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식의 빅퀘스천 - 우리 시대의 31가지 위대한 질문
김대식 지음 / 동아시아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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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과학은 얼마나 의미 있을까? 사이언스 이즈 컬처(Science is Culture)라는 서문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오늘날의 키워드는 과학은 문화이다. 지난 10년간 과학은 정치, 경제, 예술, 지성의 지표를 바꾸어 놓았다. 과학은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한 인식을 바꿈과 동시에 인류의 가치 체계, 그러니까 지구 그리고 인간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각을 현대화하고 있다. 신념, 민주주의, 자유 시장 같은 개념들도 물론 세상을 바꿔 놓은 힘이다. 그러나 과학은 가장 보편적이고 압도적인 변화의 매개체다. 오늘날 과학은 지구상에 사는 모든 이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과학은 자연 현상을 이해하는 아주 기초적인 방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방정식을 풀다보면 ‘1+1=2’라는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과학 지식을 알게 된다. 과학의 역사란 체계적으로 과학 지식을 파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과학의 역사에서 고민해야할 문제는 과학 지식의 우열도 아니며 과학 지식이라는 그 자체 개념에 몰입하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과학 지식이 어떻게 해서 얻어지는 것인지 탐구하는 사고방식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과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실존의 의미를 합리적으로 구할 수 없는 세상이다. 그래서 KAIST 뇌과학자 김대식이 이야기하는김대식의 빅퀘스천은 우리에게 31가지 커다란 질문을 던진다. ‘삶은 의미 있어야 하는가’, ‘우리는 왜 정의를 기대하는가’, ‘만물의 법칙은 어디에서 오는가등등. 그런데 통찰력 있는 질문의 양상은 사뭇 다르다. 그의 1.4 킬로그램의 뇌는 과학뿐만 아니라 신화, 철학, 문학, 영화 등을 넘나든다. 생각해보면 앞서 말한 질문에서 즉, 삶의 의미이며 정의 등에 관한 문제는 아이러니하게도 과학 지식만으로는 풀리지 않는다는 것.

 

가령, ‘존재는 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는 먼저 흄과 칸트가 지적한대로 논리적으로 필요것은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 질문이 18세기부터 왜 무가 아니고 유인가?’라고 바뀌는데 그 답은 아주 단순할 정도다. , ‘물체와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무는 양자역학적으로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무는 오래 갈 수 없기 때문에 유이다.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는 랜덤으로 변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우리는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우리는 왜 사랑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는 생물학적 사랑, 그러니까 정자와 난자라는 생식세포가 결합하는 유성생식이다. 반면에 사회학적 사랑은 지속적인 번식에 대한 욕망이며 철학적인 사랑을 또 하나의 나를 만나는 것으로 확장한다.

 

김대식의 빅퀘스천은 누구나 한번쯤 고민해봤을 질문들을 다시 반복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질문에 대한 답이 고리타분하거나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저자 말대로 의미라는 것이 용도라고 했을 때 주어진 용도에 맞게 인문학적 사유를 충실하게 하고 있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영원한가에서 보듯 다음과 같이 감각적 있는 자기성찰을 펼치게 된다.

 

민주주의는 자동차도, 기차도, 배도 아니다. 민주주의 자전거이며 비행기이다. 멈추는 순간 넘어지고 추락하는, 직접민주제.대의원제.대통령제 모두 언제든 과두정치와 독재, 무질서와 카오스로 변질될 수 있다. 민주주의는 확률적으로 너무나도 불완전한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바야흐로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다. 과학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엄청난 새로운 정보를 어떻게 폭 넓고 깊이 있게 다룰 수 있는 사고 능력이다. 단순히 과학적인 지식만으로는 복잡한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영화 <인터스텔라(Interstellar)>를 보면서 우리는 우주에서 펼쳐지는 블랙홀, 웜홀을 생각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시간은 왜 흐르는가에 관한 맥락적 지식, 융합적 지식을 얻게 된다. 그만큼 과학은 문화라는 것이며김대식의 빅퀘스천을 읽으며 또 다른 우주여행을 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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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 김영하의 인사이트 아웃사이트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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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경우는 왜 보는 것만으로 안 되는 걸까요? 언제나 뭔가를 보고 있지만 우리는 그것으로 진심을 알 수 없습니다. 진심이 3차원이라고 한다면 지금 여기는 1차원입니다. 그러니까 1차원에서 3차원을 보기 위해서는 2차원을 거치지 않으면 어렵습니다. 우리는 1차원만으로는 진심을 볼 수 없습니다. 2차원에서 1차원을 보면서 느낌과 의미를 찾아낼 때 비로소 우리가 진심이라고 부르는 세계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진심은 상식의 반대편이 아니라 상식을 절실히 껴안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이 아닐까요?

 

김영하의보다를 읽으면 잘 설계된 우회로를 걸었다는 느낌과 마주하게 됩니다. 우리의 시선이 밝고 투명해지는 것은 물론 스스로도 정확한 생각을 한다는 것에 놀랄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를 좀 더 살펴보면 독일의 사상가 크라카우어가 말한 대기실의 사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철학이라는 보편적 진실이 맨 끝이라고 했을 때 역사, 문학은 끝에서 두 번째, 즉 대기실입니다. 생각해보면 대기실은 이쪽에서 궁극의 진실이라는 저쪽으로 가기 위한 중간쯤이라 곧바로 철학으로 직행하고자 했다면 굳이 우리가 대기실에 머물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중간이 없다고 했을 때 문자 그대로 진심을 알기가 막막하다는 것이 문제로 남겠지요.

 

그렇기에 우리가 대기실에 머문다고 해서 그 시간이 순간이라고 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오히려 대기실에 들어오기 전의 어떤 경우들이 순간입니다. 우리의 기억에서 순간들이 생각되지 않거나 기록되지 않는다면 어느 순간 사라지고 맙니다. 그래서 대기실의 사유는 곧 허공으로 흩어져 버리는 순간들을 제대로 보기 위한 영원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우리 삶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을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도 분명 어떤 순간은 진심을 부정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하고 놓쳐버렸던 순간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깨닫게 된다면 후회스러운 얄미운 감정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을 뒤흔든다고 해서 생각이 전부라고 여기는 것은 또 다른 모순입니다. 동시에 생각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작가는 망명정부의 라디오 채널 같은 존재로 살았던 것을 고백하면서 생각의 가장 훌륭한 도구는 그 생각을 적는 것이라고 확신을 보여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둘의 차이는 생각이 보이는 것에서 안 보이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면 글은 보이는 것에서 안 보이는 것을 보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현실과 맞닿은 진심의 경계, 그 속에서 찾아내는 작가의 독특한 산문은 생각의 끝이라기보다는 새로운 대화의 시작점이라는 것을 우리 가슴 속에 불러일으킵니다.

 

작가에 따르면 insightoutsight의 차이는 무지에 있다고 합니다. 프랑스 혁명 때 군중들을 격분시켰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말을 들어보세요. "빵이 없으면 케이크 먹으면 되지"라는 말! 아웃사이트에서 보자면 가난을 조롱하는 것 같아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하지만 이 정도까지 가난에 대하여 무지했는지를 인사이트해보면 정말 쓸쓸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작가에게도 어린 시절 부유한 친구로부터 이렇게 작은 집에도 슬리퍼가 필요해?”라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느낌이란 지금에 와서야 순수한 호기심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순수한 호기심이 어떤 진실을 위한 여닫이쯤 되면 좋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안에 갇혀 버리는 무지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는 아주 간단해보입니다. 삶이 지나치게 기계적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 오히려 인간적이라고 하는 게 이상할 정도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우리의 삶을 불행하게 만든 것일까요? 하나, 작가는 박훈정 감독의 영화 <신세계>을 봅니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은 부자 아빠가난한 아빠를 모두 죽일 수밖에 없는 모순에 빠집니다. 이러한 의식은 곧 윤리적 생존이 아니라 생존의 윤리 때문입니다. , 작가처럼 정신적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옷을 입는 감각이 아니라 옷을 입지 않는 감각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패스트패션으로 사라집니다. , 라캉이라고 하면 히스테리자라고 불렀을 것인데 자신의 욕망이 만족되지 않는 상태로 타인의 욕망으로 은폐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가 말대로 인간이라는 작은 지옥을 보게 되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되는 걸까요? 정말로 그렇다면 우리가 작은 지옥이라는 것을 모른 체 살다가 이제야 블랙홀에서 벗어나려는 것은 아닌지 모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때가 있습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작은 지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작가가 난데없이 불가능한 인간이 되라고 요구하는 것은 착시가 아닙니다. 엉뚱한 방법을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한 감수성을 분명하게 의식하게 됩니다. ,

 

우리는 우리 자신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무심하게 내버려둔 존재, 가장 무지한 존재가 바로 자신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지 모른다.(p185)

 

이렇듯 작가는 5년 만의 독특한 산문집에 걸맞게 우주를 떠돌던 정신적 무중력 상태에서 벗어나 강력한 중력이 존재하는 지구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무엇을 보았는가? 가 아니라 누구에게 본 것을 진심으로 전달할 수 있는가를 발견했습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 해야 할 말은 단지 생각의 끝이 아닌 또 다른 대화의 시작점이라는 것을, 작가의 눈으로 진심을 바라보게 되면 우리 또한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렇게 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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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우리를 가로막는가
로버트 켈시 지음, 인윤희 옮김 / 넥서스BIZ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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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는 선택 사항이 아니다.”

영화 <아폴로 13호>에서 비행 관제 본부장인 진 크라츠(Gene Kranz)가 한 말이다. 그러면 그의 말대로 실패는 선택 사항이 아닐까? 어느 누구도 실패를 선택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실패의 두려움이라는 기회비용이 위험하다. 행동 능력을 떨어뜨리는 것은 물론 우리가 발전하기 위한 잠재력을 계속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패를 선택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우리의 상식과는 차원이 다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선택의 결과에 대한 건전한 경고라고 할 수 있다. 즉 우리가 실패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주장은 실패가 선택 사항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조하는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로버트 켈시가『무엇이 우리를 가로막는가』에서 제안하는 성공의 비결은 ‘골치 아픈 문제들’을 어떻게 치유하는가에 있다. 우리는 성공 자체가 목적이 된 시대에 살고 있다. 이로 인해 성공이 장밋빛이라면 실패는 잿빛이 되고 만다. 그런데도 성공한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놀랍게도 실패를 간과하지 않았다. 가령, 발명왕 에디슨은 “나는 실패하지 않았다. 그저 작동하지 않는 1만가지의 방식을 발견한 것뿐이다.”라고 했다. 결국 문제는 실패가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저자가 말하는 성공의 비결을 발견하게 된다. 오랫동안 실패에 대한 해답을 찾았던 저자는 스스로를 ‘실패 전문가’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실패 전문가는 성공의 여부를 실패 자체가 아닌 실패에 대한 반응에서 찾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실패를 경험하기 마련이다. 실패 없이 성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저자의 주장대로 실패가 아닌 실패에 대한 반응이다. 우리가 실패를 하게 되면 두려움을 감당하기 어렵다. 이것이 곧 실패의 두려움이며 자신감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자신감이 부족한 사람은 어떤가? 우리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잠재력을 계속 창조해야만 하는데 실패의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정작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무엇보다도 실패의 두려움은 성공이 낮은 방식으로 행동하게 만들어 실패를 더 확실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럴 때 저자가 주장하는 실패의 두려움을 헤쳐 나가는 7단계는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골치 아픈 문제를 파악하는 데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즉,

 

1단계-당신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라

2단계-목표를 시각화하라

3단계-이정표를 설정하라

4단계-전략과 전술을 세워라

5단계-효율적으로 실행하라

6단계-사람 대하기

7단계-당신만이 가진 재능을 찾아라

 

이 책을 통해 꿈의 실현이 실패의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감옥이 될 수 있음을 볼 수 있다. 꿈이 우리의 방해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방해물에 대한 반응이 더 큰 문제이다. 긍정적인 성취동기를 가진 사람들의 통제 위치는 상황에 따라 적응에 나갈 수 있으며 자기 확신으로 이어진다. 반면에 부정적인 성취동기를 가진 사람들의 통제 위치는 실패의 두려움으로 인해 자기만족에 빠지고 만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실패의 두려움이라는 중요성을 잊고 산다. 이제 우리도 자신만의 진정한 잠재력을 발휘하기 위해서 저자의 조언대로 두려움을 용기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 성공이 ‘모’ 아니면 ‘도’라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만큼 설득력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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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비용 제로 사회 - 사물인터넷과 공유경제의 부상
제러미 리프킨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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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안하는 제러미 리프킨의한계비용 제로사회는 자본주의 가 몰락한 이후의 사회를 흥미롭게 파헤치고 있다. 자본주의가 몰락한 원인을 아이러니하게도 자본주의의 구조적인 모순에서 찾을 수 있다. 정말로 자본주의의 운용 논리는 성공에 의해 실패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일까? 가령, 기업들은 생산성의 극대화를 위해 한계비용을 떨어뜨려야 하는데 궁극적으로는 한계비용 제로수준이 된다. 결과적으로 상품 가격이 공짜여서 기업의 이윤은 고갈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본주의의 이후의 사회를 전망하는 것은 불투명해 보인다. 하지만 저자는 거대한 경제적 변화를 폭넓게 살피면서 공유를 재발견하고는 협력적 공유사회를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공유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공유지의 비극을 떼어놓기란 어렵다. 1968년 미국의 하딘 교수의공유지의 비극에 따르면 100마리의 양을 키울 수 있는 공유지에서 사람들이 서로 소득을 높이기 위해 양을 한 마리씩 늘려가다 보면 개인의 소득은 잠시나마 올라가겠지만 결국 목초지에는 양들이 먹을 풀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공유지의 비극이 이 정도라고 하면 공유는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공유의 개념에는 이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로즈의 공유지의 비극, 오스트롬의공유의 비극을 넘어 등등 이들의 근본원리는 공유를 긍정한다. , 시장에서 모든 공유물은 파멸한다거나 개인은 사리사욕만을 추구한다는 것을 반박한다.

 

1, 2차 산업혁명 및 3차 산업혁명이라는 경제적 변화를 보면 생산방식에서 차이가 난다. 1, 2차 산업혁명에서 경제활동은 자본주의의 에너지체계 아래 수직적이며 중앙집권적형이다. 그러나 3차 산업혁명은 사물인터넷과 스마트한 공공 인프라가 주도하면서 네트워크를 통해 수평적이며 분산형이다. 기존의 제조방식과 다른 사물인터넷이란 우리 주위의 여러 물건을 유무선 네트워크로 연결해 사람과 사물, 사물과 사물 간 정보를 교류할 수 있는 지능형 인프라를 말한다. 가령, 정보화제조(infofacture)라 불리는 3D프린팅이 상용화되면서 누구나 제조인프라가 되어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 쓸 수 있는 대중시대가 됐다. 기업이 독점적으로 생산하던 대량시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저저는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은 새로운 에너지체계와 그것을 조직하기 위한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매개체의 융합에서 발생한다고 말한다. 가령, 1차 산업혁명의 증기동력에는 인쇄와 전신의 매체와, 2차 산업혁명의 석유와 자동차는 라디오와 텔레비전 매체와 융합되었다. 그리고 3차 산업혁명의 네트워크화 공유사회에서는 인터넷이다. 1, 2차 산업혁명의 케뮤니케이션 영역이 수직적이며 중앙집권적이라고 인터넷은 수평적이며 개방형이다. 결과적으로 매개체의 문화 영역이 소유권에서 접근권으로 전환했다. 예전에는 자동차를 소유하는 것이 자본주의 시대의 상징이었다면 지금은 차량 공유 네트워크로 인해 비효율적인 고정 자산으로 되었다.

 

지난날 우리는 세계화시대를 살았다. 국가 경계를 넘어 하나의 단일화된 공간으로 사는 것이다. 하지만 장밋빛 전망과는 달리 세계화는 정부의 규제 완화라는 그럴듯한 속임수로 공공 재화와 서비스를 민영화했을 뿐이다. 이로 인해 세계화라는 상호 연결성 대신에 엔트로피 청구서(entropic bill)’를 감당해야만 하는 모순에 빠져 있다. 엔트로피는 열역학 제2법칙으로 에너지 총량에 있어 상실된 에너지를 말한다. 이 과정에서 상실된 에너지는 더 이상 l이용할 수 없다. 우리가 경제활동을 하면서 발생한 에너지가 지구 생물권을 위협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엔트로피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가한계비용 제로사회에서 제시하는 협력적 공유사회는 자본주의의 이후의 새로운 대안이지 않을까? 돌이켜보면 자본주의의 시작은 인클로저 운동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공동 경작지가 울타리를 두르고 양을 키우는 방목장이 되면서 시장경제와 재산 관계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자본의 심각한 부작용은 엔트로피 청구서의 만기가 없다는 것이다. 이제 자본주의의 꿈에서 벗어나야 한다. 결과적으로 협력적 공유사회는 소유의 종말,노동의 종말의 연장선으로 자본의 종말이다. 하지만 자본의 종말이라고 해서 자본주의 시장이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주장은 ‘13세기의 산업혁명때문이다. 18세기 1차 산업혁명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수력 방아다. 봉건경제의 손 방아에서 산업시대의 증기 방아라는 구별 때문에 실질적으로 중세 경제의 수력 방아의 중요성을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력 방아 한 개로 10~20명의 노동력을 대체할 수 있을 만큼 동력 용량의 획기적 증가에 기여했다. 이것뿐만 아니라 평민의 방아로 불렸던 풍력에너지도 화약, 나침반, 인쇄기라는 3대 발명품만큼이나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저자가 이점을 다시금 주목하는 것은 연성 원시 산업적 시장경제과 사물인터넷과 함께 자본을 대신하여 문명을 위한 협력적이고 재생적인 경제적 어젠다(agenda)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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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사이언스 클래식 24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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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창세기6장에는 노아의 홍수가 나온다. 150일 동안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는 것이다. , 사람들이 악()해지자 하느님이 사람을 만든 것을 후회하여 내가 창조한 사람들을 이 땅 위에서 쓸어버리겠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기어 다니는 것들과 하늘의 새들까지 쓸어버리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21세기에는 사람을 심판하는 데 있어 더 이상 물이라는 비유(比喩)는 통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메슈 화이트가 말한대로 헤모클리즘(Hemocly)’, 즉 피의 홍수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 간의 종교, 이데올로기 적인 갈등이 잔인하게 피의 보복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키고 있다. 거칠게 말하자면 현실이 폭력으로 인해 참혹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스티븐 핑거는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우리의 비관론을 뒤집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폭력의 역사를 추적하면서 방대한 통계적인 자료를 보여주고 있다. 진화론에 따르면 폭력의 논리는 문제될 게 없다. 적자생존이라는 자연선택에 따라 우리 또한 반격하는 성향이 있다는 점에서는 생물들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폭력성은 전략적으로 진화하면서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두 가지 서사를 만들어냈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폭력의 방향의 서로 다르지만 두 사람이 다 옳다는 식으로 자기들을 합리화하는 방향에서는 같다. 이것이 도덕화 간극(Moralization Gap)이라는 것이다. 도덕화 간극은 자기 위주 편향이 좀 더 확대된 현상이다.

 

이 책에 따르면 우리 본성이 순수한 악의 신화(myth of pure evil)’이라고 하는 이유는 도덕화 간극에서 빚어지는 폭력의 행위를 피해자의 입장에서 보고 있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입장은 도덕주의자의 관점이다. 즉 착한 피해자에게 가해지는 폭력이라고 하더라도 가해자에게는 정당하고 합리적 반응이다. 이러한 순수한 악의 신화 탓에 악은 종교에서는 악마, 일상에서는 살인범, 납치범, 강간범, 마약범으로 구체화 된다. 따지고 보면 순수한 악의 신화에서 비롯된 폭력은 동물적 충동과 다를 바 없는 비인간적이다. 그런데도 저자는 에이브러햄 링컨의 표현을 빌리며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저자는 이 의문에 답하기 위해 폭력을 역사적, 문화적으로 통계로 분석하면서 그래프로 나타내고 있다. 지난 세기의 폭력이 현재로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자세히 다루고 있다. 우리는 폭력의 그래프를 보면서 놀랍게도 폭력의 비율이 하향 곡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근거로 6가지 경향성을 주목하게 된다. , 비국가 사회에서 국가 사회로 넘어온 평화화 과정, 사회 규범의 발달에 따른 문명화 과정, 계몽주의가 이끈 인도주의 혁명, 국가 간 교역과 민주화를 통해 전쟁이 감소한 긴 평화, 집단 살해나 테러와 같은 소규모 충돌도 꾸준히 감소한 새로운 평화, 시민권, 여성권, 아동권, 동성애자 권리, 동물권 같은 권리 혁명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흥미로운 주제는 폭력 대 비폭력을 다루는 심리가 아닐까? 앞서 말했듯 우리 본성은 악마이거나 선한 천사이다. 폭력의 구조는 가해자가 피해자를 포식한다. 그러면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보복한다. 이러한 폭력에는 5가지 경향이 있는데 포식적 폭력, 우세 경쟁, 복수심, 가학성, 이데올로기이다. 이와 반대로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는 감정 이입, 자기 통제, 도덕 감각, 이성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선한 천사가 폭력에 대항하는 방법에 있어 비례(proportionality) 감각으로 도덕적 균형이 요구된다. 선한 천사라고 해도 비례 감각이 불균형을 이루다면 오히려 폭력의 도구로 전락한다. 자기 통제를 벗어나면 자기기만(self-deception)’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빌 게이츠가 내 평생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중요한 책이다라고 말한 것은 결코 자기 통제를 벗어난 말은 아니다. 인간의 폭력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시간을 들여 읽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 우아한 미개인과는 달리 20세기는 대량살육의 시대로 알고 있는 지금, 어느 누구도 폭력이 증가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자는 우리에게 폭력이 감소했다는 것을 감정 이입하고 있다. 감정 이입은 전염성이 강한 만큼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더 나아가 우리 본성에 깃든 선한 천사의 날개를 활짝 펼치게 하며 인간적인 사회를 가늠하게 해주었다. 이제 노아의 홍수라는 낭만적인 관점으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통하지 않는 세상이다. 그만큼 우리의 이성이 희망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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