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건너는 여섯 가지 방법
스티브 도나휴 지음, 김명철 옮김 / 김영사 / 201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떤 사람들은 25세에 이미 죽어버리는데 장례식은 75세에 치른다.”고 벤저민 프랭클린은 말했다. 활력 없는 사람들은 세상과 쉽게 타협하며 긴장의 끈을 놓아버린다. 이런 사람들에게『인생을 건너는 여섯 가지 방법』의 스티븐 도나휴는 좋은 멘토가 된다. 스티븐 도나휴는 겉으로는 단순해보이지만 속으로는 절대적인 인생의 진리를 들려주고 있다. 전작『사막을 건너는 여섯 가지 방법』에서 삶의 특별한 비책이 사막이었다면 이번에는 ‘바다거북’이다. 저자는 바다거북의 귀소본능에서 멋진 인생의 돌파구를 찾고 있다.
 

바다거북은 수백 킬로미터를 여행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산란을 위해 자기가 태어난 바로 그 해변으로 되돌아온다. 수백만 마리 바다거북이 펼치는 생명의 파노라마는 호기심 그 자체다. 저자는 호기심 그 너머에서 인간과 바다거북의 닮은 점을 발견해낸다. 그것은 바로 ‘내면의 나침반’이다. 흔히 어떤 목적지를 향할 때 나침반과 지도는 좋은 도구가 된다. 하지만 저자는 ‘나침반은 지도가 아니다.’라고 역설하고 있다. 지도는 올바른 방향으로 목적지까지 데려다 준다. 반면에 나침반은 이끌어 준다는 것이다. 지도가 시행착오를 최소화한다면 나침반은 갈망하고 꿈꾸게 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나침반을 따르며 살라고 한다. 이것이 의미 있는 삶이며 나아가 행복한 인생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지도를 선택한다면 늘 정해진 길을 따라 갈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쉽게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새로운 기회를 찾지 못할 것이다. 인생에서 마주치는 어려움에 대한 돌파구는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나침반이 내면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우리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될 수 있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여섯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1. 둥지 떠나기
2. 마음이 이끄는 대로 따라하기
3.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어 행하기
4.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기
5. 깊이 잠수하기
6. 집으로 돌아오기 
 

하나. 둥지 떠나기다. 새로운 운명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둥지를 떠나야 한다. 만약에 바다거북이 계속 둥지에만 머무른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도 마찬가지다. 운명이 밀고 끌어당길 때 둥지를 떠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둥지를 떠날 때 타이밍이 중요한데 준비 상태(being ready)에서 떠나야 한다. 모든 것을 대비된 상태(being prepare)에서는 불가능하다. 둘. 마음이 이끄는 대로 따라하기다. 나침반은 생각보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자신이 무엇에 이끌리고, 열정이 생겨나며 꿈꾸게 되는지 알아야 한다. 분명 강하게 느껴지는 끌림이 있을 것이다. 
 

셋.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어 행하기다. 무조건 열심히 하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자신만의 재능을 발견하여 정말 잘하는 일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즉 당신의 재능은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곳에서 발휘되어야 한다. 넷.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기다. 치명적이지 않은 이상 실수는 우리가 가야 할 길과 가지 말아야 할 길을 알려준다. 그래서 우리는 실수에서 더 많은 기회를 발견할 수 있다. 
 

다섯. 깊이 잠수하기다. 자신의 내면 깊은 곳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인생의 1% 시간만 깊이 잠수하라.’고 한다. 우리가 살면서 힘들 때 겪는 기분이 ‘가라앉는’ 그 때가 삶의 나침반을 찾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여섯. 집으로 돌아오기다. 집은 태어난 곳이라는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진정으로 자신으로 돌아가는 ‘내면적 경험’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또 하나 부가적인 방법을 추가한다면 일곱 번째인데 바다거북의 등딱지처럼 우리에게 중요한 것들은 우리와 함께 간다는 것이다. 
 

저자는『인생을 건너는 여섯 가지 방법』에서 내면적 나침반을 거듭 말하고 있다. 내면적 나침반은 사소하지만 커다란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바로 깊은 내면으로부터 들리는 운명의 소리가 무엇인지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인생은 바다거북과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십자군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오노 나나미의『십자군 이야기 1』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Deus Io Vult)’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인류 역사상 200년 동안 치러진 십자군 전쟁(Crusades)을 다각적으로 파고들기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상식 안에서 십자군 전쟁은 세계 2대 종교인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성전(聖戰)이다. 한마디로 스케일(scales)적 이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자 다음 사건이 일어난 단편적인 기록이다. 그러면 상식 밖의 십자군 전쟁은 무엇일까? 디테일(detail)적 이다. 어떤 사건을 자잘하게 추론하고 해석하면서 진리를 발견하게 한다.


이 책은 십자군 전쟁을 스케일과 디테일적인 시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스케일적인 면에서는 ‘예루살렘 해방’이라는 대의명분이다. 신성로마제국 교황 우르바누스 2세 당시 비잔틴제국령이었던 예루살렘은 이슬람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래서 비잔틴제국 황제가 도움을 요청하자 우르바누스 2세는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는 가치를 내세우며 십자군 원정을 일으켰다. 오직 교황만이 ‘신’을 말할 수 있었다. 이것은 황제의 군사력보다 막강했다. 그래서 카노사의 굴욕 이후 하인리히 4세에 압박받던 교황의 권위는 우세해졌다.


그러나 디테일적인 면에서는 십자군은 전쟁이 불가피했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 책의 첫 페이지를 ‘전쟁은 인간이 여러 난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려 할 때 떠올리는 아이디어다.’라고 말했다. 예루살렘 해방 때문에 십자군 전쟁이 일어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좀 더 다른 시각으로 보면 왜 사람은 전쟁을 하는가? 라는 매우 의미있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리스도교에게 예루살렘은 신에게 귀속하는 것이다. 비록 이슬람교가 예루살렘의 성지 순례를 허락했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지즈야’라는 통행세를 내야했다. 그리스도교적인 입장에서 이것은 신앙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의 핑계였다. 저자 표현대로라면 예루살렘이 기도하는 장소가 아닌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장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서양의 역사에 있어 세상의 중심은 신이었다. 중세에 있어 그리스도교의 적이 된다는 것은 최고의 형벌이었다. 더구나 성지순례에 대한 자유가 허용되지 않을 상황에서 그리스도교인의 좌절감은 우르바누스 2세에게 대담한 승부수를 던졌다. 즉 십자군이라는 무기를 들고 동방(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나는 것이었다. 십자군 원정이 겉으로는 성지순례였으나 속으로는 성전이었다. 성전을 통해 십자군은 ‘신이 바라시는 사업에 참여하여 영원한 보수를 받게 되는 것’이었다.


제1차 십자군이 ‘제후들의 십자군’은 불리게 된다. 이 시기 제후들은 공작이나 백작으로 불렸으며 독립된 영토를 가진 한 지역의 주인이었다. 이러한 제후들에게 성전은 자신들의 권력욕을 나타내는 하나의 통과의례였다. 가령, 폴리아 공작 보에몬드는 십자군 원정에 참가하기 전에 비잔틴제국의 군대와 싸웠다 그런 그가 비잔틴제국의 요청으로 십자군에 참가한 것은 ‘자신만의 영지, 그것도 광대하고 풍요로운 영지를 원했다는 것’이다.


제1차 십자군 원정의 제후들이 마침내 예루살렘을 해방했을 때 로렌 공작 고드프루아와 용감한 탄크레디뿐이었다. 더구나 그들의 병력은 기병 3백 명, 보병 2천 명 정도였다. 예루살렘을 해방하고 난 후 제후들은 유럽으로 돌아갔다. 역사가들은 그들이 영토 욕심이 없고 신앙심만으로 뭉친 기사들이라고 칭찬했다. 하지만 시오노 나나미는 그들의 책임감이 필수적인 결단의 선택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시오노 나나미는 책임감이 많고 적음의 차이에서 달라진다고 봤다. 십자군에게 힘을 보태는 것이며 십자군을 통한 변화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신앙만으로는 신앙조차 지킬 수 없는 것이 인간세상의 현실’이라는 작가의 성찰이 그 연장선상에 놓이게 된다.


가령, 에데사의 보두앵과 폴리아 공작 보에몬드의 최고의 정예 전사 탄크레디의 경쟁은 ‘기묘’ 했다. 비록 이슬람측이 십자군을 단순한 침략자로 생각해서 그리스도교도에게 조력을 구하는 것이었지만 보두앵과 탄크레디의 불편한 감정이 아니었을까? 그들의 ‘기묘한 전투’는 친족 간에도 적대관계였던 이슬람측의 집안싸움에 각각 협력하여 싸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 말대로 일신교도의 눈에는 ‘기묘한 전투’이지만, 다른 시점에서 보면 ‘종교의 차이를 초월하여 서로의 이익만을 목적으로 한 전투’가 되었던 것이다.


『십자군 이야기 1』은 ‘진정한 평화주의자가 바라는 작가의 정성을 대해 기록한 전쟁역사’라는 탁월한 시야가 돋보인다. 전쟁역사에서 보면 이 책은 십자군에 대한 역사서이다. 그러나 탁월한 시야에서 보면 전쟁의 매커니즘을 이해할 수 있는 ‘대작(大作)’이다. 예나 지금이나 성전(聖戰)을 내세우며 역사의 진리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변함없다. 하지만 역사에 대한 반성이 없는 진리는 속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성전의 가치로만 따진다면 십자군은 ‘좋은 아이디어’이다. 그러나 권력에 탐욕과 전쟁의 비극을 생각한다면 ‘나쁜 아이디어’이지 않을까? 정말로 신은 그것을 바랬을까?『십자군 이야기 1』를 읽는 내내 김훈의 말대로 서늘한 느낌을 우려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이지 않는 고릴라 - 우리의 일상과 인생을 바꾸는 비밀의 실체
크리스토퍼 차브리스.대니얼 사이먼스 지음, 김명철 옮김 / 김영사 / 201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운전 중에 휴대폰으로 통화하는 것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휴대폰이 일상화된 세상에서 아이러니하게도 휴대폰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괜한 오해를 낳는다. 뜻하지 않게 인간관계가 더욱 복잡해질 수도 있다. 이러한 난처함에서 단순한 해법은 운전 중에 통화를 하면 된다. 운전과 통화는 사람의 손과 눈에 달렸다. 한 손으로 운전하고 다른 한 손으로 통화를 하고 시선은 도로를 향하면 된다. 손과 눈으로만 놓고 보면 둘 다 문제될 게 없다. 운전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도 운전 중 통화는 교통사고의 주범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크리스토퍼 차브리스와 대니얼 사이먼스는『보이지 않는 고릴라』에서 인간의 주의력과 인지 능력에 대한 고정관념과 상식을 뒤엎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운전 중 통화의 위험성은 손과 눈이 아니라 ‘주의력 착각’에 있다. 즉 운전 중 통화를 하게 되면 주의력이 산만하게 된다. 산만한 정신은 우리의 인지 능력의 한계를 드러낸다. 통화를 하면서 주의력을 과도하게 사용하게 되면 그만큼 주의력이 감소하게 된다. 그 결과 바로 눈앞의 횡단보도를 건너는 보행자 혹은 옆에서 부딪치는 오토바이를 피할 수 없게 만든다.

 


이러한 맹시는 ‘보이지 않는 고릴라’의 실험에서 비롯된 사고틀이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의 실험은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렇다. 학생들을 흰 셔츠, 검은 셔츠 두 그룹으로 나눠 농구공을 패스하게 한다. 그런 후 농구공 패스 동영상을 보여주면서 흰 셔츠 학생들의 패스 횟수가 몇 번인지를 묻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실험의 관심은 다른 데 있다. 패스 횟수보다는 동영상 중간에 고릴라 의상을 입은 사람이 9초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실험 참가자들은 고릴라를 봤는가? 라는 질문에 놀랍게도 약 50%가 고릴라를 보지 못했다고 답변했다.

 


이 책의 저자들은 탁월한 인지 심리학자답게 보이지 않는 고릴라의 실험에서 심리적 맹시를 역설하고 있다. 심리적 맹시는 달리 ‘무주의 맹시(inattentional blindness)’라 부른다. 무주의 맹시란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특정 부분에 주의를 집중하고 있을 때 예상치 못한 사물이 나타나면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바라보는 것’과 ‘보는 것’의 차이를 빼놓을 수 없다. 앞서 말한 것처럼 고릴라를 바라보면서도 고릴라를 못 볼수 있다. 바라보는 것이 보는 것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바라본다고 해서 그 존재를 알아차린다고 할 수는 없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의 실험은 정도에 따라서 단순하고 평범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하고 평범하다고 해서 파장 효과가 적다는 것은 착각에 불과하다. 착각은 인식의 오류이며 직관의 한계를 나타내는 것이다.『보이지 않는 고릴라』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한, 혹은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6가지 일상의 착각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6가지 일상의 착각은 주의력 착각을 비롯하며 기억력 착각, 자신감 착각, 지식 착각, 원인 착각, 잠재력 착각을 말한다.

 


기억력 착각이란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한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떻게 기억하는지가 중요하다. 가령, 사람들은 기억을 회상 할 때, 다른 사람에게 일어났던 일을 마치 자기 자신이 겪은 것처럼 착각할 수 있다. 이것을 ‘기억 출처의 오류(failure of source momory)’라고 한다. 자신감 착각은 자신감으로 그 사람의 능력, 지식, 의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실력이 없는 데도 리더가 될 수 있으며 완벽하지 않더라도 자신 있는 목격자가 자신 없는 목격자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된다.

 


지식 착각은 자신이 알고 있는 수준보다 더 많이 안다는 착각이다. 이러한 착각에 대해 로젠블리트는 ‘호기심 많은 꼬마’ 게임으로 설명했다. 인과관계를 찾는 과정에서 ‘그건 왜요?’를 계속 되묻는 것인데 사람들이 한 두 개만 더해도 대답들 못한다는 것이다. 원인 착각은 세 가지 편견과 관련이 있다. 즉 우리가 패턴을 인식하고, 우연의 일치에서 인과관계를 추론하며, 앞서 일어난 사건이 뒤에 일어난 사건의 원인이라고 믿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잠재력 착각은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지만 아지 활용하지 못하는 지적 능력이 우리 뇌에 엄청나게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일상의 착각에 대한 저자들의 통찰력은 매우 흥미롭다. 이 책의 서문을 빌리자면 ‘일상의 착각에 대해 알고 나면, 세상이 다르게 보이고 세상사에 대한 더욱 뚜렷한 직관과 생각을 갖게 된다. 가령, 잠재력 착각에 있어 ‘모차르트 효과’는 지능 자체를 향상시키는 효과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 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들을 때 심리 상태가 좋아지고, 심리 상태가 좋아지면 IQ가 높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뇌 활용도 10%’에 있어 두뇌 활동을 향상 시키는 것은 인지 훈련이 아니라 걷기 운동이 더 효과적임을 깨닫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경제학 혁명 - 신화의 경제학에서 인간의 경제학으로
데이비드 오렐 지음, 김원기 옮김, 우석훈 해제 / 행성B(행성비)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하우스 푸어, 경제학의 예측이 빗나갔다. 집을 사는 것(buying)이 아니라 사는 곳(living)이라고 바꿔 말하고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시장에서 뜬 구름 같은 이야기에 불과하다. 사는 것과 사는 곳은 불가분의 관계다. 우리는 집을 사기 위해 숨 가쁘게 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집은 살기 위해 충분하면 된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집은 살기 위해 꼭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혼돈은『거대한 전환』을 쓴 폴라니의 사유를 빌리자면 '묻어들어 있음(embededness)'이다. 이 책에서 폴라니는 19세기 이전의 인간의 경제는 사회에 묻어들어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경제가 사회를 압도하면서 사회가 경제 안에 묻어들어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데이비드 오웰의『경제학 혁명』은 사회에 묻어들어 있지 않은 경제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그것은 부제에 나와 있듯 '신화의 경제학'이다. 신화의 경제학은 주류 경제학인 시장중심이다. 시장중심은 경제적 성장을 우선시하면서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그러나 경제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 파레토의 법칙에 따르면 20%정도다. 그나마 이정도면 괜찮다. 지금은 '0.1%'를 위한 경제학으로 치닫고 있다. 금융위기에서 나타난 경제학은 어떤가? 현실과 동떨어진 경제학을 과학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대신에 이 책의 저자가 말한 경제학은 이데올로기이며, 위조화폐라는 것이 해독제다.


저자의 '경제학 혁명'은 인간의 경제학에 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저자는 주류 경제학의 10가지 오류를 과학의 힘으로 증명하면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경제학은 ‘인간 행동의 수학적 표현’이다. 따라서 주류 경제학의 오류를 바로잡는 것 역시 그럴듯한 과학의 입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저자 말대로 과학의 위대한 힘은 ‘자기 교정’에 있다. 즉, 어떤 이론이 잘못되었다면 더 나은 것으로 교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혁명적인 주장들을 요약하면 먼저 주류 경제학은 뉴턴의 역학이다. 이것은 운동법칙이 입자들의 행동을 지배하는 합리적인 역학으로 경제학에서는 ‘수요공급의 법칙’이 된다. 하지만 경제는 단순한 방정식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기상예측과 같다. 기상예측에서 관건은 구름에 있다. 구름의 형성과 흩어짐을 예측할 만한 방정식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은 구름의 ‘창발적 속성(emergence attribute)’에 있다. 창발적 속성은 이전의 관습이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체계나 사고가 발생된 현상에 해당되는 특징을 말한다. 이로 인해 창발적 속성은 복잡계 특성을 가리킨다. 즉 일반적 체계로 구성된 지식만으로는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주류 경제학은 ‘평균적 인간’에 있다. 평균적 인간이란 합리적 인간을 말하며 개인의 비합리성은 무작위적인 잡음과 같다고 여긴다. 효율적 시장 가설에 따라 시장은 다수의 합리적인 ‘이윤극대자’로 구성된다. 그러나 행동경제학이나 신경경제학에서는 인간의 비합리적 행동에 의해 좌우된다. 전자가 일반 균형 모형이라면 후자는 행위자 기반 모형이다. 경제학을 보다 현실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경제인’이 아니라 ‘행위자’가 되어야 한다. 현실적으로는 무리수가 유리수보다 많고 곡선이 직선보다 그리는 방법이 많은데도 여전히 주류 경제학은 반대다. ‘아름다움은 진리이고, 진리는 아름다움’이라는 수학적 형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끝으로 주류 경제학은 ‘모두 필요한 자원이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피크 오일(peak oil)에서 보듯 자원 고갈의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주류 경제학은 환경의 역습을 얼마든지 대체가능하다고 전망한다. 인간의 창의성과 기술로 새로운 에너지를 발명하면 된다. 이것은 자원의 진정한 가치를 고려하지 않으면서 오직 경제성장이라는 단기 효용에만 집중한 결과다. 반면에 생태경제학은 경제성장의 부정적인 영향이 그 어떤 혜택도 능가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경제가 불황의 연속이다. 심리학자 데이비드 스피겔은 “경제적인 용어인 불황(depression)이 우울을 뜻하는 심리학 용어(depression)와 같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만큼 건강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의 저자가 주장하고 있는 인간의 경제학은 ‘건강한 경제학’을 지향하고 있다. 주류경제학이 선호하는 GDP는 경제성장의 부정적인 효과를 무시한다. GDP의 대안으로 경제, 문화, 사회, 환경을 고려한 GNP(국가총행복), ISEW(지속 가능한 경제복지수), GPI(실질진보지수), HPI(국가별 행복지수) 등은 주목할 만하다. 이제 우리에게는 낡은 신화를 넘어서는 새로운 경제학이 필요하다. 이 책은 우석훈의 말대로 ‘비포 더 레인’이지 되지 않을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11-08-04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uing -> buying / depresseion -> depression / ^^;;

오우아 2011-08-05 06:00   좋아요 0 | URL
탁님! 감사합니다~~
 
지식인의 서재 - 그리고 그들은 누군가의 책이 되었다
한정원 지음, 전영건 사진 / 행성B(행성비)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영국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는 우리에게 두 개의 눈(目)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얼굴에 있는 육체의 눈이며 다른 하나는 가슴에 있는 마음의 눈이다. 얼굴과 가슴과의 거리가 가깝다고 한다면 가까울 수 있다. 하지만 마음의 눈을 잃어버리면 그 거리를 가늠하기가 어렵다. 어떻게 보면 마음의 눈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외눈박이다. 그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평범하다.

그러나 지식인은 게으른 일상을 거부하며 초점을 잃지 않고 산다. 지식인의 사유의 힘은 무엇일까?『지식인의 서재』를 유심히 들여다 본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이 책의 제목에서 드러나듯 지식인은 독서광이다. 지식인은 만 권의 책을 읽고(讀萬券書) 만 리 길을 걸은(行萬里路)사람이다. 그래서 지식인에게 서재는 책이 꽂혀 있는 물리적인 공간으로서만이 아니라 사람을 만드는 감성적인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서재가 곧 사람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지식인의 서재에 담긴 오랜 사연들과 만난다. 가령, 법학자 조국에게는 ‘서재는 책과 교감하는 나의 성(城)’이며 자연과학자 최재천에게는 ‘통섭원’이었다. 솟대 예술작가 이안수에게는 ‘사유의 숲’이며 섬진강 시인 김용택에게는 ‘자연의 숲’이었다. 그런가하면 아트스토리텔러 이주헌에게는 ‘놀이터’이며 소셜 디자이너 박원순에게는 ‘나의 치열한 전쟁터’였다. 출판문화인 김성룡에게는 ‘삶의 흔적’이며 영화 감독 장진에게는 ‘영감과 기억의 창고’였다. 끝으로 전통공연예술 연출가 진옥섭에게는 ‘고물상’이었다.


이렇듯 지식인의 서재는 지식인의 삶과 사유를 이해하는 통로다. 또한 독서에 대한 가치를 깨닫게 해주고 있다. 흔히 사람들은 독서를 취미라고 여긴다. 하지만 최재천은 독서는 일이며 전략이고 삶의 현장이라고 했다. 소통을 역설한 조국은 자신을 넓혀가기 위해서 자기 확장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자기 생각과 다른 타인의 생각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북디자이너 정병규에 따르면 독서는 ‘약간의 낯섦’을 전제로 한다. 약간의 낯섦이란 곧 자유다.


그런가하면 도시건축가 김진애는 책을 읽을 때는 의문을 가지고 읽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주헌은 당혹스럽게도 책은 완전하지 않다고 하면서 책은 70%만 이해하면 된다고 했다. 장진의 독서에 대한 생각은 책이 아니라 책을 읽는 태도로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그리고 바이올리니스트 조윤범은 책과 음악은 같다고 하면서 독서하면서 웃거나 울거나 화내라고 했다.


우리는『지식인의 서재』에서 15명의 지식인들의 서재를 만나게 된다. 서재 못지않게 독서에 대한 단상은 게으른 정신을 활활 불타오르게 한다. 한복 디자이너 이효재가 말했듯 책은 보석보다 화려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