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 돌베개 / 201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좋은 분노는 어떻게 가능할까? 2011 올해의 책 중에서 스테판 에셀의『분노하라』를 주목한 까닭이다. 제목이 주는 인상이 강하다 보면 그것만으로도 제목이 파편화되는 경향이 있다. 그럴수록 제목은 균열이 생기면서 단순해져 누군가는 ‘분노하라’를 굳이 읽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내용을 지레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대한 메시지는 무관심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관심이 덧셈법으로 증폭됐다. 하나, 93세 레지스탕스 노투사의 외침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 분노 신드롬이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나오는 토로시가 그랬던 것처럼 ‘꼭, 그래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토로시는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을 듣고부터 삶의 부당함에 맞서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꼭, 그래야만 한다.’고 발설하지 않았던가?

 

레지스탕스 운동의 백전노장인 저자에게 프랑스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하여 사르트르와 히틀러가 복잡하게 공존하는 충격 속에서 그는 ‘역사의 흐름’에 대한 자신의 방법론을 발전시켰다. 즉, 사르트르의 ‘책임’과 히틀러의 ‘광기’라는 개인의 명암(明暗)에서 저자는 헤겔 철학을 비판하는 과녁으로 삼았다. 헤겔 철학은 ‘인류의 기나긴 역사를 의미 있는 어떤 과정이라고 해석한다. 그 의미란 인간의 자유가 한 단계 한 단계씩 진보한다는 것이다.’(19쪽) 1948년 유엔 세계 인권선언문 초안 작성에 참여하였고, 유엔 인권위원회 프랑스 대표 등을 역임한 후에도 저자는 사회운동가로서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이렇게 저자는 역사를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진보하기 위해 ‘참여’야말로 자신의 창조적 능력을 발전시키며 삶의 공동체적 가치를 회복할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그런가 하면 저자는 역사를 보는 또 다른 관점, 즉 ‘자유, 경쟁, 언제나 더 많이 갖기 위한 질주, 이런 것들로 이루어지는 진보란 마치 주위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폭풍처럼 체험될 수도 있다.’(20쪽)고 경고하였다. 삶이 예전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안정되었다고 하더라도 자본주의의 한계는 오히려 투명해졌다. 문제는 투명하다는 것이 상상력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이다. 생산 위주의 사고방식이 불러일으킨 부작용으로 인해 경제적 양극화와 고용 없는 성장은 커다란 사회적 문제다. 사회의 지속적인 발전성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인권은 사각지대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어느 때보다 우리는 상호연결성 속에 살고 있다. 따라서 인권은 사회적 위험에 대한 보편적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절감하고 있는 세계 인권 선언 제 22항은 다음과 같다.

 

모든 사람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사회보장제도의 혜택을 받을 권리가 있다. 사회보장제도는 국가적 노력과 국제적 협력에 힘입어, 각국의 조직과 경제적 형편을 감안하여, 인간의 존엄성과 그 인성의 자유로운 계발에 필수불가결한 경제적 ․ 사회적 ․ 문화적 권리의 충족을 성취함을 근간으로 한다.

 

하지만 우리의 보편적 힘은 약하다. 아니 좀 더 사실적으로 말한다면 낯설다고 해야 옳다. 불안정한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자본주의의 속도를 따라가는데 급급하다. 가령, 자동차로 출근하는 일상은 평범하고 단순하다. 그러나 평범하고 단순하다고 해서 보편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상의 이면에는 내 앞만 잘 보면 된다는 것으로 개인적인 앞가림을 부정할 수 없다. 이 책에서 저자는 개인적인 앞가림을 통렬히 비판하면서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거듭 무관심이라는 정신적 결과물을 분석하면서 인간을 이루는 기본 요소 하나를 잃어버린 결과라고 강조하고 있다. 다름 아닌 기본 요소 하나란 참여 의지를 위한 중요한 버팀목이며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무관심의 역설은 독특하다. 누구나 평범하게 살고 있지만 이 세상을 보면 참아낼 수 없는 일들이 넘쳐난다. 참을 수 없는 일들이 터질 때마다 사건의 당사자들만이 이중삼중으로 고통을 당한다. 그러나 얼마든지 우리도 고통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 이럴 때 우리는 앞가림의 평범성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한나 아렌트가『아이히만 예루살렘』에서 지적했던 ‘악의 평범성’과 같은 맥락이다. 악의 평범성은 다름 아닌 ‘무사유’(無思惟)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다. 냉소적으로 말한다면 무사유, 즉 생각이 있는 존재가 생각이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그런 특징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라면 간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럴 수 없다. 우리에게는 적어도 저자가 말한 ‘분노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목만큼이나 ‘분노하라’는 것은 절실한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저자는 ‘여러분 모두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분노의 동기를 갖기를 바란다. 이건 소중한 일이다.’(15쪽)고 말한다. 이유는 우리가 참여하는 투사가 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분노를 어떤 감정의 발현이라고 하는 대신에 참여의 의지로 해석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분노하지 않는다면 참여의 기회를 잃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분노할 일에 대해 분노를 촉발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불의에 맞서는 참여가 사람을 행복하게 하며 참여하는 사람이야말로 행복한 인간의 표본이라는 저자의 윤리를 가다듬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연예인이나 방송인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소신을 펼치는 것을 보면서 어떤 편견이 아닌 그들의 윤리를 공감하게 되었다. 얼마 전까지 김제동은 잘나가는 연예인이었다. 그런 그가 검찰 수사의 그물망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다. 아무래도 권력은 그의 사회적 발언을 달가워하지 않아 공인(公人)의 자격을 박탈하는 것도 부족하여 법정까지 끌어들이고 있다. 하지만 법정에 가면 그의 무죄는 공인(公認)되지 않을까? 개그콘서트가 따로 없다. 진정한 공인은 공익(公益)에 참여하는 것을 굳이 변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는 누가 뭐래도 ‘염치’(廉恥)를 제대로 알고 행동했다. 그는 등록금 투쟁에 대해서도 “젊어서 고생사서도 해, 이렇게 얘기하는 건 약 올리는 것밖에 안 됩니다. 그거부터 먼저 얘기하면 안 되죠. ‘미안하다.’가 먼저라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염치를 응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분노를 염치의 문화로 응시하는 것은 분노의 성질을 긍정적으로 이해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 저자는 특히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주시하면서 테러리즘을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이스라엘의 공격에 하마스가 로켓포를 발사하면 효과가 있는가? 물으면서 ‘없다.’가 답이라고 했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눈(eye)에는 눈, 이(tooth)에는 이라는 테러리즘은 대의명분이 아니라 ‘격분에 의한 행동’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격분이란 분노가 끓어 넘치는 상태를 말하며 부정적 표현으로 지나치게 위험하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격분이란 희망을 부정하는 행위다. 격분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고, 당연한 일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용납할 수 있는 아니다. 희망이 긍정적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경우에, 격분 탓으로 그것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31쪽)

 

이러한 폭력이라는 유감스러운 결론에 대해 저자는 비폭력에는 희망이 들어 있다고 성찰했다. 그래서 비폭력이 폭력을 멈추게 하는 좀더 확실한 수단이라고 했다. 일찍이 사르트르는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 폭력이든, 폭력이란 일단 실패라는 사실을 나는 수긍한다. 그러나 이 실패는 피할 수 없는 실패다. 왜냐하면 우리는 폭력의 세계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고 했다. 폭력에 저항하는 것은 당연하더라도 저자의 100% 생각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저자의 견해에 따르면 비폭력은 ‘좋은 분노’이기 때문이다. 혹은 역사학자 E. H. 카는『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지체된 성공’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에는 의미가 심장한 실패들이 있으며 오늘날 명백한 실패도 내일의 성공에 중요하게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지나친 경쟁만을 앞날의 지평으로 제시하는 대중 언론매체에 맞서는 진정한 평화적 봉기’의 승리를 저자는 확신한다.

 

프랑스에서만 200만부가 팔린 이 책! 전 세계적으로 분노 신드롬을 일으키며 폭발적인 반응을 보인 것에 놀라며 저자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순간에 때맞춰 세상에 나왔다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전 세계적으로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하여 비명을 지르고 있는 실정이다. 어쩌면 자본주의의 위기는 '타이타닉 콤플렉스'인지 모른다. 타이타닉을 침몰 시켰던 것은 빙산이 아니라 빙산이 불러일으킨 공포 때문이었다. 지금의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하여 사람들이 분노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유, 평등, 박애'의 가치들이 훼손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우리의 미래가 진보하기 위해서는 분노의 가치를 역설하고 있다.『르동드』지는 다음과 같이 서평 머리기사를 게재했다. "레지스탕스, 현재를 감전시키다-'분노하라!'는 현재의 우리들이 적절히 포착해 이용할 대상으로서, 전달의 몸짓으로서 더욱더 관심을 모으는 책이다."(61쪽)

 

한국 사회에서도 전달의 몸짓은 형식만 다를 뿐 의미하는 바는 똑같을 것이다. '꼼수' 정치에 대해 '나는 꼼수다.'라는 정치적 윤리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다. 꼼수는 과속경쟁 사회의 페달을 밟으며 앞만 보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꼼수다.'는 지속가능한 균형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며 '옆'과 '뒤'도 보라고 한다. 앞서 말했듯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며, 이는 현재의 상태를 묵인, 방조하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해서는 세상은 바뀌지 않는 다는 것이다. 반대로 희망은 반대다. 저자가 아폴리네르의「미라보 다리」를 인용하고 있듯 '희망은 어찌 이리 격렬한가!'라는 한 구절과 같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는 분노할 일에 분노해야 하며 "꼭, 그래야만 한다!" 신영복 교수가 말한 것처럼『분노하라』는 것은 책의 제호가 아니라 93세 노투사의 육성이다. 즉 "창조, 그것은 저항이며 저항, 그것은 창조다."라는 메시지는 삶을 관통하는 묵직한 보편적 가치다. 우리 모두가 자신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 분노하라! 이것은 우리의 정신을 번쩍 깨닫게 하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