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한도 - 천 년의 믿음, 그림으로 태어나다 ㅣ 키워드 한국문화 1
박철상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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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그림을 감상하려면 어떻게 해야 잘할 수 있을까요? 오주석은『오주석의 한국의 美 특강』에서 두 가지 원칙을 말했습니다. 하나는 옛 사람의 눈으로 보고, 다른 하나는 옛 사람의 마음으로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 원칙은 옛 그림을 보는 문외한(門外漢)에게도 간단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간단함에도 불구하고 옛 사람의 눈과 마음을 가늠하기란 어렵다는 아쉬움이 매번 맴돌았습니다. 어느 정도까지 해야 하는지 불분명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고민을 헤아렸는지 오주석은 어느 그림이든지 작품 크기의 대각선을 그었을 때 대략 그 대각선 혹은 대각선의 1.5배 정도에서 감상하기를 권했습니다.

박철상의『세한도』는 여러모로 의미가 뜻 깊었습니다. ‘키워드 한국문화’라는 타이틀에 걸 맞는 것은 물론 <세한도>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을 다시금 돌아보게 했습니다. 앞서 오주석이 말했던 것처럼 이 책의 저자 또한 대각선 혹은 대각선의 1.5배에서 <세한도>을 재조명하고 있습니다. 즉 <세한도>가 어떻게 탄생되었는지,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또 추사 김정희의 삶과 예술에 대해 좋은 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한도>의 진면목을 하나하나 알면 알수록 어느 순간 안복(眼福), 심복(心福)으로 가슴이 뿌듯해졌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한 대로 <세한도>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었습니다. 이 책의 부제에서 드러나듯 ‘천년의 믿음, 그림으로 태어나다’는 것이었습니다. <세한도>에 얽힌 김정희의 사연을 찬찬히 읽다보면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선비로서의 교양과 인품이 어떠해야 하는지 우리는 김정희의 모습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세한도>에서 세한(歲寒)은『논어』,「자한」편의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공자가 사랑했던 송백을 추사 또한 사랑했습니다. 이 그림에서 송백 같은 사람은 우선 이상적이었습니다. 추사 김정희가 우선 이상적에게 감사한 마음은 일시적인 답례가 아니었습니다. 그림에 쓰여 있는 제사(題詞)를 보면 제주도 유배 생활하는 추사에게 이상적은 연경의 책들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세상 인삼이라는 것이 권세에 휩쓸리는 잡초(雜草) 같을 수밖에 없는데 이상적의 단단한 삶은 사시사철 푸르른 성인(聖人)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고마움을 완곡한 그림으로 표현했던 것이었습니다.

이 그림에서 추사의 석교(石交)를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장무상망(長毋相忘)’이라는 인장에 있습니다. <세한도>에는 4개의 인장(印章)이 찍혀 있습니다. <정희(正喜)> <완당(阮堂)> <추사(秋史)> <장무상망(長毋相忘)>입니다. 인장은 관례적으로 자신의 자호(字號)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장무상망은 인장,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한장(閑章)이었습니다. 한장은 자신은 취미나 기호, 또는 좋은 시구나 경구를 새긴 인장을 말합니다. 장무상망을 풀이하면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상적에게 특별했던 교감의 너머에는 자신의 상처와 송백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감동 깊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한도>가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는 또 다른 까닭은 무엇보다도 김정희의 학문에 있었습니다. 이 점이 <세한도>의 역사와 문화를 재발견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일본 동양학자이자 김정희 연구의 대가(大家)인 후지츠카 지카시는 “청조학(淸朝學)의 연구의 제일인자는 김정희이다.”라고 극찬했습니다. 흔히 청조학이라고 하면 실학이라고 하여 경세치용의 측면 만을 강조한 탓에 정작 고증학(考證學)의 가치는 뒷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고증학의 치열한 정신이 조선 시대 파편화된 삶을 반성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김정희가 말한 대로 ‘문경(門經)을 찾는 것이야말로 학문의 요체’가 된다는 중요한 가르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가령, 김정희는 시론의 문경을 두보(杜甫)임을 역설했습니다. 그런데도 추사는 두보를 배우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저자의 설명대로 두보의 시를 배운다고 해서 두보의 경지에 오르는 게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보다는 두보에 이르는 문경을 따라가면서 차근차근 공부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즉 당대의 대가들을 배운 다음 명나라, 원나라를 거쳐 비로소 당나라에 이르러 두보의 시를 배울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야 두보를 뛰어넘는 시인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추사는 문경이라는 학문하는 법에 따라 조선 사회에 명실상부한 문인화가 없다는 현실을 직시하였습니다. 당시 조선 사회는 완물상지(玩物喪志)라고 하여 그림을 잡기(雜技)로 매몰차게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추사에게 그림은 사부기(士夫氣)였습니다. 사부기를 그리는 데 있어 추사는 황솔(荒率)한 느낌을 어떻게 그릴 수 있을 것인가를 늘 몰두했습니다. 왜냐하면 황솔한 느낌은 장경(張庚)의 영향으로 ‘냉일(冷逸:쓸쓸함)하고 고요한 의취’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좀 더 말하면 ‘거칠고 간략하고 메마른 느낌이다. 찬바람이 부는 겨울에 잎이 다 져버린 고목만 홀로 서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한편으로 <세한도>의 발문에서는 추사체(秋史體)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글씨에 대해 ‘해서가 분명하지만, 우리가 늘 보던 깔끔한 형태의 해서는 아니다. 오히려 예서의 맛이 강하게 남아 있는 해서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유홍준은『완당평전 1』에서 추사체의 본질과 매력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즉 추사는 정통적인 순미(純美), 우미(優美)가 아니라 반대로 추(醜), 미학 용어로 말해서 미적 범주로서의 추미(醜美)를 추구했다. 즉 파격의 아름다움, 개성으로서 괴(怪)를 나타낸 것이라고 했습니다.

『세한도』를 읽으면서 옛 사람들의 내면적 풍경이 되살아났습니다. 덕분에 선인들의 은은한 삶의 향기를 맡으며 공감했습니다. 그래서 <세한도>에 얽힌 사연과 즐겁게 노닐면서 ‘이 황량하고 썰렁한 분위기’를 비로소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사부기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서권기(書卷氣)에서도 손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일찍이 추사는 “가슴 속에 책 만권이 들어 있어야 그것이 흘러 넘쳐 그림과 글씨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백호당(百號當)이라고 불렸던 추사의 <세한도>를 보면서 학예일치(學藝一致)의 정신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깊이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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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의 유토피아 -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꿈꾼 세계 ㅣ 키워드 한국문화 5
서신혜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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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부터 대설(大雪)이 내렸다. 하루아침에 별천지(別天地)가 눈앞에 펼쳐졌다. 뭐라고 형언하기 힘든 설국(雪國)은 아름다움을 물씬 빚어냈다. 그래서 인지,

 
내게 왜 푸른 산에 사느냐고 묻지만

빙긋 웃고 답 안하니 마음 절로 한가롭다

복사꽃 잎 떠 흐르는 물길 아득하게 멀어지니

이곳은 별천지요 사람 세상이 아니로다

 


이태백(李太白)의 시가 절묘했다. 무릉도원(武陵桃源)이라고 해도 좋을 듯 했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무릉도원에 대해 아는 게 없다. 서양에서 말하는 유토피아가 동양에서는 무릉도원으로 불린다는 사전적인 정보 수준이었다. 그래서 무릉도원의 실체에 대해 시종(始終) 궁금한 게 사실이었다. 일찍이『논어』에서는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라는 말이 있다. 곰곰이 반추해보면 즐기는 데 있어 앞서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제대로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서신혜의『조선인의 유토피아』는 이런 지적 호기심에「몽유도원도」로 답하고 있다. 이 책은 ‘키워드 한국문화’ 시리즈라는 소책(小冊)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한 장의 그림 또는 한 장의 역사적 장면을 키워드로 삼아 구체적인 대상일 통해 한국을 찾자는’ 것은 의미 있는 내용이라고 해도 과언(過言)이 아니었다. 한국문화의 진면목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러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꿈꾼 세계는 어땠을까? 책을 펼치면 안견의「몽유도원도」가 나온다. 그리고 다시 책장을 펼치면 안평대군의「몽유도원기」가 나온다. 안평대군이 꿈에 본 도원(桃源)을 안견이 그린 것이다.「몽유도원기」을 보면 ‘골짜기에 들어서자 안이 넓게 트여 2~3리는 될 듯하였다. 사방으로 산이 벽처럼 둘러서 있는 가운데 구름과 안개가 자욱이 피어오르고 있었으며, 가깝고 먼 복숭아나무 숲에 햇살이 비치어 마치 노을이 지는 듯했다(…) 앞 내에 조각배만 물결을 따라 떠다닐 뿐이어서 그 쓸쓸한 정경은 마치 신선이 사는 곳인 듯했다.’라고 하면서 도원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한편 도원이 조선인의 유토피아를 상징했던 것은 도연명의「도화원기」에서 비롯되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몽유도원도」와「도화원기」에서 속세와 단절된 별세계 즉 무릉도원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이 도원을 꿈꾼 후 “내 몸은 궁궐에 매여 밤낮으로 일을 하는데도 어떻게 꿈에서 산림에 이를 수가 있었을까? 또 어떻게 하여 도원을 갈 수가 있었을까?”라는 심정을 토로했다. 반면에『도화원기」는 무릉이라는 사람이 길을 잃어 도원에 가서는 그곳 사람이 말하길 “선대에 진(秦)나라 때의 난리를 피하여 처자식과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이 외딴곳으로 온 후 다시는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깥세상과 교제가 끊겼지요.”라는 놀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러한 무릉도원이 조선인의 마음에 어떤 영감을 주었는지 간략하게 살펴보면 동천(洞天), 부산(釜山), 청학동(靑鶴洞), 판미동(板尾洞)이라는 지명의 흔적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령, 동천은 신선이 사는 땅으로 세속의 때가 묻지 않는 깨끗하고 아름다보고 조용한 공간을 말한다. 부산은 물자가 풍부하여 가난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청학동은 푸른 학이 사는 곳이다. 무릉도원이 환상적인 공간이라는 것과 달리 자기들이 거주하는 공간이 곧 자기들이 바라는 세상이 되고자 염원했던 것이다.

이 책을 찬찬히 읽으며「몽유도원도」의 세계를 두루 산책하며 감상(鑑賞)할 수 있었다. 옛 그림에 얽힌 다양한 시선과 상징하는 바를 보면서 덕분에 우리 문화를 새롭게 조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옛 그림 속에는 역사가 있다.”는 오주석 선생의 따끔한 충고가 소중한 지적 자극이 되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옛 그림에서 한 분의 그리운 옛 조상을 만날 수 있다.”는 진실은 더 말할 나위가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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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08-30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읽으면서 안견의 그림을 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이 좋은 그림이 일본에 있다는게 무척 아쉬울 따름이네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1
테네시 윌리암스 지음, 김소임 옮김 / 민음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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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여리면, 여린 사람들은 희미한 빛을 발하거나 반짝거려야만 해. 나비 날개는 부드러운 색을 띄어야만 하고 불빛 위에 종이 갓을 씌워야 해… 여린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거든. 여리면서도 매력적이어야 해. (…)육체적 아름다움은 사라지죠. 순간적이죠. 하지만 마음의 아름다움과 영혼의 풍요로움 그리고 가슴속 부드러움은… 나는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 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더 증폭되죠! 세월이 가면 갈수록 이요! 내가 가난한 여자라고 불려야만 하다니 정말 이상하죠! 내 가슴속에 이런 보물들이 간직되어 있는데요. 나는 나 자신을 매우 부유한 여자라고 생각해요! 그동안 어리석었죠.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다니!

-테네시 윌리엄스의『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중에서

 

 




세상을 살다보면 혼란스런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혼란스런 일들이 전혀 뜻밖일 때 인생은 쉽게 망가질 수 있습니다. 찰랑찰랑 했던 행복이 어느 순간 우리 몸에서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그렇게 사라져 버리는 것은 불행 때문입니다. 불행은 눈물을 빨아올리면서 마음 한 구석을 텅 비게 합니다. 온 몸이 가벼워진 탓에 그만큼 비틀거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10분이면 갈 거리를 불행한 사람들은 몇 분 몇 시간이 걸릴지 모릅니다.

그러면 불행한 사람에게 제일 좋은 치료는 무엇일까요? 테네시 윌리엄스는『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친절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블랑시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가다가 묘지라는 전차로 갈아타서 여섯 블록이 지난 다음 뉴올리언스 시의 극락이라는 곳’에 내린 이유는 친절이 필요해서 그랬습니다. 극락에는 자신의 여동생 스텔라와 제부인 스탠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블랑시는 그들이 어느 누구보다도 자신을 친절하게 대해 주리라 여겼습니다. 그녀가 고향을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은 가족들이 남겨놓은 차용증서 때문에 집을 팔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처지를 밝히면서 친절하게 위로 받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기대와 달리 극락은 빈민가였으며 여동생 부부는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더구나 부잣집에서 곱게 자란 여동생이 왜 단순하고 직선적인 스탠리와 결혼했는지 의아했습니다. 스텔라 말대로 스탠리가 가지고 있는 추진력 때문일까요? 스텔라는 판매원에 불과한 스탠리가 나중에 출세할거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스탠리가 천재여서 그런 게 아니라 바로 추진력 때문이었습니다. 

추진력? 블랑시는 못마땅했습니다. 오히려 그녀는 스탠리가 화약통 같다고 했습니다. 만약 스탠리가 진짜 남자라고 한다면 신사다워야 했습니다. 그녀에게 신사는 인간의 단계에 도달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술, 음악이라는 광채 덕분에 부드러운 감정들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스탠리는 짐승 같은 행동을 했으며 짐승 같은 본성을 지녔습니다. 그가 즐기는 포커 파티를 석기 시대에 살아남은 유인원들의 잔치라고 그녀는 냉정하게 말했습니다.

이렇게까지 그녀가 스탠리에게 심장이 터질 듯 한 전율을 느끼는 것은 현실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습니다. 스텔라 말대로 습관에 대해서는 서로 참아줘야 하는데 그녀는 금세 벽에 부딪쳤습니다. 그녀는 여리면서도 매력적이라는 환상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환상이라는 보물을 간직한 그녀는 언젠가 백만 탄 왕자를 만나 부유한 삶을 살게 되리라 믿었습니다. 그녀는 ‘세련되고 지성과 교양을 갖춘 여자는 남자의 삶을 풍요롭게 해줄 수’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스탠리가 자신을 친절하게 대해주지 않는 것이 자신을 미워하거나 비난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한편으로 그녀의 바람대로 미치를 만나면서 다시 한 번 사랑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녀에게 미치는 ‘내 젊음이 갑자기 배수구로 사라지고, 그리고 당신을 만났어요.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당신이 말했지요. 그래요, 나도 누군가가 필요했어요. 당신을 만난 것을 하느님께 감사했어요. 당신은 신사같이 보였기 때문이죠… 바위 덩어리 같은 이 세상에서 내가 숨을 수 있는 틈새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들 모두는 사랑의 상처를 이미 겪었기 때문에 외로웠습니다. 둘 다 근심이 가득하고 심각했으며 서로가 서로를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함께 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차는 얼마 못 가 멈추고 말았습니다. 그녀가 미치에게 말했던 마법 같은 말들이 스탠리를 통해서 가짜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녀는 그녀대로 ‘진실을 말하지 않고 진실이어야만 하는 것’을 말했다고 용서를 빌지만 미치는 그녀의 거짓말에 놀아난 스스로를 더욱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의 진실은 ‘낯선 사람과 관계를 가지면서 낯선 사람의 친절’에 의지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미치의 변심을 두고 오히려 돼지 같다고 아주 현실적으로 미워합니다.

일찍이 카를 힐티는『행복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욕망은 내가 원하는 거을 얻게 된 것을 약속하며, 혐오는 내가 싫어하는 것과 마주치지 않기를 바란다. 욕망에 속은 사람은 불행하지만, 참기 힘든 것과 마주친 사람은 더욱 불행하다는 것을 알라’고 했습니다. 또한 ‘자기가 불행하다고 해서 남을 책망하는 것은 교양이 없는 사람이나 하는 태도이며, 자신을 책망하는 것은 미숙한 사람이고, 자신도 다른 사람도 책망하지 않는 것이 교양인, 완전하게 교육을 받은 사람이 취할 태도’라고 했습니다.

이 소설에서 블랑시의 욕망은 불나방 같았습니다. 불나방에게 화려하게 빛나는 불빛은 대단히 매력적입니다. 불빛 이외에는 아무것도 불나방의 욕망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사람으로 말하자면 불빛은 매우 부자인 사람입니다. 그럴수록 불나방은 자신을 세련된 여자라는 환상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랑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적어도 사랑한다고 했을 때 헤어지면 보고 싶은 게 당연합니다. 하지만 불나방 같은 사랑은 헤어지면 그만입니다. 결국 불나방의 사랑은 서로에게 낯설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소설을 읽으며 낯선 사랑이라는 욕망은 낯선 친절에 자신을 속이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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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의 탄생 - 유럽을 만든 인문정신
이광주 지음 / 한길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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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이라는 부제가 달린 디트리히 슈바니트의『교양』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즉 ‘교양은 인간의 상호 이해를 즐겁게 해주는 의사소통의 양식이다. 요컨대 교양은 정신의 몸, 그리고 문화가 함께 하나의 인격체가 되는 형식이며, 다른 사람들의 거울 속에 자기를 비추어보는 형식’이라고 했다.

살다보면 종종 무례한 사람들로 인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상식이라고는 없는 그들과 의사소통하기란 불가능하다. 그 사람들이 일으키는 마찰력은 결국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다는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세대 간의 불협화음은 치명적이다. 한마디로 교양은 무용지물이다. 교양을 단순한 앎 정도로만 가볍게 받아들인다면 오히려 우리는 교양이라는 그럴듯한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광주의『교양의 탄생』은 대단히 흥미롭다. 이 책은 교양인이 고전에 밝은 사람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보다는 ‘경작(cultura)’에 대한 식견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키케로가 말한 ‘교양이 정신의 육성(cultura animi)’에서 비롯된 것으로 ‘교양인은 농민이 밭을 갈 듯 도처에 삶의 푸르름을, 교양의 토포스를 마련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교양의 토포스를 박하다식하게 두루 살피면서 우리들을 교양의 역사로 안내한다.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 20세기에 이르는 동안 교양의 개념을 꺼내 놓는다. 그래서 우리는 교양인의 어제와 오늘에 관해서 풍부한 교양을 쌓는 지적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교양인의 고전적 초상은 고대 그리스에서 등장하는 데 바로 ‘파우스트’였다. 끊임없이 묻고 탐색하는 인간이었다. 로마에 이르면 ‘후마니타스’였다. 파우스트와 후마니타스는 문자의 문화 대신 소리의 문화가 우세했던 시대의 교양인이었다. 그들은 아고라와 같은 광장에서 담론적, 사교적 교양인이었다. 이들의 차이점을 보면 파우스트가 관조적 교양인 반면에 후마니타스는 실천적 교양인이었다.

중세에 이르러 궁정 문화가 싹트면서 귀부인의 사교 문화가 발달했다. 이것이 바로 그랑 다메(귀부인)이다. “사랑은 12세기의 발명이다”라는 프랑스 샤를 세뇨보스의 말처럼 ‘기사와 귀부인의 만남이 낳은 여성에 대한 섬세한 마음가짐과 여성을 고귀한 존재로 받들고 사랑을 바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높인 궁정풍 사랑(armour courtois)'였다. 이러한 궁정풍 사랑은 16~17세기 살롱 문화를 낳았다. 살롱 문화에서 프랑스는 오네톰을, 영국은 젠틀맨이라는 사교적 교양인이 탄생하였다.

한편으로 살롱문화가 발달한 시기의 유렵은 아카데미의 시기였다. 이로 인해 백과전서적 교양인이 요구되었다. 그리고 18세기 과학 혁명을 통해 ‘유용성은 이제 신사 교양인의 세계에서 키워드’가 되었다. 이전에 과학(science)은 ‘값싼 요리의 지식(세네카)’, ‘내가 이 반지에 관해 갖고 있는 지식(세익스피어)’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근대에 이르러 베이컨이 주장했던 유용성이 학문의 중심이 되면서 과학은 전문적인 지식인, 전문적인 대학(大學)을 발전시켰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전통적 교양지상주의에서 전문성으로 변화되어 온 교양인을 이해할 수있게 된다. 더불어 대학이 전문화된 계기를 알 수 있다. 오늘날 대학의 전문주의에 안타까움은 18세기『백과전서』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보편적 지식은 이미 인간의 범위를 벗어났다’에 드러났다. 저자 또한 이 책을 통해 대학의 전문주의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저자는 ‘아널드의 교양(liberal)’을 재조명하고 있다. 아널드는『교양과 무질서』에서 ‘교양이 생각하는 완성이란 개인이 고립되고 있는 한 불가능하다. 개인은 다른 사람들과 손을 잡고 완성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고, 사람들이 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고 했다. 이러한 아널드의 주장에 대해 저자는 ‘사회적인 교양’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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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모른다
정이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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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아주 우연히 뭔가를 알아채는 순간이 있다.                                                              몇 십 년 만의 폭설이 세상을 하얗게 했다. 하지만 눈이 내릴 때의 행복도 잠시, 길은 탁해지면서 미끄러워졌다. 도로도 마찬가지였다. 승용차 안에서 느껴지는 네 바퀴의 통증은 어느 때보다 퍽퍽했다. 그래서 인지 사이사이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노래는 습기에 젖은 듯했다. 듣고 있는 노래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는 없었다. 노래가 끝나고 DJ가 “타르티니의 G단조 바이올린 소나타”라고 했을 때 겨우 클래식이었음을 알았다. 그런데 DJ가 그 곡의 부제가 “악마의 트릴”이라고 했을 때 정이현의『너는 모른다』가 불현듯 떠올랐다.

1713년. 스물세 살의 젊은 작곡가 타르티니는 악상이 떠오르지 않아 괴로워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속에서 악마를 만난다. 악마는 타르티니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해온다. 그의 영혼을 팔면 아름다운 음악을 주겠다는 것이다. 타르티니는 이 교환에 응해 제 영혼을 판다. 그러자 악마는 그가 처음 들어보는 놀랍도록 황홀한 선물을 연주한다. 꿈에서 깨어나자마자 미친 듯이 기억을 되살려 받아 적은 음악이 바로 <악마의 트릴>이다…(p 162) 

이 소설에서 타르티나를 알고 있는 주인공은 열 한 살의 소녀 유지였다. 음악의 신동으로 불리는 유지에게 ‘악마의 트릴’ 하나쯤 알고 있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너는 모른다’라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너’가 모르는 진실이 뼛속 깊이 새겨져 있었다. 유지는 <악마의 트릴>을 그저 듣는 것이 아니라 숨 막히는 가족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악마를 끌어안았다.

그런데 어느 날 서초구 서래마을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던 유지가 돌연 사라졌다. 유지가 사라지자 너의 가족들은 두드러져 보일만한 슬픔은 없었다. PC 방이나 친구 혹은 바이올린 레슨 선생님과 같이 있을 거라는 적당한 무관심이 서로 뒤섞여 나타났다. 비록 뒤통수를 한 대 후려 맞은 심정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원점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했던 ‘너’는 냉정을 지키려고 했다. 유지는 ‘너’의 가족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너’는 유지에게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가 소설을 읽을수록 ‘너’에게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작가 말대로 의문이란 고요한 수면으로 흐트러뜨릴 가능성이 있는 돌멩이였다. 작가는 유지 실종 사건과 연루된 너의 가족들의 입장을 번갈아 추적했다. 이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불행한 사고를 당했을 때 나타나는 ‘가족 내 문제’가 투명한 탓이었다. 유지가 피해자인 반면에 너의 가족들은 가해자가 되는 투명한 사건이라고 할까?

이를테면 아버지 김상호는 사업 밖에 모르며 무뚝뚝한 이기심으로 사는가, 어머니 진옥영은 굳이 친정을 핑계로 왜 중국으로 은밀히 가려고 했나, 이복언니 은성은 가족들과 떨어져 혼자 살며 매번 짧은 사랑에 집착하고 있나, 이복오빠 혜성은 가짜 등록금 영수증을 내밀며 어째서 의대생 노릇을 하고 있나, 등등 그것이다. 반면에 유지는 엄마는 짱깨였고 엄마의 딸인 아이도 짱깨라는 폭력에 맞서 싸우기 위한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그럴수록 내면의 동요를 감추는 기술을 배워나갔다. 그리고 학교에서 바이올린을 핑계로 하여 애들과 어울리지 않아 왕따를 당하면서도 정작 유지는 자기가 혼자라는 것에 흔들리지 않았다.

이렇듯 작가는 너의 가족들의 황폐해진 삶을 따라가면서 상처뿐인 가족들의 실체를 보여주고 있다. 어느 누구로부터도 사랑받고 있지 않다는 것은 곧 나 스스로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를 미워하게 되는 것이다. 가족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닐 것이다. 이 소설에서 ‘유지는 뭐랄까, 누군가에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아이였다. 누구에게나 골고루 무심했다.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인생을 유지는 아예 몰랐다. 알 필요가 없게 태어났다.’라는 우울함이 가족의 화목함에서 벗어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일찍이 마르틴 부버는『나와 너』에서 ‘나와 너의 관계를 제시하려면 동그라미를 하나 그리는 수밖에 없다. 이 동그라미는 너와 관계하지 않는 모든 것을 그 둘레 밖으로 내쫓는다.’라고 했다. 어쩌면 가족은 가장 안전한 동그라미다. 이제껏 우리는 그렇게 믿어왔다. 하지만 가족마저 맹목적인 사랑에 갇히면 마르틴 부버가『나와 너』에서 말한 대로 ‘사랑이 상대방의 전체를 얻지 못하게 되며 상대방의 부분 밖에 더 보지 못할 때는 미워하게 되는’ 것이었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사랑과 미움의 맹목적 관계’를 리얼리티하게 포착하고 있다. 유지의 실종과 함께 너의 가족들의 아주 일상적인 암묵적 규칙이 서로 겹치면서 가족이라는 게 뭘까? 라는 생각을 되돌아보게 했다. 어쩌면 부모와 자식이라는 이름 아래 놓인 가족은 서로의 정서적 공감을 향유하는 친구도 아니며, 사랑을 놓고 줄다리기를 하는 연인도 아닌 ‘기습적으로 도착했던 생명’에 불과한 지도 모른다. 혹은 ‘그냥 식구’일수도 있다.

『너는 모른다』를 읽으면서 악마에게 영혼을 팔면 어떻게 되는 것인지 시종 궁금했다. 앞서 말했듯 사랑이 반쪽이라고 한다면 외로운 가족의 현실은 악마의 자화상이 아닐 수 없었다. 악마의 자화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나타낸다면 말줄임표(…)이거나 물음표(…?)였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삶이 정지된 슬픔 같은 것이었다. 가장 가까워야 하는 사이의 사람들이 가장 먼 사람이 되는 반쪽 사랑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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