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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 - 융합과 횡단의 글쓰기 ㅣ 정희진의 글쓰기 5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2년 7월
평점 :
빠리 거리의 지린내를 잔뜩 머리에 묻혀 온 그날 밤
방음이 하나도 되지 않는 에어컨 없는 낡은 호텔의 객실에서
우리는 아주 잠깐
몸으로 쓰는 글에 대해 이야기 나누었다.
꼭 페미니즘여서가 아니라 감정을 느끼고 그것을 쓰는 사람들은,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쓰지 않을 수 없는 몸을 가지게 되어버린 사람들은, 조금 더 애를 써서 자신을 돌보아야 한다고. 정성을 들여서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긍정, 자기 긍정. 돌봄, 자기 돌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자기를 잘 배워야 한다고. 알아가야 한다고. 무한한. 나 자신이라는 세계를.
누군가를 바꿀 수는 없다. 내가 나를 바꾸는 거다. 하지만 종종 곁을 바꾸고 싶을 때가 있다. 내가 바뀌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는 그것을 더 이상 헛된 통제욕망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정당한 요구이며 치열한 협상이다. 그리고 지난한 노동이고 괴로운 과정이 될테지만. 한 번 쯤. 생애에 한 번 쯤은. 물론 내가 원하는 만큼 바뀌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옳지도 않지만, 포기하진 말아요. 왜냐면 사랑하시잖아요. *그러니까 사랑.* 내가 나를 더 사랑하는 방향으로 바뀔텐데, 그가 나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그 역시 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뀌어가겠죠? 애초에 사랑하지 않는다면 바뀔 필요조차 느끼지 않을 테구요. 하지만 정말 제가 보탤 말은 아닌 게 나는 혼자니까. 내 주제에 무슨. 그래도 하다 안되면 저 같은 가능성도 있잖아요. 정 안되겠다 싶으면 혼자, 혼자도 추천입니다. 언제나 둘이 어렵죠. (쉬운. 그러나 그렇게 쉽지 만은 않은 혼자라는 선택지도 있다는 걸. 잊지 마요, 차마, 당부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겁 없음. 나는 나의 겁 없음에 생각했다. 치열함과 치밀함 붕괴에 가 닿을 만큼의 매진에 대해서도. 내가 잘못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계속해서 뒤척였던 밤들에 대해서. 그러다가 오늘은 정희진의 새 책에서 이런 단어를 찾았다. <불성실함> 나의 못마땅함은 사랑 받지 못함이 아니라 함량 미달의 사랑… 어떤 불성실함에 있었던 걸까. 용기가 아니라 불성실 이었다면… 얼추 퍼즐이 맞춰진다. 그래, 그래서 사람들은 제도 안에 자신을 안착 시키고 싶어하지. 나 역시 매사에 성실한 편은 아니지 않은가. 조금은 불성실해지고 싶어 제도를 요구했구나 너는. 나는 사랑을 요구했고. 결혼이 성실을 약속하고 다짐하는 것이 아니라 불성실의 방패막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사실 모두 알고 있었는 데 나만 또 몰랐구나.
애초에 애초에 모든 것을 끼워 맞추려던 나의 교조적인 성향이 언제나 문제였고. 이런 성향의 나는 조금만 알고 그저 열심히 살면 되었을 텐데, 하필, 하필이면 내가 태어나 사는 세계는 무한히 무한히 자유롭다. “(99) 무한한 자유,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유의 시대다”
어쨌든 이제는 삶에서 놓을 수 없어진 나의 성실함. ‘머리’와 ‘몸’으로 ‘글’과 ‘삶’으로 따로 떼어 나눌 수 없는 나눠지지 않는… 계속해서 분열하지만 딱 붙어 있는… 나에게 돈이나 시간을 가져다 주지 않는… 그러나 없이는 살 수 없는… 외로움의 총체와도 같은 동시에 그래서 더 절실한 다른 세계와의 만남과 연결인… 그 (비생산적) 일들을 정희진은 ‘공부’라고 표현해주었고, 나는 내가 하고 있는 것이 ‘공부’구나 하면서 조금 웃는다.
공부, 공부하세요.
나는 나한테 말하고 있었네.
공부, 열심히 공부하세요.
여행지에 돌아와서 시차 적응이 덜 된 내가 오밤중에 갑자기 삘받아 열심히 한 것은 책장 정리였다. 물론 직접적인 까닭은 잠자냥의 책장 정리 페이퍼(https://blog.aladin.co.kr/socker/13832144) 때문이었지만, 거실이 읽다 만 책으로 점점 뒤메질 스러워지고 있었기 때문...
250~300권 정도를 유지하던 나의 책장은 1년 사이에 500권으로 두배 증식 하였고, 도끼옹 전집을 위해 마련한 나의 페미니즘 책장은 이제 완전한 철학&페미니즘 책장으로 탈바꿈하고 말았다. (도끼옹 전집은 침대 맡에 두기로 하였다...)
그리고
몰랐는 데
수치스럽게도 (에바 일루즈 정리하다 보니)
사랑.칸. 이 생겼다. (푸코 칸을 압도한다. 그럼. 푸코. 너. 내게 사랑이었니?)
내가 읽었던, 읽으려고 사둔 ‘사랑’에 대한 책이 이렇게나 많았던 거다.
놀랍다. 나 사랑에 진심인 여자였다. (그렇게 사랑이 싫다면서요...크크크크크크큭....)
사랑을 이루고 있다는 단어들. 어떤 날은 노력에 어떤 날은 존경에 어떤 날은 용기에, 투사에, 이름에, 실존에, 꽂혔다. 그래서 사랑을 잘했냐고요? 잘하게 되었냐고요?
그러게 말입니다. 😞 슬프게도 제가 사랑을 공부하기 시작하자 수월하게 타자를 사랑하지 못하는 흐린 눈이 잘 안되는 사랑고자가 되었는 데 말이지요… 하지만 이만큼 열심히 사랑을 글로 공부하면서 주체와 타자를 나누는 구태한 이분법을 해체하는 연습을 하고… 그것은 따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주체 나 사랑 타자 사랑 주체… 그러합니다… 언어의 물성에 대해 언어의 현실성에 대해 연구하며… 즉 글로 사랑을 배우면 사랑 그거 할 수 있어진다는 뭐… 응? 이제는 뭐? 아무튼 사랑,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닐, 그 마음의 사치, 그리고 사랑을 언어로 공부하는 것은 현실과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몸으로 받아들인 지식이 융합되어 있는 타자의 몸과 만나 또 융합하는 새로운 앎-지식을 생산하며… 어쨌든 저는 신.중.한 사람이므로 먼저 글로 사랑 공부를 끝.낸. 후에 사랑도 시작해보도록 하려 하였건만은.
나는 <헤어질 결심>을 봐버렸고. (크허헝🤣🤣) 사랑 좀 잘 알 알라딘 이웃들은 사랑 자꾸 불가항력 막이래. 그래서 나는 사랑을 쓰려거든 연필로 쓰세요, 머리로 사랑을 한다던 부장님께 비법을 좀 배우고자 자문을 구하였는 데, 그는 수지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어’ 노래를 틀어주었다. 쟝님, 그냥 이 노래로 가슴을 찢어버려... 라고 했지만 저는 그 노래를 통해서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배울 수가 없었습니다. 아아, 이것이 사랑을 글로 배운 사람의 총체적 난국....
(미련) 실은 책장에 꽂힌 저 책들을 아직 다 완독 못해서 인게 아닐까요?
그러므로, 마침내, 사랑, 다 읽은 다음에 생각해보겠습....(그러므로 아직, 섹스는, 아주, 멀었다 잠자냥아,)
네... 이웃님의 우려 잘 알고 있습니다.
이딴 인문학 책 말고 문학을, 소설을 더 읽는 게 좋지 않겠냐구요?
훗. 나는 소설을 분석한 책을 읽는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이 나의 장르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로맨스 영화라도 좀 보라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훗. 나는 그 영화를 보고 쓴 글을 읽는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게
나의 장르라니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 오늘도 잠은 안 오네요. 낮잠을 많이 잤거든요. 이거 참. 큰일 났습니다.
덧붙임.
참, 정희진의 이번 책은 어떤 결의가 느껴집니다. 개인적으로 이 편이 훨씬 좋습니다. 선생님. 가시는 길. 응원합니다. (우리 가는 길은 다르겠지요~ 그것은 저의 당파성이니까요~) 당신의 저주를 온몸으로 받아 내면서 공부. 사랑. 합니다. 그거. 나.
공부를 하세요. 공부가 취업으로 연결되지 않는 시대니까, 돈 안드는 나만의 공부를 하는 거예요. - P99
나는 내 몸의 역사다. 개인의 몸은 그 개별성 때문에 앎의 내용과 가치관에 따라 현실과 합쳐지는 범위가 다르며 만들어지는 지식도 다르다. 아니, 달라야 한다. - P101
다른 사람의 몸에서는 다른 일이 벌어진다. 삶은 몸들의 개별적 화학이다. 요컨대 인생사에서 공부는 혼자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일이다. … 여기서 말하는 공부(工夫)는 글자 그대로 특정 분야에 자기 몸을 훈련하여 장인(匠人)이 되는 것이다. 거창한 얘기가 아니다. 공부는 세상이라는 공방(工房)에서 대장장이에게 망치질을 당하고 불에 녹아 쇳물이 되는 등 다양한 모습으로 변환을 거듭하며 *내 몸에 기(技)와 예(藝)를 새기는 것*이다. - P102
*주변에 어떤 사람을 가까이 두는가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 이 문제에 관한 한, 공부처럼 좋은 예도 없을 것이다. ‘좋은’ 선생을 만나는 것만큼 큰 행운이 없다. 공동체를 꾸리거나 도반(道伴)을 맺는 것이 함께 공부하는 대표적인 방식이다. 두 방식 모두 제도 안팎에 동시에 존재한다. 학교, 배타적인 연애, 가족 제도는 제도권 안에서 가능한 대표적인 공부모임이다. - P103
반면 개인이 조직하고 참여하는 온․오프라인 공부 모임이나 제도로부터 자유로운, 두 사람만의 관계인 도반이 있다. 공부에 필요한 적대는 일대일 관계이므로 도반은 두 사람이어야 한다. 세 사람이면 대화가 흩어진다. 도반이 ‘유사 연애’의 모습을 띠는 이유는 검열 없이 대화가 오가고 상대방의 뇌에 출/입할 수 있을 만큼 둘 사이에 신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 P103
학교, 가족, 이성애 같은 제도적 관계는 제도 자체가 관계를 유지해주기 때문에 개인의 노력이 덜 요구된다. 반면 제도권 밖의 관계는 그렇지 않다. 흔히 생각하듯 개인이 공동체나 도반의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다. 개인이 열심히 공부할 때만, *즉 스스로 융합을 멈추지 않을 때만 관계가 지속된다*. 모이는 것만으로 융합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개인 내부에 융합이 있어야 외부와 ‘함께’하는 공부가 가능하다. - P104
융합은 합하는 작업이 아니라 융합하는 개별적 몸들이 접속하는 상태다. 융합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각자의 가치관이 충돌하여 새로운 사유를 만들어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타인과 충돌할 자기 만의 몸이 있어야 한다.* 이처럼 도반은 믿을 만한, 편한 길동무라기보다는 자극과 긴장 관계에 가깝다. - P104
성질급한 이들은 혼자 득도하는 쪽을 택한다. *상대에게 더는 배울 것이 없을 때 남는 것은 노동 뿐이다*. 그래서 상대를 ‘버리는데’, 그 이유를 아는 상대도 있고 모르는 상대도 있다. 혼자 남겨진 ‘을’은 자신을 반성하지 않고 융합하는 상대방의 몸(mindful body)에 집착한다. 대개 치정으로 간주되지만 그냥 한쪽의 불성실이다. *성실한 삶은 어렵기 때문에 불성실에 관해서는 할 말이 없다.* 길동무가 지속되려면 서로 보조가 맞아야 하는데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래서 나는 "그냥 친구로 남자"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 P104
융합은 먼저 내 몸에서 일어나고 그 다음에 공동체나 도반에서 일어난다. … 스스로 융합된 몸이 되어야 다른 융합도 가능하다. 그리고 그러는 편이 바람직하다. 융합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당파성의 지속적인 생산이기 때문이다. 개별적인 가치관의 충돌과 재생산이 없는 공동체나 도반이 무슨 소용인가.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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