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밭 위의 식사
전경린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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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람들은 압생트(Abstinthe)를 탐닉하며 마실까요? 녹색 술로 불리는 압생트에게 무슨 마술이 있는 걸까요? 오스카 와일드는 “계속 마시다 보면 당신이 보기 원하는 것들을 보게 되는 단계에 이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남들 사는 만큼 산다고 한다면 우리는 시시때때로 상념에 빠져들지 모릅니다. 그래서 일을 하다가 지루하거나 사랑하다가 두렵거나 할  때 은근히 압생트를 마시면 인생을 사는 기분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전경린의 장편소설『풀밭 위의 식사』를 읽으면서 겹꽃잎처럼 피어 있는 눈을 가진 여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에두아르 모네가 그린「풀밭 위의 점심」에 나오는 벌거벗은 여자를 보고 우리가 난처했다면 이 소설에 나오는 누경이라는 여자는 ‘자신의 눈물로 제 뿌리를 적시며 생존하는 기이한 사막 식물’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겹꽃잎처럼 피어 있는 눈에는 눈물이 마르지 않았습니다. 슬픔이 겹겹이 쌓여 단단해지다가 어느 순간 와르르 무너지면 눈물이 되어 몸 밖으로 쏟아져 나와야 하는데 누경에게는 그런 힘마저 없었습니다. 그만큼 누경의 상처는 깊었습니다.

누경에게 열여섯 살은 아찔했습니다. 남모르게 좋아했던 서강주가 결혼하던 때이었으며 그와 함께 들판에서 보낸 봄날을 잊지 못해 풀밭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런 데 그날 풀밭에서 낯선 사람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열여섯 살의 상처로 인해 그녀는 우울해졌습니다. 세월이 흐른 후에도 그녀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잔인해졌습니다. 다른 남자와 조금 익숙해지거나 사랑에 빠지려고 하면 그녀는 당혹스러우리만치 일방적으로 사라졌습니다. 연애란 ‘두루뭉술한 의중들 속의 밀고 당김’이었는데 그녀는 두루뭉술한 의중들마저 두려워 했습니다. 누경에게 사랑에 대한 특별한 감정이 없었던 탓이었습니다.

이런 누경에게 작가는 소풍을 가자고 하였습니다. 인생이 공휴일 같았던 누경에게 풀밭 위에서 ‘바삭하게 구운 빵에 치즈를 바르고 살라미와 야채샐러드를 얻고 붉은 와인을 잔에 부어요. 풋사과와 검붉은 포도도 먹어요’라고 명랑하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상처로 얼룩진 열여섯의 당신을 구하라고 했습니다. 기억을 앓는 병에 걸린 누경에게 작가는 ‘부정된 기억’을 숨기지 말고 드러내기를 바랐습니다. 기억을 부정하는 것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부정하는 것’ 이었습니다.

이 소설에서 풀밭은 망각 저편의 낭떠러지거나 남들과 함께 식사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네가 그린「풀밭 위의 점심」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 그림에 나오는 벌거벗은 여자를 보면 삶의 의외성이 달리 보였습니다. 여자가 그것도 대낮에 옷을 벗고 점심을 먹는 다는 것은 여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속살을 보여주는 여자는 둥그스름한 얼굴마냥 행복했습니다. 아름다움과 추함의 경계를 허물고 있었습니다.

이 소설의 끝에 가서야 왜 제목이 ‘풀밭 위의 식사’가 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풀밭 위의 점심」에 나오는 여자처럼 자기 상처를 밖으로 드러내도 웃을 수 있는 행복을 누경에게도 말하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삶에 낙심한 사람은 눈과 눈 사이, 뼈와 뼈 사이가 헐거워져 넓적한 얼굴이 된다고 했을 때 열여섯 살의 질긴 상처를 털어내지 못한 누경의 얼굴이 어떤지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래서 작가는 누경에게 ‘어제의 무게’를 내려놓았으면 하기를 바랐습니다. 마치 빛살을 중화시키고 내부로 빛을 범람하게 하는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더 많이 더 깊이 사랑한 사람은 사랑으로 인해 다치지 않아’라고 말하면서 삶을 붙잡으라고 했습니다. 작가는 릴케의 시 ‘사랑은 어떻게 너에게로 왔는가. 햇살처럼, 꽃보라처럼, 또는 기도처럼 왔는가’를 인용하면서 누경에게 사랑은 다름 아닌 ‘풀밭’에서 왔음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풀밭에서 ‘행복이란 다른 게 아니라 내 몸의 고요’라는 것을 알게 되기를, 슬픔이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어야 한다는 것을 귀 기울이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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