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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 ㅣ 오늘의 일본문학 6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1월
평점 :
한동안 열 권을 읽으면 다섯 권은 일본 소설이었을 정도로 일본 소설에 빠져 지냈던 적이 있었다. 무엇보다 '가볍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일본 소설의 장점이지만 비슷한 분위기의 책을 연달아 읽다보니 어느새 시들해져버렸다. 그렇게 일본 소설에 대한 애정(?)이 식었을 무렵에 나왔던 요시다 슈이치의 <악인>은 어쩔 수 없이 책장에 고이 잠들어 있었다. 그러다 이번 주말 '뭐 그냥 가볍게 읽을만한 책 없나~'하며 책장을 살피다가 골랐는데 오랫만에 읽어서 그런지 페이지가 더 술술 넘어간 것 같다.
보험설계사로 일하는 20대 여성의 요시노는 같이 어울리는 동료들에게는 거짓말을 하며 적당히 자신을 꾸미지만 실은 만남 사이트를 통해 남자를 만나곤 한다. 그녀는 동료들에게 대학생인 남자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말했지만, 다음날 외딴 도로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그리고 그날 밤 요시오를 만난 두 남자. 젊은 사람답지 않게 인생을 즐길 줄 모르며 조부모의 뒤치닥거리를 하며 살아가는 유이치, 부잣집에서 태어나 타인에게 상처주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마스오. 과연 요시노가 두 남자를 만난 그 날, 이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사실 책을 읽기 전에는 "감히 나의 대표작이라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는 작가의 말에 혹했다. 요시다 슈이치의 작품을 많이 접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간 읽었던 그의 소설이 평범한 일상의 발견 수준이었기에 대체 '악인'이라는 제목으로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갈까 궁금했는데, 의외로 살인사건이라는 비일상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어서 놀랐다. 평소에 다뤘던 젊은이들의 이야기가 아닌 저마다의 상처를 안고 있는 외로운 사람들의 이야기가 하나의 살인사건을 통해 보여지고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며 과연 '악인'이라고 규정짓는 것이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했다. 단순히 사회적인 규범을 어기고 범죄를 저지르는 것만이 악일까? 아니면 자신이 타인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며 남을 깔보는 사람이 악인일까? 아니면 거짓으로라도 자신을 그럴듯하게 포장해 속이는 사람이 악인일까? 이 책 속에는 참 못된 사람들이 많이 등장했지만 그들 모두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서 악인일 수도 아닐 수도 있었다. 다시 말해, 소설 속의 등장인물뿐만 아니라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사람은 모두 악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진짜 악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피해자가 되고 싶어한다는 책 속의 말처럼 어쩌면 사람들은 자신 외에 다른 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혹은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피해를 끼칠 때 그를 악인으로 규정하고 자신을 피해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어 씁쓸했다.
요시다 슈이치 특유의 소설을 예상했던 터라 의외의 전개라 살짝 놀라기도 했고, 마치 영화를 보는 듯 전개되는 것도 좋았지만, 중간중간 인터뷰처럼 형식이 바뀌는 점이나 서술자의 논평이 들어가는 부분, 선과 악을 너무 명징하게 설정한 점 등은 아쉬웠다. 뭐 그래도 어찌됐건 원래의 목표(?)대로 가볍게 읽기엔 더할나위 없는 선택이었던 것 같다. 요시다 슈이치의 대표작으로 꼽기엔 다소 아쉽지만 그냥 적당히 편하게, 적당히 재미있는 책이 읽고 싶다면 손색이 없을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