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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제왕의 생애 (반양장)
쑤퉁 지음, 문현선 옮김 / 아고라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중국 소설은 왠지 딱딱한 이미지라 꺼렸었는데 <허삼관 매혈기>나 <사람아 아, 사람아!>, <닭털 같은 나날> 등의 현대 중국 소설을 읽으면서 나의 이런 편견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최근 국내에 많이 소개되고 있는 쑤퉁을 알게 되었고 여러 작품 중에 줄타기 광대가 되는 왕의 이야기를 그린 <나, 제왕의 생애>가 끌려 읽기 시작했다.
자신보다 여러 면에서 제왕의 면모를 가졌던 장자인 단문을 제치고 막내 단백은 열네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섭국의 제왕이 된다. 왜 단문이 아니고 자신이 왕위에 앉은 것인지 열등감에 시달리며, 단백은 자신을 대신에 섭정을 하는 황보부인과 맹부인이 국정을 도맡아 처리하자 자신은 결국 허울뿐인 왕임을 느끼게 된다. 사랑하는 여인과 혼인을 하지 못하고, 성 안에 갇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직 누군가를 죽이라고 명령을 하는 것 뿐. 때문에 단백은 새를 보며 자유를 꿈꾸고, 내시 연랑과 함께 몰래 빠져나가 본 줄타기를 꿈꾼다. 궁 안에서 보이지 않는 줄을 위태롭게 걷고 있었던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섭왕이라는 운명에서 벗어나 현실에서의 줄타기를 갈망한다. 단순히 최고 권력자에서 줄타기 재주꾼이 된 단백의 이야기를 그리는데에서 그치지 않고, 권력에 자신의 목숨을 거는 이, 상황이 변하자 성품마저 변해버린 이, 돈 몇 푼에 자식을 파는 이 등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을 보여주며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게 해줬다.
이 책의 장르를 딱 하나만 정하라면 역사 소설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 <나, 제왕의 생애>에는 온갖 장르가 들어 있다. 궁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질 수 있을만한 모든 요소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어떤 부분에서는 무협지가 됐다가, 어떤 부분에서는 한 남자를 두고 벌어지는 여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애정 소설이 됐다가 하는 식으로 소재에 따라 장르적 특성을 바꾸며 이야기를 풀어갔다. 저자는 이런 방식을 통해 독자가 지루하지 않게 완급을 조절해서 자칫하면 산만해질 수 있는 이야기를 줄타기를 하듯이 아슬아슬하게 긴장감을 유지하며 풀어간다.
주인공 단백은 궁 안에 갇혀 지극히 타성에 의한 삶을 살아간다. '내가 무슨 빌어먹을 개 방귀만도 못한 왕이란 말이냐? 나는 하늘 아래 가장 유약하고 무능하며, 또한 가장 가련한 제왕이로구나. 어릴 때는 유모와 환관, 궁녀 들이 하라는 대로 했고, 글을 깨우칠 무렵에는 승려 각공이 하라는 대로 했으며, 왕이 되어서는 황보부인과 맹부인이 하라는 대로 했다. 이제 나라의 정세가 크게 변하여 민심이 흉흉하고 여기저기서 반란을 일으키고 있으니 모두 다 늦었구나. 한 자루 칼이 내 목을 노리고 달려드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나는 그저 여기서 한숨만 내쉬고 있을 뿐이다.'(p.217)라고 스스로 말할 정도로 그는 자유롭게 살고 싶어하지만 섭왕이라는 굴레에 갇혀 그저 살아갈 뿐이다. 하지만 결국 단문에 의해 섭왕의 자리를 뺏기고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채 평민으로 살아가게 되며 그는 차츰 자유를 경험하게 된다. 궁 안에서의 생활의 마지막 끈이었던 연랑과 헤어져 평범한 사람으로 겪는 이야기들은 안타깝고, 애처로웠지만 오히려 그렇게라도 그렇게 꿈꾸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이 행운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봤다. 한 때 섭왕의 지위에 있다가 평민이 되었다가 미친 놈 취급을 받다가 줄타기 왕이 된 단백. 줄을 타고, <논어>를 읽으며 지내는 그의 남은 나날들이 부디 행복하기를 책을 놓으며 바랐다.
다소 아쉬움도 있었지만 쑤퉁이 앞으로 어떤 메시지가 담긴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것인지 호기심을 불어넣기에는 충분했던 작품이었다. 앞으로 이어질 쑤퉁의 작품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