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역설 - 과소비사회의 소비심리를 분석한 미래사회 전망 보고서
질 리포베츠키 지음, 정미애 옮김 / 알마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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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물질적 성공만으로 행복할 수 있을까? A. J. 크로닌의『성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처음에는 일 년에 1000파운드만 벌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만한 수입이 들어오자 곧 희망 금액을 두 배로 올리고 그 숫자를 최대치로 잡았다. 그러나 그 최대치에 도달하고서도 그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높여 나갔다. 가지면 더 갖고 싶었다. 그리고 그대로 갔다면, 그는 결국 파멸하고 말았을 것이다.’

이 소설에 나오는 그(앤드루)처럼 우리는 물질적 성공만으로 행복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물질적 성공으로 자신의 사회적 가치를 과시할수록 이러한 기댓값은 최대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기댓값이 끝이 없다는 것이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돈이 있는데도 역설적으로 그가 불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질 리포베츠키는『행복의 역설』에서 흥미롭게도 과소비사회를 분석하면서 현대인의 불행에 접근하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소비주의 3단계를 설득력있게 제시하고 있다. 즉 생산과 대중 마케팅의 1단계, 대중소비사회의 2단계 그리고 과소비사회의 3단계다. 특히 2단계인 대중소비사회는 물질적 안락함으로 인해 풍요로운 사회이며 욕망의 사회였다. 결과적으로 욕망이 양적으로 지배를 받았다.

그래서 3단계는 비소비사회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기 쉽다. 대중소비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한다면 아무래도 소비사회를 부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우리의 단순한 생각과 달리 과소비사회를 주장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상품과 불가분의 관계며 결국에는 소비하게 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 보다는 저자는 3단계에서는 우리가 수동적인 소비자가 아니라 능동적인 소비자 즉 ‘소비주체(consommacteur)'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개인의 사회적, 경제적 정체성이 아니라 문화적 정체성을 드러내는데 창조적 소비, 감정적 소비를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과소비사회라고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니다. 비록 질적으로 소비패턴이 변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행복의 추구에 대한 또 다른 갈등이 있다. 이것이 곧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행복의 역설’이다. 저자는 5가지 패러다임을 통해 과소비사회의 심리를조명하고 있다.

첫 번째는 페니아(Penia)다. 소비주의 사회는 끊임없이 욕구를 자극하는데 그런 만큼 상대적인 박탈감으로 인한 절망하는 사회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디오니소스다. 쾌락도시에서는 안락함과 풍요로움의 디오니소스다. 그러나 과소비사회에서는 유희-축제의 가치 기준이 확산되며 사실상 완전히 반디오니소스(anti-dionysiaque)다. 즉 개인이 디오니소tm적인 게 아니라, 개인은 자신의 만족을 위해 공동체를 도구화하며서 디오니소스적인 분위기를 소비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슈퍼맨이다. 실적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잠재력이 주요 결정 요소가 되었다. 완벽에 대한 집착이다.

네 번째는 네메시스다. 과소비사회는 투명한 사회다. 모두 보여주고 모두 말하고 모두 본다. 그러나 한편으로 개인의 사적 영역의 마지막 힘이 바로 질투심이다. 풍요로운 사회일수록 질투가 더 심하며 ‘모방의 지옥’에 따라 행복이 늘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는 호모 펠릭스다. 대중 미학의 소비시대에서 파괴적인 소비자가 아니라 책임감있는 소비자가 필요하다. 또한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미시 유토피아시대다. 개인의 자아도취에 따른 지혜조차 즉흥성과 감정이라는 ‘가벼운 지혜’가 되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완전한 행복을 추구하는 사회를 역설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즉 정복과 위험에 대한 열정이 높은 사회라는 것이다. 행복의 보편화 현상과 위험한 행동의 증가가 함께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3단계의 과소비사회에서 개인의 위치는 역동적이며 초개인주의다. 그래서 단순하게 소비재에 열광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행복을 정복하면서 재창조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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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이별 - 김형경 애도 심리 에세이
김형경 지음 / 푸른숲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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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세상에 통용되는 몇 가지 이별의 지침들이 있기는 했다. 떠난 사람은 깨끗이 잊는 게 낫다. 바쁘게 지내다 보면 곧 괜찮아질 것이다. 이런 때일수록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지내야 한다. 슬픔이나 고통은 혼자 조용히 처리해야 성숙한 사람이다. 그런 지침들은 그러나 마음의 고통을 덜어주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아니, 아픔이 더 오래 지속되게 만드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17쪽

그보다 좋은 것은 애도 작업을 통해 우리가 진정으로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대상 없이도 살아갈 수 있고, 혼자 힘으로도 잘해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자신감과 자율성이 강화된다. 그리하여 애도 작업이 끝나면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새에 한결 강하고 지혜로운 사람으로 변화하게 된다. 생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며 새로운 자기, 새로운 비전, 새로운 생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45쪽

'괜찬하'라고 말하지 않기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느냐고 인사할 때 '괜찮다'는 의례적인 답을 건네지 말고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한다. 여전히 좀 슬프다. 무거운 마음이 걷히지 않는다 등등. 감정을 표횬하는 것만으로도 내면의 문제가 조금씩 해결된다.-88쪽

정신분석은 늘 '지금 이곳'을 강조한다. 그 단어 속에는 과거나 미래에 살지 말라는 경고뿐 아니라, 현실 너머를 꿈꾸지 말라는 의미도 들어 있을 것이다. 환상은 의존성이나 나르시시즘처럼 성장하면서 버려야 하는 생존법이다. 그러지 않으면 외부 현실을 인식하는 눈을 갖지 못하게 되어 허공에서 비둘기를 꺼내고자 애쓰게 되기 때문이다.-106쪽

용기 있게 살아가기
세상의 모든 가치가 사라지고 생이 무의미해질 때, 그런 때조차 묵묵히 살아가는 것이 애도 작업의 일부이다. 인간 뿐 아니라 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의심이 생길 때, 의혹을 품은 채 신에게 경배하는 일이 삶의 일부이다. 실패나 실연을 무릅쓰고 다시 미래를 꿈꾸는 것, 밥을 먹는 자신에 대한 역겨움을 참아내며 계속 먹는 일이 바로 용기이다. -169쪽

울음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눈물은 한 사람의 가장 위대한 용기, 고통을 참고 견딜 수 있는 용기가 있음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간혹 어떤 이들은 겸연쩍은 얼굴로 자가가 울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나의 동료 가운데 한 사람도 눈물을 흘렸다고 고백했다. 그는 한때 부종에 시달라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부종의 고통에서 벗어나 있었다. 나는 그에게 어떻게 부종을 이겨냈는지 물었다. 그는 이렇게 고배했다.
"실컷 울어서 부종을 몸 밖으로 내보냈다네."-212쪽

용서하지 않을 자유, 용서할 수 있는 용기
정말로 용서하고 싶지 않다면 억지로 용서할 필요는 없다.용서하지 않고도 과거를 정리하고 화해할 수 있다. 하지만 용서하면,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용서할 수 있다면 가해자보다 강해졌다는 뜻이다. 진정한 자유는 용서한 사람이 받는 선물이다.-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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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비타 악티바 : 개념사 1
최현 지음 / 책세상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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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가 발전하면 민주주의가 성숙될 것 같은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촛불집회를 과잉 진압하는가 하면 표현의 자유마저 침해당하는 등 여러 가지 좋지 않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이것은 인권이 권력보다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시적으로 직장 내에서의 여성의 불평등은 위선적이다. 남성의 정신적 잔향이 아주 강하게 남아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대학 진학률에도 불구하고 여성 경제 활동인구는 최저 수준이다. 순전히 여성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어서 여기저기서 감정싸움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인권이 나빠지고 있는 현상이다.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며 얻을 수 있는 것은 인권이 무엇인지에 대한 기본적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그래서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부당함을 호소하는 것이 정당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기의 정의만을 절대화하는 한계에 부딪치면서 사회의 분열을 초래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가 제대로 알아야 할 인권(Human Right)이란 무엇일까? 최현의『인권』은 이 물음에 대해 개념사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인권이라는 하나의 주제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인권의 역사를 다루면서 인권에 대한 인식을 넓혀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인권이 당면한 문제에 대해 어떻게 확대되었는지 깊이 있게 답하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고 추정되는 권리’로 정의되는 인권은 보편적 가치이며 오늘날 ‘지구적 가치’로 전환되었다고 했다. 하지만 인권을 둘러싼 다양한 논쟁을 관찰하면서 저자는 아직까지 당위적인 가치에 머물러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정체성은 현실에 바탕을 둔 시민권(Citizen Right)을 통해 인권을 바로 보지 않았다는 문제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인권이 도덕적, 당위적, 추상적인 권리라고 한다면 시민권은 제도적, 법적, 현실적인 권리였다. 그래서 저자는 사회 문제를 정의롭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권이라는 당위적 가치를 근간으로 하여 시민권과 연계하여 파악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시민권의 역사를 살펴보면 고대의 고전적 시민권에서 근대의 보편주의적 시민권(온전한 시민권)으로 그리고 현대의 사회권으로 확대되었다. 인권과 달리 시민권에는 ‘의무와 권리가 함께 한다,’는 원리에 근거한다. 그러나 시민권이 사회를 통합하는 과정의 이면에는 여전히 개인주의-보편주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 물론 자본주의 시장 논리도 빼놓을 수 없다. 결과적으로 다양한 소수자 집단들은 여전히 필요한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여성들의 불평등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했던 아이리스 영(Iris Marin Young)의 ‘집단 인지적(group-differentiated) 시민권’은 공동체 방안이다. 그녀에 따르며 더욱 공정한 시미권이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것은 ‘사회 경제적 지위 때문에 온전한 시민권에서 배제된 것이 아니라 문화적, 심리적, 신체적 정체성 때문에 차별’을 받는다는 것이 그녀의 견해였다. 저자도 이 점을 분명히 하면서 개인주의적 보편주의라는 부당한 불평등을 줄여 사회 통합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고 전망했다.

이 책을 통해 인권에 대한 욕구는 대하여 이것을 실현시키는 시민권 제도의 개선이 필요한 상황을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인식은 인권에 대한 편향적 사고에서 벗어나 인권을 확대, 심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바야흐로 국민적 시민권에서 지구적 시민권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소수자들에게 대한 관심이 절실할 때이다. 그래서 다문화 시민권의 존중이야말로 진정한 인권의 회복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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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독서 - 세상을 바꾼 위험하고 위대한 생각들
유시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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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이점은 무엇일까? 엘빈 토플러는『부의 미래』에서 가슴에 새길만한 몇 가지를 말했다. 그중에 지식은 원래 비경쟁적이라는 것이다. 즉 지식은 수백만 명이 사용하더라도 감소되지 않으며 수백만 명이 똑같은 지식을 사용할 수 있다. 사실 사용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더 많은 지식을 생성해 낼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이다. 또 하나, 지식은 명시적일 수도 암시적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식은 표현될 수도 표현되지 않을 수도 있다. 혹은 타인과 공유하거나 자기 마음속에 간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탁자, 트럭이나 다른 유형의 물건들은 마음속에 간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 스스로를 ‘지식소매상’이라고 부르는 지식인이 있다. 바로 끊임없이 읽고 쓰는 유시민이다. 18세기 이덕무가 스스로를 ‘간서치(看書痴)’라고 자신의 습관적 사고를 말했다면 21세기 유시민은 이러한 관성의 법칙에서 변화해왔다. 다시 말하면 책에서 지식으로, 바보에서 소매상이라는 진보적인 사고방식으로 내면적인 성장을 계속 해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저자가 단순히 다른 사람의 정신 궤적을 따라가는데 만족했다면 그의『청춘의 독서』는 빛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이 책에서 밝히고 있듯 그는 아널드 토인비가 말한 ‘역할의 전도’현상에 적응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토인비의 역사는 도전과 순응의 연속이라는 말에 주목했다. 그러면서 그는 시대가 바뀌고 도전의 성격이 달라지면 응전에 성공하는 주체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한편으로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명확한 지를 반성하면서 앎의 절실함을 고백하고 있다. 가령, 랑케의『젊은이를 위한 세계사』를 읽으며 ‘역사는 발전하거나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리저리 변화할 따름이라는 것’을 믿었다. 하지만 E. H. 카의『역사란 무엇인가』를 읽게 된 후 비로소 지식인의 고뇌 즉 무지의 자각이 충격적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럴수록 그는 더욱 진보적 지식인이 되었다. 

진보는 곧 E. H. 카의『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이성의 이름으로 그 제도와 그것을 떠받치는 공공연한 또는 은폐된 가설에 근본적인 도전을 감행한 대담한 결의’였다. 그래서 그는 알고 있는 사실들에 대한 역사가의 임무는 랑케의 ‘가위와 풀’로 만든 것이 아니라 E. H. 카가 말한 ‘자루’와 같다는 것에 공감했다. 즉 가위로 오리고 풀로 붙이는 것이 아니라 자루에 무엇인가를 넣어주지 않으면 사실은 일어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지식인의 의무는 지식을 일어서게 하는 것이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저자가 지식의 자루에 담았던 것은 고전 작품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전을 낡은 지도라고 달리 불렀던 것은 세상의 부조리함에 방법적인 회의를 했던 청춘을 고전 작품들과 동고동락했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을 바꾼 위험하고 위대한 생각들’과 대화하면서 자신의 신념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자신의 신념을 명확하기 위해 또 다른 고전을 읽고 읽었다. 이러한 지나한 독서를 통해 그는 그릇된 편견과 고정 관념을 극복할 수 있었다.

가령, 도스토옙스키의『죄와 벌』을 읽고 사회악을 어떻게 바라 보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 이 소설에서 라스꼴리니꼬프는 전당포 노파를 살해한다. 이유는 전당포 노파가 사회악이기 때문이었다. 니체의 초인(超人)사상에 따르면 선한 목적은 악한 수단이 정당화될 수도 있다. 혹은 도스토옙스키처럼 “아무리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하더라도 인간은 악한 수단을 사용한 데 따르는 정신적 고통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악한 수단으로는 선한 목적을 절대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20대에 마지막으로 읽은 고전이었던 헨리 조지의『진보와 빈곤』에서는 문명이 발전해도 빈곤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를 재조명하고 있다. 이 책에서 헨리 조지는 문명이 발전해도 단순 노동의 임금은 오르지 않으며 오히려 지대(地代) 즉 토지 가치가 오른다고 했다. 그의 지대이론에는 토지의 경제적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리카도가 말한 토지의 비옥도가 아니라 토지의 위치라고 설득력있게 주장했다.

유시민의『청춘의 독서』를 유쾌하게 읽으면서 고전 작품들의 실체를 만날 수 있었으며 그 가치를 새삼 깨달았다. 흔히 고전이라고 하면 꼭 읽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마크 트웨인이 “고전 문학을 누구나 다 읽고 싶어 했으면서도 실제로는 아무도 읽고 싶어 하지 않는 것들”이라고 지적했던 고전콤플렉스에서 누구나 자유롭지 못한 게 우울한 현실이다.

저자는 이점을 우려하면서 고전을 읽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동시에 고전에 나와 있는 단편적인 주요 사상하나만으로 마치 고전을 다 앍고 있다는 착각의 오류에 대해 따끔한 충고를 아끼지 않고 있다. 이것은 훌륭한 독서가 아니며 ‘좋은 책은 그 자체가 기적이다.’라는 저자의 진심을 거부하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삶을 치유하고 변화시킨 책들은 많다. 이러한 책 속에 담긴 지혜와 지식은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삶의 나침반이 되어 줄 것이다. 유시민이『청춘의 독서』에서 언급했던 고전 작품들은 여전히 녹슬지 않는 주옥같은 책들이다. 그렇기에 세계를 보다 열린 눈으로 사유할 수 있도록 있게 해준다. 그리고 이러한 사유의 힘을 자신의 머릿속에만 담아두지 않고 타인과 소통하고자 하는 저자를 보면서 지식은 탁자가 아니다, 라는 강한 인상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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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마리아인들 - 장하준의 경제학 파노라마
장하준 지음, 이순희 옮김 / 부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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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발전이라는 미명아래 삽질공화국이 대한민국의 4대강을 파헤치고 있다. 오로지 인간만을 위한 경제이다 보니 4대강 하나쯤 희생양이 되는 것쯤이야 ‘나쁜 사마리안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4대강이 아니더라도 무분별한 개발 독주는 맹렬하게 확산되어 왔다. 이런 상황에서 4대강만 특별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은 합리적 선택이라는 궁색한 변명에 불과할 따름이다.

이러한 폭력적인 방식은 한 나라의 경제성장의 지표에서 찾을 수 있다. 세계적으로 GNP에서 GDP 체계를 사용하고 있다. GNP는 한 나라가 소유한 생산요소를 국내외의 생산활동에 투여한 대로 받은 소득을 산출하는 ‘소득지표’다. 반면에 GDP는 국내에 있는 모든 생산요소를 결합하여 만들어낸 최종생산물의 합인 ‘생산활동지표’다. 거시경제에서는 GNP가 경제성장의 지표였으나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GDP의 체계가 되었다. GNP가 국내경기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선택이었다.

세계 경제가 빠르게 세계화로 변하고 있다. 쉽게 말하자면 시장을 개방하면 한 나라의 경제 문제는 시장의 자연적인 힘으로 해결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시장자유주의가 필수다. 이른바 탈규제, 최소국가론이라는 구조조정을 통해서 모든 나라가 ‘하나 밖에 없는 최선의 모델(one-best way)'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모델의 장밋빛 미래는 전 세계의 모든 국가는 비슷한 정도로 성장하고 부유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낙관적인 기대와 달리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하나 밖에 없는 모델이란 미국식 자본주의를 말한다. 이 모델은 신자유주의를 목표로 하고 있다. 자본주의 역사에 있어 19세기 고전적 자유주의는 획일적으로 통일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 칼 폴라니가『거대한 전환』이라고 부른 대변동을 거치면서 자본주의의 다양성이 생겨났다. 즉 자기 나라의 실정에 맞는 자본주의를 발전시켰다. 그런데 1980년 대 이후 신자유주의 경제학이 본격화되면서 세계는 자본주의의 다양성이 다시 위기를 맞고 있다. 그래서 세계는 시장을 전폭적으로 개방하는 ‘우월한 자본주의’와 시장 개방을 억제하는 ‘열등한 자본주의’가 있을 뿐이라고 우려의 목소리가 팽배하고 있다.

장하준은『나쁜 사마리아인들』에서 미국식 자본주의에 대하여 가장 명료하게 공세를 펼치고 있다. 그만큼 우월한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잘 파악하고 있다. 노엄 촘스키가 이 책을 ‘현실로서의 경제학’이라고 추천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세계화를 통해 경제성장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장주의 충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충돌이 불공평하게 진행된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그래서 독일식 자본주의를 주장했던 리스트는 ‘사다리를 걷어차 버렸다.’고 비난했다. 즉 정상의 자리에 도달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뒤따라올 수 없도록 자신이 타고 올라간 사다리를 걷어차 버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앞서 말했듯 미국식 자본주의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위반한 결과였다. 높은 관세와 광범위한 보조금으로 국가가 경제시스템을 장악하면서 오늘날 잘 사는 나라가 되었다. 그런데도 다른 나라들에게는 자유무역을 일관되게 실천해온 최상의 국가라고 하면서 유인하고 있다.

세계 경제의 악순환을 부각시키고 있는『나쁜 사마리아인들』의 내용을 보면 ‘세계화에 관한 신화와 진실’을 알리는 데 있다. 저자에 따르면 토머스 L 프리드먼의『렉서스와 올리브나무』를 다시 읽는데서 시작하고 있다. 토마스 L 프리드먼은『렉서스와 올리브 나무』에서 새로운 글로벌 패션을 주장했다. 냉전 시대에는 인민복, 네루 의상, 러시아의 가죽 모자와 가죽 코트가 있었다. 그러나 세계화 시대에는 오직 황금 구속복(golden straitjacket) 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황금 구속복은 곧 세계화 시대를 규정짓는 정치, 경제적 의복이었다.

저자는 황금 구속복을 입고자 하는 나라는 16가지 황금률을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령,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폐지하거나 인하할 것, 외국인 투자를 저해하는 규제를 폐지할 것, 공기업과 수도, 전기, 가스 등 국유 사업이나 공익사업을 민영화할 것, 자본 시장에 대한 규제를 완화할 것 등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황금 구속복을 입어야 세계화가 덫이 아니라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만약 방직기 제조사로 출발한 도요타가 프리드먼 말대로 황금 구속복을 입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렉서스를 수출하는 국민이 아니라 누가 뽕나무를 차지할 것인지를 놓고 싸우는 국민이 되었을 것‘이라고 비유한 저자의 통찰력을 폄하해서는 안 된다. 이쯤에서 우리가 주지해야 할 사실은 세계화의 상징이 된 렉서스와 반세계화의 상징이 된 올리브나무의 역학 관계다. 돌이켜보면 렉서스와 올리브나무는 불가분의 관계다. 렉서스인 동시에 올리브나무여야 한다.

다음으로 부패하고 비민주적인 나라에는 등을 돌려야 하는가? 에 있다. 저자는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신자유주의 정책의 실패에 대한 변명으로 부정부패를 부당하게 이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 신공공관리(New Public Management)을 통해 부정부패를 줄일 수 있다고 했지만 ‘시장의 힘이 지나치게 작아서가 아니라 지나치게 크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부정부패의 원칙을 간과한 나머지 실패하고 마는 것을 역설적으로 경고했다. 그리고 시장과 민주주의에 있어 결코 자유시장과 민주주의는 타고난 짝이 아니었다. 민주주의가 1인 1표라고 한다면 시장은 1달러 1표의 원리였다. 이로 인해 ‘강한 긴장’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끝으로 문화는 경제 발전에 영향을 미치는가? 를 살폈다. 보통 가난한 사람들의 특징으로 게으름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저자는 ‘국민들이 게을러서 나라가 가난한 것이 아니라 가난하기 때문에 국민들이 게으른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경제와 문화의 관계에 있어 경제를 발전시키기 전에 먼저 문화 혁명을 단행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앞서 말했듯 경제 발전이 문화에 미치는 영향이 훨씬 더 크며 문화의 재발명에 있어 그를 뒷받침하는 경제 구조와 제도의 변화가 뒤따라야 한다고 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속셈을 파악하게 되었다. 세계화라는 승자독식 게임에서 그들은 줄기차게 ‘경기장을 평평하게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 왔다. 그러나 저자는 ‘기울어진 경기장’이어야 한다고 독특한 주장을 펼쳤다. 경기장의 높은 쪽이 개발도상국이고 낮은 쪽이 선진국이어야 한다. 그래서 평평한 경기장에서는 불공정했던 게임이 오히려 기울어진 경기장에서는 공정해진다는 것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하나 있다. 조지프 스티클리츠가 “GDP가 보여주는 숫자 너머를 봐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매일 같이 일하고 주말에도 쉬지 않는다면 GDP는 증가하겠지만 모든 사람들이 더 행복해진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을 떠올리게 했다. 세계화를 단순한 성장 논리만으로 질주한다면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그만큼 삶의 질을 나타내는 ‘인간개발지수(HDI)’는 밑바닥 수준에 불과할 것이다. HDI는 아마르티아 센 교수의 ‘역량’ 개념을 기초로 하고 있는데 행위자가 자신의 목적, 지향, 가치 등을 실제로 수행할 수 능력을 말한다. 따라서 세계화라는 자본주의의 단일성이 가진 한계를 제대로 인식하고 자본주의의 다양성이 희망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유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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