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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그림자 1 ㅣ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안개에 싸인 바로셀로나. 그곳에 잊혀진 책들의 묘지가 있다는 소리에 솔깃했다. 또한 저주받은 책이라는 미스터리가 사뭇 궁금했다. 우리가 아는 묘지는 망자(亡者)들이 머무는 곳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망자의 기억덩어리다. 그래서 우리는 망자에 대한 그리움을 차마 허공으로 떠나보내지 못하고 단단하면서도 안타깝게 붙잡고 있는 것이다.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바람의 그림자』에서도 우리는 그런 감정을 숨길 수 없다. 다만 망자라고 당연히 믿었던 사람이 놀랍게도 망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살아있으면서 우리 주변을 마치 망자처럼 스쳐지나가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뼈 속으로 싸늘함이 파고들면서 긴장감을 파르르 떨리게 했다.
그는 왜 그랬을까? 살면서 망자처럼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망자처럼 산다는 것은 어떤 운명일까? 그 정체를 알 수없는 두려움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오히려 그 정체는 뚜렷하게 나타났다. 단지 책이 팔리지 않는 다는 이유만으로 저주를 받는다면 그것을 쓴 사람은 증오심을 불태우며 끝내는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자기와는 상관없이 무섭고도 날카로운 운명의 굴레라든가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이 그를 몰락하게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그는 제대로 싸워볼 만한 용기가 없었다. 대신에 그는 도망을 가서는 분노에 휩싸이고 만다. 즉 그가 느꼈을 상실감은 이내 후회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말았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불안하다. 이는 데이비드 호킨스가『의식 혁명』에서 말하고 있듯 사람을 약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사람을 강하게 하는 것도 존재한다. 사랑이 그렇다. 저자는 이를 소설가답게 책에 대한 변명을 통해서 그 속내를 드러낸다. 책에 대한 변명이라고 하니 낯설지만 그 위트의 떨림이 도심에 자욱하게 깔린 안개를 걷어내는 듯 현대인의 아픈 속살을 도려낸다. 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아도 혹은 시간 속에서 길을 잃어도 언젠가는 새로운 독자, 새로운 영혼의 수중에 들어가길 기다리며 영원히 살고자 한 다는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후회할 때도 있을 것이다. 사랑하려고 하는데 사랑하지 못해서 또는 살려고 하는데 살수 없을 때 우리는 괴로움 때문에 그만 마음의 문을 닫고 만다. 일시적인 도피는 그래도 괜찮은 편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그 문이 닫혀 있으면 아무래도 좋을 리 없다. 집 안을 곰팡이가 잠식하듯 사람을 약하게 하는 마음은 머지않아 죽음의 냄새로 가득찰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강해져야 한다. 이 책에서 소년이 망자 같은 사람을 두려워하면서도 어느 순간 소년은 망자의 슬픔을 받아들인다. 이러한 소년의 행동은 다소 상투적인 탓에 밋밋함을 떨쳐낼 수 없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보면 소년의 캐릭터는 여느 소설과는 다른 점이 있다. 즉 소년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통은 전염되기 쉽기 때문에 소년 또한 망자처럼 될 수도 있음을 저자는 눈물이라는 슬픔의 덩어리를 경계하고 있다. 그리고는 우리가 늘 가까이 하면서도 잊고 지내고 있는 가슴이 저린 감정 하나를 톡 건드리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사랑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사랑이라고 해서 꼭 남녀 사이의 관계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쩌면 사랑의 단순함이다. 우리 자신이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는 사람을 약하게 하는 감정들을 몸 밖으로 내보는데 있어 비로소 사랑은 놀랄 만한 일을 하는 것이다. 상처받은 과거 때문에 우리가 언제까지 그림자처럼 살아야 하는 것인지 사랑은 바로셀로나라는 도시에서 묻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사랑의 비밀스러움을 찾아 나서는 저자는 분명 사람을 강하게 하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더욱이 마력이 매혹적이어서 이 책은 충분히 읽어볼 만하다. 마술적 리얼리즘이 이런 것이구나, 를 새삼 느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