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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역사 과학기행 - 역사 속 우리 과학을 어떻게 볼 것인가?
문중양 지음 / 동아시아 / 2006년 4월
평점 :
절판
오늘날 우리는 디지털 시대에 살고 있다. 가령 지금이 몇 시인지 궁금하면 핸드폰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핸드폰에 표시된 숫자는 곧 시간을 나타내는 정보다. 이는 분명 아날로그 방식보다 현대적이다. 아날로그는 작은 바늘이 시(時)를 큰 바늘이 분(分)을 각각 표시한다. 그렇다면 지금이 아닌 과거 사람들은 시간을 어떻게 인식했을까? 이것이 우리가 전통과학에 관심을 가지는 몇 가지 이유다.
이번에 나온 문중양 교수의 『우리역사 과학기행』은 주목할 만하다. 이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으나 제대로 알지 못한 전통과학의 향연에 우리를 초대하면서 사고의 크기를 확장하고 있다. 예컨대, 지금이 오후 12시 50분이라면 과거 앙부일구에 표시된 해시계는 오시 정3각 5분을 가리키고 있었을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시각의 차이를 바로 현대과학과 전통과학의 패러다임에 있다는 것이다. 패러다임은 토마스 쿤이『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한 시대를 지배하는 과학적 인식이나 사고 그리고 가치관이 결합된 것이다. 따라서 과학적 사실만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것은 잘못이다.
토마스 쿤은 같은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관찰과 경험은 인정할 수 있는 과학적 믿음의 범위를 극단적으로 제한할 수 있으며 또 제한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면 과학이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관찰과 경험만으로는 그러한 믿음의 특정한 무리를 결정할 수가 없다. 개인적 그리고 역사적 사건으로 이루어진, 겉보기로는 임의적인 요소가 항상 주어지니 시대의 어느 과학자 사회에 의해서 신봉되는 믿음 가운데 그 구성 성분으로 끼어들게 마련이다’라고 했다.
여기서 말한 임의적인 요소를 저자는 역사의 관점에서 조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과학이란 시대적인 요청이 반영된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전통과학을 오늘날 현대과학의 기준으로 추측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더불어 역사를 과학적으로 왜곡해서도 안 된다.
이 책에 나와 있듯 첨성대에 대한 의문은 되새겨 볼 만하다. 첨성대는 별(星)을 보는(瞻)구조물(臺)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첨성대는 현존하는 천문 관측을 위한 구조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 것일까? 저자는 첨성대의 진실을 찾아 나선다. 결과적으로 첨성대는 천문대가 옳다는 것이다. 첨성대가 설치된 그 당시에는 천문을 통해서 국가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알고자 했다.
그리고 거북선에 대한 영웅화는 첨성대보다 한 단계 발전된 조작의 역사라는 것을 강조한다. 물론 거북선이 과학적으로 독창적이지 않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의 활약이 판옥선에 비해 역사적으로 높이 평가되었다는 것이다. 거북선은 말 그대로 영웅이라는 철갑을 두르고 오늘날 철옹성처럼 전통과학의 우수성을 알리고 있다. 더구나 일제의 식민사관이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다고 하니 아쉬움이 적지 않았다.
이 책을 통해 전통과학의 오해를 발견하고 새롭게 재정립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런 과정에서 전통과학의 우수성이 역사적인 해석에 대한 부족으로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였지만 반대로 이는 전통과학의 우수성이 혁명적으로 발전해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는 토마스 쿤이 말한 대로 과학혁명의 구조에 따라서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우리의 전통과학이 정체되어 있었다면 오늘날 우리의 과학은 놀라운 진보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과학혁명은 정상과학을 뒤흔드는 것이다. 물론 마테오리치가 그린 <곤여만국전도>에 나와 있는 세계와 우리의 <혼일강리국도역대지도>에 나와 있는 직방세계(중국을 중심으로 문명인들이 사는 세계)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크다.
하지만 좀 더 개방적이면서 포괄적인 의미에서 우리의 전통과학이 틀리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서구의 과학이 합리적으로 우수하다고 인정하는 것은 모순이다. 이는 우리의 전통과학이 가지고 있는 과학혁명에 있어 패러다임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결과이다. 그래서 저자는 우리에게 묻는다. 갈릴레이의 지동설과 홍대용의 지동설의 다른 점이 무엇일까? 결과적으로 갈릴레이와 홍대용이라는 과학자의 패러다임이 다를 뿐 지동설 그 자체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저자의 전통과학에 날카로운 잣대는 한편으로는 지적인 혁명이다. 전통과학에 대한 문외한의 굴레를 한층 벗어나게 한다. 우리의 패러다임으로 우리의 전통과학을 발굴해야 한다는 주장은 유쾌하다. 이로 인해 전통과학의 우수성이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