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이해해버리지 않을 것
월례행사로 산책들 바코드 등록하는 날이다. 이번 달에도 사 제꼈구나. 나여, 넌 월 초에 허벅지를 찌르며 도스토옙스끼를 사지 않았더냐? 양심껏 이번 달엔 줄여야 했던 것 아닐까? 20대 이후 또 다시 상위 0.7%를 찍었다고, 알라딘이 알려준다. 믿기지 않는다. 나는 정말인지 고심하고 고심하여, 한달에 꼬박꼬박 열 권 넘게 절대 스무권은 안되게 샀을 뿐이다. 내 허버진 욕망에 비하면 내가 산 책은 새발의 피도 안된다. 그런데도 상위 0.7%라고? 억울하다! 하지만 이렇게 된 바, 우연히도 이 세상에 태어나서, 알라딘 서재를 하게 되었는 데, 0.1% 한번 찍어보는 것도 인지상정...은 정신차려. 나는 어제 돈을 아껴 대부호가 되기 위해 재테크 책을 읽은 사람이다!!!! 우하하🥲
알라딘 우주점 서비스를 이용해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구매했는 데, 오라는 골드문트는 안오고 2만원 채우려고 산 <서울리뷰오브북스>만 0권, 1권이 왔다. 문의해보니까 골드문트씨는 분실되었다고 한다. 굳이 따로 또 신청해야한대서 뭐 그렇게까지야… 도서관에서 빌려 읽어야지!라고 생각 하니까 왜 사기 전에 도서관에서 빌려읽을 생각을 안했던 걸까🤔
아뭏든 이번 달에 나는 <서울리뷰오브북스>라는 서평잡지를 두권 사보았다. 서재이웃님이 언급한 최은영 소설의 제목 키워드였던 “무해”를 뽑아서 쓴 김홍중의 글이 읽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꼭지 “무해의 시대 - 21세기 안전 패러다임의 계보와 전망”만 읽고 김홍중이라는 저자에 호기심이 생겨 <은둔기계><사회학적 파상력>등을 장바구니에 담았다가 허벅지를 주먹으로 치면서 참는 중이다. (12월엔 정말 안사고 도…도…도끼옹의 반짝이는 금박 양장본을 끌어안고 침잠할거다. 북플앱... 지울까...)
“(29)왜 장애인이 비장애인보다, 왜 가난한 청년들이 부유한 부모를 만난 자들보다 더 많은 사고를 겪어야 하는가? 왜 여성이 남성보다더 쉽게 살해되어야 하는가? (중략) 우리가 누군가와 연대한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삶의 위험, 불안, 공포를 함께 겪는 자들의 연대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불안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과 싸워야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안전이 결핍된 존재자들의 새로운 연대, ‘무해의 연대’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 서울리뷰오브 북스 1호, 김홍중”
우리의 불안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과 싸워야한다는 문장에 눈길이 머물렀다. 내가 정말로 정말로 상처받았던 순간들은 죄다 그런 순간들이다. 친밀하다 믿은 사람들에게 상처로 인한 나의 불안과 공포를 호소했을 때 돌아왔던 어리둥절한 반응들. 전혀 이해받지 못했던 순간들. 때로는 신경증자 혹은 도덕 강박을 앓는 사람처럼 된 것만 같은, 그 때의 나는 초라한 마음이었다. 상처의 해결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어떻게든 지고 이고 극복할 자신이 있었다. 다만 그것이 때론 이러한 공포가 되기도 한다고, 망상인 것을 알면서도 이런 상상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설명할 수록 미궁에 빠졌다. 다 그 정도는 참고 살아간다는 뉘앙스의 달램. 당연하다. 이미 그 정도는 참고 살아왔다.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그 정도를 이야기하는 것 조차도 왜 너를 내가 괴롭히는 것 처럼 느껴졌을까. 그들은 참을 수 없어했었다. 튕겨내었다. 어쩔수 없다고 했다. 그러니까 참아왔던 네가 참으라고 했다. 그 순간들을 떠올릴 때 마다 아직도 가슴이 에일 것 처럼 아프다. 나의 불안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 그들은 정말로 삶이 위험했던 적이, 불안했던 적이, 공포스러웠던 적이 없었단 말인가. 자신의 취약함에 빗대어 타인의 불안함을 이해하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그토록 어려운 일인 걸까... 그렇다면 내가 아니라 당신네들이 다른 의미의 강박증인 걸지도 모른다고.
무해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망(내 생각에 이것은 욕망이다, 쉽게 풀면 상처주고 싶지 않다는 욕망)의 무의식(주인공들은 그 욕심에 대해 어떤 회한을 느낀다. 그 역시 옳기만한 사랑의 방식은 아니었다는, 모든 일이 끝난 후에야 반추가 가능한 형태의)을 최은영이 그이의 소설에서 매우 섬세하게 써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고 보니 <내게 무해한 사람>을 처음 읽은 지 만 3년. ‘쉽게 이해해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던 내가 지금에와서 푹 찔리게 되는 물음표는 이런 종류다. 혼자있을 때 가장 안전하다고 느끼는 스스로가 “(30)타자와의 건강한 관계를 맺을 능력을 상실한 ‘후기 자본주의의 나르시시즘적 주체’”인 것은 아닐까하는. 관계에서 어떤 기대를 철회해 버리고 나니, 깊은 관계를 만드는 것을 종종 참을 수 없어 한다는 걸 느낀다. 역시 따뜻한 온기보다는 미지근한 기운 정도가 적당. 내가 접속했을 때만 접속해있고 보고 싶은 것만 보면 되는 친구들. 이 정도도 충분히 안온한 것 같은 데.
김홍중은 무해를 향한 욕망을 “(33)다수의 재난을 겪어내면서 대중들이 고통스럽게 생간해 낸 사회적 공통 감각”으로 진단하며 근래의 페미니즘, 비거니즘,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과도 연결 짓는다. “(33)2010년대의 안전 욕망이 ‘내(우리)가 겪는 유해’의 고발과 항의에 집중되어 있었다면, 앞으로 그것은 ‘내(우리)가 가하는 유해’에 대한 윤리적 성찰, 일종의 ‘생태적 전환’의 형태로 그 반경을 넓혀가지 않을까?”라고 말한다. 그런것도 같고. 아니, 나의 경우엔 맞고. “(34)내가 있는 자리는 *누군가가 있을 수도 있었던 자리의 ‘점유’*이다.” 굳이 레비나스까지 끌여들어오지 않더라도 나 역시 언제부턴가 이 점유 상태를 선연히 감각하고 있으며, 어디까지가 나를 보호하는 것이며 또 어느 정도까지를 조심스러워해야하는 지를(인간 관계 + 지구나 동물, 환경)자주, 빈번히 생각한다. 장난처럼 타노스라도 되는 양, 인류가 너무 많은 게 문제야! 세이프 섹스(비섹스 아님.. 선언하면 안될것 같아?)-! 비출산!!! 따위를 밈처럼 외치는 데에는 이런 인식이 있는 것이다. 휴머니즘 물러가라ㅋㅋㅋㅋ
쓰다보니 또 한장 없이 쓰고 있네. 어쨌든 <서울리뷰오브북스>를 중고로 샀고, 단 한 꼭지를 읽었을 뿐인데 좋다… 실은 정기 간행물들을 구독해 본적이 없는데, 그건 초등학교 때 눈높이를 밀리던 트라우마가 발동해서지 싶다. 하필 구매한 게 0호랑 1호라서 뭔가 독서인구에게 야심찬(!) 호소를 하는 이 잡지가… (좋은 의미로)신경 쓰인다. 주례사 서평은 지양하겠다니, 그들만의 리그에 갇히지 않겠다니…라고 써져있는 데. 일단 산 0권, 1권은 다 읽어보고 정말로 주례사 지양해서 신나게 깠는지(ㅋㅋㅋㅋ 주례사 서평없기로는 알라딘 서재가 짱임), 그들만의 리그가 진짜 아닌지(솔직히 여기 필진들 셀럽까진 아니어도 나름 ‘네임드’들 아닌가? 김영민, 장강명, 요조, 김혼비, 김초엽… 그래… 초반이니까 힘줬다고 생각하자.)보고 괜찮다 싶으면 정기 구독해볼까 맘이 동함. 시사 잡지는 시사를 안좋아해서, 문학 잡지는 문학을 덜 좋아(한다고느껴)해서 시큰둥했는 데, ‘책 좋아하는 사람들의 책 이야기’는 확실히 내가 좋아하는 분야니까. 혹시 구독자 있으면 추천하는지 아닌지 알려주시겐?
지난 달엔 김연수가 35살에 쓴 <청춘의 문장들>을 35살 기념해서 읽었다. 너무 문학하는 청년남자이야기라서(군대얘기, 혼자하는 여행 얘기) 하품이 좀 났다. 그래도 읽는 내내 잘썼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 감성이랄까 문체랄까가 내 책 친구를 떠올리게 해서, 친구가 20대에 가장 감명깊게 읽었다던 단편이 실린<나는 유령작가입니다>를 샀다. 사는 김에 영문과 출신 김연수 번역력도 한번 느껴보자 함시롱 <대성당>도 샀고. 돌이켜보면 또래의 책 읽는 친구들은 모두 김연수를 좋아했는 데, 좋아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싶지싶다. 좀 늦었지만, 독서가들의 독서를 따라가본다. 비슷한 맥락으로 애거서 크리스티랑 레이먼드 챈들러 소설도 읽는다.… 어라, 재밌네? 나 추리소설… 좋아하잖아? 넷플릭스에 찌든 뇌가 살짝 쾌활해지는 느낌. 소설이 주는 은은한 도파민이랄까...ㅋㅋㅋㅋ
<구의 증명>은…… 굿즈 접시 때문에 샀습니다. 딱 저 크기의 간식 접시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얻어걸린(?) 책들 중에 좋은 책들 많아서 왠지 좋을 거 같음.
위고에서 나온 <여성과 광기>는 12월 책으로 박스포장을 뜯고 이 책을 쓰다듬던 나는 정말인지… 미쳤네 미쳤어를 연발. 책이 너어어어어어무 고급스러운겨(사실 때탈까봐 걱정인 데, 이건 곱게 읽을거다 정말로)☺️ 최고다. 고전의 고전답게 만들어 벌임. 다이어리같은 재질의 싸바리 너무 맘에 들고… 암튼 올해 받아본 책들 중에 가장 고급진 디자인으로 제가 임명합니다. 이 정도의 물성을 지닌 책이라면 비싸도 만족스럽다.
<해체주의와 그 이후>는 품절된 책 알라딘 중고 알림 걸어놨는 데 뜨길래. 하지만 <여성과 광기> 옆에 두니 표지 속 푸코가... 푸코가...너무 푸코스럽다.... 저 손 동작 뭐냐... 지구뿌셔? 뭐 이런건가? ㅋㅋㅋㅋㅋ 올해 읽은 책들 중에 호기심이 동하면서 좀 괴로워했던 책들은 푸코를 위시로 하는 해체주의 계보에 꿰일 저자들이었는 데, 이거시 뭐시여 하면서도 이거시 뭐신지 왠지 알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으로 읽는 게 즐거웠다. 왜 철학 책 읽는 게 좋은걸까.🤔 왜… 왜…. 곰곰히 생각해보고 있는 데 역시 잘 모르겠다. 분명한 건 철학 책들을 읽고 있을 때 나는 정말인지 하나도 외롭지 않다! 이 사람들이 이런 것을(?) 쓰면서 느꼈을 외로움에 비하면 내 외로움이란 무지하게 쪼꼬맣고 말랑하고 귀여운 어떤 것이 되는 거다. 여튼 해체의 ㅎ도 모르지만, 언젠가는 해체주의과 그 이후도 궁금해지지 않을까하며, 절판된 책이니까 일단 사두고 언젠가 나에게 열리기를 기다리자 하는 마음…!! 나만 아는 마음인거야? 그런거야? 미래의 내가 읽고 싶어질지도 모를(?)것임이 느껴지는 품절 책을 보면 난 그렇게 아깝다. 지금 사봤자 읽지도 못할 거 너무 욕심내지 말자… 하면서도 왜 사고 싶은지. 그렇게 뒤메질이 되는 것인가.
11월~12월에 아주 좋은 작품을 만나지 않는다면, 2021년 공쟝쟝 픽 올해의 소설은 <내 이름은 루시바턴>이 될 예정이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는 데, 아무래도 소장각 이라서 후속편과 다름없다는 <무엇이든 가능하다>와 함께 구매했다. 이 소설이 왜 좋은 지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없다. 소설은 어디까지 갈 수 있는 매체일까. 처음으로 그런 걸 느꼈는 데, 그녀가 쓰지 않을 것을 쓰지 않음으로써 썼다는 생각을 했다. 널찍널찍하게 떨어진 문단 사이 여백에 내 유년 시절의 끝나지 않은 감정들을 채워 넣었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많아졌는 데, 아무 말도 할 필요가 없어질만큼, 나에게는 너무 충분한 소설이었는 데, 너라면 이걸 읽고 내가 느낀 것들을 비슷하게 느낄 수 있을 거 같아. 왜냐면, 우린 그런 가족 안에서 자랐으니까. 동생에게 이 책을 선물했고, 다 읽고난 동생도 인생 책을 만났다고 말해주었다. 우리는 딱 그만큼의 대화만 하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내가 언어에 매달리는 것은 결국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고 싶기 때문인걸까. 지구 반대편에서 1956년에 태어난 여자가 이런 소설을 썼다면, 그리고 그게 뉴욕타임스의 베스트셀러 1위가 되었다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생각보다는 고유하지 않은 장치일지도 모르겠다. 각자의 경험은 다르더라도 느끼는 데에 있어서는 보편적일 수도 있겠구나. 그러니까, 거기에서부터 시작해야하는 것은 아닐까.
무엇을? 글쎄, 무엇이든. 무엇이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