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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모른다
정이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때로는 아주 우연히 뭔가를 알아채는 순간이 있다. 몇 십 년 만의 폭설이 세상을 하얗게 했다. 하지만 눈이 내릴 때의 행복도 잠시, 길은 탁해지면서 미끄러워졌다. 도로도 마찬가지였다. 승용차 안에서 느껴지는 네 바퀴의 통증은 어느 때보다 퍽퍽했다. 그래서 인지 사이사이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노래는 습기에 젖은 듯했다. 듣고 있는 노래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는 없었다. 노래가 끝나고 DJ가 “타르티니의 G단조 바이올린 소나타”라고 했을 때 겨우 클래식이었음을 알았다. 그런데 DJ가 그 곡의 부제가 “악마의 트릴”이라고 했을 때 정이현의『너는 모른다』가 불현듯 떠올랐다.
1713년. 스물세 살의 젊은 작곡가 타르티니는 악상이 떠오르지 않아 괴로워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속에서 악마를 만난다. 악마는 타르티니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해온다. 그의 영혼을 팔면 아름다운 음악을 주겠다는 것이다. 타르티니는 이 교환에 응해 제 영혼을 판다. 그러자 악마는 그가 처음 들어보는 놀랍도록 황홀한 선물을 연주한다. 꿈에서 깨어나자마자 미친 듯이 기억을 되살려 받아 적은 음악이 바로 <악마의 트릴>이다…(p 162)
이 소설에서 타르티나를 알고 있는 주인공은 열 한 살의 소녀 유지였다. 음악의 신동으로 불리는 유지에게 ‘악마의 트릴’ 하나쯤 알고 있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너는 모른다’라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너’가 모르는 진실이 뼛속 깊이 새겨져 있었다. 유지는 <악마의 트릴>을 그저 듣는 것이 아니라 숨 막히는 가족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악마를 끌어안았다.
그런데 어느 날 서초구 서래마을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던 유지가 돌연 사라졌다. 유지가 사라지자 너의 가족들은 두드러져 보일만한 슬픔은 없었다. PC 방이나 친구 혹은 바이올린 레슨 선생님과 같이 있을 거라는 적당한 무관심이 서로 뒤섞여 나타났다. 비록 뒤통수를 한 대 후려 맞은 심정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원점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했던 ‘너’는 냉정을 지키려고 했다. 유지는 ‘너’의 가족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너’는 유지에게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가 소설을 읽을수록 ‘너’에게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작가 말대로 의문이란 고요한 수면으로 흐트러뜨릴 가능성이 있는 돌멩이였다. 작가는 유지 실종 사건과 연루된 너의 가족들의 입장을 번갈아 추적했다. 이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불행한 사고를 당했을 때 나타나는 ‘가족 내 문제’가 투명한 탓이었다. 유지가 피해자인 반면에 너의 가족들은 가해자가 되는 투명한 사건이라고 할까?
이를테면 아버지 김상호는 사업 밖에 모르며 무뚝뚝한 이기심으로 사는가, 어머니 진옥영은 굳이 친정을 핑계로 왜 중국으로 은밀히 가려고 했나, 이복언니 은성은 가족들과 떨어져 혼자 살며 매번 짧은 사랑에 집착하고 있나, 이복오빠 혜성은 가짜 등록금 영수증을 내밀며 어째서 의대생 노릇을 하고 있나, 등등 그것이다. 반면에 유지는 엄마는 짱깨였고 엄마의 딸인 아이도 짱깨라는 폭력에 맞서 싸우기 위한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그럴수록 내면의 동요를 감추는 기술을 배워나갔다. 그리고 학교에서 바이올린을 핑계로 하여 애들과 어울리지 않아 왕따를 당하면서도 정작 유지는 자기가 혼자라는 것에 흔들리지 않았다.
이렇듯 작가는 너의 가족들의 황폐해진 삶을 따라가면서 상처뿐인 가족들의 실체를 보여주고 있다. 어느 누구로부터도 사랑받고 있지 않다는 것은 곧 나 스스로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를 미워하게 되는 것이다. 가족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닐 것이다. 이 소설에서 ‘유지는 뭐랄까, 누군가에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아이였다. 누구에게나 골고루 무심했다.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인생을 유지는 아예 몰랐다. 알 필요가 없게 태어났다.’라는 우울함이 가족의 화목함에서 벗어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일찍이 마르틴 부버는『나와 너』에서 ‘나와 너의 관계를 제시하려면 동그라미를 하나 그리는 수밖에 없다. 이 동그라미는 너와 관계하지 않는 모든 것을 그 둘레 밖으로 내쫓는다.’라고 했다. 어쩌면 가족은 가장 안전한 동그라미다. 이제껏 우리는 그렇게 믿어왔다. 하지만 가족마저 맹목적인 사랑에 갇히면 마르틴 부버가『나와 너』에서 말한 대로 ‘사랑이 상대방의 전체를 얻지 못하게 되며 상대방의 부분 밖에 더 보지 못할 때는 미워하게 되는’ 것이었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사랑과 미움의 맹목적 관계’를 리얼리티하게 포착하고 있다. 유지의 실종과 함께 너의 가족들의 아주 일상적인 암묵적 규칙이 서로 겹치면서 가족이라는 게 뭘까? 라는 생각을 되돌아보게 했다. 어쩌면 부모와 자식이라는 이름 아래 놓인 가족은 서로의 정서적 공감을 향유하는 친구도 아니며, 사랑을 놓고 줄다리기를 하는 연인도 아닌 ‘기습적으로 도착했던 생명’에 불과한 지도 모른다. 혹은 ‘그냥 식구’일수도 있다.
『너는 모른다』를 읽으면서 악마에게 영혼을 팔면 어떻게 되는 것인지 시종 궁금했다. 앞서 말했듯 사랑이 반쪽이라고 한다면 외로운 가족의 현실은 악마의 자화상이 아닐 수 없었다. 악마의 자화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나타낸다면 말줄임표(…)이거나 물음표(…?)였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삶이 정지된 슬픔 같은 것이었다. 가장 가까워야 하는 사이의 사람들이 가장 먼 사람이 되는 반쪽 사랑 같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