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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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노 나나미의『십자군 이야기 1』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Deus Io Vult)’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인류 역사상 200년 동안 치러진 십자군 전쟁(Crusades)을 다각적으로 파고들기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상식 안에서 십자군 전쟁은 세계 2대 종교인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성전(聖戰)이다. 한마디로 스케일(scales)적 이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자 다음 사건이 일어난 단편적인 기록이다. 그러면 상식 밖의 십자군 전쟁은 무엇일까? 디테일(detail)적 이다. 어떤 사건을 자잘하게 추론하고 해석하면서 진리를 발견하게 한다.


이 책은 십자군 전쟁을 스케일과 디테일적인 시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스케일적인 면에서는 ‘예루살렘 해방’이라는 대의명분이다. 신성로마제국 교황 우르바누스 2세 당시 비잔틴제국령이었던 예루살렘은 이슬람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래서 비잔틴제국 황제가 도움을 요청하자 우르바누스 2세는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는 가치를 내세우며 십자군 원정을 일으켰다. 오직 교황만이 ‘신’을 말할 수 있었다. 이것은 황제의 군사력보다 막강했다. 그래서 카노사의 굴욕 이후 하인리히 4세에 압박받던 교황의 권위는 우세해졌다.


그러나 디테일적인 면에서는 십자군은 전쟁이 불가피했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 책의 첫 페이지를 ‘전쟁은 인간이 여러 난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려 할 때 떠올리는 아이디어다.’라고 말했다. 예루살렘 해방 때문에 십자군 전쟁이 일어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좀 더 다른 시각으로 보면 왜 사람은 전쟁을 하는가? 라는 매우 의미있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리스도교에게 예루살렘은 신에게 귀속하는 것이다. 비록 이슬람교가 예루살렘의 성지 순례를 허락했다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지즈야’라는 통행세를 내야했다. 그리스도교적인 입장에서 이것은 신앙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의 핑계였다. 저자 표현대로라면 예루살렘이 기도하는 장소가 아닌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장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서양의 역사에 있어 세상의 중심은 신이었다. 중세에 있어 그리스도교의 적이 된다는 것은 최고의 형벌이었다. 더구나 성지순례에 대한 자유가 허용되지 않을 상황에서 그리스도교인의 좌절감은 우르바누스 2세에게 대담한 승부수를 던졌다. 즉 십자군이라는 무기를 들고 동방(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나는 것이었다. 십자군 원정이 겉으로는 성지순례였으나 속으로는 성전이었다. 성전을 통해 십자군은 ‘신이 바라시는 사업에 참여하여 영원한 보수를 받게 되는 것’이었다.


제1차 십자군이 ‘제후들의 십자군’은 불리게 된다. 이 시기 제후들은 공작이나 백작으로 불렸으며 독립된 영토를 가진 한 지역의 주인이었다. 이러한 제후들에게 성전은 자신들의 권력욕을 나타내는 하나의 통과의례였다. 가령, 폴리아 공작 보에몬드는 십자군 원정에 참가하기 전에 비잔틴제국의 군대와 싸웠다 그런 그가 비잔틴제국의 요청으로 십자군에 참가한 것은 ‘자신만의 영지, 그것도 광대하고 풍요로운 영지를 원했다는 것’이다.


제1차 십자군 원정의 제후들이 마침내 예루살렘을 해방했을 때 로렌 공작 고드프루아와 용감한 탄크레디뿐이었다. 더구나 그들의 병력은 기병 3백 명, 보병 2천 명 정도였다. 예루살렘을 해방하고 난 후 제후들은 유럽으로 돌아갔다. 역사가들은 그들이 영토 욕심이 없고 신앙심만으로 뭉친 기사들이라고 칭찬했다. 하지만 시오노 나나미는 그들의 책임감이 필수적인 결단의 선택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시오노 나나미는 책임감이 많고 적음의 차이에서 달라진다고 봤다. 십자군에게 힘을 보태는 것이며 십자군을 통한 변화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신앙만으로는 신앙조차 지킬 수 없는 것이 인간세상의 현실’이라는 작가의 성찰이 그 연장선상에 놓이게 된다.


가령, 에데사의 보두앵과 폴리아 공작 보에몬드의 최고의 정예 전사 탄크레디의 경쟁은 ‘기묘’ 했다. 비록 이슬람측이 십자군을 단순한 침략자로 생각해서 그리스도교도에게 조력을 구하는 것이었지만 보두앵과 탄크레디의 불편한 감정이 아니었을까? 그들의 ‘기묘한 전투’는 친족 간에도 적대관계였던 이슬람측의 집안싸움에 각각 협력하여 싸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 말대로 일신교도의 눈에는 ‘기묘한 전투’이지만, 다른 시점에서 보면 ‘종교의 차이를 초월하여 서로의 이익만을 목적으로 한 전투’가 되었던 것이다.


『십자군 이야기 1』은 ‘진정한 평화주의자가 바라는 작가의 정성을 대해 기록한 전쟁역사’라는 탁월한 시야가 돋보인다. 전쟁역사에서 보면 이 책은 십자군에 대한 역사서이다. 그러나 탁월한 시야에서 보면 전쟁의 매커니즘을 이해할 수 있는 ‘대작(大作)’이다. 예나 지금이나 성전(聖戰)을 내세우며 역사의 진리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변함없다. 하지만 역사에 대한 반성이 없는 진리는 속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성전의 가치로만 따진다면 십자군은 ‘좋은 아이디어’이다. 그러나 권력에 탐욕과 전쟁의 비극을 생각한다면 ‘나쁜 아이디어’이지 않을까? 정말로 신은 그것을 바랬을까?『십자군 이야기 1』를 읽는 내내 김훈의 말대로 서늘한 느낌을 우려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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