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격사원
에가미 고 지음, 김주영 옮김 / 북하우스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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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가 들어 직장을 다니는 친구들이 하나씩 늘자, 예전엔 연예인 누가 좋다는 둥, TV는 무슨 프로가 재미있다는 둥 그런 얘기를 하던 녀석들이 점점 회사에서 일어난 갖가지 이야기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진상을 부리는 고객에서부터, 상사에 대한 험담까지. 남의 돈 벌어먹고 사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냐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한 친구의 이야기에 다른 친구들은 공감하며, 자신의 비슷한 경험을 털어놓기도 한다. 이 책 <실격사원>은 그렇게 직장생활을 하는 이라면 한 번쯤 겪어봤을(혹은 들어봤을) 이야기들로 구성된 소설이다.

  독특하게도 10개의 이야기의 제목은 십계명으로 되어 있다. 기독교의 십계명과 직장생활에서의 십계명은 기가막히게 잘 어울렸다. 예를 들어, '야훼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에서는 헤드 헌팅이라는 유혹을 당하는 주인공이 등장하고, '도둑질하지 말라'에서는 부하직원의 공을 자신의 공처럼 속이는 밉상스러운 인물이 등장하며,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에서는 월월화수목금금으로 평생 제대로 쉬지 못하고 은행에서 일하던 주인공이 퇴직당한 뒤 IT회사에서 일은 안하고 노는 것처럼 보이는 직원들을 바꾸겠다는 계획때문에 겪는 이야기 등이 등장한다. 

  에가미 고라는 저자는 다소 낯설어서 책 날개에 있는 작가 소개를 읽어봤더니 은행에서 일했던 경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총 10개의 에피소드 가운데 절반 이상에서 은행이 등장할 정도였다. 아마 작가의 경험도 경험이지만 폐쇄적인 조직을 보여주기에 은행만한 곳도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책을 읽으며 예전에 읽었던 (역시 은행원 출신 작가의) <은행원 니시키씨의 행방>이 떠올랐다. 그 책에 등장하고 있는 은행원들의 모습은 <실격사원>에 등장하는 은행원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저마다 좀더 실적을 쌓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나 설사 고객에게 위험을 떠넘기는 것이 되더라도 그들의 성공을 위해 고객은 그저 하나의 발판으로 이용하는 모습은 닮아 있었다. 하지만 <은행원 니시키씨의 행방>보다 <실격사원>쪽이 회사원들의 애환을 잘 풀어냈고 좀더 유머러스한 부분도 있는 것 같아 더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다. 

  직장생활을 하며 겪는 부당한 일들, 그리고 누구에게도 쉽게 얘기하지 못한 답답한 일들. 그런 이야기들이 <실격사원>에는 잘 담겨 있다. 주머니 속에 사표를 만지작거리며 하루하루를 견디는 이들에게 이 책이 잠시나마 일상을 탈출하게 도와줄 수 있게, 또 다른 이들의 이야기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게 해주지 않을까 싶었다.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주인공들의 이름만 한국식으로 바꾼다면 깜빡 속을 정도로 사실상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아 더 재미있게 읽은 것 같다. 작가 약력에 보니 <사장실격>이라는 책도 있던데 그 책도 왠지 재미있을 듯. 앞으로 좀더 다양한 에가미 고의 책을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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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의 집
가토 유키코 지음, 박재현 옮김 / 아우름(Aurum)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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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날과 잘 어울리는 푸릇푸릇한 표지에 끌려서 읽게 된 책. 가토 유키코라는 다소 낯선 일본 작가의 책이라 어떤 내용일까 궁금했는데, 표지처럼 풋풋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읽기 전에는 '꿀벌'이라는 단어때문에 순간 움찔하기도 했는데(어릴 때 벌에 쏘여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럴듯) 책을 읽으며 꿀벌이, 그리고 등장인물들이 한없이 사랑스러워졌다.

  도쿄에서 평범하게 살고 있던 리에는 어느 날 동거하던 연인 류가 훌쩍 떠나자 감기를 핑계로 회사를 며칠 쉰다. 좀체 다시 출근하고픈 마음이 나지 않았던 리에는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기 시작한다. 아빠의 자살 이후 줄곧 삐걱거리는 관계를 유지한 엄마와 떨어져 살고 싶었기에 이왕이면 입주해서 일할 수 있는 회사를 찾다가 눈에 띈 '꿀벌의 집'에 찾아가 작은 마을에 간다. 처음에는 어떻게 이런데서 살까라고 생각했지만 리에는 도쿄의 시끌벅적함 속에서도 외로움을느꼈던 이전과는 달리 면접 뒤 다시 도쿄에 올라와서도 계속 꿀벌의 집에서 느꼈던 분위기를 곱씹는 자신을 발견한다. 다행히 면접 합격 소식이 오고 리에는 꿀벌의 집에서 초보 양봉가로 살아가기 시작한다. 그곳에서 꿀벌의 집 사장이자 씩씩한 양봉가인 기세 씨를 비롯해 폭주족 출신의 무뚝뚝한 겐타, 세상을 무서워하는 아케미 등 저마다의 상처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양봉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던 리에는 양봉에 대해 하나씩 배워가는 한편 그 과정에서 자신을 누르고 있었던 마음의 상처도 조금씩 치유해가기 시작한다. 

  '꿀벌의 집'이라는 공간은 어떻게 보면 꿀벌들이 살고 있는 집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꿀벌과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집이라는 의미도 있는 것 같다. 여왕벌은 알을 낳는 임무가 있고, 일벌은 꿀을 모아오는 임무가 있듯이 꿀벌의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저마다의 역할이 있다. 각자 구역을 나눠 벌들을 관리하는 꿀벌의 집 사람들.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것 같지만 어느 정도 선을 넘지 않은 채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그저 협동하며 살아간다고 생각했던 꿀벌이 겨울을 나기 위해 더이상 필요가 없어진 수컷을 밀어내는 모습이나 말벌, 곰 등 다른 생물들과 살아가는 것처럼 우리 인간도 자신의 필요에 따라 살아가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으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고만고만한 삶을 살아왔던 리에는 꿀벌의 집에서의 생활을 통해 자신만의 족적을 남기며 살아가는 것을 선택한다. 그저 남이 떠미는대로 삶을 살았던 리에가 꿀벌의 집에서 조금씩 성장하며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과연 나는 얼마나 내 의지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조용한 시골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도시의 시끄러운 소리보다는 벌들의 윙윙거리는 소리에 익숙한 사람들이 등장인물이라 자칫 지루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꿀벌의 집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사건들이 지루할 새 없이 이어졌다. 그리 많지 않은 분량이라 그런지 후반부에 가면 약간은 흐지부지 얼렁뚱땅 마무리를 짓는 듯한 느낌이 들어 아쉬웠지만, 각각의 에피소드들이 재미있어서 한 편의 따뜻한 성장 드라마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자연을 통한 인간의 치유를 그리고 있는 작품이니만큼 따뜻한 오후에 공원에 앉아 이 책을 읽는 것도 꽤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표지도, 내용도 '아. 정말 봄이구나'라는 생각을 절로 들게 했던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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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아이들 새로고침 (책콩 청소년)
로버트 스윈델스 지음, 천미나 옮김 / 책과콩나무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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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F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더이상 노숙자는 낯선 개념이 아니다. 서울역을 비롯해서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지하철 역에 가면 신문지로 방을 만들어놓고 거주하는 사람을 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청소년 노숙자는 직접 본 적이 없어서(물론 TV에서는 가출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본 적이 있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 링크가 겪는 길거리 생활은 뭔가 충격으로 다가왔다.

  나름 평화롭게 살고 있었던 링크. 그런 링크에게 새 아빠가 생기며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다. 폭력을 휘두르는 새아빠에게서 쫓겨난 링크. 누나에게 신세를 져보기도 하지만, 매형의 시선도 곱지 않아 결국 런던으로 떠난다. 런던에만 가면 금방 일자리를 구해 자립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도 잠깐. 기껏 구한 방에서 쫓겨나다시피하고, 결국 길거리에 나앉게 된다. 어떻게 길거리에서 생활해야했는지 몰랐던 링크는 다른 노숙자들에게 당하며, 점점 살기 힘들어진다. 그러던 중 우연히 만난 또래 노숙자 진저. 그에게서 링크는 길거리 생존 방법을 하나씩 익히게 된다. 진저와 함께라면 거리도 무섭지 않다고 생각했던 링크. 그러던 어느 날 진저가 갑자기 사라지고 링크는 혼자 남는다. 뒤이어 몇 명의 아이들이 사라지고, 링크는 진저를 찾기 위해 나름대로 조사를 시작하는데...

  이 책은 링크의 이야기와 연쇄살인범인 전직 육군 장교 쉘터의 이야기가 교차되며 진행된다. 노숙자는 사회의 쓰레기라고 생각하며 자신은 사회를 위해 청소를 해주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쉘터. 그의 광기는 너무나도 섬뜩하게 느껴졌다. 한편 현실은 시궁창이라도 언젠가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꺼라고 희망을 놓지 않았던 링크의 이야기는 너무 안타까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하철에서 노숙자를 보면 인상을 찌푸리고, 그들을 피해다니기 때문이다. '사지가 건강한데 일을 해서 돈을 벌 생각은 안하고... 쯧쯧'하며 노숙자들을 보며 혀를 차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정작 그들이 끝없이 밑바닥 삶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것은 사회가 한 번 굴레를 벗어난 이들에게 관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가 더럽고 냄새나는 그들을 고용할 것이며, 누가 그들을 배려해주겠는가. 책을 읽으며 나도 어쩌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쉘터처럼 내 안에서 노숙자들을, 그들의 인격을 죽인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 이 책을 접했을 때는 꽤 얇은 분량때문에 '가볍게 읽을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책을 읽다보니 얇지만 무거운 주제의식을 느낄 수 있었다. 인간다움, 그리고 사회로부터 쫓겨난 사람들에 대한 이해, 무엇이 공공선을 위한 것인가 등 많은 생각을 하며 읽어갈 수 있었다. 링크의 이야기와 쉘터의 이야기가 교대로 등장하고 있는 점도 긴장감 있는 진행에 도움을 준 것 같다. 청소년 문학이라 한 편으로는 아이들이 이렇게 사회의 어두운 면을 꼭 알아야할까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오히려 이런 어두운 면을 알고 이를 바꾸려고 노력한다면 사회가 좀 더 밝아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자라면서 한 번쯤은 가출을 생각할 아이들에게 거친 길거리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도 느끼게 해줄 것 같았다. 행복과 희망을 잃어버리고 사회에서 내몰린 사람들. 그들을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우리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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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9-03-30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마음이 무거워지는 리뷰네요.

이매지 2009-03-30 20:23   좋아요 0 | URL
책의 분위기자체는 무겁지 않았는데,
생각할거리는 참 많았어요.
 
휘파람 반장 카르페디엠 13
시게마츠 기요시 지음, 김은진 옮김 / 양철북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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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만난 시게마츠 기요시의 작품. 시게마츠 기요시의 작품을 읽을 때면 항상 평범한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한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지만 그 일상성이 참 따뜻하다는 것을 느낀다. 평범한 사람들이 어떤 사람을 만나거나 어떤 사건을 겪으면서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갖게 되는 이야기는 책을 읽는다는 느낌보다는 친구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편안하고, 그래서 더 공감하게 된다. 이번 이야기인 <휘파람 반장>에서도 어린 시절 한 번쯤 있었음직한 말괄량이 여학생에 관한 이야기라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재미있게 읽어갔다. 

  어느 날 아빠에게 전학생이 올 지도 모른다는 얘길 듣게 되는 츠요시. 아빠와 절친했던 죽은 친구의 아이로 성별도 이름도 모르지만 그냥 동갑내기라는 마코토. 이후 츠요시는 6학년도 오르지 못한 나무에 올라갔다더라, 외발자전거를 능숙하게 타더라 등 마코토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된다. 그러던 중 6학년 껌딱지단이 2학년 남자아이를 괴롭히는 모습을 보며 도와줄까 도망갈까 고민하고 있던 차에 외발자전거를 탄 아이가 나타나 껌딱지단을 혼내주는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 아이와 같은 반이 된 츠요시. 이름에서 풍기는 분위기와는 달리 의외로 여자아이였던 마코토. 전학을 와서 자기 소개를 하며 당당히 반장이 되겠다고 선언한다. 이후 마코토는 당당하게 어려움에 빠진 아이들을 돕기도 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실질적인 반장으로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강하다는 의미를 담은 츠요시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실제로 츠요시는 전형적인 모범생이다. 옳다고 생각하는 일도 자신의 뜻대로 밀고나가지 못하고, 옳은 일이지만 반대에 부딪힐 것을 알면서도 학급임원이니까 반 아이들의 합의를 통해 결정해야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마코토는 반 아이들의 시선은 개의치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정의를 구현해간다. 결국 마코토를 처음 만났을 때만해도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를 보며 도망할 생각을 했었던 츠요시는 마코토와 헤어질 무렵에는 질 것을 알면서도 곤란에 처한 아이를 구해주려 뛰어든다. 마코토를 만나 자신의 이름에 걸맞게 용기를 갖고 살아가게 된 츠요시. 마코토와의 만남은 그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하나의 추억으로 남는다.

  겉으로 보기엔 씩씩해보였지만,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하고 할머니의 병수발을 해야하는 마코토는 보기완 달리 아픔을 가진 여자아이였다. 눈물이 날 것 같을 땐 휘파람을 불다보니 어느새 누구보다 휘파람을 잘 불게 된 마코토. 강함 속에 숨겨진 그 연약함을 보며 마코토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꼬옥 안아주고 싶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친구는 슬쩍 따돌리는 모습이나 행동을 할 때도 다른 친구들의 눈치를 살피는 모습, 동급생 사이에서는 깨깽하면서도 어린 하급생들을 괴롭히는 모습, 선생님에게 고자질하기보다는 스스로 일을 해결하고 싶어하는 모습 등을 보며 아이들의 세계도 어른들이 사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구나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초등학교 고학년 학생에서부터 나같은 철 없는(?) 어른까지 누가 봐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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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흐트와 아들
빌렘 얀 오텐 지음, 유동익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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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스카 와일드의 재림'이라는 문구에 혹해서 읽게 된 책인데 확실히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처럼 한 폭의 그림과 그에 얽힌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비슷했지만,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달라서 비슷한 소재였지만 유미주의 작가였던 오스카 와일드와는 다른 분위기를 맛볼 수 있었다. 네덜란드 최고 권위의 리브리스 문학상 수상작품답게 이 책은 독자에게 많은 예술가의 열정이나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 탄생과 부활이라는 종교적인 메시지까지 많은 생각할 거리를 남겨줬다. 

  가로 2미터, 세로 120센티미터라는 크기 때문에 평범하지 않은 인생을 살게 된 캔버스. 평범한 그림을 그리기엔 너무 큰 크기의 캔버스라 오랜 시간 주인을 만나기를 조용히 기다린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을 살 것 같지 않았던 한 남자가 자신을 구매해간다. 초상화가였던 그(펠릭스 빈센트)는 캔버스를 샀지만 오랜 시간 그는 캔버스에 그림을 그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던 중 거부인 발레리 스페흐트가 자신의 죽은 아들인 싱어의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고, 그동안 자신이 원하던 저택을 구입할 돈을 모으고 있었던 빈센트는 이번이 마지막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있는 사람만 그린다는 자신의 원칙까지 깨고 싱어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커다란 캔버스에 그려지는 싱어의 모습.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몇 가지 의문점들이 발생하기 시작하는데...

  아무것도 없는 하얀 캔버스. 그 위에 하나의 생명을 그려내는 빈센트. 그를 캔버스는 '창조자'라 부른다. 창조자는 빈 캔버스 위에 한 사람의 모습을 오롯이 그려내 생명을 부여한다. 사람의 육체는 언젠가 사그라지지만, 그림 위에 그려진 인물은 또 다른 생명을 얻어 영원히 살아간다. 화가를 창조자라고 부르는 것에서부터 캔버스 위에 싱어라는 아이를 표현하는 과정에서 싱어가 테인이 되고, 아들인 스타인이 되는 순환적인 과정을 통해 한 폭의 그림은 생명을 부여받는다. 결국 캔버스 위에 그려진 싱어는 불타버리지만, 싱어는 반으로 잘라진 폴라로이드 사진으로, 그리고 빈센트의 아들인 스타인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아내가 죽을 위기를 넘기며 출산을 하듯 빈센트 또한 자신의 혼을 쏟아부어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낸다. 다른 사람의 연인을, 다른 사람의 아들을 그리지만 빈센트는 자신의 애정을 담아 자신의 눈으로 그림을 그린다. 결국 그는 타인을 그리고 있지만, 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자신의 어린 시절과 대면하게 된다. 

  종교적인 색채도 엿보이고(창조자라는 명칭부터가) 철학적인 내용이 많은 책이라 페이지는 술술 넘어가도 한 번 읽어서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 아닐까 싶다. 캔버스가 화자라 자신이 보고 들은 것만 전달하기 때문에 사건의 단편적인 내용만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라 독자 역시 제한된 내용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싶다. 각각의 상징물을 통해 작품을 분석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은데 아직 내 능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시간이 지나고 한 번쯤 다시 읽으면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작품. 두고두고 읽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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