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때와 죽을 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6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지음, 장희창 옮김 / 민음사 / 201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죽음과도 같은 수년간의 혹독한 시련 이후 술은 더 이상 술이 아니고, 은은 더 이상 음악이 아니고, 엘리자베스도 엘리자베스가 아니었다. 모든 것은 그 이상의 것이었으며, 저 다른 삶의 상징이었다. 죽음도 파괴도 없는 삶, 이미 신화가 되어 버려 하나의 바랄 수 없는 꿈이 되어 버린 삶 그 자체를 위한 상징이었다(…) 각자 자신의 운명을 지고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을 때는 판단을 내리고 용감해지는 것이 쉽다. 그러나 무언가를 가지게 되면 세상을 달라 보인다. 더 쉬워질 수도 더 어려워질 수도 있으며 때로는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 용감해지는 것은 언제든 가능했지만, 이제 그것은 다른 모습이고 전혀 다른 이름으로 나나타며 또 바로 거기서 출발해야 한다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사랑할 때와 죽을 때』 중에서

 

 

 

사람에게 전쟁은 지옥입니다. 그러나 구더기에게는 천국입니다. 전쟁의 희생양이 되어버린 사람들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닙니다. 점잖게 말하면 시체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구더기의 고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구더기는 만찬을 마련해준 전쟁의 당사자들은 마음씨 좋은 신으로 기억할 것입니다. 이런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아기를 낳고 싶다고 한다면 당신은 뭐라고 대답할까요? 당신의 아기가 태어날 세상이 얼마나 지옥 같고 비참할 지 생각한다면 망설이지 않을 수 없겠지요.

그런데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사랑할 때와 죽을 때』에서 엘리자베스는 아이를 낳고자 했습니다. 2년 만에 전선에서 휴가를 나온 그녀의 남편 그래버가 평화로운 시대에 가능하겠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희망에 불과하다고 반대했습니다. 전후방이 따로 없는 악몽 속에서 가족의 안전과 생명을 지키는 것은 전선에서 총을 들고 싸우는 것보다 세 곱 내지 열 곱으로 버거운 전쟁이라고 그는 절망했습니다. 사는 것과 죽는 것이 완전한 흑백의 세계였지만 그녀는 ‘만일 현재와 같은 시대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모두 아이를 낳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야만스러운 사람들만 아이를 낳게 된다면 어찌 되겠어요? 그렇게 된다면 누가 이 세상에서 정의를 다시 실현할 수 있겠어요?’라고 구원을 갈망했습니다.

하지만 그래버가 엘리자베스를 사랑할 때 그녀가 말했던 ‘정의’는 아니었습니다. 그 보다는 ‘사치’에 가까웠습니다. 전선에서 2년 동안 반합으로 음식을 먹으면서도 무사히 먹을 수 있을까 늘 노심초사했습니다. 이와는 달리 휴가 나온 그가 술을 마시기 위해 크리스털잔과 백포도주 잔을 고르는 것은 사치스럽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전선에서 탈출하고자 하려는 그의 사치는 ‘사치 그 이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평화이고 안전이고 기쁨이고 축제’였습니다. 그가 엘리자베스에게 키스하면서 기뻐했던 것은 그녀가 곧 그의 ‘제 2의 자신’이라는 느낌 때문이었습니다. 즉 한계도 없고 과거도 없고, 어떠한 죄의 그림자도 없는 완전한 현재이고 생명이었습니다.

휴가를 나온 그는 죄의 그림자 때문에 잿빛 고독에 빠졌습니다. 전쟁 중인 조국을 내버려 둘 수 없다면서 스스로를 설득했지만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변명에 불과했습니다. 더 나쁜 일을 방지하기 위해 함께 싸운 다는 변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잿빛 고독이 소리도 색깔도 없이 스며들면서 자신의 색깔을 잃어버렸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처참한 배신이었습니다. 그의 싸움은 살인과 거짓과 불의와 폭력과 한 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전의 선생님이었던 폴만에게 기만당한 자신의 처지를 고백하면서 진실을 알고자 했습니다. 이미 패한 전쟁인데도 불구하고 전쟁을 무의미하게 계속하려고 하는 것은 전쟁의 당사자들이 권력을 연장하기 위한 것이며 이로 인해 많은 불행이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고 했습니다. 한편으로 노예 제도와 살인, 집단 수용소, 대량 학살과 비인도적 행위를 중단시키기 위해서는 전쟁에 패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불합리한 상황에서 그가 전선으로 다시 돌아가야 전투에 가담한다면 도대체 어디까지가 공범자가 되는 것입니까? 라고 털어놓았습니다. 만약 그가 전선으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한다면 교수형이나 총살을 당할 것입니다. 또한 자기 목숨뿐만 아니라 자신의 부모에게도 보복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선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정작 아무런 방어도 하지 않는다면 자살행위가 되고 말 것입니다.

폴먼은 그가 공범자라는 굴레에 대해 ‘죄악’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서 죄악이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서도 끝나는지 아무도 몰라. 죄악은 어디서든 시작되지만 어디서든 끝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거야. 아니면 정확히 정반대일 수도 있고. 그러나 공범 관계라는 것, 누가 그것을 알겠는가? 오직 하느님이 알 뿐이지,라고 했습니다. 하느님에 대해 폴만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 살인하지 마라는 말이 있는가 하면 카이저의 것은 카이저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라는 말도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만 있으면 영혼의 함석장이는 어떤 물건이라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사랑할 때와 죽을 때』을 읽으면서 그래버가 고민했던 양심의 문제는 반성이 지나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전선이라는 엄중한 현실에서 과거를 회상하면서 무기력하다는 것은 용기가 없어 보였습니다. 용기는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을 때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쟁에서 공범자, 더 나이가 살인자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하이에나 같은 동물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이에나는 언제나 하이에나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다양한 변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다양한 변모에 대해 ‘탄력적인 양심’이라고 말했습니다. 탄력적인 양심에 따라 그는 낮 동안에는 병사이더라도 밤에는 병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밤에는 그렇게 되어 버린 존재가 아니라, 원래 그래야 하는 존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형의 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8
헨릭 입센 지음, 안미란 옮김 / 민음사 / 201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성은 태어나는 것일까요, 만들어지는 것일까요?『제2의 성』을 쓴 시몬느 드 보부아르에 따르면 여성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녀는 남성을 제1의 성, 여성을 제2의 성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여자는 남자와의 관계에서 한정되고 달라지지만, 남자는 여자에 대해 그렇지가 않다. 여자는 우발적인 존재다. 여자는 본질적인 것에 대해 비본질적이다. 남자는 주체다. 남자는 절대이다. 그러나 여자는 타자이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여성은 남자에 의해 만들어지는 ‘자궁이며 난소’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성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헨리크 입센의『인형의 집』을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 ‘종달새’로 불리는 노라가 나옵니다. 세 아이를 둔 엄마인 노라를 그녀의 남편인 헬메르는 작고 귀여운 종달새라고 불렀습니다. 남편을 위해 즐겁게 노래해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낭비꾼 새’라고 했습니다. 돈을 최고로 좋아하는 새이기 때문입니다. 첫 월급을 받으려면 아직 네 달이 남아 있는데 노라는 아무 걱정없이 크리스마스 주간에 돈을 다 써버렸습니다. 남편인 헬메르가 보기에는 낭비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앞으로 어떤 상황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돈을 낭비하는 것은 경박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헬메르는 노라의 낭비벽을 보면서 ‘여자는 어쩔 수가 없다’라고 실망했습니다. 도무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돈을 손에 넣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면서도 돈이 생기면 그 돈은 바로 노라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습니다. 그 보다는 노라가 돈을 잘 가지고 있고 그 돈으로 정말로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의 자세였습니다. 그리고 남에게 돈을 빌려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이 노라의 생각인 반면에 헬메르는 절대로 안 된다고 했습니다. 빌린 돈, 빚을 가지고 살림을 하면 뭔가 자유롭지 못하고 어딘가 보기 안 좋은 일이 생기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소설에서 안 좋은 일은 죽을병에 걸린 남편을 위해 노라가 가장 큰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변호사인 크로그스타드에게 돈을 빌리고야 말았습니다. 빌린 돈으로 그녀는 남편과 함께 이탈리아로 여행을 갔습니다. 돌아올 때는 그녀의 말대로 남편은 싱싱한 물고기가 되었습니다. 만약 그녀가 크로그스타드에게 돈을 빌리지 않았다면 남편의 생명은 어떻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아마도 남편의 생명을 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이것을 자랑스럽고 기쁘게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남편에게는 속 시원하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남편에게 돈을 빌려도 괜찮은지 물어봤지만 그는 화를 냈으며 그녀의 경박을 다스리는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노라는 사랑 때문에 남편을 구했습니다. 비록 여자가 남편의 동의 없이 돈을 빌린다는 것은 사회적인 잣대로 보면 잘못이었습니다. 물론 남편의 생명을 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닙니다. 아내라면 당연히 그럴 것입니다. 다만 남편 모르게 하는 일이 어리석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크로그스타드에게 돈을 빌리기 위해 이미 죽은 아버지의 서명을 위조했습니다. 결국에는 이것이 법의 심판을 받아야 했지만 노라는 그것까지 신경을 쓸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법이라는 것이 사건의 과정을 묻지 않는 다고 하자 노라는 ‘아주 나쁜 법’이라고 심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내라면 남편의 생명을 구할 권리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법을 자세히 알지는 못해요. 하지만 제가 아는 건, 이런 것들을 어디에선가는 허용해야 한다는 거예요’

[인형의 집]에는 노라가 말한 아주 나쁜 법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헬메르의 위선입니다. 그는 도덕적 환자였습니다. 도덕적인 타락을 파헤치고 거기 관계된 사람들에게서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지위를 얻어내려고 했습니다. 노라의 비밀을 밝혀지자 그는 경박한 여자 때문에 자신의 행복과 미래가 모두 망가졌다고 증오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이 세상 밖으로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사건을 축소하고 싶었습니다. 가령, 노라가 모든 책임을 지고 집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그는 계속 당신은 집에 있어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예전과 똑같아야 했습니다. 자신의 체면을 지키기 위한 거짓 행복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크리그스타드가 차용증서를 돌려주면서 그녀를 용서하자 그는 ‘나는 살았어! 나는 살았어!’라고 기뻐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이 사건은 헬메르에게 끔찍했습니다. 도덕적인 불명예를 용서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노라가 보호했다는 것이 정말이지 꿈에 지나지 않았으면 했습니다. 모든 사건이 아무 탈 없이 끝나자 그는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용서한다고 했습니다. 노라가 아내의 도리 그대로 나를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통찰력이 부족해서 수단에 대해 옳은 판단을 내리지 못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자신에게 기대면 노라에게 충고를 해 주고 여자인 노라의 무력함이 그녀를 두 배로 매력적으로 만들지 않는다면, 그는 남편이 되어서는 안 될 거라고 했습니다. 그에게 마음을 열기만 하면 그는 노라의 의지와 양심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노라는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남편의 ‘인형 아내’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자신을 용서하는 것이 남편에게는 달콤하고 만족스러운 일이며 자신을 두 배로 소유하는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노라에게 그것은 두 배의 고통이었습니다. 그저 놀이방에 지나지 않은 집에서 그녀는 남편에게 재주를 두 배로 부려야 했습니다. 전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인형의 집에서는 단지 재미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노라는 아무것도 할 수도 없고 될 수도 없다는 불행에 대해 스스로 책임지기로 했습니다. 더 이상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 노라에게 아내라는 이름으로 강요되는 의무라든지 종교라든지 도덕적인 감각이라든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두 번 다시 인형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결혼을 위한 놀랄만한 기적이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녀의 한 다스 -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문화인류학, 개정판 지식여행자 7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현진 옮김, 이현우 감수 / 마음산책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주제 사라마구의『수도원의 비망록』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아무도 그런 말은 한 적은 없다네. 성경의 그 어디에도 그런 말은 적혀 있지 않아. 다만 하느님은 왼손이 없는 것이 아닐까, 하고 한 번 생각해 보았던 것뿐일세. 하느님은 항상 오른손을 쓰시고 오른편에만 앉아하시니까 말이야.(…)이는 누구도 하느님의 왼편에는 앉아 있지 않아. 그곳은 텅 비어 있기 때문이자. 그러니까 하느님은 왼손잡이라고 할 수 밖에.(…)하느님에게는 왼손이 없어.”

정말로 하느님은 왼손이 없는 걸까? 그러나 굳이 하느님이 아니더라도 아주 가까이 우리들의 왼손을 바라보면 황량함을 느낄 수 있다. 왼손의 처지가 곤란하다. 오른손잡이에게 왼손의 쓸모는 매우 미미하다는 이유만으로 쉽게 주눅 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비록 우리 눈에 쉽게 발견되지는 않지만 왼손은 분명 우리 몸의 일부이다. 좋든 싫든 오른손은 왼손과 한 평생을 같이해야 한다. 만약 왼손이 없다고 상상한다면 얼마나 위험한가를 금방 알 수 있다. 스스로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퍼트리면서 얼마든지 악마(?)소리를 들어야만 한다.

돌이켜 보면 우리 삶에 있어 악마 혹은 악녀는 자유롭지 못하다. 사람들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피할 수 없다. 이러한 이유는 요네하라 마리가『마녀의 한 다스』에서 지적 했듯 악녀는 ‘마음가짐이 나쁜 여자가 아니라 용모가 미운 여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악녀는 미녀에 에게 질투가 심하여 결국 ‘달갑지 않은 친절로 전화(轉化)’되었다고 했다. 악녀가 좋다고 따라다니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모두가 도망가기에 급급하다.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고통 받고 있는 악녀의 편에 선다는 저자의 표현대로 ‘이단’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감수해야 한다. 이단을 숫자로 나타내보면 이 책의 제목과 같은 ‘마녀 한 다스’가 된다.

보통 한 다스라고 한다면 ‘12’개가 된다. 12라는 숫자가 물건의 단위를 넘어 생활 속에서 상징하는 것은 아주 긍정적이며 밝은 색깔을 나타낸다. 12는 행운의 숫자이며 예수가 태어난 것도 12월이다. 이와는 달리 마녀의 한 다스라고 한다면 ‘13’개가 된다. 13이라는 숫자는 어둠 그 자체이다. 교수대의 층계가 13개가 되고 예수를 배신한 사람은 13번째 제자였다. 그런데 서양과 달리 동양에서는 좋은 숫자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 13은 좋은 숫자일까? 나쁜 숫자일까? 또 하나 질문을 던지면 ‘좋은 혹은 나쁜’ 이라는 절대적 가치는 있는 것일까?

요네하라 마리는『마녀의 한 다스』라는 에세이를 통해서 ‘절대’라는 묵직한 고민을 소박하게 풀어내고 있다. 저자가 동시통역사라는 것은 우연의 일치만은 아니다. 동시통역사여서 이 나라 저 나라를 몸소 겪은 것이 저자에게는 아주 큰 힘이 되었다. 이러한 큰 힘 덕분에 ‘다른 사람의 말을 다른 사람의 귀로 듣고 다른 사람의 입이 되어 전하는 즐거움’ 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즐거움이 웃음으로 끝나지 않고 삶에 대한 새로운 시각, 나아가 우리의 마음에 대해 뭔가를 되새길 수 있게 했다. 그중에서도 어느 문화권에서 ‘절대적’으로 여겨졌던 것이 다른 문화의 가치관에 비추는 순간 ‘맥없이’ 무너져 간다는 것을 속속들이 들춰냈다. 결국 저자의 스승이었던 나카자와 선생이 ‘절대 절대 외치지만, 인간사에 절대라는 것은 절대로 없어’라는 기묘한 명언은 터무니없고 허황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 책의 ‘마녀 한 다스’라는 제목은 심상치 않다. 동시통역사인 저자 자신이 곧 마녀 한 다스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마녀라고 해서 지금까지의 정의를 공격하는 어떠한 폭력이거나 위협이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전체주의적 사고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전체주의적 사고를 싫어하는 이유는 세상과 소통하기를 단절하기 때문이다. 단절은 곧 이성과 감성의 틀에 갇히는 것이다. 저자에게는 이러한 우물 안 개구리는 ‘나쁜 마녀’일수 밖에 없다. 하지만 저자는 세상과 단절 없이 자유자재로 글을 쓰고 있다.

세상의 부조리를 바라보는 저자의 생각은「천동설의 맹점」에서 파악할 수 있다. 한마디로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라’는 것이다. 천동설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세상이 자기와 자신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천동설이 언제나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생명체의 자기보존 본능은 오랜 자연의 법칙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인 차원에서 천동설의 맹점은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있다. 그만큼 상대방의 입장에서라는 타인에 대한 배려는 매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이러한 한계에 대해 저자는 ‘차라리 상대방이 스스로 말하게 한 후 거기에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는 자세를 취하는 편이 더욱 효과적’이라고 조언해주고 있다.

그리고 인생의 매 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비극이 희극으로 바뀌는 순간」에서 들려주고 있다. 살다보면 뜻밖의 사태로 인해 불안해지기 마련이다. 이럴 때 저자는 ‘나무를 보고 숲을 보라’고 당부했다. 궁지에 몰릴수록 마음의 여유를 잃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삶의 공허함을 바꾸기만 해도 행복은 얼마든지 회복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제3자의 눈’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단순한 방법은 정신 건강에 아주 좋았다. 병든 가슴을 치유하기 위해 이런저런 방법을 사용한다고 하지만 제3자의 눈은 돈을 한 푼도 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대상과의 거리를 코앞에서 한순간에 휙 늘이는 방법, 바로 그 낙차로 인해 생기는 웃음’이 진정한 행복임을 일깨워 주고 있다. 단지 불편을 참고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불편을 즐긴다는 발상은 참으로 재미있고 신선했다.

이렇듯 이문화(異文化)에 대한 애정과 사려깊은 눈길이 담뿍 담긴 이 책은 저자 말대로 ‘즐거움의 발견이요, 패턴화된 뇌세포에 대한 자극’이었다. 서로 다른 두 언어의 문화적 경계를 넘나들며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저널리스트 고종석의 표현대로 ‘지루하지 않다’는 것이 하나의 매력이다. 또 하나의 매력은 저자가 동시통역사를 하면서 깨달은 삶의 진실이 지금까지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저자의 새로운 눈을 통해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며 앞서 말했듯이 ‘절대 절대는 없다’는 것이다.

일찍이 생텍쥐페리는『어린왕자』에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라고 했다. 각각의 얼굴만큼이나 다양한 각양각색의 마음을 아주 짧은 순간에도 마음속에는 수만 가지의 생각이 떠오르는데 그 바람과 같은 머물게 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그런데『마녀의 한 다스』를 읽어보면 ‘세상에서 가장 큰 비극이 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그것은「맹꽁이들」에서 나오는데 ‘좁은 시야, 오만한 강요, 무지하고 자만에 가득 찬 독선, 다른 문화나 역사적 배경에 대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결여된 상상력을 가진 소유자’들이다. 이 책을 읽으면 우리 자신이 ‘맹꽁이들’과 같은 존재라는 것은 뜨끔하다. 그 순간 우리 삶이 비극에서 희극으로 바뀌는 것은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3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201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 몸짓을 불멸에 대한 욕망의 몸짓이라 명명하자. 큰 불멸을 갈망하는 베티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이다. ‘나는 현재와 더불어, 현재의 온갖 근심과 더불어 사라지길 거부한다. 나는 나 자신을 초극하여 역사의 일부가 되고자 한다. 역사는 영원한 기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작은 불멸을 희망할 뿐이지만, 로라 역시 같은 것을 원한다. 자기 자신을 초극하고 자신이 겪은 불행한 순간을 초극하여, 자신을 알았던 모든 이들의 기억 속에 머무르기 위해 뭔가를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사랑이란 매우 매우 매우 큰 감정이다. 거짓 사랑은 작은 감정이며, 진정한 사랑은 매우 큰 감정이다. 하지만 절대라는 관점에서 모든 사랑이 다 작지 않은가? 물론이다. 바로 그래서 사랑은 자신의 진실을 입증하기 위해 합리성에서 벗어나고자 하고, 어떤 절제도 무시하려고 하며, 사실성에서 벗어나 ‘열정의 생동하는 광란으로’ 자신을 변모시키고자 한다. 달리 말하면 광적이 되고자 한다.
- 밀란 쿤데라의『불멸』중에서

 


  
 
사랑을 3단계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사랑의 1단계는 사랑이라는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가장 행복할 때입니다. 그러다 갑자기 이런저런 간섭으로 사랑이 불안해지는 것이 사랑의 2단계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랑에 대한 전망이 더 이상 없고 쉽게 피로를 느끼는 것이 사랑의 3단계입니다. 만약 사랑 때문에 7킬로그램을 잃어버린다면 아마도 사랑의 2단계에 놓여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머지않아 사랑의 3단계에서는 덧없이 흩어지거나 혹은 자유롭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밀란 쿤데라는『불멸』에서 이런 사랑의 2단계 혹은 3단계를 ‘사랑 저 너머’라고 불렀습니다. 사랑 저 너머는 곧 사랑의 다른 쪽이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중요시하는 것은 사랑하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가 잘되어야 했습니다. 또한 누군가를 싫어하면 그는 못 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1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사랑은 그냥 사랑일 뿐이야. 사랑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에 있었습니다. 마치 ‘새장 속 새 인양 나의 가슴 속에서 파닥거리는 날개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사랑이 사랑 저 너머에 있다면 밀란 쿤데라는 사랑이 소멸한다고 했습니다. 사랑보다 삶을 선택해서 그렇습니다. 반대로 사랑을 선택한다고 한다면 즉 사랑 저 너머에 있지 않다면 이런 사랑은 불멸한다고 했습니다. 불멸! 이 소설에서 작가는 불멸 앞에서 사람들은 모두 평등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세 가지 불멸을 말했습니다. 첫 번째는 작은 불멸입니다. 생전에 알고 지낸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큰 불멸입니다. 생전에 몰랐던 이들의 머릿속에도 남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우스꽝스런 불멸입니다. 한 사람의 생애를 요약하는 한 우화로 탈바꿈하는 것입니다.


작가는 우스꽝스러운 불멸을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해 괴테와 베티나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스물 여섯 살의 베티나가 예순 살의 괴테를 사랑하는 것은 모호했습니다. 작가 말대로 사랑이 모호하면 모호할수록 흥분이 더욱 강렬해졌습니다. 그녀가 그의 무릎 위에 앉으면서 희열을 느낄 때 괴테 또한 그녀를 어린 아이와 같은 자연스러운 솔직함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단 둘이 만나적은 불과 서너 번 정도였습니다. 대신에 그들은 편지를 주고 받았습니다. 베티나는 어느 편지에서 “나에겐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리라는 굳고 견고한 의지가 있답니다”라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베티나는 괴테를 사랑했을까요? 우리가 알고 있는 괴테는 역사 속 인간 이었습니다. 괴테는 유럽의 한 가운데 있는, 기막힌 중심점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양 극단을 두려워하여 우물쭈물 하는 소심한 중점이 아니었습니다. 그 보다는 양 극단을 유럽이 다시 경험하지 못할 기막힌 균형 상태로 유지하는 견고한 중점이었습니다. 베티나가 괴테를 사랑했던 것은 견고한 중점에 어울리는 견고한 의지 때문이었습니다. 그녀에게 사랑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불멸이었습니다. 그녀의 삶은 사랑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불멸을 위한 투쟁이었습니다. 비록 그녀가 괴테로부터 ‘쇠파리’라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괴테의 젊은 여인이라는 영예를 차지했습니다.

이 소설에서 베티나의 불멸의 몸짓은 두 명의 여자 즉 아녜스와 로라에게 되살아났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아녜스와 로라의 몸짓은 베티나에 대한 불가사의한 향수를 일깨워 주었습니다. 자아의 유일성을 가꾸는 데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덧셈 법과 뺄셈 법입니다. 아녜스는 자신의 순수한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 자신의 자아에서 외적인 것과 빌려온 것을 모두 추려냈습니다. 이는 뺄셈이며 자아가 0이 되어 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반면에 로라의 그 반대입니다. 자신의 자아를 좀 더 잘 보이게 하고, 좀 더 파악하기 쉽게 하고, 좀 더 두텁게 하기 위해서 그녀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덧붙여 그것에 자기를 동화했습니다.

가령, 사랑에 있어 아녜스는 ‘보답으로서의 사랑’이었습니다. 모방할 수 없고 교환할 수 없는 그 사랑은 사랑을 심은 자, 즉 사랑의 대상을 향한 것이기에 변신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녜스의 사랑을 달리 ‘관계-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로라는 ‘진정한 사랑’을 갈망했습니다. 사랑을 위해서 온갖 것으로 변신하면서 애인을 찾습니다. 어떤 천상의 손길이 인간의 영혼에 피우는 불꽃, 사랑하는 이가 손에 들고 온갖 것으로 변신하면서 애인을 찾는 횃불 같은 것이었습니다. 로라의 사랑을 달리 ‘감정-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멸』을 읽으면서우스꽝스런 불멸을 생각해봤습니다. 우스꽝스럽다는 것은  사랑이 '사랑 저 너머'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삶을 운명적으로 바꾸는 뭔가 본질적이라고 한다면 사랑 저 너머에 있는 사랑은 에피소드와 같습니다. 인과적 잠재성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괴테에게 베티나와의 만남은 양적으로 미미했지만 개념의 상대성에 있어서는 결국에는 베티나는 괴테의 삶의 일부로 통합되어 승리했습니다. 어쩌면 사랑 저 너머에 있는 사랑은 침상의 보물이 아니라 사랑의 보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불멸하기 위해서는  사랑의 1단계 즉 '사랑은 사랑일 뿐이야' 라고 여겨야 가능했습니다. 사랑의 개념에 있어서 사랑은 '사랑 저 너머'에 있으면 불멸할 수 없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녀귀신 - 조선시대 여인의 한과 복수 키워드 한국문화 6
최기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설의 고향>에서 울려 퍼졌던 귀곡성(鬼哭聲)은 여전히 온 몸을 전율하게 한다. 한국인에게 하얀 소복을 입은 귀신은 오랜 트라우마다. 그래서 공포물이라는 장르에서『장화홍련전』 같은 버전이 어김없이 귀신으로 들락날락하고 있다. 지금은 너무나 지나치게 잔인할 정도로 육체적 공격을 감행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최기숙의 『처녀귀신』은 ‘정서적 공격’을 유지하고 있다. 이 책의 부제에 따르면 그것은 ‘조선시대 여인의 한과 복수’였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귀신에 대한 양가적 감정을 확인할 수 있다. 귀신은 ‘경이원지(敬而遠之)’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좀 더 말하자면 ‘형상으로서의 귀신은 부정되었지만, 원리와 존재로서의 귀신은 인정되었던 것’이다. 일찍이 주희는『중용』에서 귀(鬼)와 신(神)을 구별했다. 즉, 귀의 속성은 음(陰)으로서 돌아가고 물러나며 소멸하고 죽는 것이다. 또한 가을과 겨울처럼 머물러 있고 조용하며 안으로 수렴되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신의 속성은 양(陽)으로서 흩어지고 펼쳐지고 쉬고 생겨나는 것이다. 또한 봄과 여름처럼 생동적이고 표현적이며 움직이고 밖으로 발산하는 성질을 지녔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리학적 개념에서 귀신은 음양의 두 기(氣)를 바탕으로 천지만물을 변화시키는 이(理)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귀신을 인간의 사후적 존재로 여겼다. 무엇보다도 누구나 죽어서 귀신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귀신은 이승에 미련을 가진 자를 말하며 한이 깊어서 도저히 현실을 떠날 수 없는 자만이 귀신이 되는 것이었다. 즉, ‘귀신은 생과 사의 경계에 있다. 그(녀)는 자연사할 권리를 박탈당하고 현실에서 추방된 존재인 동시에, 죽음의 세계에도 안주할 수 없는 방랑자다. 이승에서의 생명이 멈춘 뒤에도 귀신으로서의 생을 이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연장되는 삶이란, 차라리 저주받은 삶’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조선시대 유교문화에서 귀신이 등장한다는 것은 반사회적이다. 삶과 죽음은 완전히 다른 세계이며 서로 넘나들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귀신은 전통적인 가치관을 전복한다. 누구라도 귀신이 되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귀신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냉정하고 잔혹한 현실이 만들어낸 가학적 증거물’이기 때문이다. 귀신, 특히 처녀귀신이 비운의 주인공이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귀신의 대부분이 순탄한 죽음을 맞지 못한 원귀(寃鬼)다. 그리고 원귀의 대부분이 처녀귀신인 것은 ‘남신여귀(男神女鬼)’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남자 귀신인 남신은 ‘죽어서도 존경을 받으며 현실을 통제하는 파수꾼’이었다. 반면에 여자 귀신인 여귀는 ‘구천을 떠도는 한(恨) 많은 난민’이었다.

일찍이 『여성, 문화,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남성은 문화, 여성은 자연’이라고 했다. 남성이 사회적으로 정교화된 제도 내에서 거둔 성취에 의해 정의되는 한 남성은 남성이 만든 인간 경험체계의 아주 뛰어난 참여자다. 그래서 남성의 세계는 문화라는 것이다. 반면 여성은 공식적인 사회질서 체계와는 무관한 듯 보이는 삶을 영위한다. 그녀의 지위는 생애 주기에서의 위치, 생물학적 기능 그리고 특히 남성에 대한 성적인 또는 생물학적인 관계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이다.

이 책을 보면 ‘처녀귀신’이 될 수밖에 없는 조선시대 여성의 불행한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의 저자는 귀신이 ‘당대 사회의 건강성을 반영하는 지표’라고 했다. 귀신은 단순히 사신(死神)이 아니었다. 그 보다는 ‘자신의 죽음을 믿을 수 없어 현실로 찾아온 상담 신청자’라고 했다. 그래서 귀신이야기가 타인에게는 공포물이지만 당사자의 관점에서는 비극이 되는 것은 이러한 까닭이었다. 귀신이라는 공포가 불러일으키는 두려움의 이면에는 사회적 모순이라는 불편한 진실이 숨겨져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귀신은 이것을 온 몸으로 고백하면서 동시에 비판하고 있으며 우리는 이점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