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눈물샘이 마르지 않는다는 것이 이런 거구나, 느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한 인간의 비극적이면서도 불행한 삶을 들여다보는 일은 적지 않은 애증이 온 몸을 휘감았다. 더구나 그 대상이 평범한 사람이 아닌 사형수라고 하니 뭐랄까, 날카로운 고통이 아닐 수 없었다.

이처럼 공지영은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사형수라는 만만치 않는 삶의 무게에 대해 고백을 한다. 어쩌면 사형을 둘러싼 정신적인 암(癌)에 대한 투병이며 휴먼 스토리다. 사형수와 만남과 이별을 통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죽음에 다가서야 하는지 우리들에게 묻고 있다. 그것은 곧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되묻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형수에 대한 동정심은 위험해 보인다. 자칫 잘못하다간 치명적일수도 있다. 피해자를 대신해서 사형수를 비난하는 것도 부족한데 극악무도한 죄를 용서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피해자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칼날을 휘두르게 된다.

 

또한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형수에게도 산다는 것이 과연 행복한 일인지 무척이나 회의적이었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고통이 아닐까?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사형수가 죽음을 맞이하면서 뒤늦게 후회하는 것이 사형제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교화라는 것은 통렬한 보복 같았다.

 

저자에게 이런 일이 심상치 않음을 단번에 알 수 있다. 상처를 주고받는 사회에서 치료를 위한 배려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갈등만 부추긴다. 사형수에게 상처는 무슨 상처냐며 몰아세우는 것은 사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교도소를 드나들면서 그들의 아픈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본 저자는 그들도 피해자라고 말한다. 너무나 절박한 목소리와 눈빛이 사형수의 진짜 모습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명찰 대신 ‘서울 3987’이라는 검은 글씨의 죄수 번호는 다름 아닌 가짜라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참 묘한 일이 생겨났다. 착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가엽게 여기는 마음도 함께 했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무엇인지 다시금 물컹거렸다. 내 몸 안에 숨겨져 있던 막막함이 꿈틀거렸다. 나는 정말로 사형수를 용서할 수 있을까?

 

톨스토이는『부활』에서 다음과 같이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용서해야 한다고 했다.


그때에 베드로가 다가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한 신도가 내게 죄를 지을 경우에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해야 한다.”(마태복음 18장)


돌이켜 보면 다른 사람을 이만큼 용서한다는 것은 저자말대로 바보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행복한 일이다. 그러면서 나 자신을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이든 죄인이든 누구나 인간이라는 이름 앞에서 자신의 아픔을 자신이 용서할 수 있을 때 삶이든 죽음이든 행복한 것이다.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는 곧 나의 배려이다. 남의 불행에서 생기는 동정심 때문에 상대적으로 우리가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어정쩡한 오만이다. 저자는 사형수의 불행을 보면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눈물의 경계를 슬프면서도 밝게 무너뜨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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