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
윌리엄 세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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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참으로 걸작품이 아닌가! 이성은 얼마나 고귀하고, 능력은 얼마나 무한하며, 생김새와 움직임은 얼마나 깔끔하고 놀라우며, 행동은 얼마나 천사 같고, 이해력은 얼마나 신 같은가! 이 지상의 아름다움이요 동물들의 귀감이지 -헌데, 내겐 이 무슨 흙 중의 흙이란 말인가? 난 인간이 즐겁지 않아.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어느 게 더 고귀한가. 난폭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맞는 건가, 아니면 무기 들고 고해와 대항하며 싸우다가 끝장을 내는 건가.

『햄릿』중에서

 

왜 햄릿은 떡갈나무와 같았을까요?

불행이 오래오래 살아남는 이유는 뭘까요? 셰익스피어의『햄릿』에서 햄릿은 죽는 것이 자는 것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결말이라고 했습니다. 말 그대로 잠만 자면 육신이 물려받은 가슴앓이와 수천 가지 타고난 갈등이 비로소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는 건이 꿈꾸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이 곧 불행의 걸림돌이 된다고 했습니다. 일찍이 괴테는 햄릿을 ‘화분에 떡갈나무를 심은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내성적이고 감수성이 예민했던 햄릿은 분재가 적당했습니다. 하지만 떡갈나무가 자라면서 결국에는 화분을 깨뜨리는 비극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햄릿은 떡갈나무와 같았을까요?

덴마크 왕이었던 아버지가 독사(毒蛇)에 물려 죽은 것으로 알았던 햄릿은 어느 날 유령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유령은 바로 아버지의 혼령이었습니다. 유령은 그에게 듣고 나면 복수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복수라는 것이 가볍다 가벼운 한 마디로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젊은 피를 얼게 하며, 두 눈을 궤도 이탈한 별처럼 만들고, 땋아서 묶어놓은 머리채를 풀어놓고,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을 성난 고슴도치 깃털처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유령이 말한 복수의 정체는 살인의 원수를 갚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로다

유령의 말을 듣고 보니 자신이 알고 있던 독사는 아무런 죄가 없었습니다. 진짜 독사는 다름 아닌 지금 왕관을 쓰고 있는 클로디어스라는 그의 삼촌이었습니다. 클로디어스가 햄릿의 어머니이자 왕비를 독차기 위해 사악한 기지를 발휘해서 아버지를 독살했던 것입니다. 지옥이 아니고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그는 분개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유령과 복수를 약속하며 악당이 되기로 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왕비는 그의 어머니가 아니었습니다. 최고로 악독한 여자에 불과했습니다. 자신의 남편이 죽은 지 한 달도 못 되어 최악의 속도로 삼촌과 결혼한 어머니에 대한 원망으로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로다’고 했습니다.

햄릿이 느낀 정신적인 외상, 즉 트라우마는 대단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과 어머니의 성급한 결혼 때문에 햄릿은 자기 인식에서 멀어졌습니다. 햄릿의 변신이 자신의 딸, 오필리아를 사랑한 결과라고 생각했던 플로니어스 재상에게도 정작 그것은 아무런 원인이 되지 않았습니다. 오필리아가 결혼하고자 했을 때 햄릿은 그녀에게 순결한가? 라고 물었으며 당신의 순결은 당신의 아름다움에게 어떤 대화도 허락하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자신을 찾아온 친구들에게 자신은 감옥에 살고 있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친구들은 햄릿의 야망이 너무 좁아서 생긴 거라고 했지만 그는 호두 알 속에 갇혀 있다 해도 그의 야망은 무한 공간의 왕이라고 했습니다. 다만 악몽을 꾸지 않는다면 그럴 수 있다고 했습니다. 또한 마음이 울적하여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그저 더럽고 병균이 우글거리는 증기의 집합체로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있음이냐 없음이냐

이러한 난폭한 운명 앞에서 햄릿은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어느 게 더 고귀한가. 난폭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맞는 건가, 아니면 무기 들고 고해와 대항하며 싸우다가 끝장을 내는 건가.”라고 고뇌했습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 만약에 죽는다고 한다면 잠 한번으로 모든 것이 끝날 것입니다. 하지만 자면서도 꿈꿔야 한다면 결코 죽을 수 없었습니다. 햄릿은 불행을 견디지 못한다면 양심 때문에 비겁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결심의 붉은빛은 창백한 생각으로 병들어 버리고, 천하의 웅대한 계획도 흐름이 끊기면서 행동이란 이름을 잃어버린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복수의 칼날을 접는 대신에 연극을 통해 왕의 양심을 심판하고자 했습니다. 햄릿에게 연극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과거에나 현재에나 본성에 거울을 비춰주는 거울이었습니다. 미덕에게는 자기 몸매를, 경멸에게는 자기 꼴을, 바로 이 시대와 이 시절은 그 형체와 생김새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죄지은 인간들이 연극을 보고 있을 때 그 극적인 표현이 너무나 교묘하여 영혼을 때림에 그들이 즉각 죄상을 공표하기 때문입니다. 연극의 제목은 비엔나에서 있었던 살인을 본뜬「쥐덫」이었습니다.「쥐덫」은 악랄한 작품이었지만 죄 없는 영혼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에 연극을 보고 왕이 움찔한다면 오직 죄 지은 사람에게는 찔리는 게 있을 것입니다.

 

오만한 죽음이여

그래서일까요? 불안했던 왕은 햄릿을 영국으로 보내기로 했습니다. 한편 플로니어스는 왕비에게 햄릿이 왕을 몹시 화나게 한 것을 꾸짖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면서 왕비의 내실의 휘장 뒤에 숨어 왕비와 햄릿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왕비가 햄릿에게 사악한 혀로 꾸짖는 질문을 던지자 햄릿은 경박한 혀로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햄릿은 휘장 뒤에 있던 플로니어스를 발견하고는 살해했습니다. 이런 피비린 나는 행위에서 햄릿은 왕비에게 나쁜 쪽은 내버리고 나머지 반쪽으로 더 순수하게 살라고 말했습니다.

햄릿이 플로니어스를 살해하자 재상의 아들 레이티즈가 폭도를 일으켜 왕에게 책임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왕은 자신은 죄가 없다며 칼날의 방향이 다르다고 했습니다. 더구나 햄릿 때문에 오필리아가 실성하여 끝내 물에 빠져 죽자 이것을 복수의 원인으로 생각한 왕과 레이티즈는 마음의 평화를 위해 계책을 만들었습니다. 즉 햄릿과 레이티즈가 칼로 기량에 공식 내기를 할 때 약간의 속임수로 레이티즈 칼에 독을 바르는 것입니다. 만약 운 좋게 이것이 실패한다면 차선책으로 햄릿에게 독배가 든 술잔을 마시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요? 햄릿 대신 왕비가 독배를 마셨고 그 찰나에 햄릿은 레이티즈의 칼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지푸라기 하나에 대한 큰 믿음

살다보면 햄릿처럼 한 방울의 악 성분 때문에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불러일으키는 시기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온갖 운명과 위험에 놓였을 때 진정으로 위대함은 무엇일까요? 루소는『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인간이 처한 어떤 상황 속에서 그토록 불행한 것은 오직 그들 자신 때문이다. 우리가 침묵을 지키고 이성이 말하도록 내버려 두면 이성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모든 불행을 위로해준다. 그 불행들이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 한 이성은 그것들을 없애 주기까지 한다. 왜냐하면 불행의 가장 비통한 상처는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햄릿은 불행이 닥쳐왔을 때 그것이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성을 쓰지 않고 짐승 같은 망각 혹은 결과를 너무 꼼꼼하게 생각하는 비겁한 망설임으로 복수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큰 명분이 있고서야 행동하는 게 아니라, 명예가 걸렸을 땐 지푸라기 하나에도 큰 싸움을 찾아낸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햄릿의 생각은 반에 반만 지혜일뿐 나머지는 비겁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행을 피할 수 없다면 불행 속으로 뛰어드는 방법도 있을 수 있겠지요. 이럴 때 지푸라기 하나에도 큰 믿음으로 그것을 견디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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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일에서 만족을 얻는가 - 영혼 있는 직장인의 일 철학 연습
배리 슈워츠 & 케니스 샤프 지음, 김선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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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없다면 모든 인생은 부패한다. 그렇지만 일에 영혼이 없다면 인생은 질식사한다.

-알베르 카뮈-

 

베리 슈워츠· 케니스 샤프의『어떻게 일에서 만족을 얻는가』에 대해 궁금했던 이유는 간단하다. 어떻게 일을 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에 대해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한 답을 하기 때문이었다. 바쁜 일상을 되돌아보면 우리는 일하는 인간, 즉 ‘호모 워크스’(homo workers)와 마주 친다. 만약에 일을 하지 않는다면 카뮈 말대로 우리의 인생은 부패할지 모른다. 그런데 우리가 일을 하면서도 왜 일을 해야 하는지 모른다면 어떻게 될까? 기계적인 탓에 아무런 삶의 가치도 없을 것이다. 오직 일해야 하는 규칙만 있고 대신에 일해야 하는 영혼이 없다면 앞서 카뮈가 경고한 대로 우리의 인생은 질식사할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이 일을 하면서 질식사의 위험에 놓여 있다. 이러한 까닭은 이 책의 제목에 나와 있듯 일을 하면서도 ‘어떻게 만족’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일을 하다보면 선택을 해야 하는 수많은 순간이 있을 수 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업무의 규율과 목적 사이에서 선택해야만 한다. 가령, 교사는 학생들이 카르페 디엠, 즉 오늘을 즐기면서 공부를 하도록 이끌어 주고 싶어 한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다르다. 학생들의 성적에 따른 스트레스 때문에 최선이 아닌 획일적이고 표준화된 방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결국 교사는 무력감이라는 굴레 탓으로 만족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만족의 딜레마를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이 책의 저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실천적 지혜’(프로네시스phronesis)를 제시하고 있는데 충분히 고전적 지혜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혜를 추상적이거나 소수만 갖춘 재능이 아니라, 우리가 올바른 선택을 하는데 있어 누구에게나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지혜를 이론이 아닌 실천의 문제로 파악했다. 즉 분노가 좋은가, 나쁜가라는 추상적인 질문보다는 ‘누구에게 얼마나 오래, 어떤 식으로 무엇을 목표로 화를 내야 하는가’가 중요했다. 따라서 우리가 올바른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똑똑함’이 아니라 ‘탁월성’을 발휘해야 한다. 탁월성

(excellences)이란 자제력, 공정성, 용기, 포용력 같은 기질을 일컬으며 달리 ‘미덕’(virtues)으로 불린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된 탁월성, 즉 실천적 지혜는 어떤 문제에 직면했을 때 사회공동체의 미덕을 요구한다. 그러려면 먼저 ‘도덕적 자각’이 절실하다. 실천적 지혜를 실천하는 사람은 특수성을 인지해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이해라는 서사 구조를 지닌 존재여서 ‘도덕적 상상력’과 ‘감정이입’이 요구된다. 도덕적 상상력은 ‘다양한 상황을 살펴보고 그 의미를 간파하는 능력이며 감정이입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헤아리는 정서적 기술이다. 그러나 도덕적 자각만으로 부족하여 무엇보다도 자신에 대한 통찰력(자기 성찰)도 간과할 수 없다. 이러한 능력을 가지고 우리는 행동을 조율하면서 적절한 균형을 추구한다. 적절한 균형은 곧 ‘중용’이라고 하는데 산술적인 평균이 아니라 ‘공감과 거리감을 조율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내면으로는 공감하고 이해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냉정함과 객관성을 유지하는 일’이다.

 

이 책은 실천적 지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면서 삶을 향상시키고 있다. 그리고 삶을 향상키는 목적은 행복을 조명하는 것이다. 행복학에 있어 ‘긍정 심리학자’로 불리는 마틴 셀리그먼은 자기가 하는 활동에 빠져드는 ‘몰입’과 자신이 하는 일을 다른 사람의 삶과 연결하는 ‘의미 찾기’를 행복의 ‘대표적 강점’(signature strengths)이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 직업 심리학 교수 피터 워는 ‘자기 일에 만족하려면 몰두와 열정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자기가 하는 일이 다채롭고, 일 처리 과정에서 재량권이 있어야 하며, 회사의 목적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심리학자 에이미 브제스니에프스키는 앞의 주장을 뒷받침하면서 ‘소명’(calling)과 ‘생업’(job)이나 ‘직업’(career)을 구분했다. 브제스니에프스키의 주장에 따르면 재량권을 가진 자기 일을 소명으로 하는 사람들은 일에 크게 만족한다. 이것이 바로 ‘일과 지혜의 선순환’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공공기관이나 병원의 문턱은 여전히 높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제도를 원활히 운영하기 위해서는 규율과 인센티브가 원칙적으로 필요한 것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원칙이 바람직하다고 해서 모두 올바른 것은 아니다. 바람직한 원칙에도 판단이 들어가지 않으면 오히려 위험해지고 만다. 즉 규율과 인세티브가 재량권을 통제한다면 실천적 지혜를 발휘할 수 없는 부작용이 생긴다. 저자 말대로 규율이 도덕적 기술을 없애고 인센티브가 의지를 꺾는다, 는 것이 더욱 안타까울 뿐이다. 결과적 똑똑한 만큼 무심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자기 일을 생업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한계는 최소한으로 몰입하면서 최소한의 의미 때문에 만족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일과 규율의 악순환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실천적 지혜가 일과 지혜의 선순환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현명한 선택을 한다면 우리 스스로의 삶을 변화시키며 더 나아가 우리를 둘러싼 세상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떠한 일의 목표나 목적을 가리켜 텔로스(telos)라고 했다. 진정한 행복은 실천적 지혜를 가지고 텔로스를 찾아내고 추구하는 것이다. 또한 진정한 행복과 함께 친밀한 사회적 관계에서 ‘온전한 행복’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성과주의, 능력주의의 문화로 인해 공정성이 불안정하고 삭막한 세상에 살고 있다. 이럴 때 실천적 지혜가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살 맛 나는 세상’에 대한 만족감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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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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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란 무엇일까? 사전적 의미로 풀이하면 정신이나 몸이 지친 힘든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한병철의『피로사회』를 읽으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책은 제목에 나와 있듯 피로 의 원인에 대해 명쾌하게 밝히고 있다. 저자가 말하는 피로란 프로메테우스의 간(肝)이 당하는 고통이라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준 벌(罰)로 독수리에게 간을 쪼여 먹힌다. 이런 프로메테우스는 니체가 말한 ‘주권적 인간’에 가깝다. 그럼에도 저자는 프로메테우스를 ‘자기 착취의 주체’라고 재해석하면서 엄청난 피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성찰하고 있다.

 

저자는 프로메테우스의 ‘긍정성의 과잉’을 문제시하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긍정성의 과잉이 피로라는 질병을 일으키는 것일까? 저자는 이 책의 시작을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질병이 있다.”고 하는 주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피로를 질병의 매커니즘으로 진단하고 있다. 질병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전염성 질병이며 다른 하나는 경색성 질병이다. 전염성 질병이 박테리아적 혹은 바이러스적이라면 경색성 질병은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소진증후군 같은 신경증적이다. 전염성 질병은 면역학적인 공격과 방어를 최우선으로 한다. 하지만 경색성 질병은 면역학적인 처방으로 결코 다스려지지 않는다.

 

면역학의 근본 원리는 간단하다. 타자성과 이질성에 부정적으로 반응한다는 것이다. 타자성과 이질성은 곧 제거의 대상이다. 면역학적 타자는 ‘자아 속으로 침투하여 자아를 부정하려고 하는 부정 분자’이다. 그래서 자아는 ‘타자의 부정성을 부정함으로써 타자 속에서 자기 자신을 확인’하는 것이다. 면역학적 예방법이 다름 아닌 ‘부정성의 변증법’을 따른다. 그러나신경성 질병은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비면역학적이다. 과잉으로 인한 소진, 피로, 질식이라는 비면학적인 시스템에서 저항력을 강화시키는 것은 아무런 효과가 없다. 긍정성의 과잉에는 부정성이 개입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신경성 질병은 ‘긍정성의 변증법’을 따른다.

 

앞서 말했듯이 이 책에서 무엇보다 관심을 끄는 것은 이런 질병들이 시대와 불가분의 관계에서 파악된다는 것이다. 즉 지난 세기는 면역학의 패러다임으로 푸코의 규율사회가 맹목적이었다. 정신병자, 감옥, 공장으로 이루어진 푸코의 규율사회는 금지, 규율, 강제, 타자에 대한 거부 등등 부정성의 패러다임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긍정성의 패러다임으로 성과사회다. 피트니스 클럽, 오피스 빌딩, 쇼핑몰, 유전자 실험실로 이루어진 성과사회에서는 능력, 자기 주도, 과잉, 타자성의 소멸 등등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긍정성의 과잉이라는 성과사회의 질병을 면역학의 패러다임으로 치료하는 것은 시대착오에 불과하다.

 

우리는 규율사회에서 면역 주체 혹은 복종적 주체가 된다. 면역 주체에게는 ‘~해서는 안 된다.’가 지배적인 조동사다. 물론 ‘~해야 한다.’에도 어떤 부정성, 강제성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성과사회에서 성과주체가 된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답게 무한정 ‘할 수 있음’이 지배적인 조동사다. 겉만 보면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패러다임의 전환은 부정성에서 벗어나려는 것으로 긍정적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생산을 최대화하고자 하는 열망이 숨어 있으며 결과적으로 ‘활동과잉’이라는 긍정적인 것의 대량화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생산성 향상을 위해서는 ‘능력의 긍정성이 당위의 부정성’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성과사회의 새로운 인간형인 성과주체를 노동만 하는 동물로 규정한다. 노동만 하는 동물은 복종적 주체가 아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주인이자 주권자가 된다. 그러나 성과 과잉을 위해 ‘강제하는 자유 혹은 자유로운 강제’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영혼을 시달리게 된다. 이러한 역설적 자유로 인해 노동만 하는 동물은 자기 자신을 착취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노동만 하는 동물은 착취의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그래서 성과사회의 심리적 질병인 우울, 피로, 소진이라는 자폐적 결과를 낳는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긍정성의 과잉에 따라 영혼이 경색되거나 탈진되고 나면 피로는 폭력이 된다는 것이다. 그럴수록 자신의 괴물 이미지를 더욱 강화하게 된다.

 

자본주의의 사회가 우울한 까닭은 피로가 극대화되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사회는 좋은 삶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생존을 위한 멀티스태킹을 강요한다. 이것은 마치 수렵자유구역의 동물과 같다. 동물은 생존을 위해 지속적으로 경계 태세를 취해야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노동만 하는 인간은 전혀 동물적이지 않다. 동물은 노동의 과잉이 없는 대신에 느긋함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거꾸로다. 벌거벗은 노동에 대해 벌거벗은 생명으로 반응한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호모 사케르’가 되고 만다. 더구나 성과사회에서 호모 사케르는 ‘절대적으로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죽일 수 없는 존재라는 특성이 있다. 그들은 말하자면 죽지 않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한병철의『피로사회』는 ‘우울증이 지배하는 이 시대에 대한’ 효과적인 피로회복제여서 주목할 만하다. 약학적인 도핑적 피로는 성능없는 성과를 가능하게 할 뿐 생명 활동으로 환원하지 못한다. 이것은 자아의 잉여와 반복에서 비롯되는 ‘자아 피로’에 불과하다. 하지만 저자가 제시하는 ‘치유적 피로’는 차원이 다르다. 치유적 피로는 한트케가 말한 ‘눈 밝은 피로’다. 눈 밝은 피로는 영감을 주는 피로다. 즉 자아 피로가 탈진의 피로이며 긍정적 힘의 피로라고 한다면 치유적 피로는 근본적 피로이며 부정적 힘의 피로, 무위의 피로다. 부정적 힘의 피로는 무언가를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을 말한다. 만약에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만 있고 하지 않을 힘이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오늘날 우리는 피로 과잉의 시대에 살고 있다. 언제나 피로한 상태여서 불안하다. 이런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보는 법을 달리해야 한다. 바로 저자가 제시하는 ‘사색적 삶의 부활’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사색적 삶은 곧 실천적 삶이 될 것이다. 가령, 피로가 직사각형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직사가형의 넓이를 계산하는 방법으로 피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피로가 도덕적 직사각형이라고 한다면 계산만으로 답을 찾을 수 없다. 그보다는 사색적이어야 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머뭇거리는 능력’, ‘분노하는 법’, ‘깊은 심심함’그리고 ‘돌이켜 생각하기’는 활동적 삶을 비판하고 치유하는 실천적 지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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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잡스, 잡스가 멈춘 곳에서 길을 찾다
김재범.김동준.조광수.장영중 지음 / 지식공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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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전 2.0인체와 버전 3.0인체의 차이는 뭘까? 세계적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의『특이점이 온다』에 따르면 특이점(singularity)이란 미래에 기술 변화의 속도가 매우 빨라지고 그 영향이 매우 깊어서 인간의 생활이 되돌릴 수 없도록 변화되는 시기를 뜻한다. 결국 인간이 만든 기술이 이제는 기술이 인간을 가속적으로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특이점의 시대에서는 기술과 인공 지능의 융합으로 진화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버전 2.0인체가 생물학적 인간이라면 버전 3.0인체는 인공지능형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포스트 잡스 시대에 살고 있다. 애플의 상징이자 혁신의 아이콘, 스티브 잡스가 타계했지만 그 영향력은 여전히 파급적이다. 애플의 로고에서 알 수 있듯 사과를 쉽고 간편하게 한입 먹고 싶을 정도다. 우리 삶의 방식은 그의 날카로운 통찰력과 창조적이고 뛰어난 상상력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가령, 아이폰 4S에서 사용되고 있는 ‘시리’(Siri)를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시리는 기존의 음성인식과 차원이 다르다. 질문에 답변하는 것이 정해진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거론하는 이유를 추론하여 답변한다. 마치 ‘인지적 개인비서’(cognitive)처럼 ‘상호작용’(인터랙션)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융합 전문가 4인은 포스트 잡스 시대의 생존법을『포스트 잡스, 잡스가 멈춘 곳에서 길을 찾다』에서 대화하고 있다. 전문가들의 대화 내용을 요약하면 ‘Personalization’과 ‘Connecting’ 그리고 ‘Design thinking’이다. 먼저 Personalization는 ‘생명을 불어넣다.’는 뜻으로 생명이 아닌 것이 생명이 되는 것이다. 아이패드, 아이폰이라는 제품에서 스티브 잡스로 대변되는 ‘아이’(i)는 사용자 3.0인 ‘유저머’(usumer=user+consumer)를 탄생시켰다. 유저머는 경험을 중요시하는 소비자이며 트위터, 페이스북 같은 소셜 네트워크는 ‘약한 관계’의 사람들로부터 정보를 얻는다. 또 하나의 큰 변화는 ‘내추럴 인터랙션’(natural interactin)이며, 이로 인해 포스트 잡스 시대에는 다중 감각의 멀티모달 인터랙션(multimodal interaction), 자율적인 사고를 가진 사용자 5.0인 로봇, 빅 데이터(big data)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Connecting은 스티브 잡스의 창의력 비밀이다. 다시 말하면 ‘창의란 연결이다.’라는 것이다. 연결은 두 개의 사물의 의미가 결합하여 제 3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인데 이것이 곧 창의다. 그러면 어떻게 연결해야 하는가? S-커브(curve) 진화론에 따르면 기업은 도입기-성장기-성숙기-쇠퇴기라는 과정을 거쳐 진화한다. 기업은 지속 성장을 중요시하는데 S-커브에 따르면 S-커브들이 계속 이어지는 것을 말한다. 이럴 때 세 가지 옵션이 있는데 멀리 뛰거나, 높이 뛰거나, 아래로 뛰는 것이다. 그런데 전문가에 따르면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아래로 뛰어내리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그래야 ‘the best’가 아니라 ‘the only’가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Design thinking은 예술가처럼 감성적이며 직관적인 사고와 과학자와 같은 논리적이며 분석적인 사고를 융합하는 것이다. 로저 마틴에 따르면 디자인 씽킹이 매력전인 이유는 탐색과 활용 때문이다. 즉, 직관과 가설을 중시하는 탐색은 미래의 새로운 가치를 찾아내는 강점이 있으나 리스크는 크다. 반면에 논리와 분석을 중시하는 활용은 과거로부터 축적된 지식을 바탕으로 하여 현재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탐색과 활용을 로저 마틴은 ‘지식생산필터’의 용어로 설명하는데 현실세계에서 생겨나는 수많은 의문들은 ‘미스터리’(mystery) 단계, 개인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 아이디어는 ‘휴리스틱’(heuristic)단계, 마지막으로 체계화된 정보는 ‘알고리즘’(algorithm)단계다. 따라서 그는 세계적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디자인 씽킹이 상호작용하면서도 균형을 이뤄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디자인은 스피릿(spirit)이다. 그 가치를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한 좋은 디자인은 나오지 않는다.”는 스티브 잡스의 말을 성찰하게 된다. 스티브 잡스의 테크놀로지에 구현된 스피릿은 ‘체화된 인지’라고 할 수 있다. 체화된 인지는 뇌-몸-환경이 하나의 통합체로 총체적으로 이루어지는 ‘확장된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스티브 잡스, 체화된 인지를 직관적으로 파악한 사람’이라는 전문가들의 주장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더불어 스티브 잡스라는 거인의 어깨에 올라 다음 시대를 이끌 창의성을 보는 것 또한 매우 유효했다. 전문가들은 전통적인 천재의 개념인 [He-창의성]과 최근의 개인 인지적 개념인 [I-창의성]이 아니라 문화적, 사회적 창의성의 개념인 [W-창의성]으로 연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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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 돌베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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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분노는 어떻게 가능할까? 2011 올해의 책 중에서 스테판 에셀의『분노하라』를 주목한 까닭이다. 제목이 주는 인상이 강하다 보면 그것만으로도 제목이 파편화되는 경향이 있다. 그럴수록 제목은 균열이 생기면서 단순해져 누군가는 ‘분노하라’를 굳이 읽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내용을 지레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대한 메시지는 무관심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관심이 덧셈법으로 증폭됐다. 하나, 93세 레지스탕스 노투사의 외침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 분노 신드롬이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나오는 토로시가 그랬던 것처럼 ‘꼭, 그래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토로시는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듣고부터 삶의 부당함에 맞서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꼭, 그래야만 한다.’고 발설하지 않았던가?

 

레지스탕스 운동의 백전노장인 저자에게 프랑스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하여 사르트르와 히틀러가 복잡하게 공존하는 충격 속에서 그는 ‘역사의 흐름’에 대한 자신의 방법론을 발전시켰다. 즉, 사르트르의 ‘책임’과 히틀러의 ‘광기’라는 개인의 명암(明暗)에서 저자는 헤겔 철학을 비판하는 과녁으로 삼았다. 헤겔 철학은 ‘인류의 기나긴 역사를 의미 있는 어떤 과정이라고 해석한다. 그 의미란 인간의 자유가 한 단계 한 단계씩 진보한다는 것이다.’(19쪽) 1948년 유엔 세계 인권선언문 초안 작성에 참여하였고, 유엔 인권위원회 프랑스 대표 등을 역임한 후에도 저자는 사회운동가로서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이렇게 저자는 역사를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진보하기 위해 ‘참여’야말로 자신의 창조적 능력을 발전시키며 삶의 공동체적 가치를 회복할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그런가 하면 저자는 역사를 보는 또 다른 관점, 즉 ‘자유, 경쟁, 언제나 더 많이 갖기 위한 질주, 이런 것들로 이루어지는 진보란 마치 주위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폭풍처럼 체험될 수도 있다.’(20쪽)고 경고하였다. 삶이 예전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안정되었다고 하더라도 자본주의의 한계는 오히려 투명해졌다. 문제는 투명하다는 것이 상상력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이다. 생산 위주의 사고방식이 불러일으킨 부작용으로 인해 경제적 양극화와 고용 없는 성장은 커다란 사회적 문제다. 사회의 지속적인 발전성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인권은 사각지대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어느 때보다 우리는 상호연결성 속에 살고 있다. 따라서 인권은 사회적 위험에 대한 보편적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절감하고 있는 세계 인권 선언 제 22항은 다음과 같다.

 

모든 사람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사회보장제도의 혜택을 받을 권리가 있다. 사회보장제도는 국가적 노력과 국제적 협력에 힘입어, 각국의 조직과 경제적 형편을 감안하여, 인간의 존엄성과 그 인성의 자유로운 계발에 필수불가결한 경제적 ․ 사회적 ․ 문화적 권리의 충족을 성취함을 근간으로 한다.

 

하지만 우리의 보편적 힘은 약하다. 아니 좀 더 사실적으로 말한다면 낯설다고 해야 옳다. 불안정한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자본주의의 속도를 따라가는데 급급하다. 가령, 자동차로 출근하는 일상은 평범하고 단순하다. 그러나 평범하고 단순하다고 해서 보편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상의 이면에는 내 앞만 잘 보면 된다는 것으로 개인적인 앞가림을 부정할 수 없다. 이 책에서 저자는 개인적인 앞가림을 통렬히 비판하면서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거듭 무관심이라는 정신적 결과물을 분석하면서 인간을 이루는 기본 요소 하나를 잃어버린 결과라고 강조하고 있다. 다름 아닌 기본 요소 하나란 참여 의지를 위한 중요한 버팀목이며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무관심의 역설은 독특하다. 누구나 평범하게 살고 있지만 이 세상을 보면 참아낼 수 없는 일들이 넘쳐난다. 참을 수 없는 일들이 터질 때마다 사건의 당사자들만이 이중삼중으로 고통을 당한다. 그러나 얼마든지 우리도 고통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 이럴 때 우리는 앞가림의 평범성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한나 아렌트가『아이히만 예루살렘』에서 지적했던 ‘악의 평범성’과 같은 맥락이다. 악의 평범성은 다름 아닌 ‘무사유’(無思惟)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다. 냉소적으로 말한다면 무사유, 즉 생각이 있는 존재가 생각이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그런 특징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라면 간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 수 없다. 우리에게는 적어도 저자가 말한 ‘분노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목만큼이나 ‘분노하라’는 것은 절실한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저자는 ‘여러분 모두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분노의 동기를 갖기를 바란다. 이건 소중한 일이다.’(15쪽)고 말한다. 이유는 우리가 참여하는 투사가 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분노를 어떤 감정의 발현이라고 하는 대신에 참여의 의지로 해석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분노하지 않는다면 참여의 기회를 잃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분노할 일에 대해 분노를 촉발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불의에 맞서는 참여가 사람을 행복하게 하며 참여하는 사람이야말로 행복한 인간의 표본이라는 저자의 윤리를 가다듬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연예인이나 방송인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소신을 펼치는 것을 보면서 어떤 편견이 아닌 그들의 윤리를 공감하게 되었다. 얼마 전까지 김제동은 잘나가는 연예인이었다. 그런 그가 검찰 수사의 그물망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다. 아무래도 권력은 그의 사회적 발언을 달가워하지 않아 공인(公人)의 자격을 박탈하는 것도 부족하여 법정까지 끌어들이고 있다. 하지만 법정에 가면 그의 무죄는 공인(公認)되지 않을까? 개그콘서트가 따로 없다. 진정한 공인은 공익(公益)에 참여하는 것을 굳이 변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는 누가 뭐래도 ‘염치’(廉恥)를 제대로 알고 행동했다. 그는 등록금 투쟁에 대해서도 “젊어서 고생사서도 해, 이렇게 얘기하는 건 약 올리는 것밖에 안 됩니다. 그거부터 먼저 얘기하면 안 되죠. ‘미안하다.’가 먼저라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염치를 응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분노를 염치의 문화로 응시하는 것은 분노의 성질을 긍정적으로 이해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 저자는 특히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주시하면서 테러리즘을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이스라엘의 공격에 하마스가 로켓포를 발사하면 효과가 있는가? 물으면서 ‘없다.’가 답이라고 했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눈(eye)에는 눈, 이(tooth)에는 이라는 테러리즘은 대의명분이 아니라 ‘격분에 의한 행동’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격분이란 분노가 끓어 넘치는 상태를 말하며 부정적 표현으로 지나치게 위험하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격분이란 희망을 부정하는 행위다. 격분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고, 당연한 일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용납할 수 있는 아니다. 희망이 긍정적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경우에, 격분 탓으로 그것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31쪽)

 

이러한 폭력이라는 유감스러운 결론에 대해 저자는 비폭력에는 희망이 들어 있다고 성찰했다. 그래서 비폭력이 폭력을 멈추게 하는 좀더 확실한 수단이라고 했다. 일찍이 사르트르는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 폭력이든, 폭력이란 일단 실패라는 사실을 나는 수긍한다. 그러나 이 실패는 피할 수 없는 실패다. 왜냐하면 우리는 폭력의 세계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고 했다. 폭력에 저항하는 것은 당연하더라도 저자의 100% 생각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저자의 견해에 따르면 비폭력은 ‘좋은 분노’이기 때문이다. 혹은 역사학자 E. H. 카는『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지체된 성공’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에는 의미가 심장한 실패들이 있으며 오늘날 명백한 실패도 내일의 성공에 중요하게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지나친 경쟁만을 앞날의 지평으로 제시하는 대중 언론매체에 맞서는 진정한 평화적 봉기’의 승리를 저자는 확신한다.

 

프랑스에서만 200만부가 팔린 이 책! 전 세계적으로 분노 신드롬을 일으키며 폭발적인 반응을 보인 것에 놀라며 저자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순간에 때맞춰 세상에 나왔다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전 세계적으로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하여 비명을 지르고 있는 실정이다. 어쩌면 자본주의의 위기는 '타이타닉 콤플렉스'인지 모른다. 타이타닉을 침몰 시켰던 것은 빙산이 아니라 빙산이 불러일으킨 공포 때문이었다. 지금의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하여 사람들이 분노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유, 평등, 박애'의 가치들이 훼손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우리의 미래가 진보하기 위해서는 분노의 가치를 역설하고 있다.『르동드』지는 다음과 같이 서평 머리기사를 게재했다. "레지스탕스, 현재를 감전시키다-'분노하라!'는 현재의 우리들이 적절히 포착해 이용할 대상으로서, 전달의 몸짓으로서 더욱더 관심을 모으는 책이다."(61쪽)

 

한국 사회에서도 전달의 몸짓은 형식만 다를 뿐 의미하는 바는 똑같을 것이다. '꼼수' 정치에 대해 '나는 꼼수다.'라는 정치적 윤리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다. 꼼수는 과속경쟁 사회의 페달을 밟으며 앞만 보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꼼수다.'는 지속가능한 균형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며 '옆'과 '뒤'도 보라고 한다. 앞서 말했듯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며, 이는 현재의 상태를 묵인, 방조하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해서는 세상은 바뀌지 않는 다는 것이다. 반대로 희망은 반대다. 저자가 아폴리네르의「미라보 다리」를 인용하고 있듯 '희망은 어찌 이리 격렬한가!'라는 한 구절과 같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는 분노할 일에 분노해야 하며 "꼭, 그래야만 한다!" 신영복 교수가 말한 것처럼『분노하라』는 것은 책의 제호가 아니라 93세 노투사의 육성이다. 즉 "창조, 그것은 저항이며 저항, 그것은 창조다."라는 메시지는 삶을 관통하는 묵직한 보편적 가치다. 우리 모두가 자신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 분노하라! 이것은 우리의 정신을 번쩍 깨닫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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