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할 때와 죽을 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6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지음, 장희창 옮김 / 민음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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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도 같은 수년간의 혹독한 시련 이후 술은 더 이상 술이 아니고, 은은 더 이상 음악이 아니고, 엘리자베스도 엘리자베스가 아니었다. 모든 것은 그 이상의 것이었으며, 저 다른 삶의 상징이었다. 죽음도 파괴도 없는 삶, 이미 신화가 되어 버려 하나의 바랄 수 없는 꿈이 되어 버린 삶 그 자체를 위한 상징이었다(…) 각자 자신의 운명을 지고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을 때는 판단을 내리고 용감해지는 것이 쉽다. 그러나 무언가를 가지게 되면 세상을 달라 보인다. 더 쉬워질 수도 더 어려워질 수도 있으며 때로는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 용감해지는 것은 언제든 가능했지만, 이제 그것은 다른 모습이고 전혀 다른 이름으로 나나타며 또 바로 거기서 출발해야 한다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사랑할 때와 죽을 때』 중에서

 

 

 

사람에게 전쟁은 지옥입니다. 그러나 구더기에게는 천국입니다. 전쟁의 희생양이 되어버린 사람들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닙니다. 점잖게 말하면 시체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구더기의 고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구더기는 만찬을 마련해준 전쟁의 당사자들은 마음씨 좋은 신으로 기억할 것입니다. 이런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아기를 낳고 싶다고 한다면 당신은 뭐라고 대답할까요? 당신의 아기가 태어날 세상이 얼마나 지옥 같고 비참할 지 생각한다면 망설이지 않을 수 없겠지요.

그런데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사랑할 때와 죽을 때』에서 엘리자베스는 아이를 낳고자 했습니다. 2년 만에 전선에서 휴가를 나온 그녀의 남편 그래버가 평화로운 시대에 가능하겠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희망에 불과하다고 반대했습니다. 전후방이 따로 없는 악몽 속에서 가족의 안전과 생명을 지키는 것은 전선에서 총을 들고 싸우는 것보다 세 곱 내지 열 곱으로 버거운 전쟁이라고 그는 절망했습니다. 사는 것과 죽는 것이 완전한 흑백의 세계였지만 그녀는 ‘만일 현재와 같은 시대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모두 아이를 낳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야만스러운 사람들만 아이를 낳게 된다면 어찌 되겠어요? 그렇게 된다면 누가 이 세상에서 정의를 다시 실현할 수 있겠어요?’라고 구원을 갈망했습니다.

하지만 그래버가 엘리자베스를 사랑할 때 그녀가 말했던 ‘정의’는 아니었습니다. 그 보다는 ‘사치’에 가까웠습니다. 전선에서 2년 동안 반합으로 음식을 먹으면서도 무사히 먹을 수 있을까 늘 노심초사했습니다. 이와는 달리 휴가 나온 그가 술을 마시기 위해 크리스털잔과 백포도주 잔을 고르는 것은 사치스럽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전선에서 탈출하고자 하려는 그의 사치는 ‘사치 그 이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평화이고 안전이고 기쁨이고 축제’였습니다. 그가 엘리자베스에게 키스하면서 기뻐했던 것은 그녀가 곧 그의 ‘제 2의 자신’이라는 느낌 때문이었습니다. 즉 한계도 없고 과거도 없고, 어떠한 죄의 그림자도 없는 완전한 현재이고 생명이었습니다.

휴가를 나온 그는 죄의 그림자 때문에 잿빛 고독에 빠졌습니다. 전쟁 중인 조국을 내버려 둘 수 없다면서 스스로를 설득했지만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변명에 불과했습니다. 더 나쁜 일을 방지하기 위해 함께 싸운 다는 변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잿빛 고독이 소리도 색깔도 없이 스며들면서 자신의 색깔을 잃어버렸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처참한 배신이었습니다. 그의 싸움은 살인과 거짓과 불의와 폭력과 한 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전의 선생님이었던 폴만에게 기만당한 자신의 처지를 고백하면서 진실을 알고자 했습니다. 이미 패한 전쟁인데도 불구하고 전쟁을 무의미하게 계속하려고 하는 것은 전쟁의 당사자들이 권력을 연장하기 위한 것이며 이로 인해 많은 불행이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고 했습니다. 한편으로 노예 제도와 살인, 집단 수용소, 대량 학살과 비인도적 행위를 중단시키기 위해서는 전쟁에 패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불합리한 상황에서 그가 전선으로 다시 돌아가야 전투에 가담한다면 도대체 어디까지가 공범자가 되는 것입니까? 라고 털어놓았습니다. 만약 그가 전선으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한다면 교수형이나 총살을 당할 것입니다. 또한 자기 목숨뿐만 아니라 자신의 부모에게도 보복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선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정작 아무런 방어도 하지 않는다면 자살행위가 되고 말 것입니다.

폴먼은 그가 공범자라는 굴레에 대해 ‘죄악’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서 죄악이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서도 끝나는지 아무도 몰라. 죄악은 어디서든 시작되지만 어디서든 끝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거야. 아니면 정확히 정반대일 수도 있고. 그러나 공범 관계라는 것, 누가 그것을 알겠는가? 오직 하느님이 알 뿐이지,라고 했습니다. 하느님에 대해 폴만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 살인하지 마라는 말이 있는가 하면 카이저의 것은 카이저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라는 말도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만 있으면 영혼의 함석장이는 어떤 물건이라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사랑할 때와 죽을 때』을 읽으면서 그래버가 고민했던 양심의 문제는 반성이 지나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전선이라는 엄중한 현실에서 과거를 회상하면서 무기력하다는 것은 용기가 없어 보였습니다. 용기는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을 때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쟁에서 공범자, 더 나이가 살인자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하이에나 같은 동물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이에나는 언제나 하이에나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다양한 변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다양한 변모에 대해 ‘탄력적인 양심’이라고 말했습니다. 탄력적인 양심에 따라 그는 낮 동안에는 병사이더라도 밤에는 병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밤에는 그렇게 되어 버린 존재가 아니라, 원래 그래야 하는 존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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