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이 무언가를 읽지만 끝내지 못하고 던져놓은 책들이 싾여간다. 식탁위에는 잡지와 각종 간행물이 수북,(그중 몇몇은 포장된채 버려져있다) 베란다 들어가는 입구엔 읽다만 책더미와 만화책 더미가 반반씩 싾여있고, 거실 테이블에는 비교적 최근에 읽다만 책들이 두어권 놓여있다. 우리집에서 청소란 책들이 싾여 있는 둘레를 아주 드물게 슬슬 치우는 정도다... 거실장은 아직 읽지 않은 책을 놓아두는데, 거실장에서 거실테이블을 거쳐 서재방이나 외부로 나가는 시간이 한정없이 길어지고 있다. 이 와중에 운좋게 간택되어 읽기를 마친 몇 권에 대해 써본다.
오랜만에 고전적인 미스터리 소설을 읽었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트릭은 범인이 어떻게 피해자가 그 편지를 받고 머릿속에 떠올릴 번호를 편지에 적어보낼 수 있었는가이다. 범인과 두번째 트릭은 짐작가는 바 있었지만, 작가가 제시해줄 때까지 첫번째 트릭을 풀지 못했다. 답이 나오고서야 '아 이런저런게 힌트였구나' 생각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재미있는 소설의 여부는 트릭의 정교함이나 신선함이 아님을 새삼 깨닫는다. 어찌보면 전형적인 구조, 케릭터를 가지고도 내게 이 글이 꽤나 흥미로왔던 것은 역시 소설가의 글발이 아닌가 싶다..
'한번은'은 영화감독 빔 밴더스가 풍경과 주변인물을 찍은 사진과 짧은 글이 실린 책이다. 그가 주변인을 찍은 사진을 보노라니, 그의 말대로 사진을 찍은 사람이 보인다. 그의 사진은 그의 영화와 묘하게 닮아있다.
특히 가장 인상적인 사진은 병마와 세월에 시달린 어느 거장의 당구치는 모습이었다. 낡은 스웨터 차림의 그에게서 여전한 지성과 우아함을 본다. 조금은 나이드는 것에 대해 용기가 생긴다. 현재의 나를 잘 싾아가면 노년의 나도 꽤 괜찮은 인간이 될 수 있을 듯 하다는.
추석에 시댁에 들어가니 시부모님의 아들을 향한 열렬한 눈빛이 느껴진다. 그런 눈빛들을 담아두라고 아마 명절은 있는 모양이다. 사진이라면 질색하는 나도 담아두고 싶은 순간들이 많아진다. 나의 사진속에 비친 나는 작은 인연도 소중히 하는 사람이로 보였으면 좋겠다.
책 얘기는 아니지만 주말에 혹성탈출;진화의 시작을 인상깊게 봤다. 최근 본 작품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자신이 애완동물'이냐고 묻는 모습이었다. 가족'처럼' 여겨지는 반려동물들을 보면서 때로 느끼는 슬픔은 한 존재로 자유롭게 자연스럽게 살지 못하고 인간처럼 살아야 하는 그들의 모습에 도시생활에 끼워맞추느라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내가 보이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성경의 한 구절처럼 작은 기도가 나온다. '하나님 저들은 저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나이다. 저들을 용서하소서'
몇 권에 대해서 쓰고 싶었는데 나머지 책들의 제목이 생각이 안나는 난관이... 귀가후 책더미를 바라보며 2탄을 작성해 봐야겠다.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른다고 하니 갑자기 생각난 이야기. 3월이면 아이가 태어날텐데 책더미는 어떻게 해야할까? 아이와 책더미의 공존은 가능할까? 3월 이후의 삶에 대한 무수한 걱정 중엔 이런 사소한 것들도 있다. 신랑은 내가 임신의 첫 소감을 '불쾌감'으로 표현하자 심기가 틀어졌다. 이런 몸상태에 6시에 일어나 출근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보지 않고서 나를 비난하는 것은 다소 부당할뿐더러, 무엇보다 세상에 나오지도 않은 체리만한 녀석의 눈치를 보며 내 소감을 말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여하간 체리만한 녀석과의 동거, 부풀어 오를 내 몸, 위기에 빠진 책더미 등 내 인생은 최대의 격변기를 눈 앞에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