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장정일의 공부 - 장정일의 인문학 부활 프로젝트
장정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5쪽
나는 언제나 '중용의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알게 되었다. 내가 '중용의 사람'이 되고자 했던 노력은, 우리 사회의 가치를 내면화하고자 했기 때문도 맞지만, 실제로는 무식하고 무지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렇다. 어떤 사안에서든 그저 중립이나 중용만 취하고 있으면 무지가 드러나지 않을 뿐더러, 원만한 인격의 소유자로까지 떠받들어진다. 나의 중용은 나의 무지였다.
중용은 본래는 칼날 위에 서는 것이라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사유와 고민의 산물이 아니라, 그저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것을 뜻할 뿐이다. 그러니 그 중용에는 아무런 사유도 고민도 없다. 허위의식이고 대중 기만이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에는 무지의 중용을 빙자한 지긋지긋한 '양비론의 천사'들이 너무 많다.
49쪽
논픽션 작가이자 과학 칼럼니스트이면서 출판 평론가이기도한 다치바나 다카시의 논지는 매우 분명하다. 지식이란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대다수의 사람들이 보여 주는 지적 작용의 집적과 방향이 끊임없이 확대되어 가는 곳에 있다. 그러면서 그는 현대의 지식은 자연과학에 집적되어있으며 그 방향을 향해 확대되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대담하게도 그는 철학자들이 말하는 인식론도 이미 과학의 문제가 되었다고 말하는바, 뇌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인간의 인식론마저 훤히 밝혀질 것이라고 말한다.
103쪽
사실대로 말하면 국기, 국가, 국경일 등등의 국가적 표상물은 속이 비어 있는 민족이라는 '상상적 공동체'를 불안하게 비끄러매는(단일 민족이라고 자랑하는 우리 속에서는 얼마나 많은 차이와 대립이 존재하는지!), 급조된 상징 기제(태극기가 얼마나 임의적으로 만들어졌는지를 생각해 보라!)일 뿐이다.
117쪽
문학이란 무엇인가? 우주 질서(신)라는 더 큰 빚을 의식하는 소수의 작가를 제외한 대개의 문학인은 자신을 키워 준, 산, 강,들,바다(자연)와 이웃(사회)에 글로써 빚을 갚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206쪽
윤해동의 <식민지의 회색지대>(역사비평사, 2003)는 <나치 시대의 일상사>와 공통된 문제 틀을 가진다. 데틀레프 포이케르트가 나치 시대의 일상을 분석하면서 국민들의 광버위한 "체제에 대한 합의"가 없었다면 나치 정권이 유지될 수 없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윤해동 역시 책 제목과 동일한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제국주의 식민 지배는 제국주의 지배자의 일방통행적 지배가 아니라, 식민지와의 상호 작용에 의해 유지된다. 따라서 제국주의 지배에 대한 협력의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275쪽
하이데거의 제자였던 한나 아렌트는, 일상인들의 삶은 구체적인 다수의 세계인 반면 철학자들은 자신만의 윤리적 이상에 사로잡혀 자신과 다른 다양한 인간들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한다. 철학자들은 설득과 의견이 조정되는 청치적 현실을 무시하고, 자신의 내적인 행위가 정치적 영역에서도 모법이 될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의견의 복수성이 활동하는 공적 세계에서, 의견의 복수성 자체를 부정하는 철학적 진리는 제대로 된 정치에 접근할 수 없다. 근대의 정치가 윤리나 신학과 결별한 곳에서 시작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한나 아렌트는 플라톤 이래로 서양의 정치철학을 규정해 왔던 진리의 현실 가능성을 거부하고, 인간들 사이의 조정, 균형 그리고 공동체의 법과 공론의 여할을 정치의 실마리로 삼았다.
319~320쪽
20세기 초, 폭력으로 유린된 미국의 노동 운동에 깊이 공감하고 잇는 그의 민중관은 그가 신랄하게 비난하는 지식인관과 달리 매우 따뜻하다. "때때로 국민은 세상사를 완벽하게 꿰뚫어 보고 있지만 혁명 세력으로 발전하지는 않"는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하는 그는 대중들이 혁명을 하지 않는 까닭은 현실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노동조합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누군가가 노동조합을 만들었을 때, 그의 동료는 혜택을 누릴 수 있겠지만 본인은 그 열매를 즐길 수 없을 뿐 아니라 끊임없는 회유와 협박에 시달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