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협력자 - 세상을 지배하는 다섯 가지 협력의 법칙
마틴 노왁.로저 하이필드 지음, 허준석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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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노왁과 로저 하이필드가 함께 쓴『초협력자』를 읽은 이유는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 때문이었다. 죄수의 딜레마는 당신과 당신의 공범이 경찰에 잡혀 있을 때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시나리오가 가능하다. 하나, 당신이 자백하고 상대방이 자백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1년 형을, 상대방은 4년형이 구형된다. 둘, 이번에는 반대로 당신이 자백하지 않고 상대방이 자백한다면 당신은 4년 형을 상대방은 1년 형이 구형된다. 셋, 둘 다 서로를 자백하지 않는다면 둘 다 2년 형이 구형된다. 넷, 둘 다 서로를 자백한다면 둘 다 3년 형이 구형된다. 이중에서 당신에게 가장 유리한 선택은 상대방의 선택과 상관없이 ‘배신자’가 되는 것이다.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최상의 선택이 배신이라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놀랍게도 다윈의 진화론도 배신의 논리다. 자연선택의 이면에는 자연이 선택한 ‘적자’(The Fittest)만이 그 유전자를 후대에 퍼뜨리는 것이다. 다윈적인 사고에 따르면 경쟁자에게 협력하는 것은 진화론에 역행하는 것이다. 즉 자연선택은 죄수의 딜레마에서 협력에 반하여 작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생명의 다양한 본질을 탐구하다보면 자연선택의 한계만으로는 해명할 수 없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러한 까닭에 대하여『초협력자』는 ‘생물계의 양지’라는 주장을 펼친다. 즉 자연선택이 생물계의 음지라고 한다면 협력은 생물계의 양지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들은 인간을 최고의 협력자라고 말한다. 단순히 협력은 공동의 목적을 위해 함께 일하는 것이다. 그러나 초협력자는 경쟁이 아닌 협력하기 위해 다섯 가지 메커니즘을 모두 동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직접 상호성, 간접 상호성, 공간 게임, 집단 선택, 혈연 선택 등이다. 다섯 가지 매커니즘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직접 상호성은 ‘팃 포 탯’(Tit for Tat:TFT)이다. 협력의 진화에 있어 TFT는 ‘항상 배신하는 전략’보다 우월하다. TFT는 상대가 배신했을 때만 나도 배신하게 된다. 이보다 나은 전략은 ‘너그러운 팃 포 탯’(GenerousTFT)이다. 그러나 최상의 전략은 ‘이건 승리하면 그대로, 패배로 바꾸기’(WSLS:Win Stay, Lose Shift)이다.

 

간접 상호성은 평판의 힘을 말한다. 데이비드 헤이그는 “직접 상호성을 위해서 당신은 얼굴이 필요하다. 간접 상호성을 위해서 당신은 이름을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면 이름을 인식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뭘까? 바로 이 부분에서 언어의 빅뱅, 즉 언어의 협력이 요구된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언어를 창출했다고 믿고 있는데 저자들의 생각은 정반대로 언어가 우리을 창출했다고 한다. 수다 떠는 재주를 가진 인간이 동물을 추월할 수 있었던 것은 언어가 우리의 유연한 뇌를 발달시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언어를 통한 협력으로 수많은 생태적인 문제를 해결하면서 진화해온 것이다.

 

공간 게임은 생명의 체스판이다. 우리가 설탕이나 우유를 얻을 때 아무에게나 부탁하는 대신에 이웃에게 다가가는 것이 왜 더 편한 것일까? 죄수의 딜레마에서는 배신자가 언제나 협력자보다 우월하다. 하지만 지리적 요소를 추가했을 때 상황은 달라진다. 생명의 공간 게임에서는 협력자와 배신자가 나란히 존재할 수 있다. 만약에 협력자들이 배신자들에게 둘러싸인다고 해도 살아남을 수 있다.

 

집단 선택은 부족전쟁이다. ‘다수준 선택’(multilelevel selection)으로 불리는 집단 선택은 의미 있는 사회 규범을 지닌 집단은 그렇지 않은 다른 집단들과의 경쟁에서 승리를 거둔다는 것이다. 따라서 간접 상호성은 집단 선택과 협력하여 인간다움을 형성할 수 있게 된다.마지막으로 혈연 선택은 혈연주의다. 생물학에서 적합도는 생존과 번식의 목적으로 활용되는 개체의 능력 수준, 한 개체가 타자들에 비해 다음 세대에 더 많은 자손을 남길 확률을 말한다. 그러나 포괄 적합도을 적용하면 개체보다는 친족을 통해서 작동한다. 가령, 개미나 벌 같은 사회성 곤충들은 ‘진사회성’(eusociality)으로 협력하며 자식을 양육한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진화의 또 다른 법칙을 알게 된다. 전통적인 진화론에 따르면 선택(selection)과 변이(mutation)라는 두 개의 원칙이 강조되었다. 선택은 주어진 환경에 가장 적합한 개체들을 솎아 내는 것이며 변이는 유전적 다양성을 일으킨다. 하지만 진화의 제 3 법칙으로 협력을 제시하면서 협력이 진화의 가장 능숙한 설계자라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죄수의 딜레마를 주목한 것은 자연 선택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죄수의 딜레마가 한 번으로 끝난다고 한다면 자연 선택은 배신자를 이롭게 한다. 그러나 죄수의 딜레마가 반복적이라면 협력의 메커니즘으로 인하여 자연 선택은 가장 낮은 적합도를 지니게 된다. 저자들 말대로 생물계에서 가장 창조적인 힘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죄수의 딜레마에서 ‘값비싼 처벌’(costly punishment)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죄수의 딜레마에서 가능한 두 개의 전략은 앞서 말한 대로 ‘협력과 배신’이다. 그러나 처벌도 가능한 수가 된다. 값비싼 처벌은 다른 이들이 비용을 치르게 하기 위해 나도 비용을 치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값비싼 처벌의 비용은 3:1인데 상대방이 3달러를 잃는다면 내가 1달러를 잃어도 좋다는 식이다. 연구자들은 처벌이 협력의 메커니즘이 될 수도 있다는 것으로 ‘이타적 처벌’을 제안되기도 했다. 하지만『초협력자』에서는 처벌이 협력의 메커니즘이 아니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아인슈타인이 말한 대로 “처벌을 두려워하고 보상을 바라는 마음 때문에만 사람들이 착해진다면, 사실 우리는 불쌍한 것이다.”라는 것이 처벌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지 않을까?

 

우리는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더 빨리 가려고 한다. 이럴 때 혼자 가는 것이 좋을까? 아니며 함께 가는 것이 좋을까? 아마도 혼자 가는 것이 정직한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더 멀리 가려면 함께 가는 것이 좋다. 세상에 온전한 승자는 없는 법이다. 비록 협력자와 배신자가 서로 공존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협력자가 최고의 포괄 적합도가 된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은 초협력자다.’라는 말이 우리가 우주에서 살아남게 될 가장 좋은 진리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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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야 하는 이유 - 불안과 좌절을 넘어서는 생각의 힘
강상중 지음, 송태욱 옮김 / 사계절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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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힐티가『행복론』에서 말했던가요? 사람이 의식에 눈뜬 최초의 순간부터 의식이 사라질때까지 가장 열심히 찾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역시 행복의 감정이라고. 우리는 누구나 행복을 바랍니다. 행복을 추구한다고 해서 행복을 손에 넣을 수는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누구는 행복하고 누구는 불행합니다. 행복의 방정식에 있어 행복한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행복하다고 합니다. 반면에 불행한 사람은 행복으로 역전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행복이라는 것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사실상 행복은 나중에 생겨나는 감정입니다. 불행도 마찬가지입니다. 돌이켜보면 불행이 불행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강상중의『살아야 하는 이유』는 고민의 흔적이 뚜렷합니다. 우리 앞에 놓인 수많은 좌절과 절망을 외면하지 않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더더욱 고민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자본주의가 우리의 삶을 스포츠화하면서 고민꺼리가 나날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승자와 패자라는 이분법적인 잣대에서 ‘베스트 원’이 되고자 합니다. 이런 경쟁에서 이제 우리에게 호모 사피엔스는 유효하지 않아 보입니다. 오히려 ‘호모 파티엔스’(home patiens) 즉, 고민하는 인간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생각이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제대로 불투명하게 한다면 고민은 투명하게 합니다. 문제는 투명함의 정도에 따라 고민은 양날의 칼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고민은 진짜 자기다움을 발견하는 것인 반면에 지극히 사적이고 지나치다 싶으면 ‘자기추방’내지 ‘자기비방’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나쓰메 소세키의 문학을 독파하면서 근대의 병인(病因)인 고민을 다섯 가지 키워드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로 돈, 사랑, 가족, 자아의 돌출, 그리고 세계에 대한 절망입니다. 돌이켜보면 다섯 가지는 지금의 고민과 상당히 일치하고 있습니다. 나쓰메 소세키의 문학 기법을 빌리자면 그만큼 ‘사생’(寫生)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고민에 휩싸인 사람은 겉만 보면 얼마든지 문제적인 인간이라고 속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윌리엄 제임스가『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에서 말한 ‘거듭나기’(twice born)을 언급하면서 고민의 가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제임스에 따르면 거듭나기는 ‘병든 영혼’의 소유자가 하는 것으로 마음의 병을 앓고 나서 그때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가치, 인생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건전한 마음’의 소유자는 ‘한 번 태어나는 형’(once born)으로 인생에 대한 이런 저런 고민이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살아갈 근거를 알 수 있습니다. 바로 ‘거듭나기’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거듭날 수 있을까요? 저자는 빅터 프랑클이 말한 ‘인간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 세 가지로 분류’한 것을 바탕으로 하여 이 질문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는 창조, 경험, 태도입니다. 이중에서 프랑클은 인간의 가치 중에서 태도를 가장 중요시 했습니다. 뭔가를 창조하는 것도 아니고, 뭔가를 경험하는 것도 아닌 뭔가를 마음속으로 기도하면서도 인간다운 업적을 하는 것이 곧 태도라는 것입니다. 가령, 톨스토이의『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이반 일리치는 죽음의 고통 때문에 힘겨워하는 가족들뿐만 아니라 자신조차 구원받지 못한다는 태도를 깨닫고는 ‘죽음은 끝났다!’라고 하면서 비로소 행복했습니다.

 

우리들은 유한한 존재여서 행복에 대한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무엇을 해야만 할까요? 라는 고민에 항상 쏠립니다. 무엇이 행복의 시작과 끝이라고 여기며 모두들 미래를 바라보며 바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눈으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중요하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살아야 하는 고민에 대해 언제든지 “예”라고 대답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얼마든지 ‘거듭나기’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창조나 경험이 아닌 태도를 통해서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무엇에 비하면 어쩌면 소극적인 방법에 지나지 않을까, 라고 할 수 있는데 물론 태도에는 ‘진지함’과 ‘사랑’이 책임이 뒤따라야 합니다. 만약에 진지함과 사랑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한 번 태어나고 그것으로 끝입니다. 자신의 운명을 고민하는 예리한 통증을 느낄 때 비로소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행복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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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 신화 알베르 카뮈 전집 4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199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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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예전에는 누군가 자살했다고 하면 그 놀라움과 안타까움에 가슴이 몹시 시렸는데 지금은 죽음의 유혹이라고 할 정도로 변해버렸다. 무엇이 이토록 사람들을 자살하게 하는 것일까? 누구나 살면서 절박한 문제에 부딪치게 마련이다. 이럴 때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혹은 더 이상 삶을 감당할 수 있다는 긍정과 부정의 갈림길에서 선택할 수밖에 없는 자신만의 고백, 즉 자살을 하게 되지 않을까? 장 아메리는『자유죽음』에서 자살하는 사람들의 ‘뛰어내리기 직전 상황’에 주목하면서 죽음이 ‘없음’이라고 한다면 자유죽음은 ‘없음을 있음’으로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자유죽음은 자기부정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썸네일그런데 알베르 카뮈(1913~1960)는 반항한다. 카뮈는 자신만의 고유한 색을 분명히 가지고 있는 실존주의 작가 중 한 명이다. 담배를 입에 물고 있는 얼굴만큼이나 그의 작품들은 우리의 삶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우리의 눈 속으로 날카롭게 파고 들어온다. 이렇게까지 자신만의 존재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작가는 드물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인지 카뮈 탄생100년이 지날 즈음 최근에 『이방인』을 읽으면서 비로소 카뮈를 주목하게 된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다.

 

내 생각은 옳았고, 지금도 옳고, 또 언제나 옳다. 나는 이렇게 살았으나, 또 다르게 살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런 것은 하고 저런 것은 하지 않았다. 어떤 일은 하지 않았는데 다른 일을 했다. 그러니 어떻단 말인가? 나는 마치 저 순간을, 내가 정당하다는 것이 증명될 저 신새벽을 여태껏 기다리며 살아온 것만 같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중요한 것은 없다. (…)사람들이 선택하는 삶, 사람들이 선택하는 운명, 그런 것이 내게 무슨 중요성이 있단 말인가? 오직 하나의 숙명만이 나를 택하도록 되어 있고, 나와 더불어 그처럼 나의 형제라고 자처하는, 특권 가진 수많은 사람들도 택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알아듣겠는가? 사람은 누구나 다 특권 가진 존재다.

『이방인』중에서

 

사람은 누구나 다 특권 가진 존재라는 카뮈의 깊이 있는 성찰 덕분에『시지프 신화』를 연달아 읽었다. 뭐랄까, 읽으면 읽을수록 그의 판단과 통찰이 어느 순간 삶의 진실에 가까워지는 것을 깨닫게 되어 죽기 전에 그의 작품을 읽을 수 있는 게 다행이다. 살아가면서 꼭 누가 말하지 않더라도 시니컬하고 신랄할 비판이 차고 넘칠 정도다. 이 모두가 부조리한 감정 탓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자살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뜻밖의 절박한 문제다. 이유인즉, 카뮈가『시지프 신화』에서 말한 것처럼 자살이 희망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생이 살 만한 보람이 없기 때문에 자살한다는 것, 그것은 필경 하나의 진리다. 그러나 너무나 자명한 이치이기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진리다. 삶에 대한 이런 모욕, 삶을 수렁에 빠뜨리는 이런 부정(否定)은 과연 삶의 무의미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삶의 부조리는 과연 희망이라든가 자살 같은 길을 통해서 삶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요구하는 것일까?

『시지프 신화』중에서

 

희망, 간단하게 말하자면 내일이 있다는 것이며 인간을 구원하는 데 있어 내일은 인생의 빈 공간을 채우는 하나의 방법이다. 우리가 지금 존재하는 것은 우리 삶이 오늘에 끝나지 않을 거라는 욕망이 자리 잡고 있다. 물론 틀리지 않지만 이러한 사실에는 일종의 삶의 모순이 있다. 이것이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함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인간과 그의 삶, 배우와 무대 장치의 절연(絶緣)’이 곧 부조리다. 삶이 부조리하다는 차가운 현실에서 이방인(異邦人)이 된 그는 ‘세계의 두꺼움과 낯설음’으로 인생이 부식되고 만다. 그래서 인간적인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비인간적인 것을 추구하는 데 자살도 예외는 아니다. 문제는 그가 자살한다고 해서 현세의 부조리함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죽음, 그 너머 에도 부조리함이 있다. 자살과 부조리함이 서로 적절하게 타협한다고 해서 자살이 부조리를 죽인다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부조리함을 견뎌내야 할까? 앞서 말했듯이 자살은 궁극적인 답썸네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세계가 바라는 대로 통속적으로 살아야 할까? 이러한 권태로움에 카뮈는 또 따른 통찰력을 보여준다. 바로 절망의 깊이에 빠진 우리를 ‘시지프 신화’로 구원하기 때문이다. 그리스신화의 인물인 시지프(시시포스)는 신들을 기만한 죄로 바위를 산꼭대기에 굴러야 하는 형벌을 받았다. 그런데 이 바위는 산꼭대기에 도달하면 굴러 떨어졌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그렇다고 끝이 보이는 것도 아닌 시지프의 고통! 무익하고 희망이 없는 노동보다 더 무서운 형벌은 없다고 신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시지프의 끔직한 삶을 생각하면 삶의 아무런 가능성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카뮈는 달랐다. 부조리한 인간에서 부조리한 영웅의 반전(反轉)! 그의 생각은 단단해서 구원의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그래서 카뮈가『시지프 신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처럼 우리의 생각을 바꿔보면 어떨까? 즉,

 

우리는 항상 그의 짐의 무게를 다시 발견한다. 그러나 시지프는 신들을 부정하며 바위를 들어올리는 한 차원 높은 성실성을 가르친다. 그 역시 만사가 다 잘 되었다고 판단한다. 이제부터는 주인이 따로 없는 이 우주가 그에게는 불모의 것으로도, 하찮은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그에게서는 이 돌의 부스러기 하나하나, 어둠 가득한 이 산의 광물적 광채 하나하나가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산정(山頂)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프를 마음속에 그려보지 않으면 안 된다.

『시지프 신화』중에서

 

불행한 시지프 이후의 삶의 궤적을 그려내는 카뮈의 ‘행복한 시지프’는 정말이지 바위보다 더 옹골차다고 할 수 있다. 행복한 시지프에게 자살은 삶을 포기하는 것만큼이나 불행하다. 때로는 부조리함에 맞서 술과 노래로 자족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행복한 시지프에게 부조리하다. 우리가 부조리라는 낯선 감정으로부터 요구되는 것은 상상이나 비약 같은 비논리적인 사고가 아니다. 그럴수록 부조리를 회피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행복한 시지프는 아주 논리적인 사고로 맞서며 불행에 매몰되지 않았다. 행복한 시지프에게 삶의 가치를 부여한 것은 다름 아닌 ‘반항’이다. 즉 시지프는 반항 때문에 더 인간적이며 더 행복하다고 할 수 있다.

 

카뮈의 에세이를 읽으면서 반항의 역설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바랐다. 자살이라는 걷잡을 수 없는 불행을 끝내는 것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투신(投身)이 아니라 자신(自身)있게 사는 것! 거듭 말하지만 자살한다고 해서 부조리함이 끝나는 것은 잘못이다. 오히려 죽음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다. 반대로 반항은 죽음을 거부한다. 그래서 반항적인 인간은 최대한 반항하면서 최대한 많이 산다. 반항은 자신의 열정이며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뮈는 행복한 시지프에서 ‘반항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삶의 디테일을 찾아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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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의 조건 - 사람은 무엇으로 행복을 얻는가
바스 카스트 지음, 정인회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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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인간관계를 어떻게 변화시킬까? 여기에 관한 재밌는 실험이 있다. 일명 '돈과 의자 실험'인데 방법은 이렇다. A, B 실험자에게 서로 다른 화면이 나오는 컴퓨터의 모니터를 보게 하는 것이다. A 실험자의 컴퓨터에는 알록달록한 물고기들이 노는 화면을, B 실험자의 컴퓨터에는 지폐가 펄럭이는 화면이 나온다. 그런 후 A, B 실험자에게 다른 실험자와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을 줄 테니 자신의 의자 옆에 다른 사람의 의자를 옆에 가져다 놓으라는 것이다. 이것이 실험의 끝인데 그 결과는 놀랍게도 서로 달랐다. 즉 A 실험자가 상대방의 의자를 가까이에 놓았다면 B 실험자는 멀리 놓았다.

 

위의 실험을 통해 바스 카스트는『선택의 조건』에서 우리에게 흥미로운 몇 가지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돈은 인간관계를 불행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경제가 호황인데도 여전히 행복의 만족도가 불황인 원인을 진단한다. 물론 돈이라는 물질적인 풍요를 완전히 거부할 수는 없다. 돈이 없으면 여러 가지로 불편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돈이 불러일으키는 사회적 문제를 생각하면 끔직하다. 불편함을 넘어 엄청난 스트레스다. 스트레스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저자는 베를린 프리드리히 가의 한 모퉁이에 있는 전광판을 주목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고급 레스토랑 위에 있는 전광판의 문구는 '자본주의는 사랑을 죽인다.'는 것이다.

 

때로는 복잡하고 지루한 설명보다는 간단한 문장이 오히려 더 감각적일 수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가 사랑을 죽인다는 메시지는 저자의 통찰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자본주의의 문제점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되돌아보면 우리의 삶은 돈으로 인해 어느 정도는 물질적인 결핍이 많이 줄어들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돈을 더 벌기 위해서는 더 바쁘게 살아야 하는데 그럴수록 중요한 삶의 가치를 희생해야만 한다. 즉 정신적인 결핍 현상으로 인해 인간관계가 원만하지 않다. 친밀함도 찾아볼 수 없는 막막한 사막 같다고 할까? 또한 바쁠수록 행복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불안하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정신적인 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돈을 최고로 선택하고 있다. 일찍이 허버트 A. 사이먼은 ‘인간의 생각은 첫째 어떤 대상을 알아 볼 수 있는 방대한 능력과 둘째, 선택적 탐색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굳이 철학자의 사유가 아니더라도 우리에게 어떤 상황에서 선택은 불가피하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행복의 만족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단순히 선택의 질이라고 한다면 별로 놀라울 것이 없다. 하지만 선택의 양도 간과할 수 없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저자 말대로 선택할 게 많은데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가령, 어떤 물건을 선택하는 데 있어 ‘극대화자’인가, ‘만족자’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극대화자는 물건을 사기 위해 이것저것 탐색하며 오랜 시간을 투자한 반면 만족자는 자신이 세운 기준까지만 탐색한다. 이유인즉 극대화자는 최고를 추구하기 때문이며 만족자는 좋은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최고는 끝이 없다는 데 있다. 언제든지 수많은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고라는 극대화된 감정에 있어 기회비용은 늘 불안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 바쁜 현대인들에게 좋은 것은 뭘까? 느리게 사는 것이다. 느림은 단순히 천천히 걷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행복하게 걷는 것이다. 경쟁 사회에서 느림은 상대방의 빠름에 따라 희비가 엇갈릴 수 있다. 바쁜 사람들의 눈을 보면 괴테가 주변에서 직접 느꼈던 성급한 태도, ‘벨로치퍼리시’(veloziferisch)를 알 수 있다. 어디 그뿐 만인가, 그들의 ‘악마의 눈’(이탈리아어로 malocchio)은 어떤가? 그러나 느림은 결코 상대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절대적이어야 한다. 저자가『선택의 조건』에서 충고한대로 ‘절대적인 것이 상대적인 것을 이겨야’ 한다. 이것이 행복에 있어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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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8
에밀리 브론테 지음, 김종길 옮김 / 민음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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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확실히 당신이든 누구든 자기를 넘어선 삶이 있고, 또는 그런 삶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만약 내가 이 지상의 것이야만 한다면 이 세상에 태어난 보람이 무엇일까? (…)만약 모든 것이 없어져도 그만 남는다면 나는 역시 살아갈 거야. 그러나 모든 것이 남고 그가 없어진다면 이 우주는 아주 서먹해질 거야. 나는 그 일부분으로 생각되지도 않을 거야. 린튼에 대한 내 사랑은 숲의 잎사귀와 같아. 겨울이 돼서 나무의 모습이 달라지듯이 세월이 흐르면 그것도 달라지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어. 그러나 히스클리프에 대한 애정은 땅 밑에 있는 영원한 바위와 같아. 눈에 보이는 기쁨의 근원은 아니더라도 없어서는 안 되는 거야. 넬리, 내가 바로 히스클리프야. 그는 언제까지나,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있어.

『폭풍의 언덕』중에서

 

사랑하는 영혼은 같은 것

어떤 사람의 영혼이 달빛이거나 불이라고 한다면 당신은 그 사람을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에밀리 브론테의『폭풍의 언덕』에서 캐서린은 제목만큼이나 사랑하는 방법이 폭풍 같습니다. 그녀는 서로가 사랑한다면 서로의 영혼이 같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무엇으로 되어 있든 사랑하는 영혼은 같은 것이야 합니다. 만약에 달빛과 번개, 서리와 불같이 영혼이 전혀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사랑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캐서린이 히스클리프를 사랑했던 것은 그가 잘생겼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녀 말대로 나 자신이 반드시 나의 기쁨이 아닌 것처럼 그도 그저 기쁨으로서가 아니라 나 자신으로서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캐서린이 사랑했던 히스클리프는 거칠고 야만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히스클리프는 어릴 때부터 버려진 아이였는데 캐서린의 아버지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하면서 여행 중에 자신이 사는 ‘위더링 하이츠’에 데려왔습니다. 시커먼 악마 같은 두 눈을 가진 히스클리프를 어느 누구도 좋아하지 않았지만 걷잡을 수 없이 말광량이였던 캐서린만은 너무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힌들리 오빠의 히스클리프에 대한 학대가 문제였습니다. 학대란 성인(聖人)도 악마로 만들기에 족한 것입니다. 캐서린 이런 현재만을 생각해서 에드거 린튼과 결혼하기로 했습니다. 만약에 히스클리프를 천한 인간으로 만들지 않았다면 결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혼을 하더라도 히스클리프는 예전에 그랬듯이 앞으로도 소중했습니다.

 

오만한 사람의 이상한 쾌감

정말로 마음씨가 착하면 얼굴도 선해지는 걸까요? 치장한 인형 같았던 에드거와는 달리 촌뜨기였던 히스클리프가 크고 푸른 눈과 번듯한 이마를 원했습니다. 캐서린를 슬프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악마 같은 두 눈을 천사 같은 눈으로 바꿔야 했습니다. 하지만 힘든 일과 사람들로부터 따가운 멸시를 받으면서 점차로 이러한 우월감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는 무뚝뚝하면서도 사람들에게 미움을 품게 하는 이상한 쾌감을 느끼며 오만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만한 사람은 스스로 슬픈 일을 만든다고 합니다. 마침내 폭풍이 치던 어느 날 밤, 히스클리프는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자 캐서린은 불같은 성미를 억누르지 못해 사랑의 열병에 걸렸습니다. 열병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캐서린의 마음을 최대한 편안하게 해주어야 했습니다. 마치 가시나무가 인덩덜굴 쪽으로 휘어진 것이 아니라 인동덩굴이 가시나무를 감은 격으로 말입니다.

 

에드거와 결혼한 캐서린은 폭발하는 불이 가까이 없었기 때문에 이따금 우울했지만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히스클리프가 돌아오면서 다시 한 번 그녀의 영혼에 폭풍이 불었습니다. 기독교적인 모습으로 달라진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이 서로의 기쁨에 열중하자 에드거는 반대로 불쾌감으로 점점 창백해졌습니다. 히스클리프와 그는 친구가 될 수 없었습니다. 히스클리프와 있으면 가장 훌륭한 사람도 악에 물들게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히스클리프가 워더링 하이츠에서 지내는 동안 힌들리는 노름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걱정거리는 에드거의 여동생 이사벨라가 갑자기 히스클리프를 좋아하게 된 예지치 않은 불행이었습니다. 캐서린은 겉모습과 달리 히스클리프의 속은 사나운 늑대라고 하며 반대했지만 이사벨라는 훌륭하고 진실한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당신은 내 가슴도 찢어놓은 거야

누구의 말이 옳을까요? 캐서린의 이기심일까요? 이사벨라의 질투일까요? 그러나 진짜 정답은 히스클리프의 복수심에 있었습니다. 지독하게 대접을 받았던 삶에 대한 복수였습니다. 그래서 이사벨라와 결혼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복수를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습니다. 결국 이사벨라는 비참해질 정도로 바보짓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캐서린을 지금까지 잊지 않았던 건은 에드거처럼 어떤 의무감이나 인정에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을 잃어버린 뒤의 삶은 지옥이라고 했습니다. 에드거가 팔십 년 동안 캐서린을 사랑한다고 해도 자신의 하루 동안 사랑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캐서린이 에드거를 한 번 생각하는 동안에 자신을 천 번이나 생각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에게 왜 당신 마음을 배반했는지 격정적으로 물었습니다. 그러면서 당신은 자기 마음을 죽이 것이며, 당신은 나를 사랑했는데도 무슨 권리로 자신을 버리고 갔느지, 에드거에 대한 어리석은 생각 때문이었는지, 불행도, 타락도, 죽음도, 그리고 신이나 악마가 할 수 있는 어떠한 것도 우리 사이를 떼놓을 수는 없었는데… 당신 스스로 나를 버린 것이며, 내가 당신의 마음을 찢어놓은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찢어 놓은 거야.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내 가슴도 찢어놓은 거야. 내가 살고 싶은 줄 알아? 당신이 죽은 뒤에 내 삶이 어떨 것 같아? 당신 같으면 마음 속 애인을 무덤 속에 묻고도 살고 싶겠어? 말했습니다. 캐서린이 괴로운 나머지 흐느끼면서 용서해달라고 하자 히스클리프는 나는 나를 죽인 사람을 사랑하는 거야, 라고 하면서 용서했습니다.

 

유령의 존재를 믿으며

그러나 캐서린이 병세가 호전되지 않았지만 편안하게 천국으로 갔다고 하자 히스클리프는 절대 그럴 리는 없다고 하면서 했습니다. 지난 18년 동안 밤낮으로 자신을 괴롭혀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캐서린 언쇼! 당신은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편히 쉬지 못한다는 것을! 당신은 내가 당신을 죽였다고 했지. 그러면 귀신이 되어 찾아오란 말이야! 죽은 사람은 죽인 사람에게 귀신이 되어 찾아온다면서? 난 유령이 지상을 돌아다닌다는 것을 알고 있어. 언제나 나와 함께 있어줘. 어떤 형체로든지, 차라리 나를 미치게 해줘! 제발 당신을 볼 수 없는 이 지옥 같은 세상에 나를 버리지만 말아줘. 아! 견딜 수가 없어! 내 생명인 당신 없이는 못 산단 말이야! 내 영혼인 당신 없이는 난 살 수 없단 말이야!

 

히스클리프는 유령의 존재를 믿었습니다. 그는 교회 묘지의 머슴에게 부탁하여 캐서린의 관 뚜껑을 열고는 조금 느슨하게 하고는 흙을 덮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가 캐서린에 옆에 묻힐 때 자신의 관도 한쪽을 조금 느슨하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서로의 영혼이 넘나들기 위해서 입니다. 캐서린이 죽은 뒤 그는 미치광이처럼 밤낮으로 내게 돌아오기를 빌었습니다. 적어도 영혼이라도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유령이라는 게 있을 있다면 그런 것이라는 의심이 아니라, 유령이 이 세상에 있을 수 있다는 확신을 하며 그는 유령의 존재를 믿었습니다. 그러나 추운 겨울날 다시 한 번 캐시를 안아보고 싶은 마음에 관 두껑을 뜯어냈는데 그때 그 귓전에서 진눈깨비를 몰고 오는 바람을 물리치는 따뜻한 숨결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순간 그는 캐서린이 땅속이 아니라 땅 위에 있는 걸 느끼며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안도감이 온몸으로 퍼졌습니다.

 

영혼 자신은 아직 만족하지 못하네

히스클리프의 악마적인 성격은 비참함을 떠안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여러 사람들을 파멸하게 만든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그가 훨씬 비참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악마 같은 그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으며, 이로 인해 외롭고 더욱 상실감이 클 뿐입니다. 그런데 죽음에 가까워진 그의 고백을 들으면 묘한 감정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는 죽음이 두렵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오직 한 가지 소원이 있었는데 그것을 성취하기를 열망했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리고 얼마나 꿋꿋하게 그 소원의 성취를 열망했던지 그는 그것이 꼭 성취도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소원이 성취되리라는 기대 속에 갇혀버렸습니다. 그는 고백한다고 해서 어떤 구원을 받는 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 고백이 오랜 싸움에 대한 자신의 성격의 설명할 수 없는 면에 대한 설명은 될 수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는 천국에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만을 위한 생활을 하며 신자답지 않은 생활을 했습니다. 아마 그동안 성경이란 것에 한 번도 손도 대지 않은 탓에 그는 틀림없이 성경에 무엇이 쓰여 있는지도 다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걸 뒤적거릴 여유도 없습니다. 만약 이제라도 돌아가기 전에 마음을 고치지 않는다면 도저히 성경 말씀에 나오는 천국에 갈 자격이 없다는 말을 듣는 것도 해롭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은 아무것도 뉘우칠 게 없으며 너무 행복하지만 아직 충분히 행복하지 못하다고 했습니다. 그는 영혼의 행복이 자신의 육체를 죽이고 있지만 영혼 자신은 아직 만족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굳이 남들이 바라는 천국에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미 그는 자신이 바라는 천국에 거의 와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의 궤도

히스클리프는 어느 누구보다도 사랑의 유령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사랑과 욕망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사랑의 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무엇인가를 욕망하는 것은 그것을 소유하려는 것이다. 소유란 우리의 궤도를 돌던 어떤 대상이 우리에게로 와서 우리의 일부분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논리에 의하면 욕망은 그 대상을 얻는 순간 없어진다. 반대로 사랑은 불완전하고 영원한 어떤 것이다. 욕망은 수동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어서 내가 욕망하는 것이 내게로 다가오기를 원하게 된다. 이때 나는 중력의 한 가운데에 서서 그 대상들이 내게로 빨려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반대로 사랑에 있어 모든 것은 움직임 자체이다. 사랑을 하면 우리는 사랑의 대상이 내게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내가 그 대상에게 가서 그 안에 존재하려고 한다. 어쩌면 이것이 대자연이 우리에게 부여한 유일한 시련일 것이다. 사랑에 빠지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빠져나와 타인을 향한 여정을 떠나야 한다. 그 대상이 나를 중심으로 내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대상이 만든 궤도를 탄다.

 

히스클리프의 사랑이 괴상하다고요? 어쩌면 괴상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멸의 사랑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지키겠다는 무모한 노력은 행복인 동시에 고뇌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만든 사랑의 궤도는 사랑의 유령을 불러낼 정도로 영혼을 넘나듭니다. 한 번쯤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이 어떤 궤도를 타고 있는지 생각해보는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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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07-03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에 빠지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빠져나와 타인을 향한 여정을 떠나야 한다. 그 대상이 나를 중심으로 내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대상이 만든 궤도를 탄다.

오우아님, 오랜만에 리뷰 보니 반가워요.
저는 저 위의 두 문장만으로도 기분이 상당히 좋아지네요.
그럼에도 자신만을 생각하는 연약하고 한심한 사랑도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