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 나만의 질문을 찾는 책 읽기의 혁명
김대식 지음 / 민음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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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동물보다도 말하는 능력이 탁월한 사람들은 질문을 합니다. 뭔가에 대한 호기심 내지 궁금증을 참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질문이란 무엇일까요? 언어학자 촘스키는『촘스키의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에서 질문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문제이며 다른 하나는 미스테리입니다. 문제는 인간이 풀 수 있는 질문입니다. 반면에 미스테리는 인간이 풀 수 없는 질문입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너무나 분명하고도 단순합니다. 질문이 원인이라고 한다면 문제나 미스테리는 그 결과로 보입니다. 혹은 질문에 대한 대답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통해 삶의 지혜를 듣게 됩니다. 질문보다는 상대적으로 대답이 인생을 더 배울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뇌과학자 김대식 교수의『어떻게 질문을 할 것인가』는 생각의 차원이 다릅니다. 비록1.4kg 불과한 뇌이지만 우리의 모든 고민은 질문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즉, 대답에 앞서 질문을 찾아야 한다고 논리적으로 말합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질문하는 것은 가짜 질문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질문을 하면서 동시에 질문을 무색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질문할 수 있는 질문을 해야만 합니다. 질문은 ‘깊은 생각(Deep Thought)'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질문은 쉽게 잊히지만 어떤 질문은 잊히지 않습니다. 잊히는 듯하다가도 어떤 순간에 다시 떠오릅니다. 말하자면 다시 떠오르는 질문은 사실상 우리 주위를 계속 맴돌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일상에서 부딪치는 문제의 내용에 따라 다시금 우리의 생각 속으로 파고들어옵니다. 깊은 생각은 다시 떠오르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듣는 것만으로 질문하는 것은 어느 정도 한계가 있습니다. 이럴 때 깊은 생각은 보거나 들었던 것을 상상하면서 본래의 그것과 얼마든지 다르게 볼 수 있게 해줍니다.

 

 

그런데 저자는 다시 떠오르는 질문을 책 속에서 찾고 있습니다. 책을 읽으면 박학다식해진다는 생각에 몰두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저자의 탐서주의(耽書主義)는 아주 일상적이며 깔끔합니다. 명쾌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책은 배터리가 필요 없다. 언제나 ‘켜 있고’ 인터넷도 필요 없다. 원하는 페이지로 바로 이동할 수 있고, 무게도 가볍다. 거기다 가격도 저렴하니 말 그대로 최고의 사용자 경험을 줄 수 있다.

그리고 책은 또 하나의 비밀을 가지고 있다. 바로 인간의 뇌가 몰입하기에 가장 적절한 형태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책을 펴면 세상이 보이지 않는다. 눈은 글을 읽지만, 뇌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낸다. 읽는 자에게 새로운 만들어 줄 수 있는 책.(74p)

 

 

뇌과학자가 책을 선택한 이유는 책의 물리적 특성이 사용자들에게 최고라는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굳이 책이 아니라도 사용자들에게는 정보를 얻는 다양한 채널들이 있습니다. 컴퓨터나 스마트 폰을 이용하여 정보를 쉽고 빠르게 검색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배터리가 없다면 아무 쓸모없는 물건이 되고 맙니다. 그 순간, 우리는 어둠처럼 막막한 막힘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하지만 책은 다릅니다. 배터리를 충전하지 않아도 언제나 깨알 같은 글씨들이 정확하게 빈틈없이 살아있습니다. 살아있으면서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그저 그런 세상이 아닌 새로운 세상을 만들게 합니다.

 

책의 존재 목적은 다른 것들도 많겠지만 책은 말의 재단사입니다. 그중에서도 저자는 우리들에게 ‘어떻게 질문을 할 것인가’를 말하면서 질문을 찾고 있습니다. 이 책에는 32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문학, 과학, 철학, 예술을 넘나드는 질문의 경계는 없습니다. 단 하나의 경계, 그것은 바로 세상을 발견하며 자시만의 언어로 의심해야만 합니다.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이 질문할 수 없는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고민도 없이 쓰여진 문장들은 단순한 자음과 모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것, 이것은 소통이 아닌 불통이며 희망이 사라진 문장을 고민하게 합니다.

 

 

저자의 질문을 다시 한 번 훑어보게 되면 ‘함께 혼자’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혼자 밥 먹고 혼자 술 먹는 혼밥과 혼술의 문화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남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번거로움은 어느 새 사르트르가『닫힌 방』에서 말했듯 지옥으로 변합니다. 타인이 곧 지옥이라는 것. 더구나 인생을 경제적인 교환의 가치로만 본다면 지옥은 그만큼 몇 곱절로 늘어나게 지요. 하지만 인생 전체를 본다면 ‘나 홀로’ 문화는 개인적인 이기심의 최대화이며 인간답게 잘 살고 싶다는 것도 해묵은 논리가 되고 맙니다. 오히려 삶의 가치를 고민하다 보면 나 홀로를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새로운 확신이 생겨납니다. 이유인즉, 인생은 외롭지 않을 정도로 함께 하면서도 결국 나 홀로 가야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질문은 미래에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두려움입니다. 인간은 인공지능(AI), 로봇기술이 주도하는 4차 산업혁명을 발전시키면서 ‘포노 사피엔스(phono sapiens, 스마트인류)'로 진화했습니다. 스마트인류의 핵심은 기술의 인간화입니다. 가령, 미국 시애틀에 생긴 무인(無人) 대형마트 ‘아마존 고(Amazon Go)'에는 점원도 계산원도 없습니다. 스마트한 인류가 될수록 기계 또한 스마트한 기술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계와 융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계와 경쟁하면서 살아남아야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정체성입니다. 유발 하라리가『호모데우스(Homo Deus』에서 지적하고 있듯, 미래에 신과 같은 인간이 되었다고 해도 기술의 힘보다 더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인간성입니다. 비약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성 없는 인간은 스마트한 기계보다 더 위험한 존재로 변모해 갈 수 있습니다.

 

 

고야의 판화 『변덕』 43번의 제목을 보니「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입니다. 제목 그대로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나타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김대식의『어떻게 질문을 할 것인가』의 8번 제목은「대답에 앞서 질문을 찾아라」는 것입니다. 질문을 잘 모른다면 대답은 엉뚱해집니다. 삶의 관념으로 볼 때 고야의 이성과 김대식의 질문은 지적인 아름다움을 갈망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바라는 것은 무엇을 아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진실을 이야기하는 데 있습니다. 때로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야겠지요. 그러나 책을 통해 인생을 다시 물으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지가 아니라 어떻게 질문할 것인지를 궁리하게 합니다. 세계가 품고 있는 문제에 대해 질문은 우리의 맥박을 되살아나게 합니다. 질문은 질문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질문에 또 다른 질문을 더함으로써 더 많은 질문을 만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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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꿈이 나에게 말해주는 것들 - 프로이트도 놓친 꿈에 관한 15가지 진실
슈테판 클라인 지음, 전대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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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인생의 3분의 1 동안 잠을 자면서 보낸다. 동시에 꿈을 꾼다. 그런데도 꿈에서 깨어나면 꿈을 제대로 기억하기란 힘들다. 또 하나, 꿈의 파편은 아주 다양하더라도 불완전하며 엉뚱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꿈은 정말로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까? 우리가 아는 정도는 프로이트가『꿈의 해석』에서 말한 대로 꿈을 무의식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꿈은 과거의 트라우마를 반복하는 셈이다.

 

그런데 슈테판 클라인은 다양한 꿈의 분석을 통해『어젯밤 꿈이 나에게 말해주는 것들』에서 흥미로운 주장을 펼치고 있다. 바로 “꿈의 힘을 활용하면 인생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문제에 대해 과학을 비롯하여 철학, 정신분석을 넘나들며 꿈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이해하기 쉽게 펼치고 있다. 대부분 우리는 꿈을 무시한다. 밤보다는 낮이 우리 생활의 주된 공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밤을 무시하면 우리 몸속에 살고 있는 영혼을 느낄 수도 없으며 만날 수도 없게 된다.

 

우리가 꿈을 꾸는 것은 삶의 되돌림이 아니라 연장선이다. 그런 만큼 꿈의 의식을 통해 우리는 삶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다. 만약에 꿈이 프로이트가 말한 대로 ‘낮의 잔재(Tagesrete)’에 불과하다고 한다면 우리는 삶을 수동적으로 지켜보는 관찰자가 될 것이다. 반면에 우리는 얼마든지 꿈꾸는 동안에도 미래를 능동적으로 바꿀 수도 있다. 꿈이 과거를 해석하는 것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오히려 꿈은 과거인 동시에 현재며 미래다. 놀랍게도 우리는 꿈꾸면서도 학습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의 새로운 지식을 다음과 같이 살펴볼 수 있다.

 

우리의 발상과 기억과 지각이 오로지 낮의 삶 덕분에 가능하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잠은 휴식기간이 아니라 매우 다양한 상태의 연쇄이며, 그 상태에서 뇌는 과거의 흔적을 정리하고 미래의 과제를 준비하고 앎을 획득한다. 꿈꾸기가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끝으로, 우리가 꿈을 통해 알게 되는 수수께끼 중에는 ‘불안하니까 꿈을 꾼다’는 것이다. 꿈을 꾸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 아니라는 것. 이유인즉 꿈을 지배하는 진정한 주체는 감정이며 꿈에 나타난 시각적 이미지들은 환영이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런 환영에 상징적 의미를 두거나 해석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꿈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는 것, 이것이『어젯밤 꿈이 나에게 말해주는 것들』에 알맞은 진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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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품격 - 조선의 문장가에게 배우는 치밀하고 섬세하게 일상을 쓰는 법
안대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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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처럼 글을 쓰면 얼마나 좋을까? 책을 읽고 떠오르는 생각을 블로그에다 쓰다 보니 이런 바람이 어제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서투르고 빈약한 내 문장에 비해 작가의 문장은 물이 흐르듯 막힘이 없다. 막힘이 없는 탄탄한 문장을 읽으면 답답했던 가슴 한 구석이 시원해진다. 어디 그뿐인가? 어느 순간 무릎을 탁 치게 만들며 잠들어 있던 오감을 깨어나게 한다. 그러니 작가처럼 글을 쓰려고 한 시절을 보낼 때 좋은 문장을 만나는 것은 오랜 벗을 얼싸안으며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기쁘지 않을 수 없다.

 

문장을 좋게 하는 규칙 혹은 기술과 방법은 많다. 하지만 좋은 문장은 설득의 대상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이렇게 다듬고 저렇게 다듬었다면 비록 규칙에는 어긋나지 않겠지만 죽은 문장일 뿐이다. 규칙에 대한 집착이 좋은 문장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은 별개의 문제다. 아무리 문장을 좋게 하는 규칙이라고 하더라도 ‘글맛’이 없다고 하면 좋은 문장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글맛이란 글을 읽게 만드는 것이다. 글맛이 나야 책을 읽을 수 있으며 읽고 나서도 충분히 배부를 수 있게 된다.

 

안대회의『문장의 품격』을 읽으면서 ‘글맛’이라는 의미를 깨달았던 것도 이러한 이유가 없지 않았다. 이 책에는 허균, 이용휴,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이옥, 정약용 등 조선의 문장가들이 시공을 초월하여 소개되고 있다. 이른바 ‘조선의 파워블로그’로 불리는 그들이 말하는 문장의 품격이란 ‘치밀하고 섬세하게 일상을 쓰는 법’이다. 좋은 문장이라고 해서 꼭 논리적으로 써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좋은 문장을 비논리적으로 써야 하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장르를 떠나서 자유롭게 생각한 것을 진실하고 담백하게 쓰는 것이다.

 

조선 명문가의 문장은 파격적이다. 기존의 낡은 사상과 정서를 답습하는 고문(古文)이 아니었다. 대신에 아주 다양한 일상적인 모습을 개성이 넘치며 실험적으로 그려낸 소품(小品)이다. 가령, 문호(文豪)인 동시에 문제적 작가인 박지원의 산문은 그만의 개성이 넘치는 문체를 보여 ‘연암체(燕巖體)’라고 불릴 만큼 큰 영향을 끼쳤다. 박지원에게 글의 격식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만큼 글의 소재는 무엇이든지 될 수 있었다. 오직 먹물에 듬뿍 묻힌 법고창신(法古昌新)이라는 창작력으로 독특한 색채를 창조해냈다.

 

한편으로, 스스로를 간서치(看書痴)라 부른 이덕무는 ‘문단을 뒤흔든 낯선 문장’이라는 자기 고유의 색깔을 창작해냈다. 그의 치열한 문학정신을 잘 표현한 ‘나비의 비유’를 잠시 감상해보면 다음과 같다.

 

진짜에 바짝 다가서고 몹시 닮은 것이라 해도 하나같이 제이(第二)의 자리에 머무는 법. 핍진(逼眞)하고 닮았다는 것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다시 한 번 똑똑히 살펴보라! 본연의 바탕을 먼저 볼 수 있어야 가짜에 막힘을 당하지 않는다. 온갖 가지 수많은 물상(物象)은 이 나비의 비유를 법으로 삼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 7인의 조선 문장가의 문장은 모호한 구석이 없다. 인생의 치열함에서 건져올 린 생각이 투명하고 분명하다. 허균은 비판적이며 이옥은 희작적이다. 이렇듯 조선의 파워블로그 7인은 다른 글쓰기를 보이면서 다른 삶을 살았다. 문장은 글쓴이의 생각만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문장은 글쓴이의 인격이며 인격은 곧 문장의 품격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니 좋은 문장은 좋은 인격이며 동시에 좋은 예술이라는 것이다. 고전 산문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그래서 좋은 예술이란 박제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입맛’이 나야 한다. 맛이 없으면 우리는 먹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글이 아니면 우리는 읽을 수 없다. 그래서 누군가 글맛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입맛’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입맛이 글맛에 대한 최고의 감각이기 때문이다.

 

* 출판사에서 제공해준 책을 읽고 서평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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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위화,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다
위화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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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데, 이제 10년은 너무 긴 세월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루에도 몇 번이고 변하는 세상을 볼 때마다 현기증이 날 정도다. 그러니 격변하는 시대를 통과한 사람들은 오죽하겠는가? 더구나 거대한 변화의 역사를 겪은 이야기라면 더 말할 것이 없다. 오늘날 우리는 경제 성장이라는 불행한 현실 구조에서 살고 있다. 국민 소득이 적다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문제는 경제적 불평등 때문에 불행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제 성장이 물질적 풍요로움을 가져다주었다고 해서 세상이 좀 더 행복하거나 좀 더 정의로워졌는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과거와 현재가 서로 대화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요구된다.

 

이런 상황에서 왜 우리는 소설가 위화의『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를 읽어야만 하는지 궁금하다. 위화의 삶에는 마오쩌둥의 흑백 시대부터 등소평의 컬러 시대까지 지난 30년의 중국의 일상적 모습에 담긴 역사적 층위가 켜켜이 쌓여 있다. 흑백 시대에는 정치논리였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컬러시대에는 경제논리였다. 사회적 변화의 속도에 발생하는 각종 이데올로기들이 날카로워지면 개인은 국가의 운명에 상처를 입게 마련이다. 이 연장선상에서 작가의 실천적 삶은 현재 우리 사회가 참으로 뼈아프게 요청하는 ‘공공 지식인의 가능성’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책에서 작가는 인민(人民), 영수(領水), 독서, 글쓰기, 루쉰, 차이, 혁명, 풀뿌리, 산채(山寨), 홀유(忽悠) 등 10 개의 키워드를 통해 중국의 고통을 들려주고 있다. 그중에서도 작가의 목소리가 아니었으면 알 수 없었을 산채(山寨), 홀유(忽悠) 등 낯선 단어를 생각한다면 중국의 고통은 만만치 않은 주제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고통의 무게에 눌리지 않아도 되며 오히려 쉽게 페이지를 넘길 수 있게 된다. 단순히 세태 한탄이라고 한다면 모를까, 10개의 단어는 그 시대의 신산한 풍경을 마주하게 했으며 중국의 고통을 다른 각도에서 들여다 보게 했다.

 

그 다른 각도 중에 있어 무엇보다도 삶과 글쓰기는 끝없이 나뉘는 갈림길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타인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었을 때, 나는 진정으로 인생이 무엇인지, 글쓰기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이 세상에 고통만큼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쉽게 소통하도록 해주는 것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고통이 소통을 향해 나아가는 길은 사람들의 마음속 아주 깊은 곳에서 뻗어 나오기 때문이다.(353p)

 

남의 고통은 나의 고통과 어느 정도 상관성이 있는지 모호하다. 그럼에도 남의 고통에 귀 기울이며 공감하게 되면 그 순간 남의 고통과 나의 고통은 투명하게 된다.  이 책에서 작가가 자신의 경험을 우리들과 나누려고 하는 것도 이와 같을 것이다. 중국의 고통이 그의 고통이며 더 나아가 우리의 고통이기 때문이다.

 

비록 현실은 참혹하다고 해도 작가의 글쓰기는 버릴 수 없거나 버려서도 안 되는 희망이다 . 삶이 곧 글쓰기가 되며 그런 순간 또 다른 고통과 마주할 것이다. 그러나 이 고통은 소통의 언어가 될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가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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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의 밥도둑
황석영 지음 / 교유서가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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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방 때문이었을까? 먹는 것을 볼 때마다 당장에라도 먹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알려진 맛집을 굳이 찾아나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꿀맛’도 부족해 ‘핵꿀맛’이라고 하지 않은가? 우리는 배고픔을 참을 만한 용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만큼 먹는 것은 삶의 시작이기 때문다. 어디 그뿐인가. 음식을 먹었던 그 시간만큼 삶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먹방의 시대에서는 삶을 사랑하는 마음이 좀처럼 생겨나지 않는다. 꿀맛나는 음식을 먹었는데도 어딘가 모르게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해 그렇다. 어떤 특별한 의미도 없이 먹는 게 비슷비슷하다. 먹방은 살아갈 방법이 아니다. 단지, 그냥 먹고 싶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황석영이 담아 낸 음식이야기『황석영의 밥도둑』은 요새 유행하는 먹방이 아니었다. 먹방의 관심사는 앞서 말했듯 꿀맛에 있다. 꿀맛이 아니면 ‘노맛’. 지금의 입맛으로 따지면 이 책은 분명 노맛에 가깝다. 하지만 노맛은 우리가 잃어버린 세계에 대한 영영 식지 않는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돌이켜보면 이 책에 나오는 다양한 음식을 만든 사람들은 요리사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다.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음식의 낭만성을 찾고자하는 것은 궁핍한 삶에 대한 판타지에 불과한지 모른다. 그러니 궁핍하고 절박한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 음식은 ‘밥맛’을 소박하게 채워주었을 것이다.

 

 

사람은 저마다 특별한 밥맛을 가지고 있다. 특별함은 곧 그리움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움이 생각날 때마다 맨 먼저 우리 곁을 떠난 사람에 대한 추억이 앞선다. 혹 떠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떠나갈 사람에 대한 추억이다. 바로 추억의 존재는 어머니다. 어머니가 차려주신 밥상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잊을 수 없어 그때를 생각하며 음식을 만들어보아도 그 밥맛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눈물을 감출 수 없어 결국에는 ‘눈물맛’을 먹고야 만다. 그렇게 눈물맛을 먹고 나서도 또 무슨 그리움을 만들어줄 것처럼 멈추지 않는 눈물맛을 만들고 만다.

 

 

한편, 눈물맛은 어딘가에 숨어 있는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게 해준다. 저자의 표현을 빌려보면, 외로울 때, 힘들 때, 아플 때, 슬플 때,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나 정든 가족들과 함께 나누었던 음식을 떠올리며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 나오는 여러 가지 음식들은 저자가 견뎌온 아픈 시간을 위로해주고 있다. 그래서 저자는 삶의 한 소절씩 간절한 입맛을 내는 음식을 더욱 감사해한다. 비록 지금은 먹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음식이 삶의 조건이라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다시 말하면,

 

 

먹지 않는 시간은 시간이 아니다.

 

 

이 책이 밥도둑이야기라고 해서 단순히 먹거리에 대한 여행에서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좀 더 애틋한 음식에 대한 연민이라고 할까. 저자의 굴곡진 인생에 비한다면 나의 생활은 얼마가 될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다. 그런 만큼 저자의 음식에 대한 감정은 특별하다. 더구나 이런 음식에 대한 감정들이 장소 그리고 사람으로 이어지는 정서적인 유대감을 생각하면 내가 모르는 아득한 또 따른 세계가 펼쳐진다. 마치 홍어, 돼지 삼겹살, 김치 세 가지를 합쳐 별미가 되는 ‘홍탁삼합(洪濁三合)’처럼 음식, 장소, 사람의 절묘한 조합이 곧 ‘음식삼합(飮食三合)’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황석영의 산문은 딱히 목적을 정하지 않고 발길이 이끌리는 대로 걷다가 문득 발견하게 되는 음식의 흔적들이다. 평범함 음식을 이야기하면서 그것들을 향해 발휘하는 감정선은 다양한 삶의 모습을 골똘히 짚어보게 한다. 작가는 음식으로 세상과 교감하고 이해하면서 ‘무엇보다도 음식은 사람끼리의 관계이며, 시간에 얹힌 기억들의 촉매’라고 말한다. 그래서 작가의 산문집을 읽으면서 계속해서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은, 자꾸만 새로워지는 느낌은 음식과 사람의 공통점은 ‘밥도둑’이라는 것이다. 음식과 사람이 밥도둑이 아니라고 한다면 더는 사랑할 수 없지 않을까?

 

 

인상파 거장 폴 세잔은 “자연은 표면보다 내부에 있다”라고 말했다. 일례로 대상의 정확한 묘사를 위해 사과가 썩을 때까지 그렸다고 한다. 우리 문학의 거장 황석영도 음식이 썩을 때까지 글을 썼을 것이다. 그런 만큼 음식을 먹는 소리가 귓가에 들릴 정도로 생생하여 먹방으로 굳어버린 꿀맛에 대한 환상을 깨뜨린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음식의 가치를 ‘밥도둑’즉, 밥을 함께 나눠 먹는 것에서 찾는다. 이유인즉 음식을 나눠 먹는 것은 삶을 보다 아름답게 만드는 음식적이면서도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밥도둑이 되어야만 하는 존재인지 모른다. 더할 수 없이 다정하고 상냥한 밥도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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