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두사의 시선 - 예견하는 신화, 질주하는 과학, 성찰하는 철학
김용석 지음 / 푸른숲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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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메두사의 시선』의 저자인 김용석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철학자이다. 철학자인 그가 다름 아닌 철학 에세이를 쓴다고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하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앞섰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보면 그것은 말 그대로 편견이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저자의 개성적인 사유 방법을 깨닫게 된다. 저자 말대로 철학 에세이는 지식으로 쓰는 글이다. 그러나 단순히 지식의 나열이라고 한다면 자기 성찰은 곤란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신화-과학-철학을 연계하는 저자의 글쓰기는 앞서 말했듯이 독특했다. 같은 지식이라고 해도 어떻게 그 지식을 이해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생각하는 법’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사건의 역사가 아닌 ‘상상력의 역사’라고 말했던 저자의 명랑함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왔다.

그러면 이 책의 제목인‘메두사의 시선’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과학자의 시선’이다. 저자에 따르면 메두사의 눈초리는 이중적이다. 즉 변화하는 것들의 뒤에 숨어 있는 불변의 법칙을 붙잡아 두는 과학의 시선인 반면에 그런 과업에 몰두하는 과학자에게‘업보’로 돌아갈 시선이다. 이로 인해 메두사의 시선은 과학 활동의 원천이며‘과학적 패러다임은 메두사의 시선이 화석화된 법칙의 체계’가 되는 것이다.

프리고진이 갈릴레오에 대한 지지를 “지구가 수정 구슬로 바뀐 뒤에 더욱 아름다워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메두사의 눈초리에 의하여 다이아몬드의 조각상으로 변화될지어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메두사의 시선에 붙잡힌 자연법칙의 조각상이란 단순해야하고 아름다워야 한다. 또한 메두사의 시선이 확장되면 진리의 빛이 대통합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대통합은 ‘모든 것을 하나로’라는 단순함과 ‘모든 것이 함께 조화로운’이라는 아름다움에 더해 ‘전체’가 ‘여기 있다’는 장엄함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그의 사유는 엉뚱하다. 그렇다고 해서 엉뚱함으로 끝나지 않는다. 저자는 엉뚱함이 제기하는 의혹에서 무엇보다도 ‘충분한 논증’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저자에 따르면 충분한 논증이야말로 철학자가 보통 사람과 다른 존재의 이유가 된다. 가령,「피그말리온의 타자성」를 보면 자신이 조각한 여인의 상(像)이 제 아내가 되기를 바라는 피그말리온이 나온다. 그런데 저자는 피그말리온이 지독한 이기주의자 혹은 자기중심주의자가 아닌가? 라고 반문했다. 이러한 까닭에는 인간중심주의적 사고 탓이다. 진화의 종점이 인간이라고 했을 때 저자가 우려하고 바는 타자에 대한 불필요성에 있다. 인간이 근원적인 자기반성과 변화를 하기 위해서는 타자와 만나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또 하나, 저자의 놀라운 탐색을「디오니소스와 포도주의 인식론」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니체도 그랬지만 우리가 디오니소스를 이해하는 한계는 주신(酒神)만을 다루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포도주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예리하게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찰스 다윈은 인간의 유래를 설명하면서 인간의 문화적 특성을 세 가지로 활동을 들었다. 즉 술 빚기, 빵 굽기, 글쓰기이다. 이들의 특징은 자연적이지 않으며 발효의 기술이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포도주는 포도와는 달리 문화이며 이것이 곧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다.

일찍이 몽테뉴는“우리가 가장 모르는 것을 가장 잘 믿는다"고 했다. 이는 우리가 ‘잘 모르기 때문에 믿는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둘러싼 문제에 대해 다시 한 번 주목하게 된다. 즉 한때는 네 발로, 한때는 세 발로, 한때는 두 발로 걸으며, 일반적인 법칙과는 반대로 발이 많을수록 약한 존재는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정작 어린 아이도 풀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스핑크스의 반인반수(半人半獸)의 시선에서 깨닫는 것은 바로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보다 잘 알기 위해서는 ‘과학적관심과 신화적 은유를 철학적 성찰에 연계’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 책의 가치를 높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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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2010-03-24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다음 두 가지 수학진리를 대한수학회의 부당업무 관련 죄인, combacsa(그네고치기), melotopia(snowall), Pomp On Math & Puzzle(박부성) 등은 권위만을 앞세워 부인하는 잘못을 범하였던 것이다.
첫째, 다음 세 가지 공식들은 모든 피타고라스 수를 구할 수 있다.
X=(2AB)^(1/2)+A, Y=(2AB)^(1/2)+B, Z=(2AB)^(1/2)+A+B.
상기 공식은 c^2=A=Z-Y, 2d^2=B=Z-X 일 때 X=2cd+c^2, Y=2cd+2d^2, Z=2cd+c^2+2d^2 같이 된다.
위 공식은 c+d=r 일 때 X=r^2-d^2, Y=2rd, Z=r^2+d^2 같은 기존 공식이 된다.
둘째, [2^{(n-1)/n}+……+2^(2/n)+2^(1/n)](자연수)^{(n-2)/n} 과 (자연수)/(무리수) 는 항상 무리수가 된다.
최미나 010-7919-8020.
 
휴먼 스테인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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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학생은 그동안 단 한 차례도 강의에 출석한 적이 없습니다. 그게 제가 두 학생에게 대해 아는 전부입니다. 전 spooks이란 단어를 그 단어가 지닌 통례적이고 본래적인 의인 유령 혹은 귀신이라는 뜻으로 썼던 겁니다. 저는 spooks이란 단어가 이따금씩 흑인들에게 적용되는 불쾌한 용어라는 사실을 어쩌면 한 오십 년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완전히 잊고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학생들이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는 말에 극도로 조심하는 제가 그 단어를 사용하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그 단어가 사용된 문맥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학생들이 실제로 존재하기는 하는 건가요. 아니면 유령들인가요? 인종차별을 했다는 고발은 비논리적입니다. 터무니없는 이야기입니다.
- 필립 로스의 『휴먼 스테인』 중에서




“전기는 불입니까?”
어느 날 천재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유대교인 두 명의 율법학도로부터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왜 그런 질문을 하느냐고 묻자 유대교 율법에서는 토요일(안식일)에 불을 피우지 못한다고 정해져 있다고 해서 그렇다는 것이었습니다. 화학적인 현상인 전기와 불은 서로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전기가 일으키는 스파크 현상이 얼마든지 불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단순히 전기는 불이다, 아니다? 를 가늠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파인만은 “전기는 불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그들은 기분 좋게 떠났습니다.

필립 로스는『휴먼 스테인』에서 “SPOOKS"가 일으키는 아찔한 순간을 포착하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대수롭지 않았을 spooks라는 말이 당사자의 마음과 삐끗 어긋났습니다. 전혀 그러한 마음이 없었는데 뜻밖의 말실수가 되었습니다. 무방비상태에서 뒤통수를 한 대 맞는 것 같아 난처함에 놀랐습니다. 그러나 어디 놀람뿐이겠습니까? 살다보면 내가 세상에서 바라는 것과 세상이 나에게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삶을 순탄하게 살고자 한다면 나보다는 세상의 흐름에 맞추면 혼란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작가 말대로 ‘관습을 거스르는 대담함’을 가진 ‘개별적인 존재’도 있습니다. 개별적인 존재는 ‘단독성을 지닌 개체로 존재하기 위한 열정적 투쟁, 독립적 개체로서 존재하는 동물 변화하는 모든 것과의 관계. 정지된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을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단독성이란 우리(we)가 아니라 나(i)를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콜먼은 보통 이상의 남성입니다. 보통 이상이 정확히 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저 그런 속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아테나대학에서 고전문학을 강의했습니다. 그런데 학기가 시작한 지 5주가 지나도록 출석하지 않는 2명의 학생에 대해 유령들(spooks)"이라고 한 마디 던졌습니다. 불쾌지수가 높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말 그대로 평범하게 툭 던진 한 마디였습니다. 그러나 두 명의 학생이 오히려 얼굴을 붉혔습니다. 정체불명의 두 명의 학생이 놀랍게도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던 흑인이었습니다. 그래서 SPOOKS의 또 다른 의미인 검둥이가 ‘더러운 것, 나쁜 것’을 불러 일으켰으며 사람들은 그를 ‘인종차별자’라고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콜먼을 비판하는 사람들 중에 델핀 루 학장은 충분히 그럴 만했습니다. 델핀 루는 콜먼과 서로 다른 스타일의 학장이었습니다. 전임 학장이었던 콜먼은 대학의 품질혁명을 독단적으로 밀어 부쳤습니다. 이로 인해 후임 학장 델핀 루를 비롯한 교수들은 콜먼을 불신하는 반작용마저 생겨났습니다. 그러던 중 운 좋게 콜먼이 거미줄에 걸려들었습니다. 그들은SPOOKS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한 꺼풀 벗겨냈습니다. 그리고는 인종차별자라는 불명예를 덮었습니다. 말하자면 추한 성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콜먼은 자신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이 소설의 화자(話者)인 주커먼에게 책을 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콜먼에게 주커먼은 남의 잘못을 처벌하지 못해 안달인 ‘볼썽사나운 인간’이 아니라 구원자였습니다. 주커먼은 콜먼의 얼굴을 보면서 ‘백인으로 착각하는 피부색이 옅은 흑인에게서 느낄 수 있는 약간의 모호한 분위기를 풍기는 조금 누르스름한 피부색의 심한 곱슬머리 유태인 가운데 하나’라고 여겼습니다.

이러한 주커먼의 예감은 아이러니하게도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작가말대로 콜먼은 치명적인 비밀을 가진 남자였습니다. 자신의 이중적인 모호한 분위기 탓에 콜먼은 오랜 세월을 거짓 백인으로 살아왔습니다. 콜먼이 자신의 운명을 백인으로 결정한 것은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흑인이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도 아닌 흑인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조건의 인생으로 살고자 했습니다. 콜먼의 수수께끼 같은 비밀에는 자신이 흑인이라는 노예적인 생각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삶의 고단함이 덕지덕지 묻어있었습니다. 그는 불행한 자신의 인생과 마주하길 피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지금의 어려움을 겪게 된 것입니다.

살다보면 인생의 구멍이 한순간 뻥 터질 때가 있습니다. 노년의 교수 콜먼에게 불어 닥친 시련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콜먼이 어쩌다 저렇게 되었는지, 무엇이 그를 힘들게 하는지, 어떻게 삶의 탈진현상(burnout)을 극복해나가는지 은근슬쩍 우리의 내면을 건드렸습니다. 삶의 의욕도 에너지도 없는 콜먼에게 다가가 위로하고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위선과 편견은 사람의 영혼을 파괴하는 가장 무서운 병이며 그만큼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불안 상태를 잊기 위해 작가는 위험한 과거를 지닌 여자인 포니아를 등장시켜 우리를 놀라게 했습니다. 삼십사 년을 사는 동안 하도 놀랄 일을 많이 당한 서른넷의 포니아는 남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의 지혜를 얻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일흔 살의 콜먼과 사랑을 나누며 그들만의 공백을 채웠습니다. 그러자 또다시 콜먼에게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습니다. 즉 ‘모두가 알고 있다. 당신이 당신 나이의 절반밖에 안 되는 학대받고 문맹인 여자를 성적으로 이용해먹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을 만큼 위험하지도 않았으며 허리가 아플 정도로 격렬하지도 않았습니다. 남들 다하는 사랑의 실수 즉 섹스라는 가속페달을 밟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단순한 기쁨이었습니다. 남의 이목보다는 자신들의 만족과 당당함을 위해 그들은 사랑했습니다. 아니 좀 더 사실적으로 말한다면 스릴을 느꼈습니다. 어떠한 책임감이나 의무감도 아니었습니다. 돈도 아니었고 거창한 토론도 아니었습니다. 콜먼이 고백하듯 스릴같은 사랑은 예상치 않았던 친밀함에서 생겨났습니다.

누구나 삶의 변화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럴 때 작가는 인생에서 정말 난해한 변화가 생길 때는 누군가에게 ‘난 당신을 몰라’라고 말할 때라고 했습니다. 일찍이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에서 “너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 무엇을 가지지 않는다. 아니,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관계에 들어서 있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과도한 사회에서 불행한 이유는 유럽 문학이 불화에서 시작되는 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관계를 맺지 못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휴먼 스테인』을 읽으면서 인간의 오점은 무엇일까? 궁금했습니다. 한 개인의 문제는 아닌 듯 했습니다. 모든 존재의 고민이었습니다. 남들 하는 만큼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도 고독할 수밖에 없는 것은 ‘성실하고 텅 빈, 완전히 텅 빈 세대’의 모순이라고 여겼습니다. 무엇보다도 텅 빈 감정은 ‘모든 것을 깨끗하게 한다’는 야만적 농담이라는 생각……이것이 필립 로스가 던지는 또 하나의 오점이었습니다. 과거는 과거를 파묻고 침묵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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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 - 천 년의 믿음, 그림으로 태어나다 키워드 한국문화 1
박철상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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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그림을 감상하려면 어떻게 해야 잘할 수 있을까요? 오주석은『오주석의 한국의 美 특강』에서 두 가지 원칙을 말했습니다. 하나는 옛 사람의 눈으로 보고, 다른 하나는 옛 사람의 마음으로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 원칙은 옛 그림을 보는 문외한(門外漢)에게도 간단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간단함에도 불구하고 옛 사람의 눈과 마음을 가늠하기란 어렵다는 아쉬움이 매번 맴돌았습니다. 어느 정도까지 해야 하는지 불분명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고민을 헤아렸는지 오주석은 어느 그림이든지 작품 크기의 대각선을 그었을 때 대략 그 대각선 혹은 대각선의 1.5배 정도에서 감상하기를 권했습니다.

박철상의『세한도』는 여러모로 의미가 뜻 깊었습니다. ‘키워드 한국문화’라는 타이틀에 걸 맞는 것은 물론 <세한도>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을 다시금 돌아보게 했습니다. 앞서 오주석이 말했던 것처럼 이 책의 저자 또한 대각선 혹은 대각선의 1.5배에서 <세한도>을 재조명하고 있습니다. 즉 <세한도>가 어떻게 탄생되었는지,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또 추사 김정희의 삶과 예술에 대해 좋은 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한도>의 진면목을 하나하나 알면 알수록 어느 순간 안복(眼福), 심복(心福)으로 가슴이 뿌듯해졌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한 대로 <세한도>는 단순한 그림이 아니었습니다. 이 책의 부제에서 드러나듯 ‘천년의 믿음, 그림으로 태어나다’는 것이었습니다. <세한도>에 얽힌 김정희의 사연을 찬찬히 읽다보면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선비로서의 교양과 인품이 어떠해야 하는지 우리는 김정희의 모습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세한도>에서 세한(歲寒)은『논어』,「자한」편의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공자가 사랑했던 송백을 추사 또한 사랑했습니다. 이 그림에서 송백 같은 사람은 우선 이상적이었습니다. 추사 김정희가 우선 이상적에게 감사한 마음은 일시적인 답례가 아니었습니다. 그림에 쓰여 있는 제사(題詞)를 보면 제주도 유배 생활하는 추사에게 이상적은 연경의 책들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세상 인삼이라는 것이 권세에 휩쓸리는 잡초(雜草) 같을 수밖에 없는데 이상적의 단단한 삶은 사시사철 푸르른 성인(聖人)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고마움을 완곡한 그림으로 표현했던 것이었습니다.

이 그림에서 추사의 석교(石交)를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장무상망(長毋相忘)’이라는 인장에 있습니다. <세한도>에는 4개의 인장(印章)이 찍혀 있습니다. <정희(正喜)> <완당(阮堂)> <추사(秋史)> <장무상망(長毋相忘)>입니다. 인장은 관례적으로 자신의 자호(字號)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장무상망은 인장,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한장(閑章)이었습니다. 한장은 자신은 취미나 기호, 또는 좋은 시구나 경구를 새긴 인장을 말합니다. 장무상망을 풀이하면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상적에게 특별했던 교감의 너머에는 자신의 상처와 송백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감동 깊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한도>가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는 또 다른 까닭은 무엇보다도 김정희의 학문에 있었습니다. 이 점이 <세한도>의 역사와 문화를 재발견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일본 동양학자이자 김정희 연구의 대가(大家)인 후지츠카 지카시는 “청조학(淸朝學)의 연구의 제일인자는 김정희이다.”라고 극찬했습니다. 흔히 청조학이라고 하면 실학이라고 하여 경세치용의 측면 만을 강조한 탓에 정작 고증학(考證學)의 가치는 뒷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고증학의 치열한 정신이 조선 시대 파편화된 삶을 반성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김정희가 말한 대로 ‘문경(門經)을 찾는 것이야말로 학문의 요체’가 된다는 중요한 가르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가령, 김정희는 시론의 문경을 두보(杜甫)임을 역설했습니다. 그런데도 추사는 두보를 배우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저자의 설명대로 두보의 시를 배운다고 해서 두보의 경지에 오르는 게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보다는 두보에 이르는 문경을 따라가면서 차근차근 공부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즉 당대의 대가들을 배운 다음 명나라, 원나라를 거쳐 비로소 당나라에 이르러 두보의 시를 배울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야 두보를 뛰어넘는 시인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추사는 문경이라는 학문하는 법에 따라 조선 사회에 명실상부한 문인화가 없다는 현실을 직시하였습니다. 당시 조선 사회는 완물상지(玩物喪志)라고 하여 그림을 잡기(雜技)로 매몰차게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추사에게 그림은 사부기(士夫氣)였습니다. 사부기를 그리는 데 있어 추사는 황솔(荒率)한 느낌을 어떻게 그릴 수 있을 것인가를 늘 몰두했습니다. 왜냐하면 황솔한 느낌은 장경(張庚)의 영향으로 ‘냉일(冷逸:쓸쓸함)하고 고요한 의취’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좀 더 말하면 ‘거칠고 간략하고 메마른 느낌이다. 찬바람이 부는 겨울에 잎이 다 져버린 고목만 홀로 서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한편으로 <세한도>의 발문에서는 추사체(秋史體)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글씨에 대해 ‘해서가 분명하지만, 우리가 늘 보던 깔끔한 형태의 해서는 아니다. 오히려 예서의 맛이 강하게 남아 있는 해서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유홍준은『완당평전 1』에서 추사체의 본질과 매력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즉 추사는 정통적인 순미(純美), 우미(優美)가 아니라 반대로 추(醜), 미학 용어로 말해서 미적 범주로서의 추미(醜美)를 추구했다. 즉 파격의 아름다움, 개성으로서 괴(怪)를 나타낸 것이라고 했습니다.

『세한도』를 읽으면서 옛 사람들의 내면적 풍경이 되살아났습니다. 덕분에 선인들의 은은한 삶의 향기를 맡으며 공감했습니다. 그래서 <세한도>에 얽힌 사연과 즐겁게 노닐면서 ‘이 황량하고 썰렁한 분위기’를 비로소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사부기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서권기(書卷氣)에서도 손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일찍이 추사는 “가슴 속에 책 만권이 들어 있어야 그것이 흘러 넘쳐 그림과 글씨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백호당(百號當)이라고 불렸던 추사의 <세한도>를 보면서 학예일치(學藝一致)의 정신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깊이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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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의 유토피아 -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꿈꾼 세계 키워드 한국문화 5
서신혜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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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부터 대설(大雪)이 내렸다. 하루아침에 별천지(別天地)가 눈앞에 펼쳐졌다. 뭐라고 형언하기 힘든 설국(雪國)은 아름다움을 물씬 빚어냈다. 그래서 인지,

 
내게 왜 푸른 산에 사느냐고 묻지만

빙긋 웃고 답 안하니 마음 절로 한가롭다

복사꽃 잎 떠 흐르는 물길 아득하게 멀어지니

이곳은 별천지요 사람 세상이 아니로다

 


이태백(李太白)의 시가 절묘했다. 무릉도원(武陵桃源)이라고 해도 좋을 듯 했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무릉도원에 대해 아는 게 없다. 서양에서 말하는 유토피아가 동양에서는 무릉도원으로 불린다는 사전적인 정보 수준이었다. 그래서 무릉도원의 실체에 대해 시종(始終) 궁금한 게 사실이었다. 일찍이『논어』에서는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라는 말이 있다. 곰곰이 반추해보면 즐기는 데 있어 앞서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제대로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서신혜의『조선인의 유토피아』는 이런 지적 호기심에「몽유도원도」로 답하고 있다. 이 책은 ‘키워드 한국문화’ 시리즈라는 소책(小冊)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한 장의 그림 또는 한 장의 역사적 장면을 키워드로 삼아 구체적인 대상일 통해 한국을 찾자는’ 것은 의미 있는 내용이라고 해도 과언(過言)이 아니었다. 한국문화의 진면목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러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꿈꾼 세계는 어땠을까? 책을 펼치면 안견의「몽유도원도」가 나온다. 그리고 다시 책장을 펼치면 안평대군의「몽유도원기」가 나온다. 안평대군이 꿈에 본 도원(桃源)을 안견이 그린 것이다.「몽유도원기」을 보면 ‘골짜기에 들어서자 안이 넓게 트여 2~3리는 될 듯하였다. 사방으로 산이 벽처럼 둘러서 있는 가운데 구름과 안개가 자욱이 피어오르고 있었으며, 가깝고 먼 복숭아나무 숲에 햇살이 비치어 마치 노을이 지는 듯했다(…) 앞 내에 조각배만 물결을 따라 떠다닐 뿐이어서 그 쓸쓸한 정경은 마치 신선이 사는 곳인 듯했다.’라고 하면서 도원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한편 도원이 조선인의 유토피아를 상징했던 것은 도연명의「도화원기」에서 비롯되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몽유도원도」와「도화원기」에서 속세와 단절된 별세계 즉 무릉도원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이 도원을 꿈꾼 후 “내 몸은 궁궐에 매여 밤낮으로 일을 하는데도 어떻게 꿈에서 산림에 이를 수가 있었을까? 또 어떻게 하여 도원을 갈 수가 있었을까?”라는 심정을 토로했다. 반면에『도화원기」는 무릉이라는 사람이 길을 잃어 도원에 가서는 그곳 사람이 말하길 “선대에 진(秦)나라 때의 난리를 피하여 처자식과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이 외딴곳으로 온 후 다시는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깥세상과 교제가 끊겼지요.”라는 놀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러한 무릉도원이 조선인의 마음에 어떤 영감을 주었는지 간략하게 살펴보면 동천(洞天), 부산(釜山), 청학동(靑鶴洞), 판미동(板尾洞)이라는 지명의 흔적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령, 동천은 신선이 사는 땅으로 세속의 때가 묻지 않는 깨끗하고 아름다보고 조용한 공간을 말한다. 부산은 물자가 풍부하여 가난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청학동은 푸른 학이 사는 곳이다. 무릉도원이 환상적인 공간이라는 것과 달리 자기들이 거주하는 공간이 곧 자기들이 바라는 세상이 되고자 염원했던 것이다.

이 책을 찬찬히 읽으며「몽유도원도」의 세계를 두루 산책하며 감상(鑑賞)할 수 있었다. 옛 그림에 얽힌 다양한 시선과 상징하는 바를 보면서 덕분에 우리 문화를 새롭게 조망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옛 그림 속에는 역사가 있다.”는 오주석 선생의 따끔한 충고가 소중한 지적 자극이 되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옛 그림에서 한 분의 그리운 옛 조상을 만날 수 있다.”는 진실은 더 말할 나위가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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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08-30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읽으면서 안견의 그림을 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이 좋은 그림이 일본에 있다는게 무척 아쉬울 따름이네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1
테네시 윌리암스 지음, 김소임 옮김 / 민음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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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여리면, 여린 사람들은 희미한 빛을 발하거나 반짝거려야만 해. 나비 날개는 부드러운 색을 띄어야만 하고 불빛 위에 종이 갓을 씌워야 해… 여린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거든. 여리면서도 매력적이어야 해. (…)육체적 아름다움은 사라지죠. 순간적이죠. 하지만 마음의 아름다움과 영혼의 풍요로움 그리고 가슴속 부드러움은… 나는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 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더 증폭되죠! 세월이 가면 갈수록 이요! 내가 가난한 여자라고 불려야만 하다니 정말 이상하죠! 내 가슴속에 이런 보물들이 간직되어 있는데요. 나는 나 자신을 매우 부유한 여자라고 생각해요! 그동안 어리석었죠.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다니!

-테네시 윌리엄스의『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중에서

 

 




세상을 살다보면 혼란스런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혼란스런 일들이 전혀 뜻밖일 때 인생은 쉽게 망가질 수 있습니다. 찰랑찰랑 했던 행복이 어느 순간 우리 몸에서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그렇게 사라져 버리는 것은 불행 때문입니다. 불행은 눈물을 빨아올리면서 마음 한 구석을 텅 비게 합니다. 온 몸이 가벼워진 탓에 그만큼 비틀거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10분이면 갈 거리를 불행한 사람들은 몇 분 몇 시간이 걸릴지 모릅니다.

그러면 불행한 사람에게 제일 좋은 치료는 무엇일까요? 테네시 윌리엄스는『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친절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블랑시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가다가 묘지라는 전차로 갈아타서 여섯 블록이 지난 다음 뉴올리언스 시의 극락이라는 곳’에 내린 이유는 친절이 필요해서 그랬습니다. 극락에는 자신의 여동생 스텔라와 제부인 스탠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블랑시는 그들이 어느 누구보다도 자신을 친절하게 대해 주리라 여겼습니다. 그녀가 고향을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은 가족들이 남겨놓은 차용증서 때문에 집을 팔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처지를 밝히면서 친절하게 위로 받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기대와 달리 극락은 빈민가였으며 여동생 부부는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더구나 부잣집에서 곱게 자란 여동생이 왜 단순하고 직선적인 스탠리와 결혼했는지 의아했습니다. 스텔라 말대로 스탠리가 가지고 있는 추진력 때문일까요? 스텔라는 판매원에 불과한 스탠리가 나중에 출세할거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스탠리가 천재여서 그런 게 아니라 바로 추진력 때문이었습니다. 

추진력? 블랑시는 못마땅했습니다. 오히려 그녀는 스탠리가 화약통 같다고 했습니다. 만약 스탠리가 진짜 남자라고 한다면 신사다워야 했습니다. 그녀에게 신사는 인간의 단계에 도달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술, 음악이라는 광채 덕분에 부드러운 감정들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스탠리는 짐승 같은 행동을 했으며 짐승 같은 본성을 지녔습니다. 그가 즐기는 포커 파티를 석기 시대에 살아남은 유인원들의 잔치라고 그녀는 냉정하게 말했습니다.

이렇게까지 그녀가 스탠리에게 심장이 터질 듯 한 전율을 느끼는 것은 현실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습니다. 스텔라 말대로 습관에 대해서는 서로 참아줘야 하는데 그녀는 금세 벽에 부딪쳤습니다. 그녀는 여리면서도 매력적이라는 환상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환상이라는 보물을 간직한 그녀는 언젠가 백만 탄 왕자를 만나 부유한 삶을 살게 되리라 믿었습니다. 그녀는 ‘세련되고 지성과 교양을 갖춘 여자는 남자의 삶을 풍요롭게 해줄 수’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스탠리가 자신을 친절하게 대해주지 않는 것이 자신을 미워하거나 비난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한편으로 그녀의 바람대로 미치를 만나면서 다시 한 번 사랑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녀에게 미치는 ‘내 젊음이 갑자기 배수구로 사라지고, 그리고 당신을 만났어요.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당신이 말했지요. 그래요, 나도 누군가가 필요했어요. 당신을 만난 것을 하느님께 감사했어요. 당신은 신사같이 보였기 때문이죠… 바위 덩어리 같은 이 세상에서 내가 숨을 수 있는 틈새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들 모두는 사랑의 상처를 이미 겪었기 때문에 외로웠습니다. 둘 다 근심이 가득하고 심각했으며 서로가 서로를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함께 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차는 얼마 못 가 멈추고 말았습니다. 그녀가 미치에게 말했던 마법 같은 말들이 스탠리를 통해서 가짜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녀는 그녀대로 ‘진실을 말하지 않고 진실이어야만 하는 것’을 말했다고 용서를 빌지만 미치는 그녀의 거짓말에 놀아난 스스로를 더욱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의 진실은 ‘낯선 사람과 관계를 가지면서 낯선 사람의 친절’에 의지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미치의 변심을 두고 오히려 돼지 같다고 아주 현실적으로 미워합니다.

일찍이 카를 힐티는『행복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욕망은 내가 원하는 거을 얻게 된 것을 약속하며, 혐오는 내가 싫어하는 것과 마주치지 않기를 바란다. 욕망에 속은 사람은 불행하지만, 참기 힘든 것과 마주친 사람은 더욱 불행하다는 것을 알라’고 했습니다. 또한 ‘자기가 불행하다고 해서 남을 책망하는 것은 교양이 없는 사람이나 하는 태도이며, 자신을 책망하는 것은 미숙한 사람이고, 자신도 다른 사람도 책망하지 않는 것이 교양인, 완전하게 교육을 받은 사람이 취할 태도’라고 했습니다.

이 소설에서 블랑시의 욕망은 불나방 같았습니다. 불나방에게 화려하게 빛나는 불빛은 대단히 매력적입니다. 불빛 이외에는 아무것도 불나방의 욕망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사람으로 말하자면 불빛은 매우 부자인 사람입니다. 그럴수록 불나방은 자신을 세련된 여자라는 환상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랑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적어도 사랑한다고 했을 때 헤어지면 보고 싶은 게 당연합니다. 하지만 불나방 같은 사랑은 헤어지면 그만입니다. 결국 불나방의 사랑은 서로에게 낯설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소설을 읽으며 낯선 사랑이라는 욕망은 낯선 친절에 자신을 속이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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