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번째 법칙 - 역사상 가장 대담하고 냉혹한 성공의 기술 로버트 그린의 권력술 시리즈 4
로버트 그린 외 지음, 안진환 옮김 / 살림Biz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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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시인 아르킬로코스는 “여우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고슴도치는 하나의 큰 것을 안고 있다.”라고 말했다. 상식적으로 이 말은 여우가 온갖 방법을 부려도 고슴도치의 한 가지 확실한 방법을 이겨낼 수 없다는 뜻으로 풀이되고 있다.

하지만 비즈니스세계에서는 어떨까? 로버트 그린과 피프티 센트가 지은『50번째 법칙』을 보면 공격자와 싸울 때는 여우가 되라고 강조하고 있다. 저자들은 루스벨트 대통령을 예로 들면서 상대방이 사자라고 했을 대 ‘그들과 싸울 때는 의도를 감추고 막후에서 대중의 눈에 띠지 않게 일을 꾸며 장애물을 만들고 혼란을 유도하는 등 간접적인 수단을 이용하는 것이 최선이다.’라고 당부했다. 

사람들이 듣는 정도에 따라 여우의 행동은 기회주의자라는 부정적인 선입견이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들은 ‘교활한 기회주의자’가 되라고 역설하고 있다. 좀 더 사실적으로 말하면 기회주의는 위대한 기술이라고 하면서 고정관념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철저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사건들은 부정적이지도 긍정적이지도 않다. 저자들 말대로 인생의 사건들은 100% 중립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들 마음이 사건들을 부정적으로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이럴 때 인생의 내리막길을 만나거나 모든 노력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었다고 해서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된다. 진정한 기회주의자는 부정적인 상황은 긍정적인 무언가로 변모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이 이 책의 궁극의 연금술이다.

이 책을 우리는 매우 특별한 성공의 법칙을 알게 된다. 한편으로는 참신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냉혹했다.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궁극적 파워의 법칙은 다름 아닌 ‘완전한 대담성’이었다. 파워라는 것이 역경에 굴복하는 사람과 극복하는 사람의 차이에서 나타나는 열망과 의지력에 비롯된다고 했을 때 완전한 대담성은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두려움에 좌우되는 태도가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가 대담성을 철저하게 발휘하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 기회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두 번째로 현실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현실주의자라고 한다면 감정의 치우쳐 눈앞의 이익을 쫓는 탓에 상상력이 빈곤하다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경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어느 누구보다도 현실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이유인즉 현실주의야말로 인간 합리성의 정점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권위자가 되어야 한다. ‘권위(authority)’라는 단어는 라틴어 ‘창조자(autore)’에서 유래되었다. 창조자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사람을 의미한다. 가령, 나폴레옹이 단순히 부대의 선두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4만 명의 추가병력과 맞먹는 효과를 냈다. 이러한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곧 변화를 원하는 사람이 ‘사랑받는 존재가 되는 것보다는 존경받는 것, 두려움이 되는 것이 낫다.’것을 떠올리게 했다.

마지막으로 진정한 이기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강력한 자아가 필요했다. 자아가 약한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와 잠재력을 깨닫지 못한다. 그 보다는 타인의 의견에 과도하게 신경을 쓰고 만다. 하지만 강력한 자아는 자유의지가 남다르다. 자신의 가치를 확고하게 인식하고 자신에 대한 확신이 서 있다. 이로 인해 세상을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으며 이 해심이 많고 사려 깊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성공할 수 있을까?는 결코 간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성공이라는 것이 찬반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냉혹하게 받아들였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선택의 문제에 있었다. 즉 “인간은 외부 환경을 거의 통제 할 수 없지만 그에 반응하는 사고방식만큼은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 빼놓을 수 없는 요소였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의 저자들은 파워풀한 조합이었다. 부활한 마키아벨리인 로버트 그린과 파워 게임의 거장인 피프티 센트가 아닌가? 그들은『50번째 법칙』을 통해 “두려워할수록 세상은 더 거칠고 냉혹해진다. 대담해질수록 세상은 내 편이 될 것이다.”라고 옹호하고 있다. 또한 우리들 목표는 나폴레옹의 길을 따르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망설임 없이 말했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나폴레옹을 주목하면서 역사상 가장 대담하고 냉혹한 성공자로 자리매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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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1 - 4月-6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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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잔 손택은『문학은 자유다』에서 ‘작가가 하는 일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고 사람들을 흔들어 놓는 일입니다. 공감과 새로운 관심의 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과 다르게 더 나아지려는 열망을 꿈꿀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작가는 의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녀에 따르면 “정신적 약탈자들의 말을 믿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1Q84』는 제목에서부터 끝없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보는 각도에 따라 1Q가 IQ라는 단순한 오해도 있었지만 조지 오웰의『1984』와 유사하다는 단순한 의견이 더욱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래서 조지 오웰이 말한 ‘빅 브라더’와 달리 하루키는 ‘리틀 피플’을 말했는지 모릅니다.

이러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모든 것을 알 수 있으리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리틀 피플이 공기번데기를 만들 때 하늘의 달이 두 개가 돼.”라는 섬뜩하면서도 환상적인 메시지가 뒤흔들었습니다. 왜 하늘의 달이 두 개일까?라는 물음이 곧 Q(question park)이며 이 소설의 ‘1Q84'라는 제목이 되었습니다.

이 소설의 무대는 1984년입니다. 그 시간 속에서 자신의 갈비뼈를 무수히 부러뜨려야 했던 아오마메와 덴고가 나옵니다. 20여 년 전 초등학교 교실에서 그들은 서로 손을 한 번 잡았습니다. 그러나 쫀득한 감정이 미처 사라지기 전에 그들은 헤어졌습니다. 서로 다른 길을 걸었던 그들이 오랜 사랑의 공백을 끝내고 1984년 만나려고 합니다. 어린 시절 이해할 수 없었던 떨림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어른이 되고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오마메의 말을 옮기자면 “우리는 좀 더 일찍이 용기를 내어 서로를 찾아야 했어요. 그랬다면 우리는 본래의 세계에서 하나가 될 수도” 있었을 테니까요?

사랑의 언저리를 맴돌던 그들이 서로를 끌어당겼던 것은 어느 날 하늘의 달이 두 개인 것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늘 보는 달, 닐 암스트롱이 발견한 달은 노랗습니다. 반면에 보통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달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초록색 빛을 내는 작고 일그러진 달입니다. 조금은 엉뚱하다고 느끼겠지만 그들이 태어날 때부터 머리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종의 루나틱(lunatic)인데 달에 의해 정신을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눈앞의 1984년은 가짜 세계였습니다. 대신에 1Q84가 진짜 세계였습니다.

그들이 1Q84에 우연히 발을 들여놓기 전에는 미래에 대해서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마사지 트레이너인 아오마메는 성폭력을 일삼는 남자들을 살해하거나 보복하는 쿨한 살인자였습니다. 그리고 입시학원에서 수학강사였던 덴고는 소설을 쓰면서도 자신의 상상을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뭔가 특별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나름대로 완벽한 삶을 쫓아갔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가슴은 외롭고 쓸쓸했습니다.

그래서 1Q84에서는 시간 또한 일그러져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착각만은 아니었습니다. 작가 말대로 어떤 시간은 지독히 무겁고 길며 어떤 시간은 가볍고 짧습니다. 만약 시간이 반듯하거나 혹은 지나온 시간을 고스란히 균일하게 받아들인다면 그런 인생은 아마도 고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고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들은 얼마든지 시간을 조정할 수 있었습니다. 1Q84에서 그들은 과거를 구원받고자 했습니다. 덴고 말대로 ‘과거를 바꿔 쓰는 것’이면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 소설을 통해 하루키는 과거를 바꿔 쓰는 것으로 그들의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 봤습니다. 살면서 어슴푸레한 느낌만 있었던 그들의 사랑이 비로소 손만 뻗치면 닿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하루키는 우리의 희망 하나를 사라지게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사랑이 행복하리라는 그럴싸한 기대감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없지는 않았지만 하루키의 사랑은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마도 리틀 피플이 만든 공기 번데기에 있었습니다. 선과 악이 불분명한 정체불명의 리틀 피플이 ‘1Q84’라는 왕국을 세우기 위해 종교적 리더 후카다를 리시버(받아들이는 자)로 삼았습니다. 또한『공기 번데기』를 쓴 그의 딸 후카에리는 퍼시버(지각하는 자)이자 마더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교합은 우리들에게는 불쾌한 성폭행으로 보였지만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는 데 있어서는 아무런 망설임도 후회도 없었습니다. 도덕이라는 잣대가 오히려 위선에 불과했습니다.

이러한 1Q84에서 아오마메와 덴고는 특별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1984에서는 작고 초라한 그들이었지만 1Q84에서는 세상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아오마메에게 후카다는 제거되어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과거 운동권 출신의 공동체 지도자에서 종교적 리더가 된 후카다는 사회의 악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덴고는 후카에리의『공기 번데기』를 리라이팅하면서 시시각각 좁혀오는 죽음의 손아귀에서 후키에리의 액막이를 통해 위기의 순간을 벗어나게 됩니다. 그렇다고 안전할 수 없었습니다. 1Q84에서 불문율은 마더를 절대 죽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대신에 마더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이 상실되고 맙니다.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후카다를 통해 리틀 피플의 실체를 알게 된 아오마메에게 마지막 선택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후카다를 죽이면 덴고가 살고 후카다를 죽이지 않으면 덴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수레바퀴였습니다. 그래서 가장 확실하고 빠른 방법은 후카다를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오마메을 복잡하게 만들어버린 것은 자신도 끝내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덴고를 위해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만약 아오마메에게 사랑이 없다면 후카다 말대로 이 모든 것은 싸구려 연극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 사랑은 어떤가요? 일찍이 융은 “식물의 고유한 삶은 뿌리 속에 감추어져 보이지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을 곱씹어 보면 꽃이라고 하는 것은 새살이 돋아나려는 생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슴을 저미는『1Q84』를 읽으면서 낯설고 독특한 감정이 묻어났습니다. 우리 몸 안에 있는 사랑을 다시금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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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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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요? 우리가 우주에 알고 있는 것들이 겨우 4%에 불과했습니다. 나머지 96%는 여전히 우리가 모르는 암흑물질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이 어디까지인지를 가늠해볼 때 앎의 경계는 사뭇 허망했습니다. 더구나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삶 속에서 사람은 별것 아닐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고통스럽다고 질퍽하게 말하는 것은 얼마나 얄팍한 외로움인가요?

이렇게 우리가 고통을 외면하고 있을 때 김연수는 소설집『세계의 끝 여자 친구』를 통해 오히려 고통의 뒷모습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작가는 고통을 붙잡고 싶은 심정으로 말하면서 으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지겨움 때문이야.’라고 털어 놓았습니다. 그러면서 작가는 지겨움을 마흔 세 살이라는 나이로 불편하게 받아들입니다. 마흔세 살이란 반환점을 돌아서 언젠가 한 번은 와본 길을 다시 가야하는 것입니다. 때로는「기억할 만한 지나침」에서 말한 대로 ‘세상 어딘가에는 더 이상 꿈을 꾸지 않는 열여덟 살도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립니다. 깊거나 얕거나 우리는 고통을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간혹 느닷없이 부딪치는 이별, 죽음의 문제가 달갑지 않게 찾아올 수도 잇습니다. 이를 두고 우연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고통의 시작을 헤아려보면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 좀 더 사실적입니다. 고통이 우연이라고 했을 때 ‘불어오는 바람에 보랏빛 자카란다 꽃잎이 하염없이 떨어지는 광경’(「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이 스쳐갔습니다. 그러나 고통이 필연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세계의 끝’에 가봐야 뭔가 결정적인 진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소설에서 세계의 끝은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있는 곳 (「세계의 끝 여자친구」)입니다. ‘세계의 끝 여자 친구’라는 시를 쓴 시인에게 여자 친구는 세상의 끝까지 데려가고 싶을 정도로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버렸고 우리 한 번 세상 끝 까지 가보고자 한 것이 호수 건너편에 있는 메타세쿼이아 나무 아래였습니다. 비록 남들에게는 웃을 일이지만 시인에게는 메타세쿼이아만이 아는 대답이 있었습니다. 살아있는 화석나무로 불리는 메타세쿼이아에 스며든 질긴 감정이란 고통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일본의 이즈미 간척지에서 노을을 배경으로 흑두루미가 나는 모습을 구경(「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하는 것입니다. 엄마가 죽던 날의 노을과 ‘흑두루미와 함께한 날의 노을’의 사진집 시리즈에 담긴 노을이 미아에게는 서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녀말대로 자신의 슬픔을 그가 봤을 것이라는 기이하면서도 따뜻한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그 사진작가는 ‘많은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많은 것을 망각하기 위해서 사진을 찍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착해지지도 않아도 돼. 무릎으로 기어다니지 않아도 돼. 사막 건너100마일. 후회 따윈 없어. 몸속에 사는 부드러운 동물. 사랑하는 것을 그냥 사랑하게 내버려두면 돼. 그러면 세계는 굴러가는 거야…’「기러기」라는 시를 음미했습니다.

그러면 굴러가는 세계에서 지나간 순간은 다시 반복되는 것인가요?「내겐 휴가가 필요해」에서 작가는 그렇지 않다고 했습니다. 이 소설은 완도의 3층짜리 도서관을 십년 가까이 들락거리며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를 찾는 전직 형사의 고뇌를 더듬고 있습니다. 꿈이 있었을 여대생을 고문 살해한 그는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알고자 했으나 오히려 고통만 뼛속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도서관의 수많은 책은 ‘삶은 단 한번만 이뤄질 뿐이며, 지나간 순간은 두 번 다시 되풀이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세계의 끝에서 만나는 고통이라는 것은 일종의 공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달로 간 코미디언」에서 방송사 PD인 딸이 객사한 아버지의 삶을 편집하면서 느꼈던 외로움이란 바로 이야기 사이에 공백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녀 말대로 편집이 목소리 사이의 공백을 없애는 것이라고 했을 때 ‘목소리와 목소리 사이에서 기침이나 한숨소리, 침 삼키는 소리’등이 사라지고 맙니다. 자세히 들으면 그 짧은 순간의 공백에는 무수한 진실이 담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편집된 이야기를 통해 고통을 바라볼 뿐입니다.

고통을 마주보며 눈물로 마음의 상처를 묻어둔다고 해서 묻힌다고 하면 얼마나 좋은지요? 이제야 ‘우린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라는 작가의 말을 제대로 들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고통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결코 소통할 수는 없습니다. 단순히 시각의 문제가 아니라 고통에 대한 촉각과 청각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작가는 고통을 어루만지면서도 굳이 걷어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마음에는 수잔 손택이 말한 ‘왼손 남자 오른손 여자’ 때문인지 모릅니다. 즉 ‘이 왼손이 남자고 이 오른손이 여자야. 이 두 사람이 늘 함께 붙어 있다가 이렇게 떨어지면, 서로 소통이 안 되니까 그게 고통이야.’ 돌이켜보면 겉모습이 화려하더라도 속마음이 외롭고 쓸쓸했던 것은 소통의 공백에 매우 지쳐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의 고통과 타인의 고통이 서로 맞물리지 않을 때 고통은 앞서 말한 대로 지겨움이거나 꿈이 없게 됩니다.

이 소설집을 찬찬히 읽으며 고통을 느끼는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 혹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인지 생각해봤습니다. 고통이라는 것이 여전히 암흑공간이라고 한다면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들 사랑이 4%라는 느낌이 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4% 사랑에도 우리는 얼마든지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왜냐면 ‘사랑은 어떤 순간에도 미워하지 않으니까요.’(「내겐 휴가가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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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딜레마 - 인간에 대한 절망, 혹은 희망
이용범 지음 / 생각의나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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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건 고개를 돌리지 않고 뒤를 바라보는 일만큼 어렵다.”이 말은 19세기 미국 수필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한 말이다. 자기 자신을 좀 더 보편적으로 확대해보면 인간일 수 있다. 그래서 매트 리들 리가『붉은 여왕』의 서문에서 “인간은 단지 포유동물의 한 종일 뿐인데 자신의 본성을 캐기 위해 2,000여 년 동안 노력했음에도 아직 궁금증은 풀리지 않았다.”고 토로한 것을 우리는 충분히 공감하게 된다.

이용범의『인간 딜레마』는 질량이 높은 책이다. 제목에 나와 있는 대로 ‘인간의 딜레마’에 관한 모든 것을 소개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딜레마는 개인들의 일상사에서 얻어진 것이다. 저자는 ‘인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딜레마 이론을 간단명료하게 풀어쓰고 있다. 뿐만 아리라 저자는 심리학, 뇌 과학, 문학, 신화 등 마음에 접근하려는 다양한 학문을 두루 살피면서 ‘인간의 딜레마’의 구성요소에 대한 질문들을 풀어 놓고 있다.

가령, 왜 선량한 여섯 사람이 폭력배 한 사람을 당해내지 못하는 것일까? 저자는 이것을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라는 딜레마로 풀이하고 있다. 즉 저자는 이 문제에 있어 ‘방관자의 효과’에 접근하고 있다. 이러한 효과는 사람이 많을수록 오히려 책임이 분산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러한 상황에서 어떤 누구도 3분 안에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그중에 한 사람이 3분 안에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도와주려고 행동했다면 나머지 5명도 기꺼이 동참하게 있다. 이러한 까닭은 ‘사회적 증거 효과’에 있다.

그런가 하면 이타주의라는 인간 본성은 어떤가? 맹자의 성선설(性善說)과 순자의 성악설(性惡說)은 익히 알고 있다. 이것을 서양에서 찾아보면 ‘루소의 딜레마’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철학적이며 윤리적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흥미롭게도 생물학 영역으로 확대하고 있다.

우리가 생물학적인 유기체로서 콜턴이 말한 ‘본성과 양육’이라는 오랜 논쟁과 마주하게 한다. 본성이 유전결정론이라면 양육은 환경결정론이다. 유전결정론이 진화의 결과라고 한다면 환경결정론은 문화의 결과였다. 그러나 본성과 양육이라는 대립을 직시하면서도 저자는 진화와 문화의 상호관계의 산물이 곧 인간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마음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있다. 저자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목적을 주목하고 있다. 즉 생명체의 목적은 다름 아닌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결국 유전자는 복제를 가장 잘하는 이기적인 복제자를 선택하게 된다. 하지만 DNA에는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이기적인 유전자가 곧 이기적 인간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인간의 딜레마’에 대한 참신한 안목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견해를 바탕으로 하며 얻어진 지식은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더욱 넓게 하고 있다. 인간이 자연과 다른 점은 선악(善惡)의 개념을 가진 생물체라는 것이다. 즉 자연이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과정이라고 한다면 인간은 딜레마의 과정이다. 더구나 이 과정에서 문화적인 요소가 우리를 좀 더 도덕적으로 존재하게 한다는 것이다. 비록 생존과 번식이라는 효율성으로 우리의 본성이 진화해왔지만 문화적 존재라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인간의 특성에 있어 문화는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생물학적 현상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 ‘문화도 우리의 본성까지 완전히 바꾸지 못한다.’고 말한다. 저자의 주장을 따라가 보면 인간의 자연적 본성에 탐구는 ‘인간의 딜레마’를 밝혀내는 데 있어 훨씬 더 앞으로 나아간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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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대 위의 까치 - 진중권의 독창적인 그림읽기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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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미술사에 있어 ‘괴물스러운 작품들 중에서 가장 괴물스러운 작품’은 무엇일까? 우리 시대 독창적인 미학자인 진중권은『교수대 위의 까치』에서 조르조네의 <폭풍우>를 주목하고 있다. 이유인즉 이 작품에 대한 해석 때문이었다. 작품을 놓고 2~3가지 충돌이 있어도 무려 28가지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는 것에 무게감이 실렸다. 저자에 따르면 이 작품은 ‘해석의 바벨탑’이었다.

조르조네의 <폭풍우>가 논란에 휩싸인 까닭은 르네상스 시대에는 풍경이 아직 독립된 장르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인물보다 풍경을 부각하고 있다. 이런 탓에 서양 미술사에 있어 이 작품을 ‘풍경화’ 장르로 설정하고 있다. 한편으로 이 작품이 ‘역사화’란 장르로 해석된다는 것이 빼놓을 수 없는 문제였다. 역사화란 이주헌이『서양화 자신있게 보기』에서 말했듯 ‘엄밀히 말해서 역사를 주제로 한 그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보편적인 가치와 교훈, 특별히 영웅적인 모범이나 모든 사람이 지향해야할 바람직한 덕을 표현한 그림을 일컫는 용어’였다.

저자는 이 그림을 설명하면서 안토니어 모라시가 “도대체 제재(subjet)가 있기는 한 걸까?”라는 의문에 독창적인 답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제재는 분절된 이야기를 말한다. 제재의 유무에 따라 이 그림 속의 남녀는 역사화로 보면 성경이나 신화의 인물로 보여 질 것이다. 반면에 풍경화로 보면 현실의 인물로 보일 것이다. 이러한 제재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반제재(anti-subjet)이며 다른 하나는 비제재(not-subjet)이다. 반제재를 의도적 에니그마(enigma)라고 하는데 작품을 단 번에 이해하기 힘들도록 애매하게 하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비제재는 처음부터 작품의 제재를 설정하지 않는 것이다.

서양 미술의 문외한인 보통 사람들에게 예술 작품을 감성하는 데 있어 정서적 감동이 우선시될 것이다. 혹은 지각적 쾌감을 얻거나 영성의 울림을 얻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오히려 지성적 자극이 올바른 미적 체험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앞서 말한 대로 조르조네의 <풍속화>을 명확하게 해석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겠지만 그럴수록 자신의 상상력을 발동시켜야 한다고 했다. 더 나아가 칸트의 미적 체험인 ‘오성과 상상력의 유희’의 상태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책은 저자에게 지성적 자극을 불러일으킨 12점의 서양미술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중에서 저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작품은 바로 피터르 브뤼헐의 <교수대 위의 까치>였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까치에 있다. 네덜란드 속담에는 ‘까치처럼 수다를 떤다.’는 말이 있다. 결국 이 작품 속의 까치는 수다쟁이를 말하며 교수대가 권력이라고 한다면 교수대 아래서 춤추는 농부 셋의 이미지는 얼마나 부조리하고 불합리한가? 라고 토로 했다.그래서 저자는 이 그림을 ‘상식이 통하지 않는 뒤집힌 세상, 그것의 부조리와 불합리의 무시무시한 상징’으로 브뤼헬의 고약한 블랙유머를 읽어내고 있다.

이 작품에 대한 작가의 해석을 읽으면서 왜 이 책의 제목이 만들어졌는지 충분히 알게 되었다. 저자는 작품은 제작된 순간에 완성되는 죽은 ‘물건’이 아니라고 한다. 그 보다는 끝없는 물음과 답변의 놀이를 통해 영원히 자신을 형성해 나가는 ‘생물’이라고 여겼다. 그러면서 저자는 작품에 대한 창조적 독해를 강조하는데 그것이 바로 개별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푼크툼(punctum)'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공유되는 일반적인 해석인 ’스투디움(studium)'과 대조를 보인다.

이처럼 저자의 독창적인 그림읽기와 동행하면서 우리는 작품에 해당하는 지식을 얻을 수 있다. 동시에 서양 미술사의 흐름을 파악하게 된다. 자연을 탐구하는 것이 전근대적 회화였다면 자기 자신을 탐구하는 반성적 성격이 현대적인 회화였다. 그래서 팝아트같은 회화의 현대성에는 그린버그가 말한 ‘평면성의 원리’가 담겨져 있다. 평면성의 원리란 3차원의 공간의 환영을 포기하고 2차원 평면임을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 덕분에 우리는 미술사를 움직이는 것이 ‘능력’이 아니라 ‘의지’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미술사는 사실적 재현으로 진화해오다가 20C에 들어 유년기의 화풍으로 되돌아 갔다. 이 과정에서 피카소같이 완전히 다른 예술의지가 탄생되었다. 이것은 곧 들뢰즈가 말한 ‘창조적 역행’과 같다.

일찍이 플라톤은『필레보스』에서 지식, 지혜, 지성은 ‘즐거운 것’보다는 ‘좋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 책을 통해 저자의 독창적 미학관은 우리에게 분명 ‘좋은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저자가 말하는 ‘푼크툼(punctum)'은 ’좋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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