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귀신의 노래 - 지상을 걷는 쓸쓸한 여행자들을 위한 따뜻한 손편지
곽재구 지음 / 열림원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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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80쪽
1979년 6월 나는 군에서 제대했다. 친구 나해철의 어머님이 나를 찾았다. 어머님은 내게 돈 5만 원을 주셨다. 이걸로 방을 하나 얻고 싸로가 연탄을 사렴. 어머님의 말씀이 이어졌다. 내가 얼마나 힘들게 돈을 버는 줄 알지? 이 돈은 뒤에 꼭 갚아야 한다. (...)
그해 나는 50만 원의 상금을 받았다. 국립대학 3학년이었던 나의 등록금은 8만 몇천 원이었으니 이 상금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제일 먼저 나해철의 어머님을 찾아갔다. 고맙습니다 어머님. 내가 말했을 때 어머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난 그 돈 돌려받을 생각이 없었구나. 젊은 놈이 자존심 상할까봐 꼭 갚으라고 얘기했지.

89쪽
나는 그 무렵 한참 쓰고 있던 시의 제목으로 '남광주역에서'가 아닌 '사평역에서'를 선택했다. 만약 이 시를 '남곽주역에서'라고 했다면 그 시적 환기력은 훨씬 약해졌을 것이다. 상상력은 현실 속에서 태어나지만 상상력은 강력한 현실을 만나면 죽는다.

95쪽
<사평역에서>가 발표된 지 서른 해가 넘었다. 처음 십 년 정도는 누군가 내게 <사평역에서>를 이야기하면 기분이 좋았다. 무엇보다 내가 그 시를 썼던 시절의 용맹정진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누군가 내게 <사평역에서>를 이야기하면 기분이 나빠진다. 1981년 이래 나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작가가 된다. 생각해보니 그 말이 맞기도 하다. <사평역에서>가 나의 감옥이 된 것이다. 

 

101쪽

어느 해 봄 이곳 바다에 들른 소설가 박완서 선생은 개펄에서 일하는 아낙들을 바라보며 '봄날의 꽃보다 와온 바다의 개펄이 더 아름답다'는 얘길 했거니와 이는 훌륭한 육체노동을 하는 갯마을 아낙들의 삶에 대한 헌사에 다름 아니었다. 내가 쓴 시 한 쳔이 농부가 수확한 감자 한 망태나 토마토 한 광주리 같은 쓸모가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은 나의 오랜 관심사였으니 평생 글을 써온 선생에 있어서는 그 소회가 오죽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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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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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작가는 여태껏 한번도 대중 앞에서 강연 원고를 소리내어 말할 기회가 없었다고 한다.(임상심리학자(?) 가와이 하야오 선생의 타계 후 그에 관한 장은 실제로 교토 대학교 강당에서 천명의 사람을 마주하고 이루어진 것만 빼고) - 기회가 없었던 게 아니라, 기회가 있더라도 이렇게저렇게 회피했을 듯-

이 책은 그간 5년여 동안 써왔던 글을 모은 것이라고 한다. 자신이 소설을 쓰는 것에 대해, 소설가로서 소설을 써 나가는 상황에 대해 테마별로 써 두었던 것을 가지고, 강연을 한다고 생각하고 전체문장을 다듬어 쓴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강연은 하지 않고, 그의 강연 비슷한 것을 듣고자하는 사람들을 위해 썼다? 는 것은 아니고. ^^;;;  의뢰받은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기획으로 쓴 것이라 한다. 달리 말하면, 이 책은 하루키가 말하는 '소설가 하루키'이다.

 

그런데 왜 하루키는 강연을 하지 않을까? 그가 밝힌 이유 첫째, 자신이 소설을 쓴다는 작업에 대해 이런 식으로 정면에서 당당하게 말해버리는 것이 좀 멋쩍었기 때문. -"나는 내가 쓰는 소설에 대해 별로 설명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비교적 강하다. 자작에 대해 말하다 보면 아무래도 변명하거나 자랑하거나 자기 변호를 하게 되기 쉽다. 그럴 생각이 없었더라도 결과적으로 그렇게 '보여버리는' 면이 있다."

 

이 책은 또한 지금껏 그가 써온 에세이의 재탕인 면도 있다. 사실 독자 입장에서는 재탕일수밖에, 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삼십년 전의 하루키나 현재의 하루키나 기본적인 자세나 사고 방식은 같을 것이고, 계통적으로 한 자리에 보겠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분위기나 톤이 살짝 달라지는 풍경을 감상하는 데 가치가 크므로.

 

라이프 스타일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날마다 붐비는 지하철로 이리저리 치이면서 출퇴근을 하며, 개인 컨디션과는 하등 상관없이 하루하루 그날그날의  의사소통을 치루어내가며 하는 일상을 사는 개인이 바라볼 때, 자신만의 에너지와 엔진을 가지고 속력의 완급을 달리해 가며 하는 하루키 집필 생활은 부러운 무엇일 수밖에 없다.  평범한 사람들이 행복을 얻는 원천은 일상생활에 있다. 가족, 동료, 이웃, 친구 등과의 관계맺기가 관건이기에 이에 대한 두려움도 많다. 그렇지만 이 작가는 이런 것들에 적어도 초연해보인다. 그것도 사실 부럽다. ㅠ  이 말은 어쩐지 나는 평범한 사람이라서, 행복하지 않다는 것처럼 들리니, 수정해야겠다. 나중에 ㅎㅎ

 

"나는 소설가라서 사람을 관찰하는 게 일입니다. 세밀히 관찰해서 대략적인 프로세스는 거치지만 판단은 하지 않습니다. 판단은 정말로 그것이 필요할 때까지 보류해 둡니다. "

 

"참고로 내 경우의 '푸닥거리'는 달리기입니다. 그럭저럭 벌써 삽십여 년을 계속 달렸지만, 소설을 쓰면서 내게 엉겨 붙어 따라오는 '음(陰)의 기척'을 나는 날마다 밖에 나가 달리는 것으로 떨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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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6-06-15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하루키 소설을 많이 읽지 않았고 또 완전 팬이라고도 할 수 없겠지만..
하루키 라이프 스타일이 좋아요~
하루키를 좋아하는 거 맞나요?? ㅎㅎ

icaru 2016-06-15 10:37   좋아요 1 | URL
좋아하는 거 맞네요! ㅎ
저도 가만히 앉아 골똘히 생각했던 적이 있거든요.
`나는 하루키를 좋아하는가?`
ㅋㅋ
저는 장편은 거의 다 읽은 거 같아요. 물론 노르웨이의 숲 같은 책은 20년도 전에 읽은 것이라, 읽었다는 사실만 기억할 뿐이지만요. ㅎ
이상하게도 아무리 좋다지만, 한 번 이상은 안 읽게 된다는 특징이 있고요.
저도 자신이 꽂힌 것에는 깊이 내려다보고 천착하려는 그 시선과 약간의 사회성 결여 등등의 스타일이 좋더라고요.

60대의 연배에도 계몽이나 교훈조가 아닌 것도 좋고...

hnine 2016-06-15 1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후...이 책을 안 읽어볼 수가 없다니까요.
저도 사람들 관찰하는 것 만큼 시키지 않아도 하기 좋아하는게 있을까 싶어서, 이걸 직업과 연관시키면 좋을텐데 생각한 적 있어요. 그런데 하루키 같은 직업 외엔 딱히 마땅한게 없더라고요 ㅠㅠ 그래서 포기.
하루키는 겉으로 보는 것 보다 실제로는 무척 완벽주의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그런 면 보다는 자유로운 사고 방식, 생활방식에 대한 것을 주로 말하기 때문에 독자들이 잘 모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요. 아무래도 완벽주의 보다는 자유로운 스타일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가니까요.

icaru 2016-06-16 08:43   좋아요 0 | URL
소설가의 제일 중요한 자질을 갖고 계신 거네요~~ 사람을 관찰하는 일에 통찰이 있다는 것!! 저는 조만간 시중 문학계에서 서점가에서 나인님의 글을 대면할 날이 올거라고 생각해요!

하루키,, 나인님 말씀이 맞다 하는게,,, 초성실한 직업인이지 뭔가요.. 그닥 한눈파는 일 없이, 칸트의 시계처럼 늘 일정한 일과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고 규칙적으로 달려주고! ㅎㅎㅎㅎ

고양이라디오 2016-08-25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하루키씨의 팬입니다^^ 이 책도 무척이나 감동적으로 읽었습니다^^

icaru 2016-08-26 10:22   좋아요 1 | URL
으아! 반갑네요! 곁에 두고 가끔 들춰보는 몇 안 되는 책 가운데 하나라죠.. ㅋㅋ
 
온 더 무브 - 올리버 색스 자서전
올리버 색스 지음, 이민아 옮김 / 알마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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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은 그의 친구 톰 건이 이십대에 쓴 시 <온 더 무브>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아무리 나빠도 우리는 움직인다. 아무리 좋아도

절대에 가닿지 못하는, 안식할 곳 없는 우리.

언제나 멈춰 있지 않아, 더 가까워진다.


생의 마지막 1분까지 쉼없이 앞으로 또 앞으로 나아가리라는 의지가 담겨 있다. 영국에서 태어나 교육 받았지만, 60년대에 캘리포니아라는 신세계 샌프란시스코에서 터를 잡다가, 뉴욕에 30년간 산다. 아무리 소란하다 해도 대도시가 필요하고, 다양하고 방대한 신경계 환자 인구가 있는 곳에 머물러 살아간다. 의사 부모님(영국 최초 여성 일반의 어머니) 아래 4형제 중 막내였고, 두 형도 의사였다. 그러나 정신 분열증을 앓는 바로 위 형이 있었다. 1951년 그가 동성애자라는 얘기에 그의 어머니는 “너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해”라고 했는데, 비난보다 비통한 심정의 토로였다. 한 아들을 정신분열증에 잃었는데, 이제 또 한 아들을 동성애로 잃을까봐 두려운 어머니의 비통함(당시만에도 동성애는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뜨리는 낙인이었으므로)이었다. 그가 스물일곱에 영국을 떠날 때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희망 잃고 방치된 애처로운 형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컸다고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그 마음이 환자들에게서 정신분열증과 뇌-정신 장애를 탐구하고 하는 강한 의지를 낳게도 해 준 듯하다.

책 앞머리에 이 책을 빌리에게 헌정한다고 나와 있다. 그의 성정체성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었던 나는 아들이나 형제 혹은 학문적인 동지애를 넘어서는 친애하는 지인이겠거니 했는데, 약간 달랐다. 책의 중간 두 지점에 사진들을 첨부했는데, 맥락을 파악하는데 아주 요긴하고 재미있었다.


세계적인 유수의 저널에 부쳐진 추천글이 너무나 눈부신데, 다 마지막 페이지 책장을 덮고 나서 그것들을 다시 읽어보니, 그 평들의 구절 어느 것 하나 넘치고 모자람이 없었다. 심지어 알라딘 엠디 님의 추천글까지 더없이 멋지구리하다. 나는 그의 저서를 하나도 읽은 게 없지만(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는 6년 전에, 그리고 작년 겨울 도서정가제 때 ‘깨어남’과 ‘나는 침대에서 내 다리를 주웠다’를  구매했지만 아직까지도 읽지 않았음에,,,) 타고난 글쟁이들의 농밀대는 언어의 서사 구조와 자전적인 이야기를 듣는 것을 워낙 좋아하다 보니, 그의 자서전을 읽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고, 읽고 나니 벅차도록 감동적이다. 근래들어 느껴보지 못했던 종류의 것인 듯하다.



요동치는 증상을 그나마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망막과 시력이 종양과 레이저 광선에 조금씩 갉아먹히면서 다양한 시각현상에 매료되는 사람(그러지 않았더라면 일상생활은 더더욱 힘들었겠지만. 무언가를 발견한다는 신나는 생각에 상황을 뚫고 나가는 듯하다.


 


그는 ‘노령이어도 새로운 기술을 습득할 수 있다는 글을 써온 사람이었나 보다. 책 후반에서 일흔다섯에 다시 피아노와 음악 교습을 받으려고 했었으니, 좌골 신경통으로 고통을 받는 내용이 나온다.


그 시기에 그가 많이 생각하고 쓰고 읽은 것은 고통에 관한 것이었다고 한다. 고통에 대한 직접 고통을 통해서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통증이 있음을 서술한다. 무릎 수술에서 오는 통증, 철저하게 국소적인 것, 무릎 부위 너머로는 절대 퍼지지 않는 통증이다. 수술로 인해 수축된 흉터 조직을 얼마나 스트레칭해주느냐에 따라 기꺼이 이겨내고 안줄 수 있고, 훈련으로 이겨내고 정복할 수 있는 ‘착한 통증’이다. 그러나 좌골신경통의 경우 통증이 통증에 그치지 않고, 고난 혹은 공포 아무튼 불쾌한 감정 요소까지 포함되는 그것이란다. 신경통은 기꺼이 안을 수 없으며 그렇다고 맞서 싸울 수도 그냥 적응할 수도 없는 통증, 사람을 으스러뜨려 영혼이 빠져나가도록 곤죽으로 만들어버리는, 강철같은 의지도, 인간적 존엄성도, 그런 통증의 공격을 받으면 산산이 바스라지고 만다.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좌골신경통으로 그는 일흔다섯살 처음으로 자살에 대해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일흔 다섯 살에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났다. 책 앞에 헌정자의 이름으로 올라간 그 분.


우리는 요리를 배우고 건강한 식사를 함께 먹었다. 이날 이때까지 나는 시리얼이나 정어리 통조림으로 연명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은 여러 코드로 읽힌다. 인내심 많고, 혜안이 있는 자신의 편집자이야기, 




283

“나는 보통 환자를 보러 갈 때는 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갔다. 조너선은 비디오 촬영 기록과 즉시 재생 기술을 어떻게 환자 진료에 이용하는지 궁금해했다. 당시만 해도 비디오 촬영은 신기술이어서 이런 방법을 활용하는 병원은 드물었다. 조너선은 가령 파킨슨증 환자가 자신이 걸을 때 속도가 빨라지거나 한쪽으로 쏠리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다가 영상으로 자기 자세나 걸음걸이를 보고 나서는 바로 알아차리고 교정하기 위한 요령을 익히는 것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

 

289  

“언젠가 라디오를 듣는데 2차 대전 때 나처럼 어린 나이로 가족과 떨어져 대피해야 했던 사람들의 기억과 생각을 나누는 프로그램이었다. ....”맞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세 가지 문제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사람들과 유대를 형성하는 문제, 어딘가에 소속되는 문제, 사람들의 말을 믿는 문제요.“ 이 이야기가 어느 정도는 나에게도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460쪽 12째줄

나는 그의 이론이 널리 받아들여지는 못한 데는 --> 나는 그의 이론이 널리 받아들여지지 못한 데는


두려움에 떨면서 의기소침한 나날을 보내야 했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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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16-02-11 21: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헉 죄송합니다~ 좋아요 눌러 주시며 관심 주신 분들께ㅠㅠ
쓰다가말아서 비공개로 둔다는 것이 ㅠㅠ
피시가 아니라서 수정도 안 되네요 당장은

단발머리 2016-02-12 0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리버 색스 책이군요. 저는 `아내를 모자로~~`만 읽었는데 그 한권 읽고나니 이 분이 참 좋아지더라구요. 의사라고 난체 하지 않고 환자들 위에 군림하려고 하지 않고...
저도 북플로 쓰다보면 그런 일이 잦아서 글은 물론이고 댓글도 될수 있으면 피씨로 쓰려하는데 가끔 지금처럼 핸폰으로 두드릴때 사고가 난다는..... ^^
icaru님, 설 잘 보내셨지요?

icaru 2016-02-17 09:28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 님!!!
`아내를~` 책 읽으셨군요! ㅎ,ㅎ)) 저는 가깝게 지내는 아이엄마들하고 책 이야기는 잘 안 하는데, 그저 책 좋아하는 것은 제 개인 취미라고 생각하고, 먼저 이야기 꺼내는 일이 마치 먹물처럼 보일까봐서요~ 그런데 가까운 아이친구엄마가 아내를~이 재밌다며, 아아... 그래서 올리버 색스의 작품은 대중적인 축에 속하는구나! 라고 생각했어요! ㅎㅎ)) 저는 하나도 읽은 게 없어요~
그런데 온더무브의 아우라가 꽤 오래가요. 위안을 주는 효과도 있는 것 같습니다!

단발머리 2016-02-17 09:31   좋아요 0 | URL
그래서~~~ 일단 읽고 싶어요~에 넣어둡니다. 제가 좋아하는 알라디너 분도 이 책을 하도 칭찬하시길래... 두 분의 추천을 발판삼아^^ ㅎㅎㅎ
 
전태일 평전 - 신판
조영래 지음 / 아름다운전태일(전태일기념사업회)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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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27 16:31

 


 

 나의 친한 벗이 말하기를, 자신이 살아온 나날 중에서 들었던 가장 상처가 되는 말은 고등 학교 다닐 적 어느 선생님의 우연한 다음과 같은 한마디였다고 한다.

 

“너희들 공부 열심히 하지 않으면 공사장에서 일하는 인부가 되거나 그런 인부의 아내가 될 것이다.”


친구의 아버지는 건축업을 하시는 인부였다. 친구의 아버지는 우직한 농사꾼이셨지만 자식들의 학업을 위해 시골에서 농사를 접고 서울로 상경하시었었다. 배움이 없고, 가진 기술이 없어 공사장 막일로 아내와 자식들을 건사하셨지만, 부지런하시고 정직한 분이셨다. 그런 아버지를 사회에서 패배한 낙오자 정도로 일갈하는 선생님에게 친구는 뭔가를 보여 주고 싶어서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많이 아팠고, 기분이 퍽 가라앉음을 느꼈다. 이 글은 전태일 자신인 ‘나’를 아는 모든 ‘나’와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에 대해 고(告)함이다. 전태일은 독자인 나 자신의 가장 약한 부분을 건드리는 사람이기에,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전태일에게, 그리고 이 평전을 기술하기 위해 혼신을 다한 조영래의 사랑과 투쟁과 지혜에 깊은 감동을 느낀다.


노예로서의 고통과 굴욕으로 가득 찬 지루한 나날을, 아무런 의의도 보람도 기쁨도 없는 껍데기의 삶을 애걸하며 또 애걸하며 비루하게 살아가는, 오늘의 현실이 절대로 변화될 수 없는 영구불변한 현실이라는 미신에 쉽게 사로잡혀 있는 약한 자인 나에게 “인간의 존엄을 버리지 않고 인간다운 대접을 요구하며 싸우는 것은 바보가 아니”라는 걸 보여 주었다. 

 

왜 밑바닥 인생들은 항상 밑바닥 생활을 하게 되는가? 왜 눌린자는 계속 눌리어 살아가는가?

 

 

여기 고통 받는 한 사람의 의식을 살펴보자. 그가 태어났을 때 고통에 찬 현실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이 현실 속에서 자라나면서 그는 그 현실이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힘에 의하여 자신에게 강요된 것처럼 착각하게 되고, 사실은 바로 ‘인간’이 그것을 만들었다는 것을 똑똑히 보지 못하게 된다. 이 거대한 힘에 비하여 볼 때, 자기 자신은 너무나도 약하고 초라하고 무력한 존재로 느껴진다. 조만간에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현실의 사회 구조와 질서 앞에 무조건 머리를 수그리고 거기에 순응해야만 생존이 보장된다고 느끼게 되며, 따라서 현실 앞에서 위축되고 기가 죽어서 비굴해진다. 현실에 대한 모든 비판은 그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위험천만한 무모한 짓으로 되며, 자신에 대해서는 불성실하게 되고 나중에는 부도덕으로까지 되어버린다. 그리하여 그는 비판 정신의 싹은 자신의 의식 속에 싹트기도 전에 잘라버리고, 사회가 강요하는 모든 명령, 모든 가치관, 모든 선전을 받아들여 순한 양이 된다.

 

전태일이 위대한 것은 순한 양이 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힘든 가정에서 자랐으면서도, 스스로 “불행한 과거를 원망한다면 그 과거는 너의 영역에서 영원한 사생아가 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정도로 불우한 환경 때문에 좌절하거나 타락하지 않고 오히려 불우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키우고 그들의 처지를 개선해주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했다.

 

장기표 씨의 후기에서 “인간이 명석하다는 것은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얻어지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고 말하는 것은 이 부분과 맥락을 같이 한다.   

 

전태일을 보면서 민주화를 생각한다. 민주화란 무엇일까? 이 글에서 조영래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흔히 수없이 많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한 줌도 못되는 소수의 억압자들에 의해 짓밟히고 있다고 말하며 또 그러한 사례를 수없이 본다. 영화 같은 데서 수많은 노예들이 채찍에 시달리며 묵묵히 중노동을 하고 있는 장면을 볼 때 어째서 저 많은 노예들이 불과 몇몇의 감독자들에게 굴종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을 품어 본다. 인간 사회가 형성된 이래 이러한 실태는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으며, 지금 이 시간에도 그러한 요소들이 사회적 민주화의 장애가 되고 있는 나라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 원인을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말한다. 특히 들어볼 만한 설명은 억눌리는 사람들이 수적으로는 아무리 많아도 조직화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조직된 소수’에게 지배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앞서 이야기해야 할 것은 억압받는 사람들의 노예 의식인 것이다. 만약 그들이 이 노예 의식을 벗어던지고 자유인으로서 자신의 정당한 권익을 위하여 주장하고 투쟁할 결의에 차 있다면 그들의 조직화는 시간 문제일 것이며 조만간에 그들은 ‘조직화된 다수’로서 ‘조직된 소수’인 억압자들을 물리치고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것이 바로 민중 운동의 전진이며, 이것이 바로 민주화이며, 어떻게 보면 이것이 바로 진보인 것이다.

 

 

밑줄 그은 문장

 

 

사실 그 사람이 삽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세.

그 때에 절은 모자가 하고 있는 것일세.

얼마나 위로해야 할 나의 전체의 일부냐!

얼마나 불쌍한 현실의 패자냐!

얼마나 몸서리치는 사회의 한 색깔이냐!


   -재단사 일자리에서 쫓겨난 전태일이 공사장에서 일을 하다가 어느 인부를 보고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아의 좁은 환상에 집착하여, 그 속에 밀페되어 껍질을 쌓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아무 것도 참으로 사랑할 수 없으며 아무것도 참으로 소망할 수 없다. 일상 생활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많은 것을 희망하고 많은 것을 사랑하는 것처럼 착각한다. 부와 권력과 명예와 미모의 이성과...... 그러나 그것들은 알고 보면 자기 자신을 더욱 빈곤하게 만들고 더욱 처절한 고통과 고독의 심연으로 몰아넣는 허구의 욕망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 탐욕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전태일은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약점은 희망함이 적다는 것이다”라고 썼던 것이다.       -2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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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준식 옥중서한 1971-1988 - 저자교열판
서준식 지음 / 노사과연(노동사회과학연구소) / 2015년 3월
평점 :
품절


2004-01-01 18:39



 

 

요며칠 일찌감치 아침을 챙겨먹고 남들이 출근하듯 나도 인근 구립도서관에 나가 이 책을 읽었다. 공무원 시험, 학교 시험, 각종 고시 준비에 기타 등등의 수험서를 펴놓고 공부하랴 여념없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책상 위에 딱 이 두꺼운 책만 펼쳐놓고, 두 손을 꼭 모으고(도서관 안이 조금 싸늘해서) 진종일 웅크리고 앉아서 읽었다. 딱히 정한 것도 아닌데 오전부터 시작해서 오후 다섯시까지 꼬박 있으면 하루에 60페이지 가량을 보게 된다. 이 책은 결코 속도를 내서 읽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차마 그럴수가 없는 책이었던 것이다.

형제들과 사촌들 그리고 이모, 고모의 전향 설득에도 비전향을 고집하는 서준식 그를, 그래서 결국엔 스물네살에 들어간 감옥을 사십이 넘어 17년이라는 세월 동안을 보내온 서준식을 보면, 마틴 루터 킹이 했다는 다음과 같은 말이 생각난다.

“나는 한 개인이 양심이 그에게 부당하다고 명한 법을 위반하고, 그리고 그 부당성에 대해 공동체 전체의 양심을 불러일으키고자 기꺼이 그 형벌을 받아들여 감옥에 머무는 일이야 말로 법에 대한 최고의 경의를 표하는 것이지 싶다”고 말했다던...

그가 감옥 생활의 고독함을 감수하며 온 힘을 다해 사명을 이루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을 내가 온전히 이해하리란 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서준식(참고로 그는 비기독교인이고, 단순이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함이 아닌)'약자를 위한 예수'를 발견하는 부분(동생 영실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을 읽었을 때, 그가 17년간의 감옥 생활 가운데 편지 모음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는가를 조금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내가 예수의 길을 걸어가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예수가 단순히 '약자의 편'이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우리들이 그 어떠한 강자가 된다 하여도 영원히 약자의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예수가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하겠다. 예수는 모든 이념이 경직화되고 '자율적'인 것이 되어 버릴 때 그것이 인간을 얼마나 무자비하게 억압하는지를 나에게 가르쳐 준다. 우리들이 이념의 노예가 될 것이 아니라 항상 '인간에 대한 개개의 구체적인 사랑'에 굳건히 발 디딜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이것이 나 개인이 겪어야 했던 (그리고 어느 의미에서는 지금도 겪고 있는) 그 처참한 정신적 위기에 있어서 얼마나 절실하고도 귀한 가르침인가를 나 자신 이외의 아무도 알 수 없다. 이것은 '영원한 약자의 편'일 수 있는 한 가지 길이다.”

그리고 서준식은 옥중에서 ‘노예’의 결박을 풀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른바 ‘보안감호처분 무효확인소송’이었다. ‘보안감호처분 무효확인소송’이란, 다시 말하면 ‘노예’가 아닌 ‘인간’임을 인정해달라는 요구였다. 서준식의 요구는 절실했다. 그러나 연거푸 세 번을 거절당했다.

사람이라고 무조건 사람인가! 사람답게 살아야 사람이다. 사람답게 살려면 착해야 한다. 그런데 각박한 이 세상에서의 착함이란 ‘약함’의 다름 아니다. 그러한 약함을 고수하며 살기란 그렇다 너무 어렵다.......‘어리석은 자가 끝까지 어리석음을 고수하면 현명한 자가 된다.(윌리엄 블레이크)’라고 내내 읊조리던 그는 부조리한 권력에도 빌붙지 않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에의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그것을 끝까지 지키려했던 우직한 사람이다.

내가, 나같은, 인간으로써 짊어져야 할 고뇌랄까 절망 같은 것을 자주 팽개쳐버리고 싶어하는 이가, 이 옥중에서의 서간들의 아롱아롱 새겨진 따뜻한 글줄들을 정말이지 제대로 감상으로 풀어 낼 수나 있을까, 사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이 무척이나 부끄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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