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체근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이일수 옮김 / 강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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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정신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을 과연 정복할 수 있을까?  

- 폴 발레리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 근대』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근대에 대한 수많은 해석 중에서도 ‘액체 근대’는 낯설다. 하지만 막상 책장을 넘겨보면 근대를 움직이는 새로운 힘에 대한 저자의 통찰력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는 사회학적 관점으로 근대의 다채로운 향연을 만끽하고 있다. 시와 역사 다음으로 사회학을 제 3흐름이라고 하는 보는 저자는 ‘새로운 것을 창안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으로 그의 명제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그는 근대를 20세기 근대와 21세기 근대로 나눈다. 20세기 근대를 근대라고 했을 대 21세기 근대는 이차 근대, 탈근대 등등 여러 가지 용어로 쓰여 지고 있다. 이러한 차이에 대하여 저자는 감각적이면서도 쉽게 ‘고체 근대와 액체 근대’로 사고를 확장시킨다. 고체 근대가 견고해서 무거운 근대라고 한다면 액체 근대는 유동적이어서 가벼운 근대라는 것이다.

저자는 인간 정신의 무거움과 가벼움을 고체와 액체라는 물리적 특성을 통해 파악한다. 그래서 인간 정시이란 고체에서 액체로 되는 과정을 통해 충분히 정복되어야 한다고 본다. 즉 유동성이라는 액화 과정은 견고한 것들을 녹여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게 한다. 어쩌면 창조라는 것이 결국에는 다시 고체화되겠지만 얼마든지 창조적 파괴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액체성 즉 유동성(流動性)의 가장 큰 특징이다.

가령, 문명의 역사를 '유목민에 대한 정착민의 승리‘의 특징이라고 하였다. 유목민이 원시적이며 자연적이며 비공간적이라고 한다면 정착민은 문명적이며 지배적이며 공간적이다. 정착민이 공간에 대한 지배를 통해 문명화를 가속화시키고 고체 근대를 포드주의적 세계로 결합시켰다. 포드주의적 세계는 생산자 사회이며 규격화된 시간 아래 노동을 지상에 묶어 두었다. 곧 육체화된 노동이며 개인의 자유는 통제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액체 근대에 들어서면서 유목민의 가치가 새삼스럽게 조명되고 있다. 유목민의 세계에서는 더 이상 공간의 지배는 무의미하다. 그 보다는 시간을 지배하는 것이 화두가 되면서 ‘더 빠른 것과 더 느린 것 사이의 게임’이 되었다. 휴대폰의 등장이 말해주듯 소비자 사회에서는 즉시성(卽時性)이 삶을 주도하고 있다. 공간이라는 지속성보다는 시간이라는 순간적인 만족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것이 탈 육체화된 노동인 소비자 사회의 특징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개인은 사회로부터 해방되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된다.

하지만 액체 근대에서 개인화의 역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개인은 사회에 복종하는데, 복종은 개인의 해방 조건’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개인화는 사회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는 개인의 자율성과 모호한 관계를 형성하는데 ‘법률상으로 시민이 되지 않고서는 실제상 개인’으로 변할 수 없다고 역설하고 있다.

『액체 근대』에서 발견한 독특한 사회 현상은 고체 근대와 액체 근대의 차이에 있다. 저자에 따르면 차이는 ‘이성이 완전히 잠에서 깨지 못하거나 다시 잠에 빠져들 때 생겨났다.’라고 했다. 이성이 완전하다면 인간적 삶은 견고할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 이성의 힘을 해방하고자 하는 것은 개인 해방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즉 판단력 차이에서 오는 공동체 사회의 ‘안전 부재’에 대한 부작용을 성찰할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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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의 인문학 서재 - 곁다리 인문학자 로쟈의 저공비행
이현우 지음 / 산책자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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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사피엔스(Homo Sspiens)는 생각하는 사람이다. 오컴의 면도날(Ockham's Razor)로 생각의 잔가지를 잘라내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데카르트를 볼 수 있다.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럴 때 생각은 만만하지 않다. 생각은 양식이며 에너지다. 아주 일상적이어서 우리가 굳이 생각을 필요로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생각의 무감각과 생각의 감각은 다르다. 전자가 생각의 권태라고 한다면 후자는 생각의 쾌락이다. 전자가 생각하는데 불편하지 않는 반면에 후자는 오히려 불편하다.

우리가 호모 사피엔스의 별종을 주목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별종이란 바로 이현우의 『로쟈의 인문학 서재』에 나오는 호모 사피엔자(Homo Sapienza)이다. 호모 사피엔스와 인플루엔자의 합성어인 호모 사피엔자는 제목에 나와 있듯 인문학자에 가깝다. 우선적으로 저자는 수잔 손택이 말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폭발한다.”를 인용하고 있다. 인문학자는 폭발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인문학자는 로쟈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로쟈는『죄와 벌』에 나오는 주인공 로지온 라스콜리니코프의 애칭이며 살인자다. 살인자에 대한 변명을 카프카의 “한 권의 책은 우리들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라는 말을 빌려보면 좀 더 의미가 있다. 견고한 학문을 깨트리는 것 못지않게 새로운 뭔가를 창조해야 한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로쟈만의 인문학 방법을 발견할 수 있다. ‘곁다리 인문학자’의 세상 보는 법이 매우 낯설면서도 흥미롭다. 이 책을 몇 장만 읽어보면 금세 곁다리의 놀라운 시선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다양한 책읽기와 종횡무진 경계를 넘나드는 명쾌한 비평은 확실히 뒤샹 효과를 불러 일으켰다. 뒤샹의「자전거바퀴」는 자전거바퀴와 의자를 접붙임한 것이다. 그럼에도 새로운 예술작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자리 이동’에 있었다. 다시 말하면 이곳(도구)에서 저곳(이미지)으로 공간이동을 하는 것이다. 혹은 저자 말대로 ‘아직도 내가 알아야만 하는 것’보다는 ‘내가 알고 싶은 것’에 더 관심으로 저공비행하는 것이다.

가령, 로쟈는 영화「나쁜 피」에 나오는 “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두려운 사랑의 흔적을 찾아내고 있다. 순간은 시간적이면서 동시에 반시간적이다. 이로 인해 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은 더 이상 ‘감성적 사랑’이 아니라고 한다. 감성적 사랑이 생존의 욕구에 의해 제어되는 사랑이라면 초감성적 사랑은 생존의 욕구에 제어되지 않는다. 그래서 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은 죽음을 무릅쓰는 사랑인 탓에 숭고하고 두렵다는 것이다.

이러한 로쟈의 유쾌한 철학은 “진리가 여성이라면, 어쩔텐가?”라고 도발적인 물음을 던졌던 니체의 사유와 가깝다. 남성의 진리는 어린아이며 자신이 발견하지 못한 것이며 도둑질 한 것이다. 반면에 여성의 진리는 위버멘쉬(초인)이며 바다며 자궁이다. 전자가 “이게 다가 아니야.”라는 이데아 철학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이게 다 예요.”라는 아줌마 철학이라고 한다. 즉 이데아 철학이 현실 너머라고 한다면 아줌마 철학은 충만한 현실이다.

로쟈에게 니체가 아줌마 철학자였다면 괴물 같은 지젝은 대중적인 철학자였다. 그래서 스스로를 ‘지젝주의자’라고 주저하지 않는다. “레닌을 반복해야 한다.”라는 지젝의 주장보다는 ‘이데올로기의 환상’이 눈여겨 볼만 했다. 이데올로기를 구성하는 것이 ‘앎’이 아니라 ‘행함’에 있다는 것이다. 지젝은 변기의 물을 내리는 하찮은 일에서 어떻게 이데올로기가 작용하는 지 설명한다. 그리고는 탈이데올로기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도 화장실에 들르는 순간 우리는 또다시 이데올로기에 몰입하게 된다고 한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는 그야말로 잡학(雜學)하고 다식(多識)하다. 누군가 뭘 물어봐도 막힘없이 대답하고 있다. 그가 말한 대로 ‘책 읽기가 즐거운 도망이고 즐거운 저항’이라는 측면에서 ‘모두가 아는 것에서 모두가 모르는 것’으로 뒤집어 본다. 그래서 이 책은 즐겁게 읽혀지는 좋은 번역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굳이 원저나 다른 언어의 번역본을 참조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소통이 가능하게 한다.

그런가하면 시오랑이 말한 ‘눈물의 일반이론’을 웅숭깊게 감싸고 있다. 어려움이 처한 인간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철학의 무능력을 부정하면서 그의 글쓰기는 쉽고 명쾌하며 무엇보다도 고전(古典)이다. 결과적으로 철학이 메마른 시대에 이 책은 대중지성을 적시는 단비와 같다. 고리타분하고 변화의 가능성이 희박한 고체(固體)라는 학문의 빈틈을 파고든다. 이것은 마치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한 대로 유동하는 액체(液體), 유동하는 지식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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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 장영희 에세이
장영희 지음, 정일 그림 / 샘터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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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한때는 시를 읽으며 행복했습니다. 시를 외우는 만큼 시를 사랑했습니다. 지금이야 그때의 벅찬 감동이 사그라들었지만 여전히 시는 아름답습니다. 시는 봄에 피는 조팝나무의 하얀 꽃잎을 더욱 곱게 생각하게 합니다. 살포시 내려앉은 하얀 눈송이를 보게 합니다.

언제 읽었는지 기억하기 쉽지 않지만 가슴에 담아둔 시(詩)가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영국의 여류 시인 크리스티나 로제티가 노래했던「생일」을 떠올렸던 것은 고(故) 장영희 교수님 덕분입니다. 오랫동안 신문에 ‘영미시 산책’을 연재하면서 아름다운 시를 우리와 가깝게 했습니다. 삶이 무엇일까?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생일」이 응원해주었습니다.
 

 내 마음은 샘물가에서
물오른 가지에 앉아 노래하는 새
내 마음은 주렁주렁 맺힌 열매로
휘늘어진 사과나무
(……)
내 마음은 이 모든 것보다 더 기뻐요
내 사랑이 나를 찾아왔으니까요
(……)
내 생애의 생일이 왔으니까요
내 사랑이 나를 찾아왔으니까요

 위의 시심(詩心)을 따라가 보면 사랑이 내게 온 날 내 삶이 시작된 생일이라는 것입니다. 흔히 생일이면 주민등록증에 나와 있는 여섯 개의 숫자를 얄팍하게 아는 정도입니다. 그러면서도 케이크에다 몇 개의 초를 꽂아야 하는지 선물을 어떤 것이 좋은지, 세상에 태어난 그날의 기쁨을 골고루 만끽합니다.

이런 자잘한 일상을 바라보는 섬세한 눈을 가진 시인에게는 뭔가 다른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생일을 하염없이 좋아하고 있을 때 시인은 “당신의 진짜 생일을 알고 있나요?”라고 묻습니다. 듣고 보면 대수롭지 않았는데도 크리스티나 로제티의 시를 읽는 순간 가슴이 물컹거렸습니다. 그제 서야 태어난 날이 생일이 아니라 내 삶을 사랑하는 그 날이 비로소 진짜 생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생일」이 메마른 가슴을 촉촉이 적시는 한 편의 시라고 한다면 장영희의『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은 한 권의 에세이입니다. 모름지기 생일 같은 책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기적 같은 책이라고 해야 훨씬 행복합니다. 그녀를 익히 아는 사람에게도 그렇고 소아마비, 암이라는 병에 걸려 비틀거렸던 불행을 몰랐던 사람에게도 그렇습니다. 목발에 때로는 빨간약에 삶을 맡기면서도 그녀는 문학전도사로서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며 아름다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기적 같은 삶은 우리 모두에게 살아갈 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이 책에 앞서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조금이라도 이 세상과 함께 할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병상에서 그녀가 간절히 원했던 삶은 분명 그녀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필요로 했던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녀를 영영 볼 수 없다는 슬픔도 없지 않겠지만 이제 더 이상 누추한 일상을 뛰어넘는 그녀의 마법이 사라졌다는 아쉬움이 읽는 내내 맴돌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녀의 소박했던 마음은 훌륭한 가르침을 선물해주었습니다. 가령, ‘도둑에게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할 정도입니다. 뉴욕 주립대학교에서 유학 생활을 하며 각고의 노력 끝에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 논문을 완성했습니다. 그런데 심사 날짜에 맞춰 돌아올 마음으로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그만 논문이 들어있는 트렁크를 도둑맞은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고 다독거려도 슬픔에 빠져 웅크리고 있었을 그녀의 모습이 눈물 나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슬픔의 끝에서 오히려 도둑에게 감사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아니, 도독을 용서하면서 삶이 더욱 행복하고 건강해졌다고 말했습니다.

일찍이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부활』에서「마태복음」18장을 인용하면서 참다운 용서가 무엇인지를 말했습니다. 즉 베드로가 다가와서 예수께 “주님, 한 신도가 내게 죄를 지을 경우에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그러자 예수께서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고 해야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어쩌면 그녀의 용서하는 마음도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도둑을 용서하기 힘든 현실에서 그녀처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그리고 그녀의 고질적인 ‘미루기 신드롬’ 탓에 웬만해서는 미리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마지막 순간에 아슬아슬하게 지나쳐 왔습니다. 이런 그녀가 놀랍게도 ‘은혜를 미리 갚기’로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늘 누군가로부터 은혜를 받아오면서도 그녀는 나중에야 감사하다는 말조차 하지 못했던 것을 아쉬워했습니다.

 
그러나「미리 갚아요」라는 영화를 보면서 ‘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좋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습니다. 즉 자신이 세 명의 다른 사람에게 앞으로 질 빚을 갚는 친절을 베풀고. 그 세 사람이 각기 또 다른 세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입니다. 오늘날 은혜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 넘어가는 시대에 그녀처럼 모르는 사람에게도 친절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그녀의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은 솔직했습니다. 미사여구 없이 담백했습니다. 병마와 싸워야 했던 고독을 품에 안고 있으면서 희망을 목 놓아 불렀습니다. 희망! 희망이 그녀에게 진짜 약(藥)이었습니다. 절망의 순간순간마다 위기를 오기 있게 넘겼습니다. 사는 게 권태롭고 아무리 노력해도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하소연 하는 우리에게 그녀는 “괜찮아! 괜찮아!”질거라고 말했습니다.

때로는 괜찮다는 말이 자신의 못난 인생을 위로하는 듯 들려 서럽게 울기도 했습니다. 남들과 다른 거추장스러운 삶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습니다. 삶이 가볍다고 해서 포기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보다는 자신이 아프다는 것에 화를 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프면 아픈 대로 살아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녀 말대로 “조금만 참으면 이제 다 괜찮아” 라는 믿음이 반짝반짝 빛났습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그녀는 나쁜 운명으로 천천히 그리고 작게 걸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마음만은 옹골찼습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저벅저벅 울리며 큰 걸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녀에게 나쁜 운명, 좋은 운명은 서로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서로 만나는 대각선도 아니었습니다. 대각선은 나쁜 운명이 나빠질 수도 있고 좋아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말하는 지그재그는 나쁜 운명은 머지않아 좋은 운명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좋은 운명도 나쁜 운명이 될 수 있습니다. 삶을 마주대하는 그녀의 비결에는 겸손함이 가득했습니다.

현실을 순탄하게 극복하려고 했던 그녀의 살아온 기적에는 꼭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소금 3퍼센트, 무릎 끓는 나무 그리고 좋은 사람입니다. 소금 3퍼센트가 바닷물을 썩지 않게 하듯이 우리에게 나쁜 생각이 있어도 3퍼센트 좋은 생각을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가장 명품의 바이올린을 무릎 끓는 나무가 만든다고 합니다. 해발 3천 미터 수목 한계선에서 살기 위해 무릎 끓고 산다고 합니다. 끝으로 좋은 사람은 유명해서 좋은 사람이 아니라 좋은 사람 그 자체라고 합니다. 마음이 넓고 정답고 남의 어려움을 잘 이해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삶을 따뜻하게 조화롭게 살면서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했던 그녀의 책 속에는 무수히 많은 쉼표들이 있었습니다. 그만큼 허투루 읽을 수 없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읽는 것을 멈추고 눈물 나는 아름다운 그녀의 삶의 자취를 따라가며 함께 울며 웃었습니다. 그녀는 인생을 왜 살아야 하는가? 보다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를 절실하게 대답해주었습니다. 그녀는 봄의 전령사마냥 행복전도사였습니다. 단지 봄 때문에 꽃이 피는 게 아닙니다. 꽃의 활발한 생(生)의 의지가 봄을 부르는 것입니다.

이 책을 통해 삶의 치유를 노래했던 그녀와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바뀔 것입니다. 그들에게 교수님은 잊혀지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교수님의 커다란 영혼이 우리들을 언제 어디서나 바라보고 있을 것입니다. 이제는 활짝 웃는 그녀를 볼 수 없을지라도 얼마든지 “내일 뵐 수” 있다는 벅찬 그리움을 배웠습니다. 그래야 우리도 살아온 기적이 곧 살아갈 기적이라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교수님!
“내일 뵙겠습니다.”라는 약속 꼭 지키며 살겠습니다.
앞으로 가야할 길,
한발 한발 천천히 그러면서도 당당하게 내딛겠습니다.
당신을 사랑해서 행복했습니다.
당신은 희망을 크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기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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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 비타 악티바 : 개념사 2
하승우 지음 / 책세상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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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민심은 천심이다, 라고 했다. 그렇다면 오늘날 촛불을 든 민심은 무엇일까? 오스트리아의 시인 트라클은 “촛불은 높이 타오르고 그서의 주홍빛은 불끈 일어서다.”라고 노래했다. 촛불은 타오른다. 그것도 수직성으로 타오른다. 설령 한순간 바람 탓에 넘어져도 다시 수직성이다. 촛불이 하나 둘이 아니고 거대한 파도처럼 출렁이면 그것은 마치 베토벤의「운명」교향곡같다. 

얼마 전 촛불 같은 책을 통속적으로 들리겠지만 운명적으로 만났다. 바로 Vita Activa(비타 악티바: 실천하는 삶) 시리즈 중 하나인 하승우가 지은『아나키즘』을 꼼꼼하게 읽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 ‘촛불 민심’이 무엇인지에 대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우선적으로 아나키즘이 나쁜 사상이라는 오해에서 벗어나게 한다. 흔히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라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정부(국가) 그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작은 정부를 말한다. 한마디로 정부의 권력이 최소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을 주목하며 저자는 아나키즘을 ‘반강권주의’라고 말한다. 아나키즘이 추구하는 세상은 완전한 무질서가 아니었다. 그 보다는 내가 합의한 질서에 따라 나의 뜻을 완성하는 데 있었다.

일찍이 루소는『사회계약론』에서 이상적인 국가 모델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주권자와 국가의 관계는 연비례의 외항 관계로 나타낼 수 있으며 그 비례 중앙이 정부이다.’는 것이다. 가령, 주권자를 S, 국민을 P, 정부를 G로 하여 공식을 만들면 S:G=G=P 즉 S×P=G²이다. 이 식의 가운데 항은 정부이고 그 제곱이 주권자와 국민의 적과 같으므로 주권자와 국민의 관계가 변하면 정부의 힘도 변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주권자를 1로 하고 국민을 16으로 하면 정부의 힘은 4가 된다.

하지만 오늘날 국가 지상주의에서 주권자의 힘에 따라 정부의 힘이 좌지우지 되고 있다. 국가가 모든 것을 통제하는 세상에서 민심은 외면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우려 때문에 아나키즘은 크로포토킨의 표현대로 “현실은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정부 없이도 잘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유로운 협약, 자유로운 조직은 저 해롭고 값비싼 기구를 대신해서 더욱 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아나키즘에 대한 오해를 하나 더 변명해보면 바로 테러리즘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희생양일 수밖에 없다. 국가의 존재를 위협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철저하게 탄압한 결과다. 폭력이라고 해서 모든 폭력을 비판하는 것은 잘못이다. 양심을 파는 것이 아닌 당당한 행동은 자신들의 신념을 표현하는 수단이며 책임이다.

바야흐로 촛불 민심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하나의 이정표를 나타내고 있다. 촛불은 든 사람들은 약자(弱者)다. 그러나 무능하거나 무기력한 것은 아니다. 약자들이 단결할 때 세상을 얼마든지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촛불은 아나키즘으로 불끈 일어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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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운의 우리 땅 과학 답사기 - 30억 년 한반도의 자연사가 살아 숨 쉬는 우리 땅의 비밀을 찾아 떠난다! 손영운의 우리 땅 과학 답사기 1
손영운 지음 / 살림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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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단양에 있는 도담삼봉(嶋潭三峰)에 간 일이 있었다. 단양 8경 중 제 1경으로 알려진 남한강 맑은 물이 흐르는 강 한복판에 솟아있는 세 개의 봉우리. 옛사람들에게 그곳은 풍류의 멋진 곳이었을 것이다. 퇴계 이황은 “신선이 세 봉우리로 갈라놓은 돌섬”이라고 표현했다. 문학하는 사람들에게 도담삼봉은 아름다운 시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도담삼봉을 바라보는 다른 시선 즉 자연과학자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손영운이 지은『손영운의 우리 땅 과학 답사기』는 제목에 나와 있듯 우리 땅의 비밀을 답사하는 내용이다. 이 책에 의하면 도담삼봉의 만들어진 과정을 알 수 있다. 산의 끝자락이 물에 침식되면서 형성되었다고 하는데 지질학에서 이러한 지형을 ‘라피에(lapies)'라고 부른다. 즉 석회암이 노출된 지대에 물이 흘러 용식이 잘 되는 부분은 점점 사라지고 용식이 잘 안 되는 부분만 남게 되었는데, 이러한 작용이 계속되어 형성되는 크고 작은 석회암의 돌출 부분이 바로 라피에다.

지구과학 전공자답게 저자는 한반도의 지역적인 특징을 쉽게 설명하고 있다. 가령, 경기도 연천을 ‘불의 땅 위에 세워진 도시’라고 말한다. 연천에는 가장 흔한 암석이 현무암이다. 화산이 폭발할 때 분출되는 용암이 식어서 된 암석이다. 특히 한탄강 주변에는 현무암뿐만 아니라 녹색을 띤 응회암이 많이 분포한다. 응회암은 화산재가 쌓여 굳어진 퇴적암이다.

다음으로 충정남도 태안을 ‘바람과 파도가 만든 땅, 황해의 실크로드’라고 말한다. 태안의 신두리 해안의 갯벌은 놀랍게도 모래펄이다. 강화나 보령의 갯벌이 진흙과는 사뭇 다르다. 이는 태안의 해변이 경기 편마암군이 지저를 이루는 지층이기 때문이다. 경기 편마암군은 편암, 규암, 그리고 편마암 등의 암석을 말하는데 변성암을 대표하는 암석들로 결정 구조가 비교적 단단한 편에 속한다. 따라서 이런 암석들이 오랜 세월 침식과 풍화작용으로 모래가 되어 크기가 작아졌을 뿐 다른 암석이 만든 모래펄보다 그 구조가 단단해서 그런 것이다.

반면에 파도리 해수욕장에는 ‘모오리돌’이라고 불리는 자갈 해변이 특징이다. 이는 이 지역의 지층이 서산층군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서산층군의 규암층으로 인데 규암은 굳기가 다른 암석에 비해 단단하여 쉽게 풍화작용을 받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끝으로 남제주군 우도(牛島)를 답사한다. 이곳의 서빈백사(西濱白沙)때문인데 풀이하자면 ‘서쪽 물가의 하얀 모래’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산호사 해변으로 불렸는데 산호가 모래처럼 부서져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과학적으로 보면 홍조단괴 해빈이라 부르는 것이 옳다고 한다. 홍조단괴(紅藻團塊)는 광합성 작용을 하면서 바다에 서식하는 조류 중 하나인 홍조류가 탄산칼슘을 침전시켜 형성한 것이다. 원래는 짙은 갈색을 띠자만 해안에서 건조된 후 파도에 의해 침식되어 하얀 모래가 된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한반도의 자연을 흥미롭게 알 수 있다. 우리에게 그저 하나의 산이며 하나의 강에 불과했으나 저자 덕분에 우리 땅의 역사에 대한 안목을 넓힐 수 있었다. 더불어 역사 못지않게 지질학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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