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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 장영희 에세이
장영희 지음, 정일 그림 / 샘터사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한때는 시를 읽으며 행복했습니다. 시를 외우는 만큼 시를 사랑했습니다. 지금이야 그때의 벅찬 감동이 사그라들었지만 여전히 시는 아름답습니다. 시는 봄에 피는 조팝나무의 하얀 꽃잎을 더욱 곱게 생각하게 합니다. 살포시 내려앉은 하얀 눈송이를 보게 합니다.
언제 읽었는지 기억하기 쉽지 않지만 가슴에 담아둔 시(詩)가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영국의 여류 시인 크리스티나 로제티가 노래했던「생일」을 떠올렸던 것은 고(故) 장영희 교수님 덕분입니다. 오랫동안 신문에 ‘영미시 산책’을 연재하면서 아름다운 시를 우리와 가깝게 했습니다. 삶이 무엇일까?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생일」이 응원해주었습니다.
내 마음은 샘물가에서
물오른 가지에 앉아 노래하는 새
내 마음은 주렁주렁 맺힌 열매로
휘늘어진 사과나무
(……)
내 마음은 이 모든 것보다 더 기뻐요
내 사랑이 나를 찾아왔으니까요
(……)
내 생애의 생일이 왔으니까요
내 사랑이 나를 찾아왔으니까요
위의 시심(詩心)을 따라가 보면 사랑이 내게 온 날 내 삶이 시작된 생일이라는 것입니다. 흔히 생일이면 주민등록증에 나와 있는 여섯 개의 숫자를 얄팍하게 아는 정도입니다. 그러면서도 케이크에다 몇 개의 초를 꽂아야 하는지 선물을 어떤 것이 좋은지, 세상에 태어난 그날의 기쁨을 골고루 만끽합니다.
이런 자잘한 일상을 바라보는 섬세한 눈을 가진 시인에게는 뭔가 다른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생일을 하염없이 좋아하고 있을 때 시인은 “당신의 진짜 생일을 알고 있나요?”라고 묻습니다. 듣고 보면 대수롭지 않았는데도 크리스티나 로제티의 시를 읽는 순간 가슴이 물컹거렸습니다. 그제 서야 태어난 날이 생일이 아니라 내 삶을 사랑하는 그 날이 비로소 진짜 생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생일」이 메마른 가슴을 촉촉이 적시는 한 편의 시라고 한다면 장영희의『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은 한 권의 에세이입니다. 모름지기 생일 같은 책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기적 같은 책이라고 해야 훨씬 행복합니다. 그녀를 익히 아는 사람에게도 그렇고 소아마비, 암이라는 병에 걸려 비틀거렸던 불행을 몰랐던 사람에게도 그렇습니다. 목발에 때로는 빨간약에 삶을 맡기면서도 그녀는 문학전도사로서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며 아름다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기적 같은 삶은 우리 모두에게 살아갈 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이 책에 앞서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조금이라도 이 세상과 함께 할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병상에서 그녀가 간절히 원했던 삶은 분명 그녀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필요로 했던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녀를 영영 볼 수 없다는 슬픔도 없지 않겠지만 이제 더 이상 누추한 일상을 뛰어넘는 그녀의 마법이 사라졌다는 아쉬움이 읽는 내내 맴돌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녀의 소박했던 마음은 훌륭한 가르침을 선물해주었습니다. 가령, ‘도둑에게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할 정도입니다. 뉴욕 주립대학교에서 유학 생활을 하며 각고의 노력 끝에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 논문을 완성했습니다. 그런데 심사 날짜에 맞춰 돌아올 마음으로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그만 논문이 들어있는 트렁크를 도둑맞은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고 다독거려도 슬픔에 빠져 웅크리고 있었을 그녀의 모습이 눈물 나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슬픔의 끝에서 오히려 도둑에게 감사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아니, 도독을 용서하면서 삶이 더욱 행복하고 건강해졌다고 말했습니다.
일찍이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부활』에서「마태복음」18장을 인용하면서 참다운 용서가 무엇인지를 말했습니다. 즉 베드로가 다가와서 예수께 “주님, 한 신도가 내게 죄를 지을 경우에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그러자 예수께서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고 해야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어쩌면 그녀의 용서하는 마음도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도둑을 용서하기 힘든 현실에서 그녀처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그리고 그녀의 고질적인 ‘미루기 신드롬’ 탓에 웬만해서는 미리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마지막 순간에 아슬아슬하게 지나쳐 왔습니다. 이런 그녀가 놀랍게도 ‘은혜를 미리 갚기’로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늘 누군가로부터 은혜를 받아오면서도 그녀는 나중에야 감사하다는 말조차 하지 못했던 것을 아쉬워했습니다.
그러나「미리 갚아요」라는 영화를 보면서 ‘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좋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습니다. 즉 자신이 세 명의 다른 사람에게 앞으로 질 빚을 갚는 친절을 베풀고. 그 세 사람이 각기 또 다른 세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입니다. 오늘날 은혜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 넘어가는 시대에 그녀처럼 모르는 사람에게도 친절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그녀의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은 솔직했습니다. 미사여구 없이 담백했습니다. 병마와 싸워야 했던 고독을 품에 안고 있으면서 희망을 목 놓아 불렀습니다. 희망! 희망이 그녀에게 진짜 약(藥)이었습니다. 절망의 순간순간마다 위기를 오기 있게 넘겼습니다. 사는 게 권태롭고 아무리 노력해도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하소연 하는 우리에게 그녀는 “괜찮아! 괜찮아!”질거라고 말했습니다.
때로는 괜찮다는 말이 자신의 못난 인생을 위로하는 듯 들려 서럽게 울기도 했습니다. 남들과 다른 거추장스러운 삶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습니다. 삶이 가볍다고 해서 포기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보다는 자신이 아프다는 것에 화를 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프면 아픈 대로 살아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녀 말대로 “조금만 참으면 이제 다 괜찮아” 라는 믿음이 반짝반짝 빛났습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그녀는 나쁜 운명으로 천천히 그리고 작게 걸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마음만은 옹골찼습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저벅저벅 울리며 큰 걸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녀에게 나쁜 운명, 좋은 운명은 서로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서로 만나는 대각선도 아니었습니다. 대각선은 나쁜 운명이 나빠질 수도 있고 좋아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말하는 지그재그는 나쁜 운명은 머지않아 좋은 운명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좋은 운명도 나쁜 운명이 될 수 있습니다. 삶을 마주대하는 그녀의 비결에는 겸손함이 가득했습니다.
현실을 순탄하게 극복하려고 했던 그녀의 살아온 기적에는 꼭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소금 3퍼센트, 무릎 끓는 나무 그리고 좋은 사람입니다. 소금 3퍼센트가 바닷물을 썩지 않게 하듯이 우리에게 나쁜 생각이 있어도 3퍼센트 좋은 생각을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가장 명품의 바이올린을 무릎 끓는 나무가 만든다고 합니다. 해발 3천 미터 수목 한계선에서 살기 위해 무릎 끓고 산다고 합니다. 끝으로 좋은 사람은 유명해서 좋은 사람이 아니라 좋은 사람 그 자체라고 합니다. 마음이 넓고 정답고 남의 어려움을 잘 이해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삶을 따뜻하게 조화롭게 살면서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했던 그녀의 책 속에는 무수히 많은 쉼표들이 있었습니다. 그만큼 허투루 읽을 수 없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읽는 것을 멈추고 눈물 나는 아름다운 그녀의 삶의 자취를 따라가며 함께 울며 웃었습니다. 그녀는 인생을 왜 살아야 하는가? 보다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를 절실하게 대답해주었습니다. 그녀는 봄의 전령사마냥 행복전도사였습니다. 단지 봄 때문에 꽃이 피는 게 아닙니다. 꽃의 활발한 생(生)의 의지가 봄을 부르는 것입니다.
이 책을 통해 삶의 치유를 노래했던 그녀와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바뀔 것입니다. 그들에게 교수님은 잊혀지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교수님의 커다란 영혼이 우리들을 언제 어디서나 바라보고 있을 것입니다. 이제는 활짝 웃는 그녀를 볼 수 없을지라도 얼마든지 “내일 뵐 수” 있다는 벅찬 그리움을 배웠습니다. 그래야 우리도 살아온 기적이 곧 살아갈 기적이라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교수님!
“내일 뵙겠습니다.”라는 약속 꼭 지키며 살겠습니다.
앞으로 가야할 길,
한발 한발 천천히 그러면서도 당당하게 내딛겠습니다.
당신을 사랑해서 행복했습니다.
당신은 희망을 크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기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