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9-15 13:54
그의 글을 편히 읽지 못한다. 문학 평론을 하는 그가 쉽게 글을 써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몇 줄만 읽어도 알 수 있기에, 나도 편안하게 그의 글을 읽어내지 못하는가 보다.
마음이 소금밭인데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 라는 이명원의 이 책.
마음이 소금밭인 것은 어떤 것일까. 대충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마음이 소금밭일 때, 이명원은 책을 읽고, 글을 썼지만 나는 어떻게 대처했던가 생각해본다. 나는 그저 조용히 무덤 속 같은 몇일 보내고는 서서히 나를 괴롭힌 심각한 사안에 대해 잊어버리는 방식을 택하며 살았던 거 같다.
지금의 내 마음도 전전긍긍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책은 내 이해의 맥락에 닿는 부분에 한해서는 아픈 곳을 위무해주고 또한 깊은 울림까지 주고 있는 것 같다.
그의 직함은 문학비평가이지만, 이 책은 그가 문학을 포함 여러 분야의 책들을 읽고, 영화를 보고, 여러 매체를 접하면서 품은 여러 단상이랄까 생각들을 엮은 책이라서, (소금밭 같은 마음으로 도서관에 가, 책을 읽고 쓴 이 글들일지라도) 사실은 허리끈 조금 풀고, 편안한 자세로 읽어도 된다.
그의 지적에 크게 공감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던 부분은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다.
문학계에서의 통칭 ‘후일담 문학’이라는 용어에 대한 그의 말. 이 용어는 80년대에 정력적으로 진행되었던 진보적 실천행위를 냉소적으로 부정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90년대 이후의 현실을 환멸적으로 추수하게 하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끄덕끄덕...)
영어를 공용화해야 한다는 복거일의 주장과 유사한 것이 수백년전 박제가에게서 있었다. (그의 책 <북학의>를 읽고) 복거일의 주장과는 또 조금 다른 뉘앙스지만, 시대적인 맥락은 이랬다. 당대 조선사회의 위기를 청나라 문명의 적극적인 수용을 통해 돌파하고자 했던 박제가의 의욕에서 나온 주장이라고. 박제가는 중국어가 문자의 근본이며, 문명어이며, 언문의 일치가 중요함을 강조, 조선이 청나라와 같은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언문으로 표상되는 조선어를 버리고, 중국어를 국어로 활용할 필요하기 있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리고 인재 등용의 루트를 다변화할 것을 주장했다.
박제가의 이 글을 통해 한 사회의 타락과 몰락을 제어할 수 있는 정책적 대안은, 사회적 모순이 심각하게 돌출되고 있는 그 순간에 이미 제기되고 있다는 것이고, 이 등잔 밑의 정책 대안을 지배층이 수용하지 않음으로써 민중의 고난은 감당할 수 없이 심화되곤 했다는 사실이다.
박제가가 고뇌 속에서 정책적 대안을 구상하고 있던 때나,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지금의 현실이나 민중들의 고통은 여전하지만 지배층들의 한심하기 짝이 없는 권력 투쟁은 그 끝을 모르고 전개되고 있다. (끄덕끄덕...)
이 책이 흥미를 발하는 결정체를 사실 나는 다음과 같은 장에서 꼽고 싶다. 무언고 하면, 비평을 하는 비평가 자신(이명원)이 도데체 독자들이 비평을 읽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스스로하고, 답한 것. 이것은 어쩜 비평가 스스로에게 거는 가혹한 질문일 수도 있다. 그는 스스로의 질문에 대한 답을 다음과 같이 한다.
첫째, 인식의 새로움에 기여하는 비평을 발견하기 힘들다.
지적 쾌락을 선사하는 좋은 비평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관습적이고 상투적인 사유로부터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
둘째, 육성이 담겨 있는 비평을 찾기가 힘들다.
깊은 감동을 주는 비평은 싸늘한 분석적 논리에 기반을 한 것들이 아니라, 비평에서 비평가 자신의 고통스런, ‘육성’을 발견하고 자신의 체취를 내뿜는 것이었다. 비평에서 육성이 사라질 때, 한편의 평론은 수학능력시험 대비용의 문학 자습서와 비슷한 운명으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셋째, ‘지식 잡화상’과 같은 비평가의 태도도 문제다.
지식 잡화상인 비평가는 기이한 열정으로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잡다한 지식을 동원하여, 지랄탄을 쏘아 댄다고. 독자들은 이러한 비평에서 자신의 무식이 추궁당하는 느낌에 빠졌다가, 시간이 지나 그것이 한갓 언어의 사기술에 불과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비평에 대한 자신의 시선을 거두어 들인다. 무관심이 복수라고.
넷째, “주례사” 비평의 토양에서 자라난 비평 전반에 대한 독자들의 불신이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 밖에 끄덕여지는 구절들이 많았다. 모방송사의 <느낌표!>라는 프로에 대해 물음표를 던지는 생각들. 아, 그리고 언론상에서 ‘사회지도층’이라는 표현을 접할 때마다 한국사회가 언어 생활의 측면에서 보자면 중세적 신분사회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느껴진다는 이야기도. ('지도층'이라니, 누가 누구를 지배한다는 것인지.)
‘사회지도층’과 같은 시대착오적인 표현이 이 뿐일까. '경쟁력, 퇴출, 왕따, 조폭, 홍위병'과 같은 유쾌하지 않은 단어가 세상에 버글버글하다.
언어를 순화한다는 것. 글쎄.....
언어가 바뀐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러나 세상이 더욱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또 그러한 세상을 열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이 제대로 존중받는 사회가 온다면, 우리들의 국어사전도 풍요로워질 것이다. 왜냐 하면,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하니까.
밑줄 친 문장
"그들(김현과 김윤식)이 패배자인 것은 그들의 문학과 삶의 실천이 패배했기 때문이 아니라, 승리를 불가능하게 하는 놀라운 것은 그들이 패배자임을 인정하는 순간, 그들은 오만한 승리의 잔을 들게 된다는 사실에 있다. 스스로 패배를 자인하는 것은 운명을 거역하는 자의 오만함을 보여 준다. 그러나 그 오만함은 인상을 찡그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패배에 우리가 마음 깊이 공감하게 만든다. 비평에 깃들인 이 근본적인 불가능성을 가장 예민하게 사유한 비평가는 김현이다."
"멋부린 문체라는 것이 뻔히 보이는 글을 읽기에 내 인내심은 걸맞지 않다.
기형도의 어조를 흉내내, 잘 있거라, 짧았던 읽기여! 이렇게 말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느낌표가 따발총으로 이어지는 문자들을 발견하면, 숨가쁘기보다는 안쓰러워진다. 전혜린이 살던 시대나 어울릴 법한 새벽의 감상은, 역시 완연한 올드 패션이다. 소설가 김훈의 문체를 아름답다고 하는 사람은 많으나, 그 아득한 뱀을 연상하게 만드는 문장들은, 언어적 페티시즘이다. 적어도 소설은 문체의 충만을 넘어서는 곳에 존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