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리포트 1 - 나는 고발한다
정경아 지음 / 길찾기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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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위안부라는 소리에 명치 부근이 저려왔다. 태평양 전쟁의 성적 희생양이 되어 버린 여성들의 한(恨)맺힌 삶을 들여다보는 일은 무척이나 가슴을 시리게 했다. 여성의 성적인 몸이라는 이유만으로 강요된 성의 노예화는 한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부수어버리고 말았다. 허울뿐인 이념은 상처를 아물게 하지 않았으며 대신에 듣기 좋게 위안부라는 진통제로 비양심적으로 치료하려고 했다.


하지만 말이 좋아 위안부(comfort women)이지 실상은 전혀 달랐다. 이 책에 나오는 얀 뤄프 오히르네가 오랜 침묵을 깨뜨리고 증언한 사실만으로도 그녀들은 강간 피해자(rape victims)였다. 그래야 비로소 수치심이 아닌 악몽 같은 세월로 얼룩진 역사에 대한 심판을 내릴 수 있었다.


이렇듯 강간 희생자들을 보고 있으니 너무 처절해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더구나 그 버림받음을 생각하면 안타까웠다. 성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여성에게 남아있는 것은 양심이라는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경계에 더욱 가까웠다.


그런데도 위안부는 육체적 정신적 피해자이면서도 침묵하며 살아왔다. 일찍이 한나 아렌트는『혁명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는데 “은폐할 때는 솔직했던 것이 노출될 때는 거짓된 것 같으며 아무리 절실한 동기를 느꼈다 하더라도 일단 공개되고 보면 인간의 마음은 통찰보다는 오히려 의심의 대상이 된다.”고 했다.


그래서 일까? 우리가 위안부를 보는 시선은 한편으로는 슬프다고 하면서도 의심을 버릴 수 없었다. 그녀들이 피해자인 것은 사실이나 성(性)이라는 미묘한 감정이 우리의 눈과 귀를 흐리게 했다. 더구나 가해자인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그녀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겨누고 있다.

 

이런 조작된 각본 속에서 어느 누군가가 자신이 한때는 위안부이었다, 라는 사실을 드러낸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떠한 변명을 무색하게 만들어 버린다. 자신의 위안부 행위가 역사적으로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순간 스스로를 죄인의 굴레를 만들어 버린다.


이제 우리에게 위안부는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비록 우리가 당사자는 아니더라도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참다한 상황을 생각한다면 위안부에 대한 아니 강간 피해자에 대한 진실을 파헤쳐야 한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침묵은 우리를 비겁하게 만든다. 더구나 타인이 우리의 어머니이자 딸이라고 한다면 그 충격은 어마어마 할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전쟁의 광기와 참혹함을 충격적으로 볼 수 있다. 전쟁을 목적으로 성을 도구로 삼은 일본의 만행은 악몽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전쟁 후 아무런 책임도 없이 위안부들의 잘못만 크게 부풀려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오히려 이로 인해 반사이익을 노리는 이율배반적인 그들을 보니 더욱 울분이 치밀어 올랐다.

 

과연 우리는 역사의 승리자인가? 패배자인가? 일본이 패망하여 직접적으로 우리는 광복을 맞이했지만 지금까지 우리는 과거사 청산문제를 놓고 보면 역사의 패배자라는 생각이다. 매번 과거사(위안부) 문제로 한일 양국이 첨예하게 대립하면서도 끝내는 우리만 복수심에 가득 찬 분풀이에서 끝나고 마는 악순환을 반복해왔다.


이 책을 읽으면서 더 이상 시행착오를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방송인 김미화씨는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를 솔직히 말했다. 그만큼 잘못된 역사를 심판하는 자리에 우리 모두가 합류하기를 바라고 있다. 정말로 그랬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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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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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눈물샘이 마르지 않는다는 것이 이런 거구나, 느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한 인간의 비극적이면서도 불행한 삶을 들여다보는 일은 적지 않은 애증이 온 몸을 휘감았다. 더구나 그 대상이 평범한 사람이 아닌 사형수라고 하니 뭐랄까, 날카로운 고통이 아닐 수 없었다.

이처럼 공지영은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사형수라는 만만치 않는 삶의 무게에 대해 고백을 한다. 어쩌면 사형을 둘러싼 정신적인 암(癌)에 대한 투병이며 휴먼 스토리다. 사형수와 만남과 이별을 통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죽음에 다가서야 하는지 우리들에게 묻고 있다. 그것은 곧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되묻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형수에 대한 동정심은 위험해 보인다. 자칫 잘못하다간 치명적일수도 있다. 피해자를 대신해서 사형수를 비난하는 것도 부족한데 극악무도한 죄를 용서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피해자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칼날을 휘두르게 된다.

 

또한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형수에게도 산다는 것이 과연 행복한 일인지 무척이나 회의적이었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고통이 아닐까?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사형수가 죽음을 맞이하면서 뒤늦게 후회하는 것이 사형제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교화라는 것은 통렬한 보복 같았다.

 

저자에게 이런 일이 심상치 않음을 단번에 알 수 있다. 상처를 주고받는 사회에서 치료를 위한 배려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갈등만 부추긴다. 사형수에게 상처는 무슨 상처냐며 몰아세우는 것은 사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교도소를 드나들면서 그들의 아픈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본 저자는 그들도 피해자라고 말한다. 너무나 절박한 목소리와 눈빛이 사형수의 진짜 모습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명찰 대신 ‘서울 3987’이라는 검은 글씨의 죄수 번호는 다름 아닌 가짜라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참 묘한 일이 생겨났다. 착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가엽게 여기는 마음도 함께 했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무엇인지 다시금 물컹거렸다. 내 몸 안에 숨겨져 있던 막막함이 꿈틀거렸다. 나는 정말로 사형수를 용서할 수 있을까?

 

톨스토이는『부활』에서 다음과 같이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용서해야 한다고 했다.


그때에 베드로가 다가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한 신도가 내게 죄를 지을 경우에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해야 한다.”(마태복음 18장)


돌이켜 보면 다른 사람을 이만큼 용서한다는 것은 저자말대로 바보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행복한 일이다. 그러면서 나 자신을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이든 죄인이든 누구나 인간이라는 이름 앞에서 자신의 아픔을 자신이 용서할 수 있을 때 삶이든 죽음이든 행복한 것이다.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는 곧 나의 배려이다. 남의 불행에서 생기는 동정심 때문에 상대적으로 우리가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어정쩡한 오만이다. 저자는 사형수의 불행을 보면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눈물의 경계를 슬프면서도 밝게 무너뜨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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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그림자 1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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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에 싸인 바로셀로나. 그곳에 잊혀진 책들의 묘지가 있다는 소리에 솔깃했다. 또한 저주받은 책이라는 미스터리가 사뭇 궁금했다. 우리가 아는 묘지는 망자(亡者)들이 머무는 곳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망자의 기억덩어리다. 그래서 우리는 망자에 대한 그리움을 차마 허공으로 떠나보내지 못하고 단단하면서도 안타깝게 붙잡고 있는 것이다.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바람의 그림자』에서도 우리는 그런 감정을 숨길 수 없다. 다만 망자라고 당연히 믿었던 사람이 놀랍게도 망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살아있으면서 우리 주변을 마치 망자처럼 스쳐지나가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뼈 속으로 싸늘함이 파고들면서 긴장감을 파르르 떨리게 했다.


그는 왜 그랬을까? 살면서 망자처럼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망자처럼 산다는 것은 어떤 운명일까? 그 정체를 알 수없는 두려움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오히려 그 정체는 뚜렷하게 나타났다. 단지 책이 팔리지 않는 다는 이유만으로 저주를 받는다면 그것을 쓴 사람은 증오심을 불태우며 끝내는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자기와는 상관없이 무섭고도 날카로운 운명의 굴레라든가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이 그를 몰락하게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그는 제대로 싸워볼 만한 용기가 없었다. 대신에 그는 도망을 가서는 분노에 휩싸이고 만다. 즉 그가 느꼈을 상실감은 이내 후회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말았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불안하다. 이는 데이비드 호킨스가『의식 혁명』에서 말하고 있듯 사람을 약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사람을 강하게 하는 것도 존재한다. 사랑이 그렇다. 저자는 이를 소설가답게 책에 대한 변명을 통해서 그 속내를 드러낸다. 책에 대한 변명이라고 하니 낯설지만 그 위트의 떨림이 도심에 자욱하게 깔린 안개를 걷어내는 듯 현대인의 아픈 속살을 도려낸다. 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아도 혹은 시간 속에서 길을 잃어도 언젠가는 새로운 독자, 새로운 영혼의 수중에 들어가길 기다리며 영원히 살고자 한 다는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후회할 때도 있을 것이다. 사랑하려고 하는데 사랑하지 못해서 또는 살려고 하는데 살수 없을 때 우리는 괴로움 때문에 그만 마음의 문을 닫고 만다. 일시적인 도피는 그래도 괜찮은 편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그 문이 닫혀 있으면 아무래도 좋을 리 없다. 집 안을 곰팡이가 잠식하듯 사람을 약하게 하는 마음은 머지않아 죽음의 냄새로 가득찰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강해져야 한다. 이 책에서 소년이 망자 같은 사람을 두려워하면서도 어느 순간 소년은 망자의 슬픔을 받아들인다. 이러한 소년의 행동은 다소 상투적인 탓에 밋밋함을 떨쳐낼 수 없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보면 소년의 캐릭터는 여느 소설과는 다른 점이 있다. 즉 소년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통은 전염되기 쉽기 때문에 소년 또한 망자처럼 될 수도 있음을 저자는 눈물이라는 슬픔의 덩어리를 경계하고 있다. 그리고는 우리가 늘 가까이 하면서도 잊고 지내고 있는 가슴이 저린 감정 하나를 톡 건드리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사랑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사랑이라고 해서 꼭 남녀 사이의 관계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쩌면 사랑의 단순함이다. 우리 자신이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는 사람을 약하게 하는 감정들을 몸 밖으로 내보는데 있어 비로소 사랑은 놀랄 만한 일을 하는 것이다. 상처받은 과거 때문에 우리가 언제까지 그림자처럼 살아야 하는 것인지 사랑은 바로셀로나라는 도시에서 묻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사랑의 비밀스러움을 찾아 나서는 저자는 분명 사람을 강하게 하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더욱이 마력이 매혹적이어서 이 책은 충분히 읽어볼 만하다. 마술적 리얼리즘이 이런 것이구나, 를 새삼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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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책 (100쇄 기념판) 웅진 세계그림책 1
앤서니 브라운 글 그림, 허은미 옮김 / 웅진주니어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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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 보면 웃음이 나는 재밌는 책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감동도 한 몫 합니다. 그래서 인지『돼지책』은 오랫동안 아이들이 좋아하는 그림책입니다. 그것은 곧 어른들에게 한 번쯤 읽어보게 합니다. 과연 이 그림책이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 무엇이 아이들의 마음을 잡고 있는지? 그 속내가 무척이나 궁금증을 불러 일으킵니다.

『돼지책』이라는 제목부터 흥미롭습니다. 제목을 하나만으로 이 책이  돼지에 관한 책이겠지, 하면 상상력이 부족한 탓입니다. 이 책은 사람이 어떻게 돼지로 변하는지 앤서니 브라운의 독특한 시각으로 잘 드러나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돼지는 친근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놀림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흔히 돼지 같다고 하면 ‘나만 괜찮다’고 생각하는 아주 이기적인 사람을 말합니다.

이 책에 나오는 피곳 씨와 두 아들이 돼지증후군이라는 심각한 병에 걸렸습니다. 피곳 씨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회사였습니다. 그리고 두 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학교였습니다. 이로 인해 집 안 일은 하나에서 열까지 피곳 씨 부인이 해야만 했습니다.  이런 피곳 씨 부인의 가사 노동이 어느 정도인지 이 책의 표지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어른 한 명을 업기도 힘든데 아이 둘까지 업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메모 한 장을 남겨두고 피곳 씨 부인이 가출합니다. ‘너희들은 돼지야’라는 짤막한 내용에서 한껏 긴장된 부인의 음성이 생생하게 들리는 듯 했습니다. 한 동안 다음 장으로 넘기지 못하게 했는데 나 또한  이 병의 바이러스에 노출된 탓입니다. 그만큼 공감했습니다. 피곳 씨 부인이 가정부처럼 살아야 하는 것은 아무래도 가족의 책임이 큽니다.

며칠 동안 아내이자 엄마가 없는 집 안을 생각해보면 눈앞이 캄캄해집니다.  집 안이 돼지우리처럼 변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무엇보다도 아내가 없다보니 반겨주는 사람이 없어 외로움이 만만치 않습니다. 아내의 빈자리가 새삼 이런 것이구나,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집 안에서 돼지증후군이란 쉽지 않은 내용을 유쾌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집 안 일을 도와주지 않는 가족들에게 엄마의 가출은 효과만점입니다. 비로소 엄마의 행복이 무엇인지 가족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예전과는 달리 아빠가 요리하고 아들이 청소하면서 엄마의 집안 일을 도와주는 따뜻한 변화를 보니 마음이 흐뭇해졌습니다.  또한『돼지책』에 나오는 피곳 씨같은 사람이 바로 자기자신 일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니 그동안 이런 사실을 모르고 살아온 게 놀라웠습니다. 이제는 가족 모두의 행복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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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역사 과학기행 - 역사 속 우리 과학을 어떻게 볼 것인가?
문중양 지음 / 동아시아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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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디지털 시대에 살고 있다. 가령 지금이 몇 시인지 궁금하면 핸드폰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핸드폰에 표시된 숫자는 곧 시간을 나타내는 정보다. 이는 분명 아날로그 방식보다 현대적이다. 아날로그는 작은 바늘이 시(時)를 큰 바늘이 분(分)을 각각 표시한다. 그렇다면 지금이 아닌 과거 사람들은 시간을 어떻게 인식했을까? 이것이 우리가 전통과학에 관심을 가지는 몇 가지 이유다.
이번에 나온 문중양 교수의 『우리역사 과학기행』은 주목할 만하다. 이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으나 제대로 알지 못한 전통과학의 향연에 우리를 초대하면서 사고의 크기를 확장하고 있다. 예컨대, 지금이 오후 12시 50분이라면 과거 앙부일구에 표시된 해시계는 오시 정3각 5분을 가리키고 있었을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시각의 차이를 바로 현대과학과 전통과학의 패러다임에 있다는 것이다. 패러다임은 토마스 쿤이『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한 시대를 지배하는 과학적 인식이나 사고 그리고 가치관이 결합된 것이다. 따라서 과학적 사실만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것은 잘못이다.
토마스 쿤은 같은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관찰과 경험은 인정할 수 있는 과학적 믿음의 범위를 극단적으로 제한할 수 있으며 또 제한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면 과학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관찰과 경험만으로는 그러한 믿음의 특정한 무리를 결정할 수가 없다. 개인적 그리고 역사적 사건으로 이루어진, 겉보기로는 임의적인 요소가 항상 주어지니 시대의 어느 과학자 사회에 의해서 신봉되는 믿음 가운데 그 구성 성분으로 끼어들게 마련이다’라고 했다.
여기서 말한 임의적인 요소를 저자는 역사의 관점에서 조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과학이란 시대적인 요청이 반영된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전통과학을 오늘날 현대과학의 기준으로 추측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더불어 역사를 과학적으로 왜곡해서도 안 된다.
이 책에 나와 있듯 첨성대에 대한 의문은 되새겨 볼 만하다. 첨성대는 별(星)을 보는(瞻)구조물(臺)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첨성대는 현존하는 천문 관측을 위한 구조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 것일까? 저자는 첨성대의 진실을 찾아 나선다. 결과적으로 첨성대는 천문대가 옳다는 것이다. 첨성대가 설치된 그 당시에는 천문을 통해서 국가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알고자 했다.
그리고 거북선에 대한 영웅화는 첨성대보다 한 단계 발전된 조작의 역사라는 것을 강조한다. 물론 거북선이 과학적으로 독창적이지 않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의 활약이 판옥선에 비해 역사적으로 높이 평가되었다는 것이다. 거북선은 말 그대로 영웅이라는 철갑을 두르고 오늘날 철옹성처럼 전통과학의 우수성을 알리고 있다. 더구나 일제의 식민사관이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다고 하니 아쉬움이 적지 않았다.
이 책을 통해 전통과학의 오해를 발견하고 새롭게 재정립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런 과정에서 전통과학의 우수성이 역사적인 해석에 대한 부족으로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였지만 반대로 이는 전통과학의 우수성이 혁명적으로 발전해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는 토마스 쿤이 말한 대로 과학혁명의 구조에 따라서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우리의 전통과학이 정체되어 있었다면 오늘날 우리의 과학은 놀라운 진보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과학혁명은 정상과학을 뒤흔드는 것이다. 물론 마테오리치가 그린 <곤여만국전도>에 나와 있는 세계와 우리의 <혼일강리국도역대지도>에 나와 있는 직방세계(중국을 중심으로 문명인들이 사는 세계)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크다.
하지만 좀 더 개방적이면서 포괄적인 의미에서 우리의 전통과학이 틀리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서구의 과학이 합리적으로 우수하다고 인정하는 것은 모순이다. 이는 우리의 전통과학이 가지고 있는 과학혁명에 있어 패러다임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결과이다. 그래서 저자는 우리에게 묻는다. 갈릴레이의 지동설과 홍대용의 지동설의 다른 점이 무엇일까? 결과적으로 갈릴레이와 홍대용이라는 과학자의 패러다임이 다를 뿐 지동설 그 자체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저자의 전통과학에 날카로운 잣대는 한편으로는 지적인 혁명이다. 전통과학에 대한 문외한의 굴레를 한층 벗어나게 한다. 우리의 패러다임으로 우리의 전통과학을 발굴해야 한다는 주장은 유쾌하다. 이로 인해 전통과학의 우수성이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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