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고 동맹 문학동네 청소년문학 원더북스 11
미타 마사히로 지음, 심정명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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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씨가 꾸물꾸물하던 날, 뭐 읽을만한 책이 없을까 하고 두리번거리다가 연한 연두색이 주는 따뜻한 색감에 빠져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문무과학성 선정 국어과 추천도서, 월간 <책의 잡지> 서점인의 추천 도서 등등 크고 작은 곳에서 '추천도서'로 선정된 책. 얇고 가벼운 책을 펼치자 중, 고등학교 시절의 아련함이 떠올랐다. 

  초등학생일 때 비슷한 나이의 아이가 자살하며 "어차피 모두 죽어버린다"고 벽에 남긴 유서를 본 뒤 아등바등하며 살아봤자 죽어버리면 그걸로 끝, 이라고 생각하는 료이치. 피아니스트를 꿈꾸지만 학교에서는 지극히 평범하게 생활하고 있는 료이치 앞에 학교 야구부의 4번 타자로 인기만점인 데쓰야가 나타난다. 평소 안면도 없었던 데쓰야는 무턱대고 료이치에게 자신의 경기를 비디오로 찍어 달라는 부탁 아닌 부탁을 한다. 뭐에 홀린 듯이 데쓰야의 부탁을 들어준 료이치, 그리고 며칠 후 데쓰야에 손에 이끌려 간 병원의 중환자실에서 한 여자아이(나오미)를 만난다. 어차피 열심히 살아봤자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료이치와 자신에게 남은 것은 이제 죽음뿐이라고 생각하는 나오미. 그리고 그때 그때 현실에 충실한 데쓰야. 이 어울리지 않는 세 사람의 따뜻한 우정이 시작된다. 

  성장소설(혹은 청소년소설)을 많이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성장소설 하면 따뜻함, 씩씩함, 밝음 등 긍정적인 키워드가 떠올라서 좋아한다. 하지만 이 책에는 굉장히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어차피 모두 다 죽어버린다고 생각하기에 자신의 삶을 약간은 방관자처럼 살아가는 료이치. 아무도 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고, 혹은 알고 있지도 않는다. 똘똘한 동생이 있어 상대적으로 부모의 관심 밖인 것도 그의 이런 상황에 한 몫 더한다. 그의 이런 극단적인 존재론적 사고를 바꿔주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앞으로의 삶을 장담할 수 없는 나오미이다. 나오미를 통해 료이치는 자신에게는 앞으로 삶을 위한 가능성이 있음을 알게 되고, 그동안 약간은 어중간한 마음으로 준비했던 음악고등학교 진학에도, 그리고 다소간 불편했던 가족과의 관계에도 이전과는 달리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사실 불치병에 걸린 소녀를 두고 벌어지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 소설이 신파로 흐르지 않을까 걱정했다. 어디까지 내가 이 책을 읽으려 했던 이유는 꿉꿉한 기분을 전환하고 싶어서 였으니까. 하지만, 료이치의 부정적인 사고를 병에 걸렸지만 밝고 씩씩한 나오미와 겉으로는 강하지만 속은 여린 데쓰야가 순화시켜줬다. 죽음 앞에서도 담담하게 그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 죽음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법을 이 책은 따뜻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책의 제목인 이치고 동맹은 일본어로 이치는 1을, 고는 5를 의미하는 데서 왔다. 15살인 두 소년이 나오미를 잊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만든 동맹이 바로 이치고 동맹이다. 나이가 약간(?) 오버되긴 하지만, 그들만 허락해준다면 나도 이치고 동맹에 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간다는 것, 분명 힘든 일도 있고, 괴로운 일도 있고, 슬픈 일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축복이고, 기회라는 생각에는 나도 동감하니까 말이다. 상콤한 성장소설은 아니었지만 삶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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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i 2009-08-29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차피 모두 죽어버린다."

참 일본어스러운 표현인 것 같아요... (일본어의 매력을 분석한 책은 혹시 없을까요?)

이매지 2009-08-29 23:29   좋아요 0 | URL
일본어 특유의 표현을 분석한 책.
번역에 대한 책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일본어에 한정된 책은 아직 못 본 듯.
한 권쯤 나와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

기인 2009-08-29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출판사 일은 잘 적응하고 계신가요? ㅎㅎ 역시 이매지님, 출판사에 일하시면서도 책에 질리지 않고 사시는 모습을 보니, 잘 하고 계신 것 같네요 ^^ 문학동네는 특히 참신한 소설들 많이 내니까 좋으시겠어요 :)

이매지 2009-08-29 23:31   좋아요 0 | URL
워낙 다양한 책들이 많이 나와서 질리지 않아요 ㅎㅎㅎ
고전문학을 보다보니 외국소설이나 현대문학은 재미있다능 ㅎㅎ
 
검의 대가 Mr. Know 세계문학 18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지음, 김수진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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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 전에 <뒤마 클럽>이나 <플랑드르 거장의 그림>, <남부의 여인> 등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의 책 몇 권을 읽은 적이 있다. 처음에는 독특한 소재를 바탕으로 한 그의 책이 재미있었는데, 몇 권 읽다보니 너무 통속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를 내려놓았다. 다시 만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그의 작품을 이제와 새삼 읽은 것은 순전히 재미있다는 남친님의 추천때문이었다. 뭐 기왕에 추천도 해줬으니 대화 거리라도 만들까 싶어서 읽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난무하는 검술용어에 기가 죽었지만 읽다보니 서서히 이 책에 빠져들게 되었다.

  19세기 말. 정국이 혼란스러웠던 스페인에서 홀로 살고 있는 검술 교사 하이메 아스타를로아. 반평생을 귀족의 자제들을 가르치며 살아왔지만, 혼란스럽고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그에게 일은 맡기는 이들은 점점 줄어들고, 사람들은 점점 검술이라는 고리타분한 전통을 경시한다. 그렇게 서서히 인생이 저물어가던 하이메 앞에 아름다운 한 여인(아델라 데 오테로)이 등장해 하이메 전매특허의 기술인 '2백 에스쿠도' 검법을 가르쳐달라고 한다. 처음에는 여자라는 이유로 그녀의 청을 거부했지만, 그녀가 굉장한 검술가라는 걸 알게 되어 그녀에게 '2백 에스쿠도' 검법을 가르쳐준다. 그녀와 칼을 맞대며 점점 그녀에게 빠져드는 하이메. 하지만 그녀는 하이메에게 그가 검술을 가르치는 한 후작을 소개시켜달라고 조르고, 그녀와 후작은 곧 연인사이가 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후작은 '2백 에스쿠도' 검법에 의해 살해당한 채 발견되고, 아델라 데 오테로 또한 살해당한 채 발견된다. 이에 후작과 오테로에 대한 복수를 위해 하이메는 자신의 목숨을 건 인생 최대의 대결을 시작한다.

  사실 이 책은 따지고보면 굉장히 통속적이다. 자기 밖에 모르고 살던 주인공이 우연히 팜므파탈인 여인을 만나 자신이 그동안 지켜왔던 원칙과 신념을 흔드는 사건을 겪게 된다는다는 점이나, 자신을 배신하지 않을꺼라고 생각했던 인물이 결국 돈 앞에 흔들리는 점 등 읽다보면 앞으로 대충 어떤 전개가 진행되겠구나라는 예상이 되는 책이다. 하지만 그런 통속적이고, 빤한 플롯이 '펜싱'이라는 낯선 소재와 '하이메'라는 캐릭터를 만나 예스런 분위기와 함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으로 다가왔다.  

  이 책의 시대적, 공간적 배경인 이사벨 2세 치하의 스페인에 대해 알고 있다면 이 책을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겠지만, 이사벨 2세에 대해, 스페인에 대해, 심지어는 이 책의 주요 소재인 펜싱에 대해 전혀 배경지식이 없어도 재미있게 읽어갈 수 있는 책이다. 지극히 통속적이고, 대중적인 소설이라 딱 기대한만큼의 재미를 얻을 수 있어서 아쉬웠지만, 하이메라는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났다는 것으로 아쉬움을 덜어야겠다. 플롯 자체보다는 인물의 심리묘사가 눈에 들어왔던 작품이었다. 기존에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의 작품을 즐겨 읽었던 독자라면, 혹은 내 남친처럼 검술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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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 오늘의 일본문학 6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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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동안 열 권을 읽으면 다섯 권은 일본 소설이었을 정도로 일본 소설에 빠져 지냈던 적이 있었다. 무엇보다 '가볍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일본 소설의 장점이지만 비슷한 분위기의 책을 연달아 읽다보니 어느새 시들해져버렸다. 그렇게 일본 소설에 대한 애정(?)이 식었을 무렵에 나왔던 요시다 슈이치의 <악인>은 어쩔 수 없이 책장에 고이 잠들어 있었다. 그러다 이번 주말 '뭐 그냥 가볍게 읽을만한 책 없나~'하며 책장을 살피다가 골랐는데 오랫만에 읽어서 그런지 페이지가 더 술술 넘어간 것 같다.

  보험설계사로 일하는 20대 여성의 요시노는 같이 어울리는 동료들에게는 거짓말을 하며 적당히 자신을 꾸미지만 실은 만남 사이트를 통해 남자를 만나곤 한다. 그녀는 동료들에게 대학생인 남자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말했지만, 다음날 외딴 도로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그리고 그날 밤 요시오를 만난 두 남자. 젊은 사람답지 않게 인생을 즐길 줄 모르며 조부모의 뒤치닥거리를 하며 살아가는 유이치, 부잣집에서 태어나 타인에게 상처주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마스오. 과연 요시노가 두 남자를 만난 그 날, 이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사실 책을 읽기 전에는 "감히 나의 대표작이라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는 작가의 말에 혹했다. 요시다 슈이치의 작품을 많이 접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간 읽었던 그의 소설이 평범한 일상의 발견 수준이었기에 대체 '악인'이라는 제목으로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갈까 궁금했는데, 의외로 살인사건이라는 비일상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어서 놀랐다. 평소에 다뤘던 젊은이들의 이야기가 아닌 저마다의 상처를 안고 있는 외로운 사람들의 이야기가 하나의 살인사건을 통해 보여지고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며 과연 '악인'이라고 규정짓는 것이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했다. 단순히 사회적인 규범을 어기고 범죄를 저지르는 것만이 악일까? 아니면 자신이 타인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며 남을 깔보는 사람이 악인일까? 아니면 거짓으로라도 자신을 그럴듯하게 포장해 속이는 사람이 악인일까? 이 책 속에는 참 못된 사람들이 많이 등장했지만 그들 모두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서 악인일 수도 아닐 수도 있었다. 다시 말해, 소설 속의 등장인물뿐만 아니라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사람은 모두 악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진짜 악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피해자가 되고 싶어한다는 책 속의 말처럼 어쩌면 사람들은 자신 외에 다른 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혹은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피해를 끼칠 때 그를 악인으로 규정하고 자신을 피해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어 씁쓸했다. 

  요시다 슈이치 특유의 소설을 예상했던 터라 의외의 전개라 살짝 놀라기도 했고, 마치 영화를 보는 듯 전개되는 것도 좋았지만, 중간중간 인터뷰처럼 형식이 바뀌는 점이나 서술자의 논평이 들어가는 부분, 선과 악을 너무 명징하게 설정한 점 등은 아쉬웠다. 뭐 그래도 어찌됐건 원래의 목표(?)대로 가볍게 읽기엔 더할나위 없는 선택이었던 것 같다. 요시다 슈이치의 대표작으로 꼽기엔 다소 아쉽지만 그냥 적당히 편하게, 적당히 재미있는 책이 읽고 싶다면 손색이 없을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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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처방해드립니다
카를로 프라베티 지음, 김민숙 옮김, 박혜림 그림 / 문학동네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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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그래도 책이 고팠는데 <책을 처방해드립니다>라는 제목에 혹해서 읽게 된 책. 꽤 얇은 분량이라 금방 읽을 수 있겠거니 예상은 했지만 안그래도 얇은 책이 재미있기까지해서 페이지 넘어가는 줄도 모르고 후딱 다 읽어버렸다. 

  좀도둑 루크레시오는 동료인 수프가 골라놓은 집을 털기 위해 한 집앞에서 서성인다. 하지만 수프는 올 생각을 안하고 결국 루크레시오는 혼자 일하기로 결심하고 담을 넘어 집안에 들어간다. 그리고 그순간 샹들리에에 갑자기 불이 들어오고 머리칼 한 올 없는 대머리 꼬마가 등장한다. 꼬마에게 들켰다는 사실에 놀란 것도 잠시. 어떻게 된 일인지 이 꼬마는 루크레시오의 이름과 별명까지 이미 알고 있고, 게다가 아버지의 대역을 해줄 사람이 필요하다며 루크레시오에게 아버지처럼 생활을 해달라는 기괴한 요구를 한다. 이 말도 안되는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도둑질을 하려다 걸린 판이라 빠져나갈 수 없어 결국 꼬마의 아버지 노릇을 하게 된 루크레시오. 그 뒤로 도무지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일들을 연달아 겪기 시작한다.

  스페인의 대표적인 아동, 청소년 문학상인 '엘 바르코 데 바포르' 수상작이라고 하는데, 대개 무슨 수상작이라고 하면 약간은 교훈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지만 이 책은 그렇게 무게를 잡지 않는다. 오히려 재미있는 이야기를 통해 어린 독자들에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게 이끌어준다. 각 장의 제목은 '늑대야, 개야?' '서점이야, 약국이야?' '죽은 거야, 산 거야?' 등의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두 개의 질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과 실제 현실이 꼭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서 이것일 수도 저것일 수도 있는 이중적인 상황이 이 책 전체를 흥미롭게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얼핏 보기엔 괴상해 보이고 엉뚱한 이야기지만 정작 그 속을 들여다보면 생각했던 것보다 평범한 이야기가 등장하기도 하고, 반대로 평범해 보였던 이야기가 허를 찌르는 상상력으로 똘똘 뭉쳐 있어서 어디 한 부분 지루할 틈 없이 읽어갈 수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책에 걸맞게 작가의 정체(?)도 알쏭달쏭하다. 뉴욕 과학아카데미의 수학자이면서도 50여 권이 넘는 문학작품을 쓴 작가이기도 하고, 이탈리아에서 태어났지만 스페인에서 자랐으며, TV프로그램이나 연극을 기획하고 연출했다는 작가 소개는 책만큼이나 호기심을 동하게 했다. 작가 자신이 어느 하나에 규정되지 않은 삶을 살았기에 이런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저런 질문과 상상력의 원천을 던져주지만 정작 그 답을 책 속에서 명확하게 제시해주지 않아서 독자가 상상의 나래를 한껏 펼칠 수 있게 도와주는 책. 책의 띠지에 적혀 있는 문구처럼 '책이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환자(청소년)'라면 이 책의 처방을 따라봄은 어떨까? "만약 그 책이 좋은 책이라면, 그러니까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생각하게 만들고, 새로운 질문을 하게 만든다면, 나중에 우리가 현실세계로 돌아왔을 때 우리를 좀더 강하고 지혜롭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책 속의 말처럼 분명 이 책은 우리를 치료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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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당신의 인생을 구할 것이다
A.M. 홈스 지음, 이수현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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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샛노란 표지에 확 끌려서 이 책을 처음 잡았을 때만 해도 이 책이 이렇게 웃길 줄 몰랐다. 미국드라마 <L 워드>의 각본을 썼다는 저자는 온통 비현실적인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이건 뭐 어디 한 번 갈데까지 가보자는건가' 싶을 정도로 말도 안되는 사건들이 연달아 만들어낸다. 처음에는 다소 심드렁하게 읽었지만,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면서 책의 두께때문에 가방에 공간이 없거나말거나 며칠동안 이 책을 끼고 살 정도로 푹 빠졌다. 

  가정부와 트레이너, 영양사가 집으로 찾아오고, 직업도 집 밖으로 나갈 일이 없어 몇 달째 집안에서만 지내고 있는 주인공 리처드 노박. 나름 정해진 규칙을 지키며 어디까지나 예측가능한 범위에서만 살던 그는 어느날 정체 모를 통증을 느낀다. 여차저차해서 응급실에 실려왔지만 별다른 문제점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검사 결과가 나와 바로 퇴원한다. 집으로 돌아가던 중 그는 우연히 한 도넛 가게에 끌려 택시를 세우고 그 곳에 들어간다. 만약 바로 집으로 갔더라면 다시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일상이 펼쳐졌겠지만, 도넛 가게에 들어서며 그의 인생은 바뀌기 시작한다. 그저 고용-피고용적인 인간관계를 맺고 있었던 그에게 도넛 가게의 주인 앤힐은 친구가 되어 준다. 앤힐과의 만남으로 세상에 한 걸음 발을 내딛는 노박. 그가 그렇게 만난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 책에 그려지고 있다.  

  평온하게 살고 있던 노박이 어느날 갑자기 고통을 느낀 것과 노박이 살고 있는 집 앞에 큰 구덩이가 생기고 이게 점점 커진다는 사실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둘 다 '왜' 그런 것인지는 끝까지 설명을 나오지 않지만, 어쨌거나 노박의 인생은 두 사건(고통과 구덩이)때문에 변하기 시작한다. '대체 무슨 맛으로 먹나' 싶은 영양적 밸런스를 맞춘 파우더 정도만 먹는 노박의 모습은 정말인지 비인간적이다. 타인과의 대화도 거부한다는듯이 방음이 잘 되는 헤드폰을 끼고 러닝머신을 하고, 주가를 체크하는 모습은 영 정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만의 공간에서 생활했던 노박은 '고통'을 없애기 위해 병원에 가기도 하고, 명상원에 들어가기도 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며 세상과 교류한다. 그 과정에서 그는 식료품 매장에서 울고 있던 여자를 가사에서 해방시켜 주기도 하고, 뉴욕에서 자동차를 타고 로스앤젤리스까지 여행을 한 아들을 만나 그동안 쌓였던 감정과 대면하기도 한다. 노박은 이전과는 180도로 달라져 '어떻게 남한테 그렇게까지 해줄 수 있나'라고 생각될 정도로 남을 도우며 살아간다. 

  사람들이 책을 읽는 이유중 하나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기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온통 비일상적인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어 정말 '소설'을 읽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뭐가 이렇게 황당해'가 아니라 '야, 이거 밑도 끝도 없는 얘긴데 희안하게 재밌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간간이 등장하는 유머에서는 정말 혼자 빵터져서 키득거리기 일쑤였다. <이 책이 당신의 인생을 구할 것이다>라는 다소 강렬한 제목처럼 이 책이 누군가의 '인생'을 구해줄 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책은 누군가의 '일상'을 구해줄 것이라는 것이다. 매일 똑같은 생활에 지루했던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으며 눈이 번쩍 뜨이고, 가슴이 뻥 뚫린 기분을 맛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책 읽기에 시들해진 사람이라면, 뭔가 일탈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이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에 빠져보는 것도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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