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의 인사동
서울은 역사의 깊이를 간직한 도시입니다. 지금으로부터 600여년 전 서울은 조선왕조의 도읍지가 되었습니다. 조선왕조를 창건한 태조 이성계는 왕위에 오른 바로 다음달(1392년 8월) 서울로의 천도를 결정하였고, 2년 후인 1394년 10월 천도는 실현되었습니다. 이로서 서울은 조선왕조의 새로운 도읍이 된 듯 하였지만, 한 나라의 도읍을 새롭게 건설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태조를 이어 왕이 된 정종은 서울로 천도한지 5년도 되지 않은 1399년 3월 아직 미비했던 서울을 뒤로하고 이전의 도읍 개성으로 다시 돌아가버렸습니다. 태조의 서울천도결정 이후 13년이 지난 1405년 10월 3대 왕 태종이 다시 서울로 돌아옴으로서 서울은 비로서 500년 조선왕조의 도읍지로서의 흔들림 없는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서울읶 조선왕조의 도읍으로 자리잡기까지의 13년간 여러 후보지들이 거론되었습니다. 계룡산에서는 한때 새 도읍을 건설하는 공사가 진행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 후보지들을 물리치고 서울이 최종적으로 도읍으로 선택된 이유는 서울이 한반도의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또한 한강이라는 큰 강을 끼고 있어 사람과 물자가 어느 곳으로부터나 치우침 없이 쉽게 통할 수 있다는 이점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서울일대는 옛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경계를 마주하던 접경지대여서 삼국의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침이 없었고, 이전 왕조인 고려로부터도 자유로운, 역사적으로도 치우침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서울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조선시대 서울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은 북악, 인왕산, 남산(목멱산), 낙산(타락산)의 능선을 따라 세워졌습니다. 이들 네 개의 산을 서울의 내사산(內四山)이라고 합니다. 결국 조선 초의 서울은 북쪽으로는 북악, 서쪽으로는 인왕산, 남쪽으로 남산, 동쪽으로 낙산의 능선들에 둘러싸인 아늑한 분지에 자리잡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외곽으로 외사산(外四山)인 북한산(북쪽), 덕양산(서쪽), 관악산(남쪽), 용마산(동쪽)이 다시 이중으로 감싸안고 있는 그런 자리였습니다. 인구 천만이 넘는 대도시로 성장한 오늘의 서울도 대체로 이들 외사산으로 둘러싸인 범위 안에 있습니다.
도시를 산능선으로 둘러싸는 방법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이어저온 오랜 전통이었습니다. 주변의 지형지세를 적극 활용하여 도시를 건설하는 전통이 서울로까지 이어져 온 것입니다. 성곽을 쌓아 도시의 외곽 경계를 결정하는 것에서 뿐만 아니라 도시 안에 길을 내고 주요 시설들을 배치하며 동네를 만들어가는 방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도시가 들어설 자리를 신중하게 선택하고, 선택한 땅이 갖고 있는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여 도시를 만들어 가는 것, 자연의 질서와 사람이 만들어낸 도시가 하나로 조화를 이루어 사람을 배제한 자연이 아니라 그 안에 삶을 함께 하는 사람들까지를 감싸안은 자연의 질서를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도시 만들기 전통이었습니다.
그래서 옛 서울의 길과 물길은 닮은꼴을 하고 있었습니다. 비가 오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물이 흘러 작은 물줄기를 만들고 이 작은 물줄기들이 다시 모여 큰 물길을 만들어 내듯 옛 서울의 길들도 작은 골목길들이 큰길로 모이고 다시 더 큰길로 모여드는 그런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옛 서울의 가장 큰 물길은 개천이라 불리던 지금의 청계천이며 또 가장 큰 길은 서대문에서 동대문으로 서울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종로였습니다. 북악과 인왕산의 골짜기에서 물길이 남쪽으로 흘러, 남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북쪽으로 흘러 서울의 한복판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청계천으로 흘러들어가듯 길들도 북쪽에서 남쪽으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연결되어 종로에서 만났습니다.
서울사람들의 삶도 그랬습니다. 대부분의 생활은 골목길을 중심으로 하는 동네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골목길 하나가 하나의 동네인 경우도 있어서 도시의 물리적인 길의 체계와 행정구역의 단위, 공동체의 단위가 일치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골목길과 그 주변의 집들이 들어섬으로서 동네가 만들어지는 것도 오늘날과 같이 한꺼번에 '뚝딱'하고 만들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한집 한집 점진적으로 들어서는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의 골목길들이 예외 없이 꺽어지고, 휘어져 길의 선형의 변화가 심하고, 길 너비도 한결 같지 않고 변화가 심하며, 길과 길이 만나는 방식이 네거리는 거의 없고 대부분 세거리인 것은 골목길이 한꺼번이 아닌 그때그때 필요한 만큼만 토막토막 이어져갔던 것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따라서 구불구불 꺽어진 우리의 골목길은 거기에 집을 짓고 동네를 이루며 살았던 모든 사람들의 삶의 흔적이기도 한 것입니다. 도시를 하늘 위에서나 궁궐 위에서 굽어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서울에 삶터를 가졌던 보통 서울사람들의 눈높이에서 바라보았을 때, 서울의 길들이 휘어지고 구부러지고 불규칙하여 볼품없어 보이는 그 자체가 바로 서울이 자연에 순응하며 서울을 삶터로 했던 많은 사람들의 삶에 흔적의 누적체로 만들어졌다는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담고 있는 것임을 깨우쳐 줍니다.
인사동과 북촌에는 그런 우리도시의 옛길들이 살아있습니다. 인사동의 중심을 가로지르고 있는 인사동길은 조선시대에 종로와 북촌지역을 연결하는 비교적 큰길이었습니다. 인사동길의 안국동쪽 입구와 종로쪽 입구부분은 길이 넓혀졌으나 그 외의 부분들은 옛 모습 그대로를 지켜오고 있습니다. 느슨하게 구부러진 인사동길에서 우리 옛길의 여유를 느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사동에는 서울에서 가장 번화했던 거리인 종로가 있습니다. 종로 바로 뒤편에는 서민들의 길인 피맛길도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사동을 인사동답게 만들고 있는 것은 좁고, 구부러지고, 꺽어진 골목길들입니다. 골목길은 지금까지 인사동에서 살며, 인사동을 만들어온 사람들의 삶의 흔적들입니다.
인사동, 그리고 북촌의 곳곳에서 우리의 옛길들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인사동은 서울의 한복판에 위치하여 600년 역사의 깊이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입니다. 서울중심점 표지돌(1896년 세움)이 인사동에 있음이 이를 말하고 있습니다. 인사동은 역사의 중심무대이기도 했습니다. 세종대왕이 승하하신 곳이 이웃 안국동이었고, 율곡 이이선생도 인사동에서 사셨습니다. 조광조의 집도 길 건너 교동초등학교 자리에 있었고, 인조는 어린 시절을 외가였던 인사동에서 지냈습니다. 뿐만 아니라 조선말 안동김씨들의 세도의 본거지도 여기 인사동이었으며, 대원군의 운현궁도 바로 이웃한 운니동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런가하면 개화사상이 싹트기 시작한 곳도 바로 북쪽의 재동이었습니다. 그 중심인물중 한사람이었던 박영효가 살던 집이 바로 지금의 경인미술관 자리에 있었습니다.
삼일운동 또한 인사동과 관련이 깊습니다. 삼일운동은 인사동의 승동교회의 지하에서 준비되었으며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을 선언했고 탑골공원으로부터 만세소리는 시작되었습니다. 그런가하면 한때 태화관은 친일파 이완용의 별장이자 친일파의 교육장으로 이용되기도 하였고,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고초를 겪었던 종로경찰서도 인사동에 그리고 바로 이웃한 지금의 제일은행본점자리에 있었습니다. 이렇게 인사동은 우리역사의 현장이었습니다.
문화와 경제상으로도 인사동은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도화서가 있어서 이미 오래 전부터 미술의 중심이었고, 최초의 신식극장인 장안사도 이곳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일보가 최초의 사옥을 건립한 곳도 인사동이었으며 탑골공원은 대한제국기에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시민공원이었습니다.
종로는 조선 초부터 서울의 상업 중심지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로 들어서서는 충무로, 명동의 일본인 거리와 대립되는 조선인의 거리로서 조선인의 상업중심지이자 사회적 중심지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최초의 백화점이었던 화신백화점도 여기에 세워졌습니다. 지금은 헐린 이 건물은 조선인건축가 박길룡이 설계한 우리나라의 대표적 근대건축물이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인사동이란 이름은 행정구역상의 '인사동'이라는 동이름으로 보다는 종로와 율곡로, 우정국로와 낙원동길을 경계로 하는 구획의 전체 범위를 지칭하는 것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본래의 인사동이란 이름은 1914년의 행정구역개편 때에 조선시대의 행정구역의 명칭이었던 관인방의 '인'과 대사동의'사'를 모아 만들어진 것입니다. 현재 행정구역상의 인사동은 조선시대에 대사동이라 불리던 곳입니다. 이 대사동이란 이름은 탑골공원자리에 있던 원각사와 흥복사로부터 비롯된 것으로서 큰절이 있는 동네란 뜻이었습니다.
인사동이 지금과 같이 골동품, 고미술품, 화랑, 고서적점 등이 모인 곳으로서 두드러지게 된 것은 금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였습니다. 금세기 초반에 먼저 골동품상들이 모이기 시작하여 1920-30년대에는 고서적점들이 들어서게 되었고, 1950년대에는 낙원동 일대에 떡집들이 모여들었으며, 60대에는 필방들이, 70년대에는 표구점들이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본격적인 화랑가가 형성된 것도 70년대의 일이었습니다.
오늘의 인사동에도 이렇게 쌓여진 시간의 층들이 살아 있습니다.
<인사동북촌살펴보기>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