에 두 번의 단절이 있었다고 말하며 *전고전주의(단절)/고전주의(단절)/근대*로 나름의 시기 규정을 했다. 약 1800년 경에 시작된 푸코의 근대는 150년이 지난 1950년에 끝난다. 혹은 끝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말하는 ‘인간—지식의 주체 겸 대상으로서의 혹은 근대의 발명품으로서의—의 죽음’이다. 내 뇌피셜로 풀면 서.백.남의 죽음…ㅋㅋㅋ)의 ‘광기’는 고전주의 시대의 ‘감금’이 아닌 ‘심리학 기술’(혹은 정신의학 기술)의 대상이 된다는 건데… 정신 이상자는 결국 자신의 존재의 죄의식 혹은 자신의 비이성을 ‘과오’로 느껴야 한다는 것에서 눈이 멈췄다. 그러니까 자책하는 주체란 치료되어야 하는 광인에 가까운 존재인가? (나의 이 질문에는 두 가지의 아이러니가 교차하는 데, 그걸 써보고 싶은 데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도전)
푸코가 죽여버린(ㅋ) 인간도 근대도 아직 죽지 않고 살아서 잘 돌아다니고 있고, 미대륙을 풍미하고 한반도에 이제사 도착한 심리학은 세상 모든 ‘거리 두기’를 부제목 삼아 베셀이 되고, 수 십명의 정신과 의사들이 천만 뷰를 기록하는 유튜브서 신경과학/뇌과학을 통해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 다를 외치고 있는 가운데… 나는 푸코를 읽다 말고 이런 질문이 생기는 거다. 응? 나에게 철학이야말로 정신병 같은데? 현대사회에서 철학함이야 말로 광기 아닌가요? ㅋㅋㅋㅋ
일할 때의 내가 익숙하고 좋다. 좀 나이스 한 사람인 것 같고 어떤 이물감이 없이 편하다. 하지만 삶에서 일이 전부는 아니다. 그렇게 될 수도 없거니와 되고 싶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난 일을 하지 않았을 때, 어려움을 겪었다. 일 못하는 나를 견디지 못했다. 내가 제 발로 처음 상담실에 찾아갔던 건 그런 이유였다. 두번 째 방문도 그랬다. 요 얼마동안의 시간만 한정해 놓고 쓰자면, 어떻게든 비집고 사회에서 나의 자리를 만들어냈다고 느꼈을 때, 나는 나를 견디기가 좀 괜찮아졌다. 그 자리가 무슨 자리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 자리가 매우 취약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불안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불안을 쫓아 내기 위해서 상담을 다시 시작했는 데, 해답은 나의 불안을 더 잘 이해하고 느껴보는 것이었다. 일하지 않는 시간에 나를 돌아보고 나를 돌보고 책을 읽거(자기이해)나 읽지 않는(불안 회피용)다. 그렇게 불안을 견디는 방법을 습득하는 중이다. 아마 나의 불안은 섞여있을 거다. 상태가 나빠도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성인으로서 1인분의 몫을 해야 한다는 뭐 그런 위치로서의 불안과 기질적으로 민감한 실존적 불안. 대충 꿰서 설명해 본다면 그렇다. 물론 이게 전부는 아니다.
책을 읽을 때의 나는 심각하다(물론 심각에서 오는 재미도 있다). 일할 때의 나는 편하다(하지만 노동은 노동이라 하기 싫을 때도 있다). 이외에도 나는 퉁쳐서 말이 좋아 서른한 개의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다(당분간 유튜버는 잊기로 함ㅋㅋㅋ 사실 이역시 불안을 방어하고자 만든 분주함이었다ᄏᄏ). 어느 순간부터 내가 누군지는 나는 정말 몰라져버렸고, 바쁘다 바빠 현대인의 삶, 그것의 통합을 억지로 하려는 건 포기했다. 그래도 태어나 버렸으니 건강하고 명랑하게 사는 것은 나의 소망이다.
소망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건강하고 명랑하게‘만’살려고 하는 것이 나의 문제라는 걸 배우게 되었다. (정희진 선생님이 팟캐스트에서 온 사회가 너무 조증이라며 멜랑꼴리가 필요하다 하셨다. 그러니까 나는 조증형인간이었던…) 부정적인 감정을 비롯해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이면을 ‘없애려고’ 할 때, 삶이, 몸이 부작용을 일으키는 거다. 그러니까 불안을 ‘견뎌야’ 하는 거라고, 의미 없음을 견뎌야 하는 거라고, 슬프고 아프고 유약하고 못돼 처먹었고 화나고 허무하고 무기력하고 그런 다양한 희로애락을 다… 어떤 걸 박멸 시킬 수는 없는 거야. 어떤 걸 안 느끼려고 하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하는 거야.라는 뭐. 신박하게도 내 경우 나의 몸이 그걸 알려준다. (조증형 인간으로 살아온 벌이라고 느낌…ㅋㅋㅋ) 물론 여기까지 알아차리기는 쉽지가 않았고… 숱한 수련의 결과로 이제는 일하지 않을 때/ 일이 없을 때/ 일을 못할 때/ 일과 일 사이에 쉴 때 오늘처럼 <미셸 푸코>같은 책 따위를 읽고 있는 나 자신이 되어 버렸다요.
난 찾아낸 것 같다. ‘나이스하지 않은 나’를 나이스하게 껴안을 수 있는 방법을. 나는 내가 어딘가 이상한데, 이상한 나를 미워하고 싶지 않아서,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고, 그러다 보면 매우 매우 심각해지고, 조증과는 또 다른 어떤 멜랑꼴리의 상태에 돌입하며, 나 자신이 세상이 반기지 않는 ‘환자’의 상태임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런 시선으로 나를 보면, 나는 그런 상태인 나를 미워하게 된다. 나는 나를 다시는 미워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그리고, 그러므로, 푸코를 읽으면서 ‘치료’되기 싫은 마음을 합리화한다. 내가 나 자신으로부터 소외시키고 싶었던 어떤 마음들을 ‘대상화’ 하는 것이—근대의 발명품이라는 것. 그런 시각 따위 내 시각이 아니야! 그래서 나는 결국엔 나의 멜랑꼴리까지도 좋아하게 된다(될까?돼라,되기를).
내가 즐겨 읽는 뇌과학 책에서 이런 말을 읽은 적이 있다. “긍정적이고 도덕적인 자아상을 보존하면 정신뿐만 아니라 신체적으로도 건강해진다”고. 나는 내가 어떻게 해야 건강해지는지 안다. 나는 내가 언제 가장 스스로를 괜찮게 여기는지도 안다. 제때에 밥을 먹고, 비타민을 챙겨 먹고, 청소기를 돌리고, 일을 하고, 오늘 할 일과 한 일 목록을 지우고, 운동을 하고, 씻고 잠든다. 가끔 술 한잔하면서 가족이나 친구들이랑 사는 이야기도 한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긍정적이고 도덕적인 자아상을 보존”할 수 있어야 했는데… 도덕이 왜 도덕인지…를 묻는 것까지가 내 도덕이었다는 슬픈 이야기. 그러니까 요즘과 같은 미디어의 환경에서는 <피상적인 긍정과 피상적인 도덕>으론 타고 나기를 꼿꼿한 나의 큰 <긍정/도덕 그릇>이 양에 차지 않았던 거시다. ㅋㅋㅋㅋㅋㅋ 긍정부정을 초월한 긍정과 깊디 깊은 도덕을 알고자 한 대가로 과계몽이 되어 어떻게 살아야 할지 하나도 모르는 상태가 되어벌임. 이렇게 된 김에 이렇게 살기로 하니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짐.
그리하여 현시점의 나는 책을 읽고 일기를 쓰면서 내가 나를 보는 시선을 조금씩 조정해나가고 내가 얻게 된 시선을 글로 써둘 때(물론 이 과정은 대단히 심각하며, 가끔은 지치고, 나를 흑화 시킨…), 그리고 나처럼 자신을 공부하고 있는 똑똑한 사람들이 이미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기쁨을 느끼고 뿌듯하다. 이것은 예에 없던 페르소나 하나를 만들어내는 혹독한(?) 과정이 있었고, 신자유주의(마리 루티의 <남근선망~>은 신자유주의 실용주의 사회의 4가지 기둥을 ‘성과, 생산성, 자기 계발, 긍정’으로 정리해 준다.)의 입장에서는 하나도 생산적이지 않았기 땜에 그런 나를 만드는 과정에서 너 왤케 유난 떠냐는 내 안의 반지성주의 목소리ㅋㅋㅋ와 좀 많이 싸워야 했다.
음… 시간이 벌써 이렇케… 글을 정리하자.
이건 미래의 푸코를 읽을 나를 위해 써두는 독후감이니까. 지금까지 내가 읽어서 이해한 부분은.
근대가 발명한 ‘광기’는 인간을 ‘치료 대상’으로 포획하는 장치이다. 그것은 과거처럼 병원이나 시설에 ‘감금’시키는 형태로 작동하지(하기도한다) 않는다. 자신의 ‘광기’를 ‘과오’로 느껴야 한다. 난 이 말에서 잠시 멈추고 곰곰해졌다. 그러니까 내 안의 ‘미친 것 같음’을 ‘과오’로 느끼는 것. 그리하여 나 자신을 ‘치료의 대상’으로 느끼는 것. 그 기분. 신경정신과를 방문해서 약을 먹고, 시간과 비용을 들여 카운슬링을 받으면 해결이 될까. 어느 정도까지는 되겠지만… 그래서 결국 ‘치료가 되면’ 확실한 ‘근대 인간’이 되는 건가? 그러면 되나? 될 수도 있지. 문제는. 근대가 끝났다는 거다. 적어도 푸코에 의하면 그렇다. ㅋㅋㅋㅋㅋ 그런데 푸코는 누구냐. 근대인이다. 서양 백인 유럽 지식인 남성. (그가 좀 멋진 지점은 자기가 근대인이라는 걸 아는 근대인이라는 것임) 여기서 질문은 또 근대/탈근대/전근대 어쩌고로 가기엔 내 공부가 부족하다. 정신차리고 지금 할 수 있는 말을 정리하자. 나는 근대인이었던 적도 없고, 근대인일 수도 없다. 근대인이 될 필요? 없다. (물론 내가 쓰는 언어는 근대라는 용어부터 공부를 해야…하는… 자기가 근대인인 걸 아는 근대인 푸코를 통해 얻어낸 언어이지만…)
결론은 나는 가끔 내게 찾아오는 나의 ‘미친 것 같음’, ‘미칠 것 같음’의 대부분이 ‘근대 혹은 신자유주의적인 인간에 들어맞지 않는 인간이라는 데서 온 불안(제3세계/신자유주의에 먹혀버린 한반도에서/노동자로의 위치가 불안한/결혼도 안 한/재생산력을 쓸 생각은 없이 낡아가며/노동자로서의 생산력도 점점 줄어들 것이 자명한 늙어가는/ 부동산 없는… 여성인데… 정신 못 차리고 쓰잘데 없이 책을 읽어버림)임’을 안다. 그래서? ㅋㅋㅋㅋ 별 수 없다. 광인이라도 안되려면 ‘과오’로 느끼지 않아야지. 즉, 근대인이 아님을 자책하지 않는다. 어차피 되고 싶어도 못 됨. 아니니깐요~
“(43) 광기가 말하는 것은 인간 능력의 파탄, 붕괴된 언어의 무질서, 손상된 행동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광기가 인간의 얼굴을 획득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의 어려운 사고와 마주해야 한다. 푸코는 우리에게 광기에 대한 이러한 역사적 태도가 정확히 인간이 자기 자신을 진실로서 파악하도록, 자기 자신을 과학적 대상으로 간주하도록 해주었다고 말하려 한다. 광기에 대한 인간학적 경험으로부터 인간에 대한 과학[인간과학]이 성립되기 시작한 것이다. (…) 그러므로 광기를 설명하고 광기의 궁극적인 의미를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심리학이 아니라 오히려 광기의 근대적 경험이며, 그것이 심리학의 역사적 출현을 위한 조건이 된다.”
후… 3시간 동안 읽었는데 50페이지 읽었다… 흠하하. 문제는 푸코의 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푸코의 입문서여… 이 상태로는 푸코 읽는 데 20년이 걸릴 것 같아 10년으로 단축시키기 위해 푸코 강의를 등록했다!ㅋㅋㅋ 방구석 히키코모리의 최대 결단!!이고 이번 주부터 시작임ㅋㅋ 공부한 거 대략 감상문 올리는 게 일단 나으 계획인데… 바쁘면 못할지도요ㅋㅋㅋ?!
무튼 여러분 자책하지 마세요. 우린 어차피 근대인이 못됩니다. 한국인이자나여
광인은 더 이상 도시의 가장자리로 내쫓긴 배제된 자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에 죄의식을 느껴 그 자신으로부터 소외되는 존재이다. 결국 광인은 자신의 광기를 과오로 느껴야 하는 것이다. -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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