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밭 위의 식사
전경린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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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람들은 압생트(Abstinthe)를 탐닉하며 마실까요? 녹색 술로 불리는 압생트에게 무슨 마술이 있는 걸까요? 오스카 와일드는 “계속 마시다 보면 당신이 보기 원하는 것들을 보게 되는 단계에 이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남들 사는 만큼 산다고 한다면 우리는 시시때때로 상념에 빠져들지 모릅니다. 그래서 일을 하다가 지루하거나 사랑하다가 두렵거나 할  때 은근히 압생트를 마시면 인생을 사는 기분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전경린의 장편소설『풀밭 위의 식사』를 읽으면서 겹꽃잎처럼 피어 있는 눈을 가진 여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에두아르 모네가 그린「풀밭 위의 점심」에 나오는 벌거벗은 여자를 보고 우리가 난처했다면 이 소설에 나오는 누경이라는 여자는 ‘자신의 눈물로 제 뿌리를 적시며 생존하는 기이한 사막 식물’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겹꽃잎처럼 피어 있는 눈에는 눈물이 마르지 않았습니다. 슬픔이 겹겹이 쌓여 단단해지다가 어느 순간 와르르 무너지면 눈물이 되어 몸 밖으로 쏟아져 나와야 하는데 누경에게는 그런 힘마저 없었습니다. 그만큼 누경의 상처는 깊었습니다.

누경에게 열여섯 살은 아찔했습니다. 남모르게 좋아했던 서강주가 결혼하던 때이었으며 그와 함께 들판에서 보낸 봄날을 잊지 못해 풀밭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런 데 그날 풀밭에서 낯선 사람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열여섯 살의 상처로 인해 그녀는 우울해졌습니다. 세월이 흐른 후에도 그녀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잔인해졌습니다. 다른 남자와 조금 익숙해지거나 사랑에 빠지려고 하면 그녀는 당혹스러우리만치 일방적으로 사라졌습니다. 연애란 ‘두루뭉술한 의중들 속의 밀고 당김’이었는데 그녀는 두루뭉술한 의중들마저 두려워 했습니다. 누경에게 사랑에 대한 특별한 감정이 없었던 탓이었습니다.

이런 누경에게 작가는 소풍을 가자고 하였습니다. 인생이 공휴일 같았던 누경에게 풀밭 위에서 ‘바삭하게 구운 빵에 치즈를 바르고 살라미와 야채샐러드를 얻고 붉은 와인을 잔에 부어요. 풋사과와 검붉은 포도도 먹어요’라고 명랑하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상처로 얼룩진 열여섯의 당신을 구하라고 했습니다. 기억을 앓는 병에 걸린 누경에게 작가는 ‘부정된 기억’을 숨기지 말고 드러내기를 바랐습니다. 기억을 부정하는 것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부정하는 것’ 이었습니다.

이 소설에서 풀밭은 망각 저편의 낭떠러지거나 남들과 함께 식사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네가 그린「풀밭 위의 점심」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 그림에 나오는 벌거벗은 여자를 보면 삶의 의외성이 달리 보였습니다. 여자가 그것도 대낮에 옷을 벗고 점심을 먹는 다는 것은 여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속살을 보여주는 여자는 둥그스름한 얼굴마냥 행복했습니다. 아름다움과 추함의 경계를 허물고 있었습니다.

이 소설의 끝에 가서야 왜 제목이 ‘풀밭 위의 식사’가 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풀밭 위의 점심」에 나오는 여자처럼 자기 상처를 밖으로 드러내도 웃을 수 있는 행복을 누경에게도 말하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삶에 낙심한 사람은 눈과 눈 사이, 뼈와 뼈 사이가 헐거워져 넓적한 얼굴이 된다고 했을 때 열여섯 살의 질긴 상처를 털어내지 못한 누경의 얼굴이 어떤지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래서 작가는 누경에게 ‘어제의 무게’를 내려놓았으면 하기를 바랐습니다. 마치 빛살을 중화시키고 내부로 빛을 범람하게 하는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더 많이 더 깊이 사랑한 사람은 사랑으로 인해 다치지 않아’라고 말하면서 삶을 붙잡으라고 했습니다. 작가는 릴케의 시 ‘사랑은 어떻게 너에게로 왔는가. 햇살처럼, 꽃보라처럼, 또는 기도처럼 왔는가’를 인용하면서 누경에게 사랑은 다름 아닌 ‘풀밭’에서 왔음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풀밭에서 ‘행복이란 다른 게 아니라 내 몸의 고요’라는 것을 알게 되기를, 슬픔이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어야 한다는 것을 귀 기울이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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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 - 조선의 마지막 황녀
권비영 지음 / 다산책방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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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이 찼습니다. 덕혜옹주의 슬픈 이야기는 허공을 향하여 울부짖는 것 같았습니다.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의 비참함으로 얼룩진 인생에는 눈물이 가득했습니다. 경술국치(庚戌國恥)의 비명이 권비영 작가를 통해 들려왔습니다. 나라 잃은 슬픔이 늙은 눈물을 흘리게 했을 때 한 여자로서의 슬픔은 어떤 눈물일까요? 이제까지 나는 덕혜옹주를 안타까워한 기억이 없었습니다. 경술국치라는 분노를 삭이며 술잔에 영혼을 적셨던 게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작가 말대로 “처음 덕혜옹주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운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말한 것처럼『덕혜옹주』를 읽으면서 마음의 뼈가 으스러졌습니다.

일찍이 수잔 손택은『문학은 자유다』에서 “작가가 하는 일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고 사람들을 흔들어 놓는 일입니다. 작가가 가장 중요시해야 할 일은 의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권비영이『덕혜옹주』에서 말하고자 하는 진실은 무엇일까요? 우선적으로 느끼는 것은 교과서에 씌어 있는 역사적 지식들이 때로는 허구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역사적 이면(裏面)을 파고드는 소설적 허구들이 오히려 진실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가령, 이 소설에 나오듯 고종(高宗)의 죽음을 둘러싼 독살이라는 가장 평범한 사실조차도 식민지 상황에서는 아무 소리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역사에 대해 언제까지 불평불만만 무의미하게 늘어놓을 수 없습니다. 작가가 덕혜옹주를 ‘가슴으로 품은 여인’이라고 불렀던 것은 이러한 자각 때문이었습니다. 작가는 덕혜옹주에 대한 파편화되고 일그러진 자화상이 마치 진실처럼 굳어진 현실을 가슴 아프게 바라봤습니다. 더구나 수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소문에 대해 작가는 반감을 느끼면서도 소문에는 책임이 없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덕혜옹주를 가슴으로 이해하게 될 때 소문은 그저 소문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문보다 더 진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소문은 떠돌다 사라지겠지만 진실은 덕혜옹주를 잊을 수 없게 했습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 덕혜옹주에게 가혹했던 삶이 더욱 절실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습니다. 1912년 덕수궁의 꽃으로 태어난 덕혜옹주는 이름 없이 자랐습니다. 그리고 13세에 덕혜라는 이름을 얻는 대신에 황족의 일원이라는 명분으로 일본에 끌려갔습니다. 그때부터 덕혜옹주는 창덕궁을 그리워하면서도 조선의 황녀라는 위엄을 잃지 않으려고 일본인들을 질타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렸고 19세에 대마도 백작과 강제로 결혼하면서 그녀의 우울증은 파국으로 치달았습니다. 또한 자신의 딸 정혜와 평행선을 달리는 불협화음은 그녀를 돌이킬 수 없는 정신병원의 그늘에 발을 들이밀게 했습니다. 그 순간 덕혜옹주는 삶의 모든 것들에 대한 애착과 미련을 깨끗이 접어야한다고 생각하진 않았을까요? 그래서 ‘역사의 책갈피 속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말라가는 작은 꽃잎’이지 않았을까요?

덕혜옹주의 삶은 고단하고 쓸쓸했습니다. 그리고 무력해보였습니다. 망국의 운명과 함께 했던 신산스런 삶은 조선의 마지막 황녀라는 운명과 다른 길을 가게 했습니다. 길을 가다가 셀 수없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상처받았습니다. 무릎에 피멍이 든다고 한다고 하면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그 보다는 식민지 사람이라는 차별을 견뎌내야 하는 역사의 수레바퀴는 메마른 땅을 지나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부유하는 먼지처럼 ‘이 세상 어디에도 마음을 내려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 말대로 ‘죽음의 길이 삶보다 편안’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덕혜옹주에게도 한 가닥 희망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낳은 딸 정혜와의 특별하고도 새로운 관계를 맺으려고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처음에는 ‘이 아이를 낳아도 될까?’라고 걱정과 두려움으로 섞여 혼란했지만 순명(順命)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운명에 거역하지 않고 순응하겠다는 다짐에는 자신의 핏줄에 대한 감정의 고뇌가 빼곡히 담겨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정혜는 자신의 유일한 혈육이자 등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정혜에게 조선말과 조선식 예절을 가르쳤습니다. 언젠가는 창덕궁 비선재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대감인 동시에 자신의 치욕을 씻겠다는 의지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두 사람의 간격은 멀어졌습니다. 정혜가 일본 이름인 ‘마사에’라는 이라는 삶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덕혜옹주는 무기력해졌습니다. 두 사람의 대립이 정점으로 치달으면서 끝내 정혜가 “엄마, 나는 일본인이에요”라고 말했을 때 덕혜옹주는 숨이 멎을 듯한 충격으로 ‘아아, 정혜야. 일본인이라니, 정혜라고 부르지 말라니. 안 된다, 애야. 너는 내 딸이다, 너는 조선인이다. 나의 정혜야’라는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습니다. 그런가하면 “엄마 따라 조선에 가고 싶다고 했잖아. 너는 엄마 딸이야”라고 하자 “조선은 이제 없어! 망해서 없어진 나라라고! 대 일본 제국의 식민지란 말이야!”라고 매몰차게 대꾸했습니다. 정녕 정혜로부터 저 소리를 들으려고 질긴 목숨을 버텨왔단 말인가? 덕혜옹주의 가슴 한 구석이 또 한 번 무너졌습니다. 저 소리를…저 무례한 말을…. 도대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덕혜옹주의 불행이 단 한 사람에게만 들이닥칠 수는 없는 일 같아서 마음이 더욱 을씨년스러웠습니다.

2010년 2월 초『덕혜옹주』라는 낯선 제목의 책을 선뜻 집어 들었던 까닭은 무엇보다도 ‘덕혜옹주’라는 이름에 있었습니다. 2010년은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러고 보면 100년 동안 우리는 덕혜옹주를 모른 체 살아온 셈입니다. 그만큼 무심했습니다. 역사라는 것이 승자(勝者)의 진실을 드러낸다고 했을 때 덕혜옹주는 패자(敗者)였습니다. 일본에서 정신병원에 갇혀 있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는데 일본이 패망하고도 이승만 정부는 덕혜옹주를 외면했습니다. 이런 끔찍한 현실에서 덕혜옹주는 고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목이 터져라 창덕궁 낙선재를 외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앙상한 덕혜옹주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심하게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덕혜옹주를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이토록 덕혜옹주에 무관심한 우리라면 정신 병원에 갇혀야만 했던 사실조차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식민지라는 국가의 정치적 몰락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그리워하는 딸이요, 한 남자의 아내로서 그리고 딸을 둔 어머니로서의 덕혜옹주의 개인사는 그것은 그대로 또 한 시대를 보여주었습니다. 경술국치의 참다한 시대의 모습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우리들이 잃어버렸던 부끄러운 역사가 자꾸만 눈에 밟혔습니다.
김구는『백범일지』에서 자신의 호를 백범이라고 고친 것은 “우리 나라가 완전한 독립국이 되려면 조선의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일본 경찰들이 자신을 몽우리돌이라고 달리 부르는 것에 격분하였습니다. 뭉우리돌은 석회질이 많은 탓에 쉽게 물컹거렸습니다. 이로 인해 김구는 뭉우리돌이 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반면에 경술국치 100년을 살아오면서 우리의 나라사랑은 어떤가요? 백범이 말한 대로 ‘뭉우리돌’을 닮은 것 같아 두고두고 한(恨)은 아닐 런지요? 많은 사람들이 조국이 독립되었다고 하면 그것으로 경술국치의 상처를 말끔히 치유하는 게 아닌가, 라고 후련하면서 편하게 살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작가는 우리가 안일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경술국치의 콤플렉스'를 다음과 같이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잊고 있었던 사람들을 조국으로 데리고 돌아가야 하네. 낯선 땅에서 핍박 받으며 견뎠던 그 모든 사람들을 데리고 가야 해. 그들이 이 땅에서 흘렸던 피눈물까지 모두 거두어가야 하네. 그걸 이루어내지 못하면 독립도 아무런 의미가 없네. 우리 동지들이 목숨을 걸고 지켰던 신념이 무엇인가? 자랑스럽고 떳떳한 네 나라를 세워 우리 민족을 모두 데리고 돌아가는 것 아니었나? 옹주마마는 그 시작에 불과하네” 이었습니다.

작가 말대로 떳떳한 나라를 세우는데 덕혜옹주가 그 시작이라는 데 무척이나 공감했습니다.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오늘에야 비로소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의 흔적도 없이 잊혀져버린 삶이 거센 바람으로 휘몰아쳤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힘이 생겨났습니다. 덕혜옹주가 슬픈 운명을 피하지 않았듯이 우리들 또한 결코 밀리거나 비켜서지 않기를 새삼 느꼈습니다. 그녀를 위한 진혼곡인『덕혜옹주』를 읽으면서 100년이라는 삶의 흔적에서 민족의식이 얼마만큼 오래되었는지 문제보다는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라는 것을 진정으로 배웠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정확한 기록보다 불운했던 황녀의 진심이 더 깊이 읽어지기를, 좀 더 깊이 그녀의 삶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본다’는 작가의 말이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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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몽
황석영 지음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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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1995년 서울 강남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어느 누구에게는 운이 없는 날이었다. 만약 운이 좋았다면『장자』「제물 편」에 나오는 나비 꿈(胡蝶夢)의 주인공이 되었을 것이다. 장주(莊周)가 꿈에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니다가 갑자기 꿈에서 깨어보니 자신이 엄연히 장주였다. 그래서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던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되었던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말하길 장주와 나비에는 반드시 분별(分別)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만물의 조화라고 했다. 여기에서 말한 분별은 차별(差別)과는 다른 것이다. 

 
황 석영의『강남몽』은 차별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다루고 있다. 사람 대 사람으로서 차별한다는 것은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다. 사람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들은 강남(江南)에서 자신들의 한계를 온 몸으로 맞서고 있다. 이러한 지난한 과정을 황석영은 보기 드물게 ‘몽(夢)’이라고 했다. 몽이라고 하면 왠지 모르게 현란하다는 생각이 앞서는데 이 소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소설을 읽을수록 몽에 대한 환상은 그야말로 한바탕 몽에 불과하다. 황석영은 몽의 애매함을 살짝 추구하면서 ‘다큐 소설’을 취하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이 소설은 더욱 현실적이 되었다. 

 
어디 이뿐인가. 이 소설의 묘한 매력은 작가의 비범한 거대 담론(談論)에 있다.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했다는 작가는 ‘광복 반 세기식의 대하소설로 쓸 수는 없고 그런 접근은 낡은 방식’이라고 고백했다. 흔히 역사학을 ‘디테일에 대한 사랑(love of detail)'이라고들 한다. 가령, 한국 전쟁이라는 소용돌이 속에서도 역겨운 화약 냄새까지도 맡을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스케일(scales)'도 빼놓을 수 없다. 말하자면 나무보다는 숲을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인지『강남몽』이라는 책 한 권을 읽으면 마치 10권을 읽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강남몽』에서 작가는 1995년 서울을 주목하고 있다.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 사건사고가 일어나는 것은 다반사다. 그러나 삼풍백화점의 붕괴는 끔찍할 정도를 넘어서고 있다. 무엇보다도 한국 현대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강남 형성사’의 총체적인 모순을 말해주는 지표였다. 일제시대와 광복, 그리고 분단이라는 정치적 후유증으로 얼룩진 5.16 쿠테다와 남서울 개발 계획의 굵직굵직한 현대사의 질곡을 정면에서 다루고 있다. 그것은 작가 말대로 ‘민중이 걷잡을 수 없는 소비 사회의 적나라한 대중으로 휩쓸려 들면서 욕망에 얽혀가는 시대’였다.

이 소설은 삼풍백화점을 연상시키는 대성백화점이 붕괴되면서 조각난 씨멘트 덩이에 깔린 서로 다른 꿈의 몰락과 아픔을 쫒아가고 있다. 대성백화점 참사는 인재(人災)에서 비롯되었다. 부실공사에 따른 건물의 안전도가 위협받았고 거기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은 최소한의 양심마저 반쪽이 되고 말았다. 문을 닫느냐, 마느냐는 정작 영업 이익 때문에 휴업하지 못했다. 대성백화점은 여름 정기세일이라는 좋은 찬스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도무지 비정상이라고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상적으로 문을 열었고 많은 사람들이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어느 누구도 대성백화점에서 인생의 끝이며 무덤이 될 줄 생각이라도 했겠는가?

박선녀와 임정아는 다행히 꿈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눈을 뜨자 생사를 오가는 참다함에 그만 놀라고 말았다. 차라리 이것마저 꿈이길 바랐으나 자꾸만 아픈 곳에 손이 가는 것마저 버거웠다. 슬픔과 분노가 뒤범벅이 된 체념은 아직도 그녀들이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삶과 죽음이 마치 종이 한 장의 간격으로 좁혀졌을 때 숨 가쁘게 살아온 과거가 아픈 속살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박선녀는 대성백화점 회장인 김진의 둘째부인이고 임정아는 대성백화점 아동매장에서 일하는 점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들은 시멘트 덩이에 깔려 있다. 단단한 시멘트를 한 꺼풀 벗겨내면 그것은 사악한 인간의 욕망 덩어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들은 잠시 실종된 것이 아니라 희생양이 된 것이다.

이 소설은 다섯 명이 저마다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크게 보면 박선녀와 임정아의 평탄하지 못했던 삶의 멍에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박선녀는 이름과 달리 나쁜 권력에 편승하면서 강남 귀부인이 되었다. 그녀의 또 다른 이름이 진희였는데 이는 ‘요술쟁이 지니’의 발음만 따서 지었다. 그녀의 요술은 술장사를 시작으로 하여 땅장사를 거쳐 몸장사를 했다. 술장사에 있어서는 깡패 홍양태가 있었고 땅장사에 있어서는 부동산 투기업자 심남수가 있었다. 그리고 40대에도 불구하고 탄력전인 몸매를 간직했던 것은 재벌가 김진때문이었다. 그녀의 성공 가도에는 미모, 주먹, 권력이라는 트라이앵글이 매순간 불가사의한 능력을 드러냈다. 생활고를 어떻게 견뎌야 하는가를 걱정했던 풋풋함은 세월과 함께 우문(愚問)에 불과했다. 불혹의 나이에 이르러 핸드백 하나에 1,000만원이 넘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러한 우문은 ‘생존만으로 충분치 않았다’는 김진에게도 당연했다. 김진이 누군가? 강남의 재벌가이면서도 굳이 남산 아래에서 살았다. 세상에 좋다는 것 다가졌으면서도 남산 집을 떠나지 않았던 것은 향수(鄕愁) 때문만은 아니었다. 남산 집은 그의 애국(愛國)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일제시대 생명의 위협보다 더 악착같았던 것은 먹고 사는 문제였다. 조선인으로 당당하게 살 수 없었던 그는 일본 헌병의 개인 밀정이 되면서부터 급변했다. 그의 애국은 매국이었으며 광복 후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에서는 ‘반공’으로 각색되었다. 그리고 박정희의 군사정권에서는 ‘중앙정보국’의 핵심세력이 되었다. 당시 중앙정보부가 남산에 있었던 탓에 남산은 누군가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할 힘을 가졌다.

그러나 이 보다 더 두려운 것은 군사정권 이후 산업화에 따른 개발논리에 파묻혀 부끄러운 역사를 청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군대의 조직력으로 사회와 국가를 개조할 수 있다는 단순명쾌한 명제’를 지닌 박정희로서는 개발이 하나의 목표였다. 이로 인해 친일파 세력들은 그들만의 패거리 문화를 형성하면서 사상을 통제하고 탄압했다. 그들이 강북이 아닌 강남을 선택한 것은 오로지 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나마 안전했기 때문이다. 올해로 개통 40주년을 맞이한 경부고속도로의 시발점이 강남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삼풍백화점의 가치는 보다 분명해졌다. 강남이 대한민국 부의 1번지의 대명사가 된 것이다. 강남에서 산다는 것은 엄청난 프리미엄이 작용했다. 그 순간 모든 불나방들이 서열화되었다. 즉 얼마만큼, 어느 정도 부를 가지고 있는가가 중요해졌다.

박선녀와 김진이 불우한 시대의 반인반수(伴人半獸)라고 한다면 임정아는 반인(伴人)이었다. 대성백화점에서 일하며 하루 세끼 밥먹으며 아무 걱정없이 사는 것이 그녀의 소망이었다. 비록 자기의 월급보다 많은 수입품들이 불티나게 팔려나가는 모순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남에게 해 끼치고 산 적’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살았다. 좋은 차에 널찍한 집에 사는 부자들이 부러웠던 반면에 별로 잘살지 못한다고 여겼다. 백화점이 붕괴되고 난 후 씨멘트 틈 사이에서 박선녀가 버티지 못하고 “나 이제부터…잘 거야…”라고 하면서 깊은 잠에 빠질 때 임정아는 결코 희망을 놓지 않았다. 박선녀가 더 이상의 요술을 부리지 못하는 것은 모든 것이 세월과 함께 소멸하기 때문일 것이다. 재력이 있다고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대성백화점이 붕괴된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에는 무질서한 것이 자멸하는 환영(幻影)이었다. 이러한 환영에 대해 임정아는 목이 찢어지도록 “여기 사람 있어요…” 라고 울부짖었다.

『강남몽』은 운명이었다. 거장 황석영은 디테일과 스케일을 아우르며 삼풍백화점의 참사를 다시 한 번 일깨워주고 있다. 그저 흘러가버린 과거라고 하기에 우리에게는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다. 강남형성사의 비극에는 자본주의의 사기극이 농후했다. 그럼에도 황석영은 삼풍백화점의 비극 앞에서 인간들의 너절한 양심을 호소하지 않았다. 오히려 강남의 꿈을 쫓는 다양한 인간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 얼마나 희극적인가? 삼풍백화점이 붕괴되면서 인형 혹은 희극같았던 부끄러운 자화상은 불식간에 허를 찔렸다. 일장춘몽(一場春夢)이 아닌 나비 꿈(胡蝶夢)이어야 더 이상의 '강남몽'은 없지 않을까? 세상은 인간만의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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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모른다
정이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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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아주 우연히 뭔가를 알아채는 순간이 있다.                                                              몇 십 년 만의 폭설이 세상을 하얗게 했다. 하지만 눈이 내릴 때의 행복도 잠시, 길은 탁해지면서 미끄러워졌다. 도로도 마찬가지였다. 승용차 안에서 느껴지는 네 바퀴의 통증은 어느 때보다 퍽퍽했다. 그래서 인지 사이사이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노래는 습기에 젖은 듯했다. 듣고 있는 노래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는 없었다. 노래가 끝나고 DJ가 “타르티니의 G단조 바이올린 소나타”라고 했을 때 겨우 클래식이었음을 알았다. 그런데 DJ가 그 곡의 부제가 “악마의 트릴”이라고 했을 때 정이현의『너는 모른다』가 불현듯 떠올랐다.

1713년. 스물세 살의 젊은 작곡가 타르티니는 악상이 떠오르지 않아 괴로워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속에서 악마를 만난다. 악마는 타르티니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해온다. 그의 영혼을 팔면 아름다운 음악을 주겠다는 것이다. 타르티니는 이 교환에 응해 제 영혼을 판다. 그러자 악마는 그가 처음 들어보는 놀랍도록 황홀한 선물을 연주한다. 꿈에서 깨어나자마자 미친 듯이 기억을 되살려 받아 적은 음악이 바로 <악마의 트릴>이다…(p 162) 

이 소설에서 타르티나를 알고 있는 주인공은 열 한 살의 소녀 유지였다. 음악의 신동으로 불리는 유지에게 ‘악마의 트릴’ 하나쯤 알고 있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너는 모른다’라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너’가 모르는 진실이 뼛속 깊이 새겨져 있었다. 유지는 <악마의 트릴>을 그저 듣는 것이 아니라 숨 막히는 가족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악마를 끌어안았다.

그런데 어느 날 서초구 서래마을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던 유지가 돌연 사라졌다. 유지가 사라지자 너의 가족들은 두드러져 보일만한 슬픔은 없었다. PC 방이나 친구 혹은 바이올린 레슨 선생님과 같이 있을 거라는 적당한 무관심이 서로 뒤섞여 나타났다. 비록 뒤통수를 한 대 후려 맞은 심정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원점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했던 ‘너’는 냉정을 지키려고 했다. 유지는 ‘너’의 가족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너’는 유지에게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가 소설을 읽을수록 ‘너’에게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작가 말대로 의문이란 고요한 수면으로 흐트러뜨릴 가능성이 있는 돌멩이였다. 작가는 유지 실종 사건과 연루된 너의 가족들의 입장을 번갈아 추적했다. 이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불행한 사고를 당했을 때 나타나는 ‘가족 내 문제’가 투명한 탓이었다. 유지가 피해자인 반면에 너의 가족들은 가해자가 되는 투명한 사건이라고 할까?

이를테면 아버지 김상호는 사업 밖에 모르며 무뚝뚝한 이기심으로 사는가, 어머니 진옥영은 굳이 친정을 핑계로 왜 중국으로 은밀히 가려고 했나, 이복언니 은성은 가족들과 떨어져 혼자 살며 매번 짧은 사랑에 집착하고 있나, 이복오빠 혜성은 가짜 등록금 영수증을 내밀며 어째서 의대생 노릇을 하고 있나, 등등 그것이다. 반면에 유지는 엄마는 짱깨였고 엄마의 딸인 아이도 짱깨라는 폭력에 맞서 싸우기 위한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그럴수록 내면의 동요를 감추는 기술을 배워나갔다. 그리고 학교에서 바이올린을 핑계로 하여 애들과 어울리지 않아 왕따를 당하면서도 정작 유지는 자기가 혼자라는 것에 흔들리지 않았다.

이렇듯 작가는 너의 가족들의 황폐해진 삶을 따라가면서 상처뿐인 가족들의 실체를 보여주고 있다. 어느 누구로부터도 사랑받고 있지 않다는 것은 곧 나 스스로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를 미워하게 되는 것이다. 가족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닐 것이다. 이 소설에서 ‘유지는 뭐랄까, 누군가에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아이였다. 누구에게나 골고루 무심했다.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인생을 유지는 아예 몰랐다. 알 필요가 없게 태어났다.’라는 우울함이 가족의 화목함에서 벗어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일찍이 마르틴 부버는『나와 너』에서 ‘나와 너의 관계를 제시하려면 동그라미를 하나 그리는 수밖에 없다. 이 동그라미는 너와 관계하지 않는 모든 것을 그 둘레 밖으로 내쫓는다.’라고 했다. 어쩌면 가족은 가장 안전한 동그라미다. 이제껏 우리는 그렇게 믿어왔다. 하지만 가족마저 맹목적인 사랑에 갇히면 마르틴 부버가『나와 너』에서 말한 대로 ‘사랑이 상대방의 전체를 얻지 못하게 되며 상대방의 부분 밖에 더 보지 못할 때는 미워하게 되는’ 것이었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사랑과 미움의 맹목적 관계’를 리얼리티하게 포착하고 있다. 유지의 실종과 함께 너의 가족들의 아주 일상적인 암묵적 규칙이 서로 겹치면서 가족이라는 게 뭘까? 라는 생각을 되돌아보게 했다. 어쩌면 부모와 자식이라는 이름 아래 놓인 가족은 서로의 정서적 공감을 향유하는 친구도 아니며, 사랑을 놓고 줄다리기를 하는 연인도 아닌 ‘기습적으로 도착했던 생명’에 불과한 지도 모른다. 혹은 ‘그냥 식구’일수도 있다.

『너는 모른다』를 읽으면서 악마에게 영혼을 팔면 어떻게 되는 것인지 시종 궁금했다. 앞서 말했듯 사랑이 반쪽이라고 한다면 외로운 가족의 현실은 악마의 자화상이 아닐 수 없었다. 악마의 자화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나타낸다면 말줄임표(…)이거나 물음표(…?)였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삶이 정지된 슬픔 같은 것이었다. 가장 가까워야 하는 사이의 사람들이 가장 먼 사람이 되는 반쪽 사랑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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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방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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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는 우리에게 두 개의 눈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는 얼굴에 있는 육체의 눈입니다. 다른 하나는 가슴에 들어 있는 마음의 눈입니다. 많은 알라디너들이 신경숙의『외딴방』을 ‘내 인생의 책’이라고 말했습니다. 왜 그랬을까? 여러 번 곱씹은 후 ‘내게 글쓰기란 무엇인가?’라는 문장을 마주하면서 마음 한 구석이 물컹거렸습니다.

1990년 이후 각종 문학상을 차지했던 신경숙이『외딴방』에서 글쓰기 때문에 힘들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녀가 소설가여서 당연한 문제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마음의 눈으로 보면 글쓰기에 대한 추억이 사뭇 달라졌습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그녀에게 글쓰기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까닭으로 기억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전 소설인『외딴방』에서 글쓰기를 은밀하게 좋아했던 초년고생을 떠올렸습니다. 그녀가 말하는 초년은 서른 살을 경계로 하고 있습니다. 좀 더 세세하게 보자면 열여섯에서 열아홉 그리고 먼 훗날 서른 살이었습니다. 열여섯에서 열아홉 나이에 얽힌 갖가지 아픔이 서른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뭔가를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래도록 막연했던 두려움을 지나쳐오면서 그녀는 고적한 목소리로 생의 버팀목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아 이것 없이는 외로웠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말했던 ‘이것’은 무엇이었는지 그 속내가 궁금했습니다. 그녀의 삶 한 자락을 펼쳐보면 그녀의 삶이 시작된 1979년 열여섯 이후 열아홉에 이르는 사년의 과거와 1995년 서른둘의 현재가 서로 만나고 있습니다. 열여섯이었던 그녀는 외사촌과 함께 고향을 떠나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서울 구로 3공단으로 들어갔습니다. 일자리를 얻기 위해 상경한 그녀들은 을씨년스러운 공단의 굴뚝이 보이는 삼층 벽돌집에서 방 하나에 세를 놓아 큰 오빠와 함께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놀랍게도 삼층 벽돌집에는 서른일곱 개의 방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습니다.

서른일곱 개의 방…… 하지만 도시에서는 굳이 서른일곱개의 외딴방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곳에서 그녀가 바라본 세상은 모순이었으며 남들과 다르게 살아야 하는 열등감이 어느 순간 평범한 일상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낮에 일했던 동남전기회사의 열악한 작업 현장은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것이 단지 가난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똑똑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철야작업에 지쳐도 생리휴가여도 무급으로 계산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다도 읽는 내내 안쓰러웠던 것은 밤에 산업체 특별학교에서 공부했으나 말이 좋아 주경야독(晝耕夜讀)이지 현실은 야멸찼습니다. 그녀와 함께 다녔던 사진작가가 되고 싶다던 외사촌, 전화교환원이 되고 싶다던 희재 언니의 꿈은 공순이라는 날선 비수에 그만 산산이 부서지고 맙니다. 사랑의 물거품도 다반사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 시절이 그립다고 말했습니다. 비록 열여섯의 나이에 가족들의 짐을 덜기 위해 교복대신 푸른 작업복을 입었지만 그녀에게는 작가에 대한 열망으로 버텨냈습니다. 공장에서 숨 가쁘게 일하면서도 그녀는 뜻도 모른 체 좋아하는 시(詩)를 노트에 옮겨 적었습니다. 가난과 외로움이라는 현실을 바꿀 수는 없을지라도 문학만이 위안이었습니다. 문학이 곧 자신이었으며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던 슬픔과 낭만이 가장 행복했던 때였습니다. 더구나 공장에서 학교로 가기 위해 교복으로 갈아입었던 그 때의 오후 다섯 시를 기적의 시간이라고 불러보고 싶었습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외딴방’이라는 단어를 놓고 이런저런 고민을 해봤습니다. 말 그대로 외딴방은 삶의 한쪽으로 쫓겨난 방이라는 탓에 마음이 산란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외딴방은 하나의 통과의례를 상징했습니다. 흔한 말로 진주조개가 진주를 만들듯 사랑의 아픔없이는 지금의 나는 여전히 불안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층민의 굴레라는 부끄러움을 잔뜩 묻히며 마음이 아팠다는 어설픈 감정이었다면 오히려 상처가 더욱 깊었을 것입니다. 삶을 방으로 비유해보면 ‘자기만의 방’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외딴방은 방과 방 사이의 중간단계에 놓여 있습니다. 즉 타인의 방과 자기만의 방의 사이입니다.

겹겹이 쌓인 고민 하나를 더 생각하면 나의 외딴방은 어떠했는지 자문해봤습니다. 나에게 행복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과거를 더듬어봤습니다. 일찍이 괴테는 “살아있는 한 방황한다.”고 했습니다.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더라도 아쉬움이 맴도는 것 또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지금의 하고 있는 일이 꼭 하고 싶어서 것이라고 한다면 다행입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꼭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한다면 외딴방의 기적은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신경숙은 외딴방에서 가질 수 없는 것을 치열하게 가지려고 했습니다. 온 몸의 뼈가 뚝뚝 끊어질 정도였지만 그럴수록 그녀의 위대한 일은 탄탄해졌습니다. 뭔가를 좋아하게 되고, 그래서 더욱 사랑하게 된다는 게 이런 거구나,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외딴방에서 느슨함도 못자라 오만하여 불행과 행복이 안개에 쌓여 흐릿했습니다. 그녀와 나는 치열함과 게으름이었으며 이것이 오늘의 그녀와 내가 살아가는 방식을 기억하게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삶을 오로지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깨달음의 순간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녀는 외딴방에서 글쓰기 때문에 살았습니다. 또 글쓰기 때문에 삶을 더욱 사랑했습니다. 또 글쓰기 때문에 고독한 절망을 견뎌냈습니다. 그녀 말대로 글쓰기는 ‘이것으로만이, 나, 라는 존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소외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튼튼히 뒷받침해주었습니다. 그녀는 글쓰기 덕분에 행복했습니다. 그녀는 글쓰기로 인해 자신의 존재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소설을 읽고 나서 나의 글쓰기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봤습니다. 신경숙이 말하는 글쓰기를 더 듣고 싶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책 관련 잡지를 보다가 ‘신경숙의 서재 탐방’ 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문제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잡지(출판저널)에서 “쓰기 먼저 하려고 애쓰지는 않았으면 해요. 우선은 읽고, 느끼고, 경험하는 게 우선이거든요. 자기가 놓여 있는 그 순간을 최대한 보고 느끼고 경험해야 해요. 그래야 글도 치열해지니까.”라고 의미심장한 그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소설가의 삶은 굴곡이 많습니다. 그녀처럼 치열하게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녀를 둘러싼 모든 것들에게 그녀처럼 고맙다는 말을 아끼지 않아야 했습니다. 그녀의 꿈이 스며든 외딴방은 누구에게나 있었을 자신을 찾아가는 여행의 첫 출발지이라는 것, 삶의 밑그림을 시작하는 것을 새삼스럽게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그곳에서 밀물과 썰물 같은 고통을 어떻게 견뎌내야 우리의 꿈이 꿈다워질까요? 그녀는 [외딴방]에서 손(手)에 달렸다고 다소 차분하게 말했습니다. 즉 ‘네가 만났던 사람들의 슬픔과 기쁨들을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퍼뜨리렴. 그 사람들의 진실이 너를 변화시킬 거야.’라고 손(手)으로 다가서게 했습니다. 글쓰기에는 아무 걱정도 없어 보였던 손이 그녀로 인해 희망을 넘나들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 그리고 먼 훗날, 외딴방에서 살았던 것처럼, 잠 못 이루며 책장을 넘기거나 볼펜을 움켜지며 써내려가며 행복했던 것처럼, 그녀 말대로 문학이 그냥 좋았던 것처럼 다른 사람이 되어 보고 싶게 했습니다. 그녀의 외딴방은 단순히 과거의 어느 날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이 팍팍할 때 조금이라도 외딴 거릴 수 있는 자유, 홀로서기의 자유를 닮아보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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