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의 한 다스 -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문화인류학, 개정판 지식여행자 7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현진 옮김, 이현우 감수 / 마음산책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주제 사라마구의『수도원의 비망록』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아무도 그런 말은 한 적은 없다네. 성경의 그 어디에도 그런 말은 적혀 있지 않아. 다만 하느님은 왼손이 없는 것이 아닐까, 하고 한 번 생각해 보았던 것뿐일세. 하느님은 항상 오른손을 쓰시고 오른편에만 앉아하시니까 말이야.(…)이는 누구도 하느님의 왼편에는 앉아 있지 않아. 그곳은 텅 비어 있기 때문이자. 그러니까 하느님은 왼손잡이라고 할 수 밖에.(…)하느님에게는 왼손이 없어.”

정말로 하느님은 왼손이 없는 걸까? 그러나 굳이 하느님이 아니더라도 아주 가까이 우리들의 왼손을 바라보면 황량함을 느낄 수 있다. 왼손의 처지가 곤란하다. 오른손잡이에게 왼손의 쓸모는 매우 미미하다는 이유만으로 쉽게 주눅 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비록 우리 눈에 쉽게 발견되지는 않지만 왼손은 분명 우리 몸의 일부이다. 좋든 싫든 오른손은 왼손과 한 평생을 같이해야 한다. 만약 왼손이 없다고 상상한다면 얼마나 위험한가를 금방 알 수 있다. 스스로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퍼트리면서 얼마든지 악마(?)소리를 들어야만 한다.

돌이켜 보면 우리 삶에 있어 악마 혹은 악녀는 자유롭지 못하다. 사람들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피할 수 없다. 이러한 이유는 요네하라 마리가『마녀의 한 다스』에서 지적 했듯 악녀는 ‘마음가짐이 나쁜 여자가 아니라 용모가 미운 여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악녀는 미녀에 에게 질투가 심하여 결국 ‘달갑지 않은 친절로 전화(轉化)’되었다고 했다. 악녀가 좋다고 따라다니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모두가 도망가기에 급급하다.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고통 받고 있는 악녀의 편에 선다는 저자의 표현대로 ‘이단’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감수해야 한다. 이단을 숫자로 나타내보면 이 책의 제목과 같은 ‘마녀 한 다스’가 된다.

보통 한 다스라고 한다면 ‘12’개가 된다. 12라는 숫자가 물건의 단위를 넘어 생활 속에서 상징하는 것은 아주 긍정적이며 밝은 색깔을 나타낸다. 12는 행운의 숫자이며 예수가 태어난 것도 12월이다. 이와는 달리 마녀의 한 다스라고 한다면 ‘13’개가 된다. 13이라는 숫자는 어둠 그 자체이다. 교수대의 층계가 13개가 되고 예수를 배신한 사람은 13번째 제자였다. 그런데 서양과 달리 동양에서는 좋은 숫자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 13은 좋은 숫자일까? 나쁜 숫자일까? 또 하나 질문을 던지면 ‘좋은 혹은 나쁜’ 이라는 절대적 가치는 있는 것일까?

요네하라 마리는『마녀의 한 다스』라는 에세이를 통해서 ‘절대’라는 묵직한 고민을 소박하게 풀어내고 있다. 저자가 동시통역사라는 것은 우연의 일치만은 아니다. 동시통역사여서 이 나라 저 나라를 몸소 겪은 것이 저자에게는 아주 큰 힘이 되었다. 이러한 큰 힘 덕분에 ‘다른 사람의 말을 다른 사람의 귀로 듣고 다른 사람의 입이 되어 전하는 즐거움’ 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즐거움이 웃음으로 끝나지 않고 삶에 대한 새로운 시각, 나아가 우리의 마음에 대해 뭔가를 되새길 수 있게 했다. 그중에서도 어느 문화권에서 ‘절대적’으로 여겨졌던 것이 다른 문화의 가치관에 비추는 순간 ‘맥없이’ 무너져 간다는 것을 속속들이 들춰냈다. 결국 저자의 스승이었던 나카자와 선생이 ‘절대 절대 외치지만, 인간사에 절대라는 것은 절대로 없어’라는 기묘한 명언은 터무니없고 허황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 책의 ‘마녀 한 다스’라는 제목은 심상치 않다. 동시통역사인 저자 자신이 곧 마녀 한 다스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마녀라고 해서 지금까지의 정의를 공격하는 어떠한 폭력이거나 위협이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전체주의적 사고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전체주의적 사고를 싫어하는 이유는 세상과 소통하기를 단절하기 때문이다. 단절은 곧 이성과 감성의 틀에 갇히는 것이다. 저자에게는 이러한 우물 안 개구리는 ‘나쁜 마녀’일수 밖에 없다. 하지만 저자는 세상과 단절 없이 자유자재로 글을 쓰고 있다.

세상의 부조리를 바라보는 저자의 생각은「천동설의 맹점」에서 파악할 수 있다. 한마디로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라’는 것이다. 천동설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세상이 자기와 자신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천동설이 언제나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생명체의 자기보존 본능은 오랜 자연의 법칙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인 차원에서 천동설의 맹점은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있다. 그만큼 상대방의 입장에서라는 타인에 대한 배려는 매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이러한 한계에 대해 저자는 ‘차라리 상대방이 스스로 말하게 한 후 거기에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는 자세를 취하는 편이 더욱 효과적’이라고 조언해주고 있다.

그리고 인생의 매 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비극이 희극으로 바뀌는 순간」에서 들려주고 있다. 살다보면 뜻밖의 사태로 인해 불안해지기 마련이다. 이럴 때 저자는 ‘나무를 보고 숲을 보라’고 당부했다. 궁지에 몰릴수록 마음의 여유를 잃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삶의 공허함을 바꾸기만 해도 행복은 얼마든지 회복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제3자의 눈’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단순한 방법은 정신 건강에 아주 좋았다. 병든 가슴을 치유하기 위해 이런저런 방법을 사용한다고 하지만 제3자의 눈은 돈을 한 푼도 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대상과의 거리를 코앞에서 한순간에 휙 늘이는 방법, 바로 그 낙차로 인해 생기는 웃음’이 진정한 행복임을 일깨워 주고 있다. 단지 불편을 참고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불편을 즐긴다는 발상은 참으로 재미있고 신선했다.

이렇듯 이문화(異文化)에 대한 애정과 사려깊은 눈길이 담뿍 담긴 이 책은 저자 말대로 ‘즐거움의 발견이요, 패턴화된 뇌세포에 대한 자극’이었다. 서로 다른 두 언어의 문화적 경계를 넘나들며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저널리스트 고종석의 표현대로 ‘지루하지 않다’는 것이 하나의 매력이다. 또 하나의 매력은 저자가 동시통역사를 하면서 깨달은 삶의 진실이 지금까지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저자의 새로운 눈을 통해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며 앞서 말했듯이 ‘절대 절대는 없다’는 것이다.

일찍이 생텍쥐페리는『어린왕자』에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라고 했다. 각각의 얼굴만큼이나 다양한 각양각색의 마음을 아주 짧은 순간에도 마음속에는 수만 가지의 생각이 떠오르는데 그 바람과 같은 머물게 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그런데『마녀의 한 다스』를 읽어보면 ‘세상에서 가장 큰 비극이 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그것은「맹꽁이들」에서 나오는데 ‘좁은 시야, 오만한 강요, 무지하고 자만에 가득 찬 독선, 다른 문화나 역사적 배경에 대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결여된 상상력을 가진 소유자’들이다. 이 책을 읽으면 우리 자신이 ‘맹꽁이들’과 같은 존재라는 것은 뜨끔하다. 그 순간 우리 삶이 비극에서 희극으로 바뀌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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