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대 위의 까치 - 진중권의 독창적인 그림읽기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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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미술사에 있어 ‘괴물스러운 작품들 중에서 가장 괴물스러운 작품’은 무엇일까? 우리 시대 독창적인 미학자인 진중권은『교수대 위의 까치』에서 조르조네의 <폭풍우>를 주목하고 있다. 이유인즉 이 작품에 대한 해석 때문이었다. 작품을 놓고 2~3가지 충돌이 있어도 무려 28가지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는 것에 무게감이 실렸다. 저자에 따르면 이 작품은 ‘해석의 바벨탑’이었다.

조르조네의 <폭풍우>가 논란에 휩싸인 까닭은 르네상스 시대에는 풍경이 아직 독립된 장르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인물보다 풍경을 부각하고 있다. 이런 탓에 서양 미술사에 있어 이 작품을 ‘풍경화’ 장르로 설정하고 있다. 한편으로 이 작품이 ‘역사화’란 장르로 해석된다는 것이 빼놓을 수 없는 문제였다. 역사화란 이주헌이『서양화 자신있게 보기』에서 말했듯 ‘엄밀히 말해서 역사를 주제로 한 그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보편적인 가치와 교훈, 특별히 영웅적인 모범이나 모든 사람이 지향해야할 바람직한 덕을 표현한 그림을 일컫는 용어’였다.

저자는 이 그림을 설명하면서 안토니어 모라시가 “도대체 제재(subjet)가 있기는 한 걸까?”라는 의문에 독창적인 답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제재는 분절된 이야기를 말한다. 제재의 유무에 따라 이 그림 속의 남녀는 역사화로 보면 성경이나 신화의 인물로 보여 질 것이다. 반면에 풍경화로 보면 현실의 인물로 보일 것이다. 이러한 제재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반제재(anti-subjet)이며 다른 하나는 비제재(not-subjet)이다. 반제재를 의도적 에니그마(enigma)라고 하는데 작품을 단 번에 이해하기 힘들도록 애매하게 하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비제재는 처음부터 작품의 제재를 설정하지 않는 것이다.

서양 미술의 문외한인 보통 사람들에게 예술 작품을 감성하는 데 있어 정서적 감동이 우선시될 것이다. 혹은 지각적 쾌감을 얻거나 영성의 울림을 얻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오히려 지성적 자극이 올바른 미적 체험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앞서 말한 대로 조르조네의 <풍속화>을 명확하게 해석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겠지만 그럴수록 자신의 상상력을 발동시켜야 한다고 했다. 더 나아가 칸트의 미적 체험인 ‘오성과 상상력의 유희’의 상태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책은 저자에게 지성적 자극을 불러일으킨 12점의 서양미술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중에서 저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작품은 바로 피터르 브뤼헐의 <교수대 위의 까치>였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까치에 있다. 네덜란드 속담에는 ‘까치처럼 수다를 떤다.’는 말이 있다. 결국 이 작품 속의 까치는 수다쟁이를 말하며 교수대가 권력이라고 한다면 교수대 아래서 춤추는 농부 셋의 이미지는 얼마나 부조리하고 불합리한가? 라고 토로 했다.그래서 저자는 이 그림을 ‘상식이 통하지 않는 뒤집힌 세상, 그것의 부조리와 불합리의 무시무시한 상징’으로 브뤼헬의 고약한 블랙유머를 읽어내고 있다.

이 작품에 대한 작가의 해석을 읽으면서 왜 이 책의 제목이 만들어졌는지 충분히 알게 되었다. 저자는 작품은 제작된 순간에 완성되는 죽은 ‘물건’이 아니라고 한다. 그 보다는 끝없는 물음과 답변의 놀이를 통해 영원히 자신을 형성해 나가는 ‘생물’이라고 여겼다. 그러면서 저자는 작품에 대한 창조적 독해를 강조하는데 그것이 바로 개별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푼크툼(punctum)'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공유되는 일반적인 해석인 ’스투디움(studium)'과 대조를 보인다.

이처럼 저자의 독창적인 그림읽기와 동행하면서 우리는 작품에 해당하는 지식을 얻을 수 있다. 동시에 서양 미술사의 흐름을 파악하게 된다. 자연을 탐구하는 것이 전근대적 회화였다면 자기 자신을 탐구하는 반성적 성격이 현대적인 회화였다. 그래서 팝아트같은 회화의 현대성에는 그린버그가 말한 ‘평면성의 원리’가 담겨져 있다. 평면성의 원리란 3차원의 공간의 환영을 포기하고 2차원 평면임을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 덕분에 우리는 미술사를 움직이는 것이 ‘능력’이 아니라 ‘의지’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미술사는 사실적 재현으로 진화해오다가 20C에 들어 유년기의 화풍으로 되돌아 갔다. 이 과정에서 피카소같이 완전히 다른 예술의지가 탄생되었다. 이것은 곧 들뢰즈가 말한 ‘창조적 역행’과 같다.

일찍이 플라톤은『필레보스』에서 지식, 지혜, 지성은 ‘즐거운 것’보다는 ‘좋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 책을 통해 저자의 독창적 미학관은 우리에게 분명 ‘좋은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저자가 말하는 ‘푼크툼(punctum)'은 ’좋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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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초 - 순식간에 원하는 결과를 끌어내는 결정적 행동의 비밀
리처드 와이즈먼 지음, 이충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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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에 관한 이야기는 많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성공의 노하우는 소설(小說)이 아니다. 허구가 아닌 실생활에서 얻은 값진 정신력은 우리 삶 속에서 ‘고릴라’를 발견하게 한다. 괴짜 심리학자로 널리 알려진 리처드 와이드먼은『왜 나는 눈앞의 고릴라를 못 보았을까?』에서 고릴라를 우리가 눈 뜬 장님이어서 놓치는 당연한 것들, 남다른 아이디어, 기발한 해결책, 성공의 기회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번에는『59초』에서 좀 더 색다른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보일러 수리비를 둘러싼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어떤 남자가 보일러가 고장 나서 고쳐보겠다고 오랜시간 낑낑댔지만 헛수고였다. 그래서 그 남자는 보일러 기술자를 불러 고치게 했는데 그 방법이 간단했다. 보일러 옆구리를 한 번 툭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보일러 수리비는 제 값을 지불해야 했다. 왜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냐고, 남자가 묻자 보일러 수리공은 “보일러를 툭 치는데 걸린 시간에 대한 비용이 아니라, 정확하게 어디를 쳐야 하는지 오랜 경험을 통해 알아내는 데 걸린 세월에 대한 비용”이라고 말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받는 것보다는 주는 것이 낫다? 라는 문제를 상호주의 원리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역사상 가장 간단한 사회심리학 실험이라 불리는 것을 통해서 ‘최소한의 호의, 최대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실험의 원리는 크리스마스카드를 가족이나 친구가 아닌 전화번호에 나와 있는 사람들에게 무작위로 보내는 것이다. 이럴 때 낯선 사람에게서 축하카드를 받을 수 있는지 조사한 결과 긍정적인 답변을 얻게 되었다. 이로 인해 낯선 사람에게 호의를 보이는 것이 좋으며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렇듯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결정적 행동의 비밀에 감쳐진 패턴을 분석하고 있다. 그러면서비밀의 중요한 세 가지 사고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먼저 ‘이중 사고’다. 흔히 성공하면 장밋빛 미래를 상상하게 된다. 일종의 자기 최면이다. 하지만 저자는 성공하기 위해서는 상상과 결별하라고 한다. 장밋빛 미래를 상상하는 것은 기분만 좋을 뿐 꿈을 현실로 만드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상상보다는 목표달성이 훨씬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서 저자는 외팅겐의 ‘이중사고’가 매우 유용하다고 말한다. 이중사고는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개념을 차용한 것인데 외팅겐은 목표 달성에 대해 낙관적인 태도를 지니면서 동시에 도중에 일어나는 문제들에 대해 현실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다음으로 ‘상대적 사고’다. 실제로 원의 크기는 같은데도 원을 둘러싼 주변과 비교하기 때문에 서로 다르게 보인다. 가령, 흰색 원을 검은색 작은 원들로 둘러싸여 있으면 상대적으로 커 보인다. 반면에 흰색 원을 검은색 큰 원들로 둘러싸여 있으면 상대적으로 작아 보인다. 이 두 가지 관계에서 전자가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무의식 사고’다. 무의식 사고는 복잡한 결정을 내릴 때 효과적이다. 간단한 결정을 내릴 때는 의식적인 사고가 합리적이다. 그러나 일이 복잡해지면 보통 우리는 상황을 전체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가장 명백한 요소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이럴 때 의식의 관점을 다른 데로 돌림으로써 중요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59초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우리가 59초 노하우를 알고 있다면 성공의 값비싼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행복할 때 웃는 것 못지않게 웃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거꾸로 말하면 이 책 덕분에 우리는 오랜 기간에 걸쳐 발전해온 혁신적이면서 창조적인 생각을 59초 만에 알 수 있게 된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효과적인 변화를 일어나게 하는 데 반드시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1분도 걸리지 않는다. 또한 이것을 적재적소에 행동하는 데 1분도 걸리지 않는다는 것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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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로운 꿀벌의 세계 - 초개체 생태학
위르겐 타우츠 지음, 헬가 R. 하일만 사진, 최재천 감수, 유영미 옮김 / 이치사이언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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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은 곤충일까? 포유동물일까? 우리가 아는 꿀벌은 곤충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포유동물이라고 주장하는 생물학자가 있다. 그는 『경이로운 꿀벌의 세계』를 지은 위르겐 타우츠였다. 이 책에서 그는 꿀벌 군락을 두루 살피면서 우리가 미처 몰랐던 꿀벌에 관한 모든 것을 상세히 알려주고 있다.

그의 주장을 이해하기 앞서 우리는 두 명의 생물학자를 빼놓을 수 없다. 한 사람은 윌리엄 모튼 윌러(William Morton Wheeler)이며 나머지 한 사람은 요하네스 메링(Johannes Mehring)이다. 윌러를 주목하는 이유는 ‘초개체(superorgnism) 개념’에 있다. 초개체 개념이란 꿀벌은 각각 별개의 생명을 지닌 개체이지만 언제나 군락 전체가 마치 하나의 개체처럼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메링을 주목하는 이유는 ‘척추동물’에 있다. 메링은 “일벌은 생명 유지와 소화를 담당하는 몸이고, 여왕벌은 여성의 생식기이며, 수벌은 남성의 생식기다.”라며 꿀벌의 군락을 척추동물이라고 했다.

이러한 꿀벌에 관한 특성을 바탕으로 하여 저자는 앞서 말했듯이 ‘포유동물’이라고 말했다. 여기에는 낮은 번식률, 엄마젖과 자매젖이라 불리는 로열젤리의 유사성, 벌집이라는 ‘사회적 자궁’, 포유동물의 체온이 약 36도 관련하여 유충의 체온을 약 35도 일정하게 유지하는 점, 포유동물의 인지능력에 견줄 만한 꿀벌의 집단 지성이 각각 포함되어 있다. 이중에서도 저자는 꿀벌 군락의 생리학적 필수 요소는 벌집이라고 말했다. 꿀벌 군락에 있어 벌집은 거주공간, 저장 공간, 그리고 육아 공간이었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꿀벌 군락을 사회생리학으로 살펴보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꿀은 피보다 진하다.’라고 말하면서 꿀벌 군락의 연결고리를 분석하고 있다. 다윈의 진화론에 따르면 진화의 가장 우선적인 전제는 자신의 종(種)을 존속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꿀벌의 짝짓기를 보면 다윈 스스로도『종의 기원』에서 ‘꿀벌의 일벌들은 자신의 이론을 적응하기 매우 어려운 존재’라고 토로할 정도였다. 여왕벌에서 태어난 생식능력이 없는 암벌 즉 일벌들은 모두가 같은 엄마가 낳은 자식들이다. 그리고 암벌들은 자신의 유전자를 확산시키기 위해 스스로 자식을 포기하는 대신 자신의 어머니가 가능하면 자매들을 세상에 많이 배출시킬 수 있도록 돕는다.

그렇다면 암벌의 생존전략은 무엇일까? 저자는 ‘혈연선택’이론으로 꿀벌의 생물학적 특성을 말하고 있다. 이는 동물들이 협동적이고 매우 이타적인 행동하는 이유를 알려주며 꿀벌들이 진화하면서 ‘외톨박이’에서 사회적 생물로 옮겨간 현상을 적절하게 설명해준다고 저자는 말한다. 특히 윌리엄 해밀턴이 대중화시킨 ‘대립유전자’을 개체군에 많이 확산시키는 데 있어 친척끼리 서로 돕는 행동은 도움을 베푸는 자와 그의 대립유전자에도 유익이 된다고 덧붙이고 있다.

이 책의 요지는 꿀벌의 진화 과정에서 성공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까닭은 초개체라는 꿀벌 군락에 있다. 다른 동물들이 개체에 직면하는 문제를 해결해나가면서 진화했다면 꿀벌은 집단 간에 협력 관계를 수립하였다. 이러한 능력에는 ‘복합적응계’라는 특성을 발휘하는데 “서로 병행적으로 끊임없이 행동하고 동료 행위자의 행동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많은 행위자들로 이루어진 역동적인 네트워크다.”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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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 당신들의 대한민국 세 번째 이야기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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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 운동으로 널리 알려진 간디는『마을이 세계를 구한다』에서 ‘수탁자 이론’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만일 내가 유산을 받거나 장사나 일을 해서 상당한 돈을 갖게 된다면 나는 그 모든 돈이 내게 속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된다. 내게 속한 것은 대다수 다른 사람들이 누리는 것보다 나을 것 없는 명예로운 생계수단의 권리이다. 내 재산의 나머지는 공동체에 속하고 공동체의 복지를 위해 쓰여야 한다.

오늘날 산업 자본주의 위기 속에 ‘복지’는 제국을 넘어서는 하나의 시스템으로 작용하고 있다. 적어도 인간의 생존권을 억압하는 방식에 맞서는 진보적인 가능성이라고 해도 좋다. 그래서 인지 우리 사회의 민감한 부위를 적나라하게 자극해왔던 박노자는『왼쪽으로, 더 왼쪽으로』에서 미래사회를 ‘복지 자본주의’라고 역설했는데 결코 우연한 일만은 아니었다.

그러면 그의 ‘왼쪽으로’는 혁명인가? 아니면 급진적 개혁주의인가? 이 책의 내용을 들여다 보면 급진적 개혁이 최선(最善)이고 혁명은 차선(次善)이라는 구분이 명확해진다. 그가 말하는 급진적 개혁은 피를 흘려 이 체제를 무너뜨리지 않고 쟁취할 수 있는 최대한을 의미하는 것이다. 가령, 대형 기업의 국유화, 토건 국가 예산을 교육, 복지 예산으로 전환, 부유층을 집중 겨냥하는 각종 부유세, 대학 평준화와 명문대 개념의 불식, 국방 예산 감축 등이다. 이를 위해서는 촛불집회나 총파업 같은 밑으로부터의 직접적 압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명박 정권에 대한 국민의 면도날은 날카롭다.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이 어느 때보다 후퇴하고 있는 탓에 “모든 게 이명박 탓”이라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그래서 촛불집회는 국가권력에 맞서는 대중들의 건전한 참여 방법이다. 그런데도 이명박 정권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더구나 좌파적으로 오도하고 그것도 모자라 토끼몰이 식으로 인권을 탄압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인권위원회를 대통령 직속으로 개편하려고 했던 것이 단순한 해프닝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명박 정권이 녹색성장이라고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있는 ‘4대강 살리기’는 정말로 우리의 경제를 살리는 것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결과적으로 4대강 살리기는 시대착오적이며 권위적이다. 저자 말대로 세계는 이미 수출국이 선진국이 되는 시대는 과거에 불과하다. 그 보다는 식량 위기 시대에서 식량 자급률을 높이는 것이 대세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경제 살리기’라는 구호아래 삽질 공화국으로 억척스럽게 땜질하고만 있다. 결과적으로 4대강 살리기에는 천문학적 예산을 집행하면서도 초등생 무료급식은 완전 삭감이라는 불균형 발전의 안타까운 현실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들은 이명박만 당선되면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고 낙관했다. 자영업자가 상대적으로 많은 한국에서 경제 대통령을 선택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경제 대통령에 잠재된 박정희 시대에 성공주의 이데올로기 및 죽은 독재자의 망령이라는 모순을 비판하는데 우리는 실패했다. 이로 인해 ‘식민지근대화론’을 긍정할 수밖에 없는 불행한 현실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러한 부작용이 가속화되는 현실에서 저자는 ‘왼쪽으로’ 저항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왼쪽이 지금의 ‘자본주의적 위계질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선의 대안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거듭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저자는 왼쪽이라는 ‘대듦’의 대중적 반란을 생각해보라고 우리에게 호소하고 있다. 즉 대중들이 현실의 문제를 외면하지 말고 제대로 인식하면서 자신감을 가질 때 비로소 다양한 방식의 저항과 비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순이 반복되는 한국 사회를 향하여 거침없이 쓴 소리를 쏘아대는 박노자의 진실은 불편했다. 하지만 저자 말대로 한국 사회가 미래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왼쪽으로 행진해야 한다는 각성은 의미심장했다. 더불어 왼쪽으로의 방향이 단순한 분노가 아니라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좀 더 정밀하게 다듬어져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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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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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였던가? 그때의 혼란스러움은 두려웠다. 추석을 보내고 귀경하는 길이었다. 어둠이 달라붙었을 때 이미 고속도로는 주차장이나 다름없었다. 끈적거리는 지루함이 못내 싫었을까? 운전을 하고 있던 친구가 국도로 달리자고 했다. 다행히 차의 속도는 빨라졌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질흙같이 어둡고 낯선 곳을 자동차의 하이빔 만으로 의지한 체 돌파하기에는 친구와 나는 나약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방향을 잃어버렸고 때로는 길을 헤매다 사고 날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초초하게 보내다가 문득 마을입구에 ‘생사리(生死里)’라고 적혀 있는 대리석을 지나쳤다. 생사리….

 
공지영의『도가니』를 읽고 나니 ‘생사리’가 떠올랐다. 무슨 까닭인지는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당혹스러움은 이 소설에 나오는 강인호 앞에 펼쳐진 무진과 생사가 다르지 않다는 데 있었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지도책과 도로 곳곳에 표지판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엉뚱한 길을 달렸던 것일까? 우리가 알고 있던 모든 것들이 그렇게 쉽게 어둠에 파묻혀 쓸모없게 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백지상태에서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구분하기 힘들다.

생사의 수많은 갈림길에서 공지영이 선택한 무진시(霧津市)는 암담했다. 무진 즉 안개가 1차적인 이유였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모든 것이 안개 탓이다.’라는 일종의 위선에 찬 인간들의 끔직한 현실이 유독 눈에 띄었다. 이것은 정말이지 감추고 싶고 드러내고 싶지 않은 추한 안개였다. 공지영 말대로 광란의 도가니였다. 남들과 달리 몸을 불편한 장애아에게 자의반 타의반 장애시설로 수용되는 것은 단지 그들만의 행복은 아니었다. 장애아를 보살펴야 하는 부모들, 더 나아가 이들 모두들 책임져야 할 자애(慈愛)학원에게도 행복이었다.

하지만 자애학원에서 잘 먹고 잘 놀아야 할 장애아들에게 행복은 멀리 있었다. 장애아들에게는 당장의 배고픔과 외로움이 눈앞에 있었다. 그래서 무차별적인 폭력을 가하는 선생들 앞에서 장애아들은 눈치를 봐야 했다. 이와는 달리 장애아들의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그들의 성(性)을 장난감마냥 가지고 놀았던 학원 이사장 앞에서 그들은 눈치를 볼 수 없었다. 눈치를 버려야 할 만큼 장애아들의 마음은 이미 병들어 있었다. 성폭행을 당한 장애아 중에서 한명은 절벽에서 떨어졌고 또 한명은 기찻길에서 사고를 당했다. 그러나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장애아들의 절박한 입장은 철저하게 가려졌다. 이 모두가 “안개 탓”이었다.

『도가니』를 통해 자애학원의 더러운 현실이 생생하게 드러났다. 장애아들을 성폭행한 짐승같은 학원 이사장 때문에 가슴 한 구석이 아릿하게 물컹거렸다. 그리고 이내 분노의 도가니가 되었다. 왜 사람들은 행복이라는 이름을 내세우며 불행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성폭행을 당했던 장애아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를 냉정하게 심판해야 할 법(法)은 전혀 119 구조대 같지 않았다. 오히려 가해자인 학원 이사장의 잘못을 한 순간의 불장난이라고 하면서 물러서고 말았다. 법마저 걷잡을 수 없는 양심이 시커멓게 타들어갈 지경이니 굳이 다른 사람들을 몹쓸 인간이라고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라는 자괴감이 맴돌았다. 정말이지 “학원 이사장과 장애아의 인권이 같은 줄 알아요?”라는 뜨끔한 질문에 “예‘라고 답하지 못했다. 학원 이사장의 잘못은 분명한데 재판 결과 놀랍게도 그는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 오히려 꼼짝 못하고 갇혀버리는 것은 정의(正義)였다.

책을 읽으면서 내 마음은 몇 번이나 벼락을 치면서 꽝꽝 울렸다. 맞딱드리고 싶지 않은 현실에 불편했다. 그리고 분노했다. “재판장 당신을 고소합니다. 당신은 죽은 거나 마찬가집니다.”라고 말하면서 사람들에게 호소하고 싶었다. 이렇게까지 법정에서 소란을 일으켜야 했던 것은 작가 말대로 진실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단점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진실이 게으르다는 것’이었다. 즉 ‘진실 아닌 것들이 부단히 노력하며 모순된 점을 자고 분을 바르며 부지런을 떠는 동안 진실은 그저 누워서 감이 입에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지도 모른다.’는 절망때문이었다.

진실의 경계(境界)! 지금 이 말이 대수롭지 않게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기간제 교사로 일했던 강인호가 자애학원의 비리에 맞서 싸우다가 끝내는 패배한 짐승이 되어 도망간 것을 굳이 탓할 까닭이 없어보였다. 만약 강인호같은 막막한 상황이었다면 나또한 그랬을 것이다. 눈 한번 감으라는 아내의 바람을 외면하고 남을 위해 그토록 자신있게 할 수는 있어도 부끄러운 자신의 결점이 드러날 때 설령 어렵게 진실을 얻었다고 해도 진실을 지켜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세상은 동화도 환상도 아니었다. 세상이 자기 뜻대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소설을 헤아려보면 그 안에는 공지영 만의 뜨거운 것이 담겨져 있었다. 작가의 전작을 읽어본 사람이 아니더라도 책을 읽고 이렇게까지 불편해지는 게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더 깊게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공지영에게는 인생의 절박한 냄새가 확 풍겨왔다.『도가니』도 예외는 아니었다. 도덕적 폐허 시대에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깨닫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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