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대 위의 까치 - 진중권의 독창적인 그림읽기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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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미술사에 있어 ‘괴물스러운 작품들 중에서 가장 괴물스러운 작품’은 무엇일까? 우리 시대 독창적인 미학자인 진중권은『교수대 위의 까치』에서 조르조네의 <폭풍우>를 주목하고 있다. 이유인즉 이 작품에 대한 해석 때문이었다. 작품을 놓고 2~3가지 충돌이 있어도 무려 28가지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는 것에 무게감이 실렸다. 저자에 따르면 이 작품은 ‘해석의 바벨탑’이었다.

조르조네의 <폭풍우>가 논란에 휩싸인 까닭은 르네상스 시대에는 풍경이 아직 독립된 장르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인물보다 풍경을 부각하고 있다. 이런 탓에 서양 미술사에 있어 이 작품을 ‘풍경화’ 장르로 설정하고 있다. 한편으로 이 작품이 ‘역사화’란 장르로 해석된다는 것이 빼놓을 수 없는 문제였다. 역사화란 이주헌이『서양화 자신있게 보기』에서 말했듯 ‘엄밀히 말해서 역사를 주제로 한 그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보편적인 가치와 교훈, 특별히 영웅적인 모범이나 모든 사람이 지향해야할 바람직한 덕을 표현한 그림을 일컫는 용어’였다.

저자는 이 그림을 설명하면서 안토니어 모라시가 “도대체 제재(subjet)가 있기는 한 걸까?”라는 의문에 독창적인 답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제재는 분절된 이야기를 말한다. 제재의 유무에 따라 이 그림 속의 남녀는 역사화로 보면 성경이나 신화의 인물로 보여 질 것이다. 반면에 풍경화로 보면 현실의 인물로 보일 것이다. 이러한 제재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반제재(anti-subjet)이며 다른 하나는 비제재(not-subjet)이다. 반제재를 의도적 에니그마(enigma)라고 하는데 작품을 단 번에 이해하기 힘들도록 애매하게 하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비제재는 처음부터 작품의 제재를 설정하지 않는 것이다.

서양 미술의 문외한인 보통 사람들에게 예술 작품을 감성하는 데 있어 정서적 감동이 우선시될 것이다. 혹은 지각적 쾌감을 얻거나 영성의 울림을 얻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오히려 지성적 자극이 올바른 미적 체험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앞서 말한 대로 조르조네의 <풍속화>을 명확하게 해석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겠지만 그럴수록 자신의 상상력을 발동시켜야 한다고 했다. 더 나아가 칸트의 미적 체험인 ‘오성과 상상력의 유희’의 상태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책은 저자에게 지성적 자극을 불러일으킨 12점의 서양미술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중에서 저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작품은 바로 피터르 브뤼헐의 <교수대 위의 까치>였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까치에 있다. 네덜란드 속담에는 ‘까치처럼 수다를 떤다.’는 말이 있다. 결국 이 작품 속의 까치는 수다쟁이를 말하며 교수대가 권력이라고 한다면 교수대 아래서 춤추는 농부 셋의 이미지는 얼마나 부조리하고 불합리한가? 라고 토로 했다.그래서 저자는 이 그림을 ‘상식이 통하지 않는 뒤집힌 세상, 그것의 부조리와 불합리의 무시무시한 상징’으로 브뤼헬의 고약한 블랙유머를 읽어내고 있다.

이 작품에 대한 작가의 해석을 읽으면서 왜 이 책의 제목이 만들어졌는지 충분히 알게 되었다. 저자는 작품은 제작된 순간에 완성되는 죽은 ‘물건’이 아니라고 한다. 그 보다는 끝없는 물음과 답변의 놀이를 통해 영원히 자신을 형성해 나가는 ‘생물’이라고 여겼다. 그러면서 저자는 작품에 대한 창조적 독해를 강조하는데 그것이 바로 개별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푼크툼(punctum)'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공유되는 일반적인 해석인 ’스투디움(studium)'과 대조를 보인다.

이처럼 저자의 독창적인 그림읽기와 동행하면서 우리는 작품에 해당하는 지식을 얻을 수 있다. 동시에 서양 미술사의 흐름을 파악하게 된다. 자연을 탐구하는 것이 전근대적 회화였다면 자기 자신을 탐구하는 반성적 성격이 현대적인 회화였다. 그래서 팝아트같은 회화의 현대성에는 그린버그가 말한 ‘평면성의 원리’가 담겨져 있다. 평면성의 원리란 3차원의 공간의 환영을 포기하고 2차원 평면임을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 덕분에 우리는 미술사를 움직이는 것이 ‘능력’이 아니라 ‘의지’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미술사는 사실적 재현으로 진화해오다가 20C에 들어 유년기의 화풍으로 되돌아 갔다. 이 과정에서 피카소같이 완전히 다른 예술의지가 탄생되었다. 이것은 곧 들뢰즈가 말한 ‘창조적 역행’과 같다.

일찍이 플라톤은『필레보스』에서 지식, 지혜, 지성은 ‘즐거운 것’보다는 ‘좋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 책을 통해 저자의 독창적 미학관은 우리에게 분명 ‘좋은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저자가 말하는 ‘푼크툼(punctum)'은 ’좋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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