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는 내가 읽는 네번째 가가 형사 이야기고 그 중에 단연 최고라 할만하다.
살인 현장을 최초로 발견한 피해자의 지인과 가가형사가 각각 한쳅터씩 교대로 서술을 해나가는 형식상의 특이함과 반전의 반전을 거듭해 가는 이야기가 흥미진진하다. 각각의 진술 중 거짓과 무심코 들어낸 진실의 파편들을 분간해내느라 집중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가가형사는 내가 가장 아끼는 케릭터 중에 하나다. 검도를 즐기는 두툼하고 입이 무거운 사내는 내가 좋아하는 하드보일드 소설에 흔히 나오는 탐정같다. 그리고 그건 나의 이상형이기도 하다. 형사로서 그는 날카로운 직감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해결된듯 보이는 사건의 작은 미심적은 부분도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 집념 또한 갖추고 있다.
여성, 외국인, 약한 것들(약한 아이, 주인없는 고양이, 곤충 등등)에게 행해지는 온갖 이유없는 악의를 매일매일 뉴스에서 듣고 사는 요즘 이 이야기가 이야기로만 읽히지 않는다는 것이 이 책에서의 유일한 안타까움이다.
파일로 밴스는 홈즈의 계보를 잇는 부유하고, 지적이며, 예의바른 신사풍의 아마추어 탐정이다.
평론가 출신으로 파일로밴스 시리즈를 집필하기전 이천권이 넘는 미스테리를 독파했다는 저자의 이력을 들추지 않아도 가장 전형적인 탐정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저자는 자신이 말한 좋은 탐정소설의 스무가지 규칙에 부합하게도 독자와 탐정에게 공평하게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며, 수정구술을 들여다 본다거나 초자연적인 현상의 힘을 빌리는 바 없이 면밀한 관찰에 의해 사건을 해결해 간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김전일을 떠올릴 것이다. 사람들을 모아놓고 장광설로 사건을 설명하는 걸 보자면 말이다. 거기다 미적미적 되는 파일로 밴스에게 화를 내는 책 속에 등장하는 형사들에게 쉽게 감정이입이 된다. 이 사람은 아무리 신사지만 왜 이리 미적된단 말인가!
여하간 탐정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필시 파일로 밴스도 마음에 들 것이다.
"법률 따위!" 평소의 그답지 않은 격정적인 말투였다. "그리고 바로 그런 법률이 일반 대중을 위해 전시되는 장소를 우리는 정의의 재판정이라고 부르지. 정의라니-고모님 맙소사! 서뭄 저스, 서멈 인주리아('가장 엄정한 법은 가장 부정한 법이다'라는 뜻의 키케로의 말). 남의 말을 무조건 반복하는 행위의 어디에 정의가, 지성 따위가 있단 말인가? 여기 세 사람이 있네. 지방 검사와 강력계의 경사와 브람스의 B플랫 피아노 협주곡을 사랑하는 사내 말일세. 그리고 이들은 살인자임을 알고 있는 사내를 십오 미터 이내의 거리에 두고 있어. 그런데도 아무 일도 할 수 없어! 왜냐고? 왜냐하면 우둔한 자들이 없는 머리를 쥐어짜서 발명한 법률이라는 것이 위험하고 비열한 범죄자를 박멸할 수단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략)"
(402쪽 : 강조는 내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