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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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요? 우리가 우주에 알고 있는 것들이 겨우 4%에 불과했습니다. 나머지 96%는 여전히 우리가 모르는 암흑물질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이 어디까지인지를 가늠해볼 때 앎의 경계는 사뭇 허망했습니다. 더구나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삶 속에서 사람은 별것 아닐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고통스럽다고 질퍽하게 말하는 것은 얼마나 얄팍한 외로움인가요?

이렇게 우리가 고통을 외면하고 있을 때 김연수는 소설집『세계의 끝 여자 친구』를 통해 오히려 고통의 뒷모습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작가는 고통을 붙잡고 싶은 심정으로 말하면서 으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지겨움 때문이야.’라고 털어 놓았습니다. 그러면서 작가는 지겨움을 마흔 세 살이라는 나이로 불편하게 받아들입니다. 마흔세 살이란 반환점을 돌아서 언젠가 한 번은 와본 길을 다시 가야하는 것입니다. 때로는「기억할 만한 지나침」에서 말한 대로 ‘세상 어딘가에는 더 이상 꿈을 꾸지 않는 열여덟 살도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립니다. 깊거나 얕거나 우리는 고통을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간혹 느닷없이 부딪치는 이별, 죽음의 문제가 달갑지 않게 찾아올 수도 잇습니다. 이를 두고 우연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고통의 시작을 헤아려보면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 좀 더 사실적입니다. 고통이 우연이라고 했을 때 ‘불어오는 바람에 보랏빛 자카란다 꽃잎이 하염없이 떨어지는 광경’(「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이 스쳐갔습니다. 그러나 고통이 필연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세계의 끝’에 가봐야 뭔가 결정적인 진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소설에서 세계의 끝은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있는 곳 (「세계의 끝 여자친구」)입니다. ‘세계의 끝 여자 친구’라는 시를 쓴 시인에게 여자 친구는 세상의 끝까지 데려가고 싶을 정도로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버렸고 우리 한 번 세상 끝 까지 가보고자 한 것이 호수 건너편에 있는 메타세쿼이아 나무 아래였습니다. 비록 남들에게는 웃을 일이지만 시인에게는 메타세쿼이아만이 아는 대답이 있었습니다. 살아있는 화석나무로 불리는 메타세쿼이아에 스며든 질긴 감정이란 고통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일본의 이즈미 간척지에서 노을을 배경으로 흑두루미가 나는 모습을 구경(「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하는 것입니다. 엄마가 죽던 날의 노을과 ‘흑두루미와 함께한 날의 노을’의 사진집 시리즈에 담긴 노을이 미아에게는 서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녀말대로 자신의 슬픔을 그가 봤을 것이라는 기이하면서도 따뜻한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그 사진작가는 ‘많은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많은 것을 망각하기 위해서 사진을 찍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착해지지도 않아도 돼. 무릎으로 기어다니지 않아도 돼. 사막 건너100마일. 후회 따윈 없어. 몸속에 사는 부드러운 동물. 사랑하는 것을 그냥 사랑하게 내버려두면 돼. 그러면 세계는 굴러가는 거야…’「기러기」라는 시를 음미했습니다.

그러면 굴러가는 세계에서 지나간 순간은 다시 반복되는 것인가요?「내겐 휴가가 필요해」에서 작가는 그렇지 않다고 했습니다. 이 소설은 완도의 3층짜리 도서관을 십년 가까이 들락거리며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를 찾는 전직 형사의 고뇌를 더듬고 있습니다. 꿈이 있었을 여대생을 고문 살해한 그는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알고자 했으나 오히려 고통만 뼛속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도서관의 수많은 책은 ‘삶은 단 한번만 이뤄질 뿐이며, 지나간 순간은 두 번 다시 되풀이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세계의 끝에서 만나는 고통이라는 것은 일종의 공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달로 간 코미디언」에서 방송사 PD인 딸이 객사한 아버지의 삶을 편집하면서 느꼈던 외로움이란 바로 이야기 사이에 공백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녀 말대로 편집이 목소리 사이의 공백을 없애는 것이라고 했을 때 ‘목소리와 목소리 사이에서 기침이나 한숨소리, 침 삼키는 소리’등이 사라지고 맙니다. 자세히 들으면 그 짧은 순간의 공백에는 무수한 진실이 담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편집된 이야기를 통해 고통을 바라볼 뿐입니다.

고통을 마주보며 눈물로 마음의 상처를 묻어둔다고 해서 묻힌다고 하면 얼마나 좋은지요? 이제야 ‘우린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라는 작가의 말을 제대로 들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고통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결코 소통할 수는 없습니다. 단순히 시각의 문제가 아니라 고통에 대한 촉각과 청각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작가는 고통을 어루만지면서도 굳이 걷어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마음에는 수잔 손택이 말한 ‘왼손 남자 오른손 여자’ 때문인지 모릅니다. 즉 ‘이 왼손이 남자고 이 오른손이 여자야. 이 두 사람이 늘 함께 붙어 있다가 이렇게 떨어지면, 서로 소통이 안 되니까 그게 고통이야.’ 돌이켜보면 겉모습이 화려하더라도 속마음이 외롭고 쓸쓸했던 것은 소통의 공백에 매우 지쳐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의 고통과 타인의 고통이 서로 맞물리지 않을 때 고통은 앞서 말한 대로 지겨움이거나 꿈이 없게 됩니다.

이 소설집을 찬찬히 읽으며 고통을 느끼는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 혹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인지 생각해봤습니다. 고통이라는 것이 여전히 암흑공간이라고 한다면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들 사랑이 4%라는 느낌이 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4% 사랑에도 우리는 얼마든지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왜냐면 ‘사랑은 어떤 순간에도 미워하지 않으니까요.’(「내겐 휴가가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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