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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비행 - 생계독서가 금정연 매문기
금정연 지음 / 마티 / 2012년 8월
평점 :
서평은 왜 읽는가 라는 오래된 의문(우문?)에 대해, 근사치의 답을 제시해준 책이다.
"나와 도서 취향이 닮은 이웃 블로거의 지나간 책에 대한 서평.
내가 미처 알지 못했고 그들이 아니었다면 영영 알지 못했을 책에 대한 이야기다.
(중략) 온 몸을 던져서라도 지키고픈 책과 아무리 생각해도 사랑할 수 없는 책에 대한 진심어린 각자의 이야기들을 듣고 싶은 것이다."
덕분으로 다음과 같은 책을 소개 받았지.
" 영국 음악계의 촌철살인 계보를 잇는 자비스 코커는 언젠가 이렇게 노래한 바 있다.
결코 내가 사려 깊은 사람이라고 말한 적 없어, 다만 뼛속깊이 얄팍한 인간일 뿐
무식은 광대하고, 내 시야는 좁아터졌지
지레 찔려서일까, 원제 the shallows, 직역하자면 '얄팍한 사람들'쯤 되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을 읽는 내내 그 노래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카의 주장은 간단하다. 우리는 유사 이래 가장 스마트한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들 개개인이 더 똑똑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집중력 저하와 건망증에 시달리며 깊이 생각하는 일에 그 어느 때보다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 자신의 삽을 굴착기와 맞바꾼 중노동자의 팔 근육이 약해지는 것처럼, 스마트한 기기들을 통해 인터넷을 이용하는 현대인은 사고하는 힘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략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도시는 불타고 있었다. 전쟁은 소문으로만 존재했다. 아버지들은 전장으로 끌려갔고, 남겨진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시골로 보냈다. 쌍둥이 형제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으로 만난 할머니는 엄마를 암캐라고 불렀다. 동네 사람들은 할머니가 남편을 독살한 마녀라고 했다. 한 번도 이름이 불리지 않은 형제는 개자식들이 되었다.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그곳에서 소년들은 스스로 살아남는 법은 배운다. 거울처럼 마주선 그들은 서로의 벗은 몸을 채찍질하며 육체를 단련한다. 배고픔을 극복하기 위해 단식을 하고 구걸을 연습한다. "사랑한다"는 엄마의 말을, 이미 추억이 되어버린 그 말을 껌 씹듯 반복하면서 그 말에 담긴 애틋함을 거세하는 정신훈련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들은 작문공부를 한다.
모눈종이와 연필, 커다란 노트를 들고 더러운 실탁에 앉은 소년들의 공부는 눅누가 주제를 외치는 것으로 시작한다. 모눈종이 두 장을 채우는 데 허락된 시간은 두 시간, 그 시간이 지나면 형제는 서로의 글을 돌려 읽는다. '잘 했음' 혹은'잘 못했음'평가에 따라 글은 난로에서 태워지거나 커다란 노트에 옮겨진다.
그들의 평가에는 오직 하나의 기준만이 존재한다. 그것은 진실이다. 있는 그대로의 것들, 그들이 보고 들은 것들, 그리고 그들이 직접 행한 일들만을 적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할머니는 마녀를 닮았다'라고 써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람들이 할머니를 마녀라고 부른다'라고 써야 한다. '이 소도시는 아름답다'라는 표현도 금지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 소도시는 우리에게는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다른 람에게는 추하게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살아남기 위해 훔치고 협박하고 살인까지 저지르지만, 그들은 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글쓰기는 그들이 존재하는 유일한 이유이기 때문에.
중략
<소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77쪽 발췌
우리는 삶 자체에서 실습하게 되고, 그리하여 이것이 우리를 문학의 세부사항을 좀더 잘 읽는 독자로 만들면, 그것이 이번에는 우리의 삶을 좀 더 잘 읽는 사람으로 만든다. 이런 과정이 이어지는 것이다. 문학을 가르쳐보면 젊은 독자들 대부분이 삶을 알아차리는 능력이 형편없다는 것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이십년 전 학생 때 마구잡이로 주를 달아둔 내 옛날 책을 보면서 알게 된 것인데, 그 당시 나는 지금에 와서는 진부하다고 느껴지는 세부사항들. 이미지, 은유 따위에 마음에 든다는 표시로 줄곧 밑줄을 치면서도, 지금 굉장해 보이는 것들은 아무 생각 없이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독자로서도 우리는 성장 과정을 겪거니와, 스무살배기들은 상대적으로 철딱서니다. 그들은 문학을 읽는 법을 문학에서 배우기에는 읽은 문학 작품이 아직 충분하지 않다.
(중략)
영화와 글쓰기의 차이를 묻는 질문에 그(우디 앨런)는 이렇게 대답했다.
"문학적인 글을 쓸 때는 하면서 반드시 스스로 즐거워야 해요. 왜냐하면 반응을 알 수가 없거든요. (...) 하지만 연극이나 영화는 실제로 관객들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좀더보다 생생한 반응이죠. 그리고 작품을 본 사람들을 끊임없이 마주치죠. 글 쓰는 것보다 영화를 만드는 게 훨씬 별로예요."
중략
<어떤 작위의 세계> 정영문 94쪽
내가 재미있게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말하기 전에 먼저 재미없게 생각하는 것들을 들면, 모든 종류의 소음, 거의 모든 음악, 폭력적인 것, 우울, 전통적인 소설, 시대를 반영하는 소설, 상처와 위안과 치유에 대해 얘기하는 소설, 등장인물의 생각보다 행위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소설, 거창한 소설, 감동을 주는 소설(그런 소설들에 낯간지러운 찬사를 늘어놓는평론가들이 얼마나 재미없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은 약간은 재미있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재미없으니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비결은 평론가로서 소양이 없거나 한 인간으로서 위엄과 자존이 없거나 두 가지 타일 것라는 얘기만 하도록 하자), 성장 소설, 심각하기만한 소설, 자의식의 과잉이 묻어나지 않는 소설, 잠언 풍의 시, 상식적인 것, 뻔뻔한 수작(을 부리는 사람), 구김살이 없는 사람, 묘한 구석이 없는 사람, 귄위를 온몸으로 풍기는 사람, 부지런하고 의욕이 넘치는 사람들, 사회에 기여하고자 하는 사람들, 구름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 단순한 사람들, 말이 많은 사람들, 욕심이 너무 많은 사람들, 유머는 알지 못하고 우스개밖에 모르는 사람들, 뭐라 말할 수 없게 말할 수 없이 재미없는 사람들(이들은 정말 재미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