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장 속의 과학 - 과학자의 눈으로 본 한국인의 의식주
이재열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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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미녀하면 8등신을 말한다. 하지만 우리네 몸매는 7등신이 아름답다고 한다. 신체를 둘러싼 서양과 우리의 미의 기준은 건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건축물에 있어 황금(黃金)비례는 누구나 익히 알고 있다.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은 폭과 높이가 1.618:1이다. 반면에 우리 건축물에 있어 아름다운 비례를 금강(金剛)비례라고 한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용마루를 기준으로 했을 때 1.414:1이다. 

이러한 흥미로운 대조에는 아름다움이 모두 똑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생활방식에 따라 얼마든지 아름다움의 잣대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금강비례를 촌(村)스럽다,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것은 아무래도 문화의 편식이다. 지금 우리 사회를 둘러보면 안타까움이 절로 나온다. 서구화를 따라가기에 급급하다. 이른바 맥맨션(McMansion: 획일적인 주택이라는 뜻에서 맥도날드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같은 아파트 틈에서 한옥은 숨 가쁘다. 살기에 불편하다고 해서 버림받은 지 오래다.

하지만 주거에 있어 편리함만이 능사가 아니다. 맛과 멋이 있어야 한다. 이재열이 쓴『담장 속의 과학』에는 우리의 전통 의식주(衣食住)를 구수하게 담아내고 있다. 덕분에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고향 살림을 차근차근 음미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단순한 과거의 여행이 아니라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전통이라고 하면 왠지 비과학적이라고 몰아세우는 덕지덕지 묻어있는 마음의 때를 조목조목 따지면서 말끔히 씻어 내렸다. 즉 과학이 먼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보다는 생활의 지혜라고 해야 정갈하고 단정하다.

가령, 주(住)에 있어 마을을 이루며 집들이 들어앉았다. 이럴 때 장풍득수(藏風得水)가 되는 땅이어야 했다. 바람을 막아주고 물을 주는 곳이다. 또한 배산임수(背山臨水)를 갖추어야 했다. 그리고 집터를 잡을 때도 좌청룡에 해당하는 흐르는 물길, 우백호에 해당하는 큰 길, 남주작에 해당하는 연못 그리고 북현무에 해당하는 구릉이 더 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집은 살아 숨쉬어야 한다는 것을 빼놓을 수 없다. 집이 살아 숨쉬려면 틈새 사이사이로 바람이 통해야 가능했다. 이것이 우리 집들의 두드러진 특징이었다. 어릴 때 기억을 되돌려보아도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름 한낮에 안팎 방문을 열고 마루에 앉아 있으면 시원했다. 말 그대로 냉방과 통풍을 하는 교묘하고 지혜로운 구조였다. 이러한 열린 마음에는 자연주의 즉 순환의 질서를 생활 속으로 끌어들인 셈이었다.

반면에 아파트는 닫힌 공간이다. 물론 아파트는 물리적인 측면으로 본다면 아주 과학적이다. 일거수일투족이 편리하게 움직인다. 그러나 정신적인 측면을 고려한다면 앞서 말했듯 삶의 향기가 없다. 기계의 지혜에 익숙하다 보니 어느새 생태맹이 되고 만다.

집을 장 담그기에 비유한다면 충분히 발효해야 한다. 사람만이 사는 공간이 아니라 여러 가지 미생물과 공존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서로간의 아무런 도움이 없다면 집은 부패하고 만다.

이 책을 통해 저자가 말하는 우리의 전통 의식주의 다양한 사례들은 그 자체로도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문명사회의 질병이 날로 팽창해지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것일까? 그 어느 때보다 온고지신이 절실하다. 저자 말대로 서양의 담장 밖의 과학과 우리의 담장 속의 과학이 소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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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단련법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박성관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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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엘리자베스 뉴턴은 ‘두드리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간단한 놀이에 관한 연구 논문으로 심리학 박사가 되었다. 두드리는 사람이 어떤 노래의 리듬에 맞춰 테이블을 두드리면 듣는 사람이 이 노래의 제목을 맞추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두드리는 사람은 듣는 사람이 정답을 맞힐 확률을 50% 예상했지만 듣는 사람은 기대에 훨씬 못 미쳤다.

그러면 왜 이런 예상 밖의 결과가 나왔을까? 그는 이 실험을 통해 ‘지식의 저주’를 문제 삼는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두드리는 사람은 머릿속에 익숙한 선율이 흐르는 반면에 듣는 사람에게는 그 음악이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노래의 제목을 알게 되면 두드리는 사람은 더 이상 ‘알지 못한다.’는 느낌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지식의 저주’였다.

지식의 가치를 다루는 데 있어 엘리자베스 뉴턴 못지않게 지(智)의 거장 다치바나 다카시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방대한 독서량에서 나오는 저작들이 국내에서 유명세를 탔기 때문이다. 더구나 도쿄 한복판에 그가 세운 고양이 빌딩이 보통의 일반인에게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그 빌딩 전체가 서가(書家)라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책읽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의『지식의 단련법』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지(智)의 소프트웨어’라는 원제에 나와 있듯 이 책은 지식의 입력과 출력에 관한 저자의 독특한 전략이 사뭇 인상적이었다. 저자 말대로 이런 전략은 수많은 시행착오에서 얻어진 결과였다. 덕분에 우리는 쓸데없는 시행착오를 피할 수 있게 되었다.

먼저 입력에 있어 ‘지적 생산형’과 ‘지적 생활형’으로 구분하고 있다. 전자가 입력이 수단이라면 후자는 입력 그 자체가 목적이다. 이러한 차이는 정보를 가진 의미를 이해하면서 입력하는 데 있다. 바로 이렇게 해야만 정보가 지식으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목적선행형 독서법을 지향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독서하는 데 있어 무엇보다도 자신이 무엇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를 명확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출력에 있어 좋은 문장을 쓰는 실용적인 방법을 말해주고 있다. 그는 매끄럽게 읽히지 않는다면 매끄러워질 때까지 과감하게 쳐내라고 한다. 불필요한 수식어를 덜어내고 연문(連文), 복문을 단문화해서 가능한 단순하고 짧은 문장으로 만들어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적인 방법에 앞서 좋은 문장을 많이 읽으면서 좋은 문장에 대한 감각을 익히라고 당부한다. 문장의 본질적인 가치는 어떻게 쓰여져 있는가보다 무엇이 쓰여져 있는가, 라는 것의 그의 문장론이다.

이 밖에도 입력과 출력 사이에 지식을 단련하기 위한 방법들이 귀를 기울이게 했다. 즉 목적 없는 스크랩은 그만둬라, 방대한 분량의 잡지를 독파하라, 문체는 옷에 불과하다, 내면적 상상력을 키우라, 무의식층의 거대한 잠재력을 파악하라, 부분으로부터 전체를 연역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라고 한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일본 최고의 저널리스트인 다치바나 다카시의 ‘지식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들을 섭렵하게 된다. 그리고 1984년에 출간된 이 책이 여전히 웹 2.0 시대에도 유효한 것은 아무래도 “독서는 정신적인 식사”라는 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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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4-06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아님, 오랜만이에요.
리뷰 당선 축하드려요. 다치바나 다카시의 책이군요.

오우아 2009-04-11 00:38   좋아요 0 | URL
혜경님.. 인사가 늦었습니다.. 정말이지 오랜만이네요..
꽃들이 예쁜 4월..어떻게 보내고 계신가요? 여전히 저는 책 욕심때문에 제 할일 못하고 있는... 늘 감사합니다..행복하세요~~
 
생쥐 기사 데스페로 - 팝업북
케이트 디카밀로 지음, 김경미 옮김, 브루스 포스터 그림 / 비룡소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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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좀 더 재밌는 그림책을 읽어주려고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생쥐기사’에 솔깃했습니다. 내용도 흥미진진해보였고 무엇보다도 팝업북이라 충분히 살만 했습니다. 며칠 후 기대하던『생쥐 기사 데스페로』가 왔습니다. 그런데 봉투가 하나 들어 있었습니다. 이게 뭐지?하고 펼쳐봤는데 영화예매권이었습니다.  





 

 

 

 

 

 

 

 

 

 

 

 

 

 

 

 

 이 책이「작은 영웅 데스페로」라는 영화의 원작이었습니다. 뜻밖의 선물을 감사히 받고는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다가 얼마 전 표 2장을 추가해서 온 가족이 이 영화를 봤습니다. 재미와 감동이 좋았습니다. 시궁쥐가 무섭다고 눈을 찡그리며 감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아이들의 눈은 마냥 신났습니다.

이 그림책에는 제목에 나와 있듯 ‘생쥐 기사’ 데스페로가 나옵니다. 하지만 데스페로를 보면 전혀 기사답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키가 작았으며 이상하게도 귀만은 커다랗습니다. 남들과는 다른 생쥐라는 놀림을 받을 만 했습니다. 더구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해야만 하는 성격이었습니다. 그래서 생쥐하면 겁이 많아야 하는데 데스페로는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글쎄 미술 시간에 고양이를 그렸습니다. 





 

 

 

 

 

 

 

 

 

 

 

 

 

 

 

 

 

데스페로 엄마 아빠 입장에서는 그냥 웃고 넘길 일이 아니었습니다. 호기심이 많아서 그렇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조심해야 할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제멋대로 살 수는 없습니다.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엄마 아빠는 어쩔 수 없이 펠로 형에게 동생을 잘 가르쳐달라고 당부합니다. 왜냐면 펠로는 생쥐답게 겁이 많았습니다.

이들 형제가 처음으로 간 곳이 도르 왕실 도서관이었습니다. 펠로는 데스페로에게 책을 갉아먹는 법을 가르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데스페로는 책을 먹지 않는 대신에 읽었습니다. 읽으면서 책 속에 나오는 용감한 기사에 푹 빠져 버립니다. 그리고는 자신도 기사처럼 살고 싶다고 다짐합니다. 책 덕분에 데스페로는 꿈을 먹게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면 꿈이란 배고플 때 먹는 밥(食)과 다릅니다. 배고프지 않아도 언제나 먹을 수 있는 것이 꿈이 아닐까요?

이러한 데스페로의 꿈은 도르 왕실의 피 공주와 대화하면서 이루어졌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피 공주가 사랑이 다시 찾아오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연은 이렇습니다. 도르 왕국의 ‘수프 먹는 날’ 행사에서 그만 왕비가 죽고 맙니다. 놀랍게도 왕비의 수프 속에서 로스쿠로라는 시궁쥐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왕비를 잃은 왕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 왕국에서 더 이상 수프를 먹지 못하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시궁쥐들을 모두 잡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도르 왕국의 하늘에는 빛바랜 슬픔이 우중충하게 드리워졌습니다. 피 공주가 기다리던 사랑은 다시금 도르 왕국이 행복해지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자신 때문에 도르 왕국이 불행해지자 로스쿠로 시궁쥐는 지하 감옥으로 쫓겨납니다. 지하 감옥은 온갖 악(惡)이 말 그대로 시궁창처럼 지저분한 곳입니다. 이곳에서 로스쿠로는 죽느냐 사느냐 갈림길에서 놓이게 됩니다. 이 때 데스페로를 만나게 됩니다. 데스페로도 생쥐 신분에 피 공주와 이야기한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그 벌로 생쥐 세상에서 추방되어 이곳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로스쿠로의 안타까운 사연을 듣고 공주에게 용서를 빌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신사다운 행동이라고 덧붙입니다.

하지만 데스페로와 로스쿠로의 바람과는 달리 피 공주는 로스쿠로를 용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래서 용서를 받지 못한 로스쿠로는 또 한 번 상처를 받고 결국에는 피 공주의 하녀를 속여 공주를 지하 감옥으로 납치합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데스페로는 용감하게 지하 감옥 대장과 싸우게 되고 이것을 넌지시 바라보던 로스쿠로는 자신의 잘못을 뒤늦게 반성하면서 데스페로와 함께 피 공주를 구하게 됩니다.

우리는 데스페로의 모험담을 통해 기사답게 사는 용기를 알게 됩니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사는 것입니다. 어디론가 도망간다고 해서 자신의 불행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어떻게 용서해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사랑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누군가 진정으로 용서를 바랄 때 우리 또한 진정으로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지 데스페로의 귀가 커다랗다는 메시지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남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쥐는 생쥐답게 사는 것만이 옳다고 믿으며 데스페로의 말을 전혀 듣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어쩌면 도르 왕국의 문제는 수많은 오해에서 생겨났습니다. 이제 우리도 데스페로처럼 마음의 귀를 활짝 열어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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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더루스트? 2009-02-21 0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얼마전에 영화보고와 책으로 아이에게 읽어주려검색하다 보고가네요 집도 이쁘고 아이들도 너무 귀여워요 잘보고 갑니다
 
철학 콘서트 2 ㅣ 철학 콘서트 2
황광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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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문이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 좋다고 생각했다. 예컨대 부석사의 무량수전(無量壽殿)이 아무리 좋다고 귀가 따갑게 들어본들 다리품을 팔면서 안양루(安養樓)를 올라 본 것보다 못하다. 눈의 즐거움은 마음까지 상쾌하게 한다.

하지만 백견(百見)보다 더 좋은 게 있다는 것을『철학콘서트 2』를 읽으면서 새삼스럽게 알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인 황광우는 “백견이 불여일독(百見不如一讀)이라고 말한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취향은 제각각이다. 여행일수도 있고 음악일수도 있고 미술일수도 있다. 책과 함께 살아온 저자에게 일독은 너무나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그럼에도 굳이 강조하는 것은 일독이 최고의 좋음(最高善)이기 때문이다.

최고선하면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최고선을 행복이라고 했다. 좀더 자세하게 말해보면 의술이 목적이 건강, 병법의 목적이 승리라고 한다면 최고선의 목적은 행복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살고 싶냐, 는 질문을 받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입버릇처럼 말한다. 행복이 뭐라고 설명하기는 어려워도 말하기는 쉽다. 기쁨 혹은 즐거움보다 그 위에 있는 것이다. 이 정도면 행복에 대한 밑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지금 어느 때보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경제 성장률이 -4%로 곤두박질하고 있다. 잊을 만하면 굵직굵직한 사건이 터지면서 우리의 가슴을 소스라치게 한다. 뿐만 아니라 사이버 폭력 및 사이코패스 같은 정신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만 가고 있다. 예전만큼 안전하지 못한 상황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래저래 불행하다고 하소연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위로를 받기는커녕 아이러니하게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게 될 것이다. 어떻게 이런 부조화가 생긴 것일까?

저자 말대로 아리스토텔레스의『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일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행복을 찾는 인간의 삶을 세 가지 유형을 구분하고 있다. 먼저 쾌락적인 삶이다. 이는 노예와 짐승의 목적이다. 반면에 정치적인 삶이 있다. 교양 있는 사람들이 명예를 얻기 위한 것이지만 불완전하다.

마지막으로 관조적인 삶이다. 이것이 그가 말하고자 하는 행복한 삶이다. 그러면서 그는 행복한 삶은 탁월성에 따른 삶이라고 한다. 즉 인간의 탁월성은 지성이며 지성의 활동이 곧 관조라는 것이다. 따라서 지성을 따르는 삶이 가장 좋은 것이다.

황광우의『철학콘서트 2』에는 탁월한 사상가 10명이 나온다. 저자는 그들의 책을 중심으로 하여 위대한 지혜를 재밌게 설명해주고 있다. 그런데 책을 읽다보면 뜻밖의 사실에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전히 철학의 중심인물로 나오는 것 못지않게 시인 호메로스가 나오며 과학자인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뉴턴 등이 나온다. 또한 무함마드가 나오며 볼테르가 말했던 동양의 철인 왕 세종이 나온다.

흔히 철학자라고 하면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물론 틀리지 않다. 그러나 저자는 10명의 철학자를 통해 모든 철학자는 혁명가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저자말대로 “ 그 어떤 권위도 거부한 채 끊임없이 진리만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 그 모든 사유의 집이 주는 안정을 포기하고 새로운 항해에 나서는 사람, 그가 바로 철학자다.”라는 것이다.

일찍이 조선의 18세기 실학자였던 최한기는 가산을 탕진할 정도로 책을 샀다고 전해진다. 이유인즉 책장 문을 열면 공자와 맹자, 서역의 학자 등을 만날 수 있는데 책을 사지 않고 이들을 직접 만나러 다니려면 얼마나 돈이 많이 들겠냐. 고 했다.

이 책의 저자는 이것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 일독이다. 일독하지 않으면 우리는 지혜를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의『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단지 사는 데 있어 편리한 것이 행복이라는 헛된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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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기술 - 심리학자의 용서 프로젝트
딕 티비츠 지음, 한미영 옮김 / 알마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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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때문에 이웃과 한바탕 설전(舌戰)을 벌였다. 같은 또래의 이웃집 아이가 어느 순간 우리 아이의 얼굴에 상처를 내고 말았다. 아이들이 놀다보면 그럴 수 있지만 다른 부위도 아닌 얼굴이라 마음이 편치 못했다.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아이에게 손짓을 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이웃집 엄마의 따가운 눈총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누구나 살다보면 용서하기 힘들 때가 있다. 나이를 한두 살 먹다보니 인생을 어떻게 사는 것 못지않게 어떻게 용서해야 하는지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만약 누군가를 용서하고자 한다면 얼마만큼 해야 하는 것일까? 문학의 거장 톨스토이의『부활』을 읽다가 다음과 같은 문장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때에 베드로가 다가와서 예수에게 말하였다. “주님, 한 신도가 내게 죄를 지을 경우에,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해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해야 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곱 번의 일흔 번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 용서란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설령 누군가를 용서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다. 마음을 다해서 용서했는지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그저 입버릇처럼 한다면 그것은 용서가 아니며 잊어버리지도 않는다. 정신의학자 토머스 사스에 의하면 멍청한 사람들이다. 반면에 순진한 사람들은 용서하고 잊어버린다.

하지만 용서하는 데 있어 평온한 눈길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용서의 기술』을 지은 심리학자인 딕 티비츠도 그중 한 사람이다. 앞서 말한 토머스 사스에 의하면 저자는 현명한 사람이다. 현명한 사람은 용서하되 잊어버리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진실을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더 온전하게 기억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주장하는 메시지는 간단하면서도 명료하다. ‘살아가기 위해 용서하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어떤 불공평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지나간 일이다. 어느 누구도 과거를 바꿀 수 없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는다. 용서하지 않는 것이 상대방의 마음을 바꾸게 하거나 혹은 불공평에 맞서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서로가 공평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저자의 생각은 다르다. 용서를 하라고 한다. 삶에서 중요한 순간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라고 강조한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는다면 현재를 살고 있더라도 과거의 암울한 싸움에서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다. 과거는 과거대로 현재는 현재대로 유지할 수 있는 최선의 지혜는 다름 아닌 용서에 있다는 것이다. 용서 없이는 삶의 희망마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이렇듯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용서하는 법을 다시금 배울 수 있다. 용서는 남의 일이 아니다. 결국에는 내가 책임지어야 한다. 내 삶의 불행을 남의 탓으로 돌리며 자신의 인생은 아무것도 없다. 용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용서는 내가 살아가기 위해 선택하는 가장 아름다운 방법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고통을 넘어 희망으로 가기 위해서는 스스로 용서해야 가능하다는 것을 충분히 알게 된다.

되돌아보면 인생에 있어 용서는 금(金)과 같지 않을까? 금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가치는 고귀한 아름다움에 있다. 그런데 황금이라고 불리는 금색은 사실 금의 고유한 색이 아니다. 금속은 원래 고유한 색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도 금이 노란 색인 이유를 찾아보면 여러 파장의 빛이 섞인 백색광에서 노란 색만 반사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나머지는 흡수한다.

우리도 용서를 반사해야 한다. 그래야 사람다운 제 빛을 낼 수가 있을 것이다. 요즘처럼 바쁘게 살면서 용서하기 힘든 세상에 우리들 마음이 밝게 빛난다면 그만큼 살맛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래서 『용서의 기술』을 읽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매우 과학적으로 증명된 용서의 방법이 우리의 불합리한 마음을 한결 부드럽게 해주는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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