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기쁨인 똑똑한 여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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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내 몸을 지나간 후 ㅣ 정희진의 글쓰기 4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2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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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혼 여성이 페미니스트일때 내적 갈등이 더 심할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도 힘든 점이고요..비혼 비출산이 현실적으로 가장 개인에게 깔끔한 선택이지만 출산이라는게 여성의 의무만이 아니라 하나의 권리이자 특권일 수도 있는데.. 어떻게 하면 특권이 될 수 있을까요? 그게 하나의 과제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라고 수하님이 말씀하셨고.
“버릴 수 없고, 버리고 싶지 않은 내 삶의 조각들을 다 부정하는 게, 부정하라고 말하는 게 페미니즘은 아니라고 느껴요. 저는요. 하지만 자주 그렇게 ‘들리기는’해요.”
라고 단발머리님이 말씀하셨다. (https://blog.aladin.co.kr/selfsearch/13917094)
나는 여기에 *인식론적 특권*을 이야기 하며 부정과 분열을 쓰라는 종류의 댓글을 달아 놓았다.(https://blog.aladin.co.kr/jyang0202/13919676) (https://blog.aladin.co.kr/jyang0202/13918760)
그렇다. 오늘의 글감은 이거다. 50살 쟝쟝, 보고 있나? 너는 지금 어젯 저녁 (타발적 금주) 한 달을 종료하고 신나게 소맥을 마셨고 ㅋㅋ 동생 남친 소개 받고 동생이 그와 결혼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며 ㅋㅋㅋㅋ(니 인생 아니라고 그렇게 막 생각해도 되는 거냐?) 늦잠 자고 일어나서 아, 오늘 어떻게 가성비 넘치게 쉬지? 궁리하며 글은 노트에 세줄 ‘만’ 쓰자. 라고 먹었던 마음을 손바닥 처럼 뒤집으며 나의 비타(🫢)와 단발머리님 수하님한테 하고 싶은 말을 써보도록 하자. (명절 노동 고생하셨어요 ㅜㅜ)
1.
나는 나의 모순과 분열이 나에게 글을 쓰게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없으면 책을 읽을 필요도 글을 쓸 필요도 안생겼을 것 같다. 일상에서는 모순적인 인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인간은 꽤나 능숙하게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종족이며, 그것은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서 매일매일 전쟁을 치르듯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더욱 자주 목격되는 현상이라는 사실은 나를 자주 상처받게 한다. 어쨌든 ‘그럴 수 밖에 없는’ 인간에 대해 꽤나 붙잡고 생각해 보았고, 어쩌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궁금한 것은 그들의 일상에서 발생하는 모순에 대한 개인 특유의 생존전략(해결하는 방식)이다.
나는 그게 잘 안돼서 힘든데 어떻게 하세요?? 그러면 괜찮은 사람들은 곧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많은 중년 남자들은 허세에 가득차서 하나마나 한 소리를 곧잘 대답한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가장 생각을 많이 한 것 처럼 쉽게 재빨리 자기 생각을 말하는 것… 그것이야 말로 한국사회의 모순 아닌가?ㅋㅋㅋㅋ 응? 여기까지 쓰고 나니 그럼 나는? 하고 자문하게 된다. 물론 나는 아직은 미미님만 알고 있는 천재니까 재빠른 버전과 천천한 버전 둘다 가능하다, 푸하하하.
지금의 나에게 분열과 모순을 해결까지는 아니더라도 *인정*하는 시선이 *가까스로* 생겼다면 그것의 8할 정도는 페미니즘 공부에 빚지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페미니스트로 나를 정체화하냐? 라고 묻는다면 분명 그렇지만… 나는 페미니스트 보다는 글을 읽고 쓰는 사람(그걸 공부라고 말하기로 했다)으로 나를 더 정체화하고 싶다. 물론 나의 공부는 학위도 없고, 증명서도 없고, 돈도 안된다. 되려 나의 돈을 쓰게 하고, 없는 체력을 갉아먹고(ㅋㅋ), 깔끔했으면 좋겠을 방을 무거운 책 더미로 어질러 놓고, 친구들과 멀어지게 하며, 시시때때로 나를 많이 많이 많이 마아아않이 아프게 했지만, 그렇지만 그 결과로 나는 나를 좀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미워서 나를 미워하던 짓들을 이제는 조금 많이 멈추게 되었다.
아마 나는 결혼 제도에 안착하지 못할 것이다. 아마 나는 ‘종’으로서의 여성을 포기하고 재생산을 하지 않게될 것이고. 그건 페미니즘 때문이 아니다. 부끄럽지만 그건 페미니즘적 실천이 아니다. (그래서 기혼 유자녀 여성이 ‘부역자’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건가.) 내가 이렇게 지내는 건 내가 유달리 강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나는 적응하지 못했다.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만약 됐으면 했을 것이다. 지금도 된다면 하고 싶…?지는 않은 것 같다. 이제는 딱 그 만큼의 나를 안다. 또 미래의 나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그것이 만약에 페미니즘을 위한 실천이었다면 나는 나를 미워하게 되어 괴로웠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쩌.다.보.니. 이렇게 살고 있게 된 것이고, 이렇게 사는 삶을 뭐라고 하는 시선에 주눅 들기 싫을 뿐이다. 어제도 나는 동생들에게 타발적 4B라고 스스로를 놀렸다. 안하는 게 아니라 어쩌다 보니 안하게 된거야. 그런데 안하다보니까 삶이 너무 깔끔해. 부딪치는 게 없어. 간단하고 컴팩트해. 그러므로 어찌보면 인식론 적 혼란이 없는 것이다. 어찌 보면 그것들 말고도 신경써야 하는 것들이 넘쳐 나기 때문일 거고.
그런데 (동생네 집 벽에 걸린 영화 엽서들을 보면서) 미친 <헤어질 결심>이 미친 영화가 나에게 사랑이 무엇인지를 묻게 했어😭 이게 인생이다라고 보여주는 것 같은 거야. 내가 고독하고 혼자를 너무도 편하게 느끼고 있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는 내가 고독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시시때때로 외로운 건 내가 *감당*하면 된다 라고 생각했는 데, 아닐 수도 있는 거야. 아니게 되는게 맞는 거지. 그건 내가 원하는 대로 내 인생을 설계하고 싶다는 것 밖에 안돼. 또 다른 의미로 현실을 제대로 직면하지 않은 거야, 난.
그러니까 붕괴, 그거라니까. 나는 이미 붕괴되어 있고, 이제 조금은 복구되었으므로, 계속해서 이마저도의 붕괴를 염두해두고 있어야 하니까 큰코다치지 않게 미리미리 예방 차원에서. 그래, 사랑을 공부하자. 언니들이 말했어. 사랑은 불가항력. 물론 그것은 쓰려거든 연필로 쓸 수도 있지만, 머리로도 하는 것이지만(ㅋㅋㅋ), 그렇다고 안할 수는 없으니 미리미리 공부해서 나쁠 것은 없지. 그렇지만 사랑 그거 열심히 공부해도 결국 공부다 끝냈는 데 못할 수도 있음. (아놔 ㅋㅋㅋ 이렇게 여기서 글 끝내고 싶네?) 음 나는 노래를 들으면서 가슴을 찢어버리는 기술도 배웠는 데 사랑을 못할 수도 있겠…아니 나 지금 또 뭐쓰고 있지?ㅋㅋㅋㅋㅋㅋ
여튼 처음으로 다시 돌아오자. 동생이 정식으로 소개해 준 동생 남친을 만나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대체로 내가 동생들에게 저지른 나쁜 짓 들이었다… 이를 테면 중딩 동생을 데리고 <올드보이>를 보러 갔다던가 초딩 동생에게 <지구를 지켜라>를 보여줘서 트라우마를… 안겨줬다든가… 언니 고딩 주제에 왜 그렇게 다크한 영화를 많이 본거야? 그런 언니여서 미안… 내 안에 해소되지 않은 폭력의 욕구가 있었던가봉가… 하지만 생각해줘. 동시대의 영화중엔 <달마야 놀자> 같은 게 있어. <늑대의 유혹> 이런 거. 내 안의 어두움은 그런 상업 영화들로 충족되지 않았단 말이다…ㅋㅋㅋ 그렇게 어렸을 때 부터 내가 너희를 단련시켜줬기 때문에 넌 <미드소마>를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이제 나는 못본다… 4B로 사는 거 너무 간단하고 시원하고 좋은 데, 딱하나 안좋은 거를 꼽으면 나홍진이나 아리 애스터 못 봄. 근데 뭐 안봐도 됨. ㅋㅋㅋㅋㅋㅋ 은 아니고. 여차저차 하다보니 나는 처음 만난 동생 남자 친구에게 “메일 게이즈(Male Gaze)”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번에 메일 게이즈 때문에 엄청 싸웠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해서 가까운 시일 안에 동생 남친은 내 동생과 헤어지게 된다고…(씨익)
2.
나는 왜 또 삼천포로 빠지는 글을 쓰고 있는가 정신 차려. 나는 원래 인식론적 특권에 대해서 쓰려고 했다. 이렇게 길을 잃으면? 인용하려던 문장을 가져오자.ㅋㅋㅋㅋ
“(45) 언어는 언제나 현실보다 늦게 당도한다. 언어는 현실을 가시화하지 못한다. 우리의 현재가 바로 인식된다면, 이미 가부장제 사회가 아니다. 역사상 그 어느 사회에서도 지배적 언어(인식)는 단 한 번도 약자의 편이었던 적이 없다. 가부장제는 인류 문명의 기반이었지만, 현대 페미니즘은 1949년에 출간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을 기준으로 해서 백 년이 안되었고 한국 사회에서는 30~40여년 되었다. 그 시간도 *법 제정과 젠더 주류화라는 공적 영역을 지배하고 있는 ‘남성의 철학’ 자유주의의 자장*안에서 였다.”
희진샘은 천재다. 그가 당대의 여성 지식인으로서 스스로 취한 페미니즘 마저도 *공적 영역&자유주의 자장* 안이었음을 자백하신다. ㅋㅋㅋㅋ (아님 말고ㅋㅋ) 샘 진짜 쌤. 진짜. 쌤. 사랑해요. 내가 쌤 좋아하는 거 알죠?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이별… 그것이 순리… (아 주접 그만 떨자)…
그렇다. 언어는 현실보다 늦게 당도하고, 사회적 약자인 나의 언어는 세상에 없다. 남성들의 언어와 시선에서 벗어나오기 위한 페미니즘을 열심히 읽어도, 그 페미니즘이 당신에게 쾌감이 느껴지는 언어를 제공해 줄 수 있을 지는 모르겠으나, 그건 당신이 쓴 당신 자신의 언어는 아니다. (물론 나 자신만의 투명한 언어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아무도 쓰지 않은 것. 그것이 곧 자원이다. 현 시점의 나는 그것이 명백히 *자원*임을 안다. 그냥 자원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아무도 해석해 주지 않은 가난하고 뒤죽박죽인 나의 몸을 통과하고 있는 지금 나의 삶을 써보는 것. 그리고 그것을 미리 살고 쓴 여자들의 글을 읽는 것. 거기에 내 삶을 견주어 보면서 여성의 몸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글을 이어가보며 나름의 연대를 도모하는 것. “(42) 사회적 약자가 약자인 이유 중 하나는, 먼저 경험한 선대의 역사와 맥락을 모르고 오류를 반복한다는 것이다. 여성주의자도 예외는 아니어서 늘 ‘내가 처음’이라고 착각하는 이들이 많다.” 언어는 현실보다 늦게 당도하므로… 가장 가까운 나의 현실(버지니아 울프 언니는 플랫폼 자본주의를 살아보지 못하셨음)을 언어화 하기. 어딘가에 나와 같은 물음표를 지닌 여성들이 있다고 믿으면서.
간단하고 명료하고 깔끔한 글쓰기가 좋을 수도 있다. 아, 팔리는 글은 그런 글들이니까 좋은 게 맞다. 그런데 그건 세상에 좋은 거고. 내게 좋은 글은 내가 사랑하는 글들은… 그런 글들이 아녔다. 나는 그런 글 들을 읽으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조금씩 알게 되었다. 갈등, 삶에 대한 부정, 불안함, 불편함, 명확하지 않음, 초조함, 붕괴- 내가 가진 생각과 / 나의 몸과 / 나의 일상 사이에서 오는 분열. 아름답지 않다는 것. 삶이 고통으로 꽉 차 있다는 것. 아프지 않은 삶이나 사랑은 없다는 것. 그러나 삶이 없지도 않다는 것. 삶을 없앨 수는 없다는 것. 가끔의 안녕, 찰나의 행복, 곱씹어야 하는 안정, 그럼에도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다짐, 매일의 노동과 매일의 수치와 매일의 꿋꿋함. (그런데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건가? 라고 생각하면 역시 태어나지 않는 것이 맞다)을 읽을 때 나는 좀 움직여졌다. 내 몸을 잘 움직여서 하루를 움직여서 잘 살아낼 수 있었다. 여튼 나는 그런 글들을 좋아하고…
다행스럽게도 나같은 평범한 여성도 글을 읽고, 써볼 수 있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태어나서 살게 되었다. (평범한 사람에게 가장 가성비 좋은 도구는 역시 글이다. 글은 누구나 읽고 쓸 수 있다.)
“(43) 나를 비롯해 여성도, 여성주의자도 젠더에 대해 알기 어렵다. 여성주의는 *과정의 사유*다 왜냐하면 여성주의는 *그 자체로 모순*인 사유이기 때문에 매 순간 공부하지 않으면 안된다. 도대체 누가 여성이며, 그것은 누가 정하는가. 현실이 계급 문제로만 이루어져있지 않듯, 젠더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 남녀 간 권력관계로 ‘보이는’ 젠더는, *여성들 간의 차이와 남성들 간의 차이*를 매개로 하여 작동한다.
이러한 여성주의의 모순과 복잡함은 *사상의 한계가 아니라 자원*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주의적 사고 방식은 가성비가 높은 공부이며 빼어난 인식론일 수 밖에 없다. 여성주의는 다른 사유처럼 공부해야만 획득할 수 있는 어려운 인식이다.”
모순, 나의 모순. 나의 모순은 나도 모순이면서 모순을 잘 인정하지 않는 것. 나의 모순이 보이면 그걸 해결하고 싶어하는 것. 내 시선이 남의 모순을 꿰뚫어 버리면 괴로워하는 것. 그래서 나를 싫어/미워하는 것? 그러지 않으려면… 페미니즘을 공부해야 했다. 그것은 어떤 부분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게 했고 그것이 이상한 게 아니라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했다.
애나 번스의 <밀크맨>에 나온다. 하늘은 파랗다. 그런데 하늘은 파랗지만은 않다. 까맣고 회색이고 분홍색이고 주황색이고 섞여있다. 그런데 하늘을 파랗다고 한다. 파랗지만은 않아요. 너는 잘못되었어 파랗다고 말해. 하지만 안다. 우리는. 하늘이 파랗지만은 않다는 걸. 어떤 사람들은 하늘이 파랗다는 ‘말’에 압도 당해서 파랗지 않은 하늘을 파랗다고 생각하고, 다른 색깔들을 인정하지 않게 되어 버린다. 더 무서운 것은 그래서 파랗지 않음이 확연히 드러나는 황혼녘의 아름다운 하늘을 보지 않기도 한다. … 그것을 죄책감 없이 아름답게 바로 볼 수 있기 까지. … 내게 필요한 것은 공부였는 데, 그 공부를 멈추지 않는 거였는 데, 그게 살려고 그랬던 거구나.라고 지금은 좀 말해 볼 수 있다.
3.
“(49) 우리는 공부해야 한다. 공부하지 않는 한 해방은 없다. 여기서 공부의 첫단계는 이론을 적용하지 말고 ‘지금 여기 자신’의 위치에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훈련이다.”
선생님은 내가 하는 것들을 공부라고 말씀주셨고, 내가 하는 글쓰기를 훈련이라고 말해주셨다. 나는 이 삶(읽고 쓰는 것)을 계속 할지 말지 계속 흔들렸고 지금도 흔들린다. 그렇지만 정말 아무것도 아닌, 정말 아무에게도 아무것도 아닌, (물론 홉스에겐 집사 ㅋㅋㅋ)인 내가 세상에 필요한 존재라고. 니가 쓰는 거 세상에 필요한 글이라고 말해주시는 것 같아서 나는 이 책을 ‘공부하면서’ ‘기뻤’다. 그리고 나의 기쁨을 ‘때때로 그만 읽고’ 싶어하는 언니들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나는 그 마음을 이해합니다. 그만 읽고 싶은 마음) 나는 기쁜데, 그대들도 기뻤으면 좋겠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를 똑바로 보는 것이라고. 인류가 발전시켜 놓은 (이라고 망쳐놓은 이라고 읽는다) 현 시대의 모든 기술과 권력들이 무자비하게 통과하고 있는 자기 자신의 몸으로 자신의 문제를 *똑똑히 똑바로* 보는 것. 남자들이 (실천도 못할 꺼면서 가르치고 싶어서 드릉드릉) 쓰는 당위의 글(하나마나한 소리)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세상과 견주는 물음표의 글을 계속해서 써나가는 것. 그런 식의 존재 증명. 그런 식의 삶. 똑똑한. 이미 그렇게 살고 계시는 분들을 발견하게 된 나의 안목이 *감사*한데 나만 기쁘고 나만 감사할 순 없지!!! ㅋㅋㅋ
누구나 정치인이, 성공한 기업인이, 떡상한 유튜버가, 돈버는 지식인이, 연예인이, 셀럽이 될 수는 없다. 세상은 어려워져 이제는 공무원도 회사원도 되기 어려운 시절이 되었다. 나의 경우 주부나 엄마가 되지 못한 것에 가깝다. 내 인생에 답이 없는 데 남의 인생에 감놔라 배놔라 할 수는 없다. 아무튼 답은 없다. 답이 있었으면 인류가 왜 이 모냥이겄어. 그렇다고 답 없네~ 하고 죽어버릴 수는 없으니까 나는 내가 사는 방식을 공유해보는 거다. 읽고 쓰고 살기. 다만 쓰는 것이 어려운 종류의 것임을 이제 좀 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매일 쓰세요. 자주 쓰세요. 공부하세요. 읽으세요. 또 공부하세요. 읽으세요. 우리가 처한 이 언어없는 상황이 *인식론적 특권*인데, 수하님 말대로 그것이 정말 *특권*이 되게 하고 싶다면, 그런 세상을 정말 바란다면. 쓰세요. 써서 올리세요. 쓰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쓰지 않으면 모르니까 쓰세요. 하하, 나 여기서 오래오래 알라딘 할게요.
4.
(그런데 이 시점에서… 고민이 되는 것은….) 나는 여성의 노동에 기대지 않았으면 글을 쓰지 못했을 여성을 담아내지 못하면서도 감히 여성에 대해서 쓴 ㅋㅋ 남자들의 문학(철학..정치학...과학...생물학...다)이 싫고… 그런 문학을 여성 독자들이 계속해서 사주고 팔아줬다는 사실에 분개하며, 그래도 남자 치고는 잘쓰는 사람들이 있긴 하니깐, 남자가 썼으면 엄청 음청 완존 잘쓴 글만 인정해줄 건데ㅋㅋㅋㅋ(아 필립로스 너를 어떡하니ㅋㅋㅋㅋㅋ)
이제 막 쓰기 시작한 여자들 글은 완전 편애 할 것이라고 맘 먹었는 데… 인간. 어쩔 수 없는 것이... ‘공부’ 안한 냄새 나는 (출판 된) 글은 여자가 썼다고 해도 이제 좀 싫다. 기후위기 시대의 나무 낭비 아닌가. 전자책으로 냅시다. 물론 여기서의 공부란 정희진이 말하는 공부인데… 다행이야. 정말, 나에겐 플랫폼 자본주의ㅋㅋㅋ가 있어서 나무 낭비 안하고 이딴 누더기 같은 글을 올려볼 수 있군ㅋㅋㅋㅋㅋㅋㅋ
그래도 이번 글은 누군가에게 용기가 되면 좋겠다. 계속 읽기고 쓰기를 멈추지 않는 용기?!
인식론적 특권을 과학기술의 발달로 공략(?)하는 나는 2022년의 신자유주의 페미다.
구원은 없다. 공부만 있다. 내가 하는 걸 공부로 인정 하든 말든 나는 공부한다. 그렇다. 난 정희진의 저주에 걸린 사람. 마법에 풀리려면 그가 읽은 책들을 더 처먹는 수 밖에 없다. 50살의 나여, 보고 있냐? 이불킥하고 싶겠지만 어쩔 수 없어. 여기까지가 너의 최선이었다.
*덧붙임*
나는 기혼 유자녀 페미니스트 여성들의 몸으로 산 글들이 분명히 더 필요해질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너무 필요하지만. 잘 쓴 글 말고 날 것의 글. 쓰다 보면 더 잘 써지게 되겠고. 분열과 모순이 글쓰기와 공부의 원동력이자 자원이라면, 그들 보다 더 공부 잘하고 똑똑해질 사람이 어디있단 말인가. 사실 4B해보니까 분열이 별로 없어서 페미니즘 공부할 의욕이 안 생겨...(응? 거짓말임) ㅋㅋㅋ 농담임.. 농담임둥!!!!
세상을 바꾸는 전투적 페미니스트도 필요하지만, 남성들이 쓴 모성이 아니라 여성 자신이 쓴 모성도 필요한 법이고, 페미니즘의 인식론없이 쓰는 모성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마나 한 소리가 될 것이기 때문에....(그리고 이 종이 유지된다면 반드시 재생산한 엄마가 있기 때문에) 열공하면서 자기 삶을 써주세요. 언냐들. ㅋㅋ 태업은 필수, 파업은 선택! 아아아아모르파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