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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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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요? 우리가 우주에 알고 있는 것들이 겨우 4%에 불과했습니다. 나머지 96%는 여전히 우리가 모르는 암흑물질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이 어디까지인지를 가늠해볼 때 앎의 경계는 사뭇 허망했습니다. 더구나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삶 속에서 사람은 별것 아닐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고통스럽다고 질퍽하게 말하는 것은 얼마나 얄팍한 외로움인가요?

이렇게 우리가 고통을 외면하고 있을 때 김연수는 소설집『세계의 끝 여자 친구』를 통해 오히려 고통의 뒷모습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작가는 고통을 붙잡고 싶은 심정으로 말하면서 으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지겨움 때문이야.’라고 털어 놓았습니다. 그러면서 작가는 지겨움을 마흔 세 살이라는 나이로 불편하게 받아들입니다. 마흔세 살이란 반환점을 돌아서 언젠가 한 번은 와본 길을 다시 가야하는 것입니다. 때로는「기억할 만한 지나침」에서 말한 대로 ‘세상 어딘가에는 더 이상 꿈을 꾸지 않는 열여덟 살도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립니다. 깊거나 얕거나 우리는 고통을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간혹 느닷없이 부딪치는 이별, 죽음의 문제가 달갑지 않게 찾아올 수도 잇습니다. 이를 두고 우연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고통의 시작을 헤아려보면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 좀 더 사실적입니다. 고통이 우연이라고 했을 때 ‘불어오는 바람에 보랏빛 자카란다 꽃잎이 하염없이 떨어지는 광경’(「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이 스쳐갔습니다. 그러나 고통이 필연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세계의 끝’에 가봐야 뭔가 결정적인 진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소설에서 세계의 끝은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있는 곳 (「세계의 끝 여자친구」)입니다. ‘세계의 끝 여자 친구’라는 시를 쓴 시인에게 여자 친구는 세상의 끝까지 데려가고 싶을 정도로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어버렸고 우리 한 번 세상 끝 까지 가보고자 한 것이 호수 건너편에 있는 메타세쿼이아 나무 아래였습니다. 비록 남들에게는 웃을 일이지만 시인에게는 메타세쿼이아만이 아는 대답이 있었습니다. 살아있는 화석나무로 불리는 메타세쿼이아에 스며든 질긴 감정이란 고통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일본의 이즈미 간척지에서 노을을 배경으로 흑두루미가 나는 모습을 구경(「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하는 것입니다. 엄마가 죽던 날의 노을과 ‘흑두루미와 함께한 날의 노을’의 사진집 시리즈에 담긴 노을이 미아에게는 서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녀말대로 자신의 슬픔을 그가 봤을 것이라는 기이하면서도 따뜻한 경험 때문이었습니다. 그 사진작가는 ‘많은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많은 것을 망각하기 위해서 사진을 찍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착해지지도 않아도 돼. 무릎으로 기어다니지 않아도 돼. 사막 건너100마일. 후회 따윈 없어. 몸속에 사는 부드러운 동물. 사랑하는 것을 그냥 사랑하게 내버려두면 돼. 그러면 세계는 굴러가는 거야…’「기러기」라는 시를 음미했습니다.

그러면 굴러가는 세계에서 지나간 순간은 다시 반복되는 것인가요?「내겐 휴가가 필요해」에서 작가는 그렇지 않다고 했습니다. 이 소설은 완도의 3층짜리 도서관을 십년 가까이 들락거리며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를 찾는 전직 형사의 고뇌를 더듬고 있습니다. 꿈이 있었을 여대생을 고문 살해한 그는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알고자 했으나 오히려 고통만 뼛속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도서관의 수많은 책은 ‘삶은 단 한번만 이뤄질 뿐이며, 지나간 순간은 두 번 다시 되풀이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세계의 끝에서 만나는 고통이라는 것은 일종의 공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달로 간 코미디언」에서 방송사 PD인 딸이 객사한 아버지의 삶을 편집하면서 느꼈던 외로움이란 바로 이야기 사이에 공백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녀 말대로 편집이 목소리 사이의 공백을 없애는 것이라고 했을 때 ‘목소리와 목소리 사이에서 기침이나 한숨소리, 침 삼키는 소리’등이 사라지고 맙니다. 자세히 들으면 그 짧은 순간의 공백에는 무수한 진실이 담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편집된 이야기를 통해 고통을 바라볼 뿐입니다.

고통을 마주보며 눈물로 마음의 상처를 묻어둔다고 해서 묻힌다고 하면 얼마나 좋은지요? 이제야 ‘우린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라는 작가의 말을 제대로 들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고통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결코 소통할 수는 없습니다. 단순히 시각의 문제가 아니라 고통에 대한 촉각과 청각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작가는 고통을 어루만지면서도 굳이 걷어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마음에는 수잔 손택이 말한 ‘왼손 남자 오른손 여자’ 때문인지 모릅니다. 즉 ‘이 왼손이 남자고 이 오른손이 여자야. 이 두 사람이 늘 함께 붙어 있다가 이렇게 떨어지면, 서로 소통이 안 되니까 그게 고통이야.’ 돌이켜보면 겉모습이 화려하더라도 속마음이 외롭고 쓸쓸했던 것은 소통의 공백에 매우 지쳐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의 고통과 타인의 고통이 서로 맞물리지 않을 때 고통은 앞서 말한 대로 지겨움이거나 꿈이 없게 됩니다.

이 소설집을 찬찬히 읽으며 고통을 느끼는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 혹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 것인지 생각해봤습니다. 고통이라는 것이 여전히 암흑공간이라고 한다면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들 사랑이 4%라는 느낌이 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4% 사랑에도 우리는 얼마든지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왜냐면 ‘사랑은 어떤 순간에도 미워하지 않으니까요.’(「내겐 휴가가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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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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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였던가? 그때의 혼란스러움은 두려웠다. 추석을 보내고 귀경하는 길이었다. 어둠이 달라붙었을 때 이미 고속도로는 주차장이나 다름없었다. 끈적거리는 지루함이 못내 싫었을까? 운전을 하고 있던 친구가 국도로 달리자고 했다. 다행히 차의 속도는 빨라졌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질흙같이 어둡고 낯선 곳을 자동차의 하이빔 만으로 의지한 체 돌파하기에는 친구와 나는 나약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방향을 잃어버렸고 때로는 길을 헤매다 사고 날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초초하게 보내다가 문득 마을입구에 ‘생사리(生死里)’라고 적혀 있는 대리석을 지나쳤다. 생사리….

 
공지영의『도가니』를 읽고 나니 ‘생사리’가 떠올랐다. 무슨 까닭인지는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당혹스러움은 이 소설에 나오는 강인호 앞에 펼쳐진 무진과 생사가 다르지 않다는 데 있었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지도책과 도로 곳곳에 표지판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엉뚱한 길을 달렸던 것일까? 우리가 알고 있던 모든 것들이 그렇게 쉽게 어둠에 파묻혀 쓸모없게 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백지상태에서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구분하기 힘들다.

생사의 수많은 갈림길에서 공지영이 선택한 무진시(霧津市)는 암담했다. 무진 즉 안개가 1차적인 이유였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모든 것이 안개 탓이다.’라는 일종의 위선에 찬 인간들의 끔직한 현실이 유독 눈에 띄었다. 이것은 정말이지 감추고 싶고 드러내고 싶지 않은 추한 안개였다. 공지영 말대로 광란의 도가니였다. 남들과 달리 몸을 불편한 장애아에게 자의반 타의반 장애시설로 수용되는 것은 단지 그들만의 행복은 아니었다. 장애아를 보살펴야 하는 부모들, 더 나아가 이들 모두들 책임져야 할 자애(慈愛)학원에게도 행복이었다.

하지만 자애학원에서 잘 먹고 잘 놀아야 할 장애아들에게 행복은 멀리 있었다. 장애아들에게는 당장의 배고픔과 외로움이 눈앞에 있었다. 그래서 무차별적인 폭력을 가하는 선생들 앞에서 장애아들은 눈치를 봐야 했다. 이와는 달리 장애아들의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그들의 성(性)을 장난감마냥 가지고 놀았던 학원 이사장 앞에서 그들은 눈치를 볼 수 없었다. 눈치를 버려야 할 만큼 장애아들의 마음은 이미 병들어 있었다. 성폭행을 당한 장애아 중에서 한명은 절벽에서 떨어졌고 또 한명은 기찻길에서 사고를 당했다. 그러나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장애아들의 절박한 입장은 철저하게 가려졌다. 이 모두가 “안개 탓”이었다.

『도가니』를 통해 자애학원의 더러운 현실이 생생하게 드러났다. 장애아들을 성폭행한 짐승같은 학원 이사장 때문에 가슴 한 구석이 아릿하게 물컹거렸다. 그리고 이내 분노의 도가니가 되었다. 왜 사람들은 행복이라는 이름을 내세우며 불행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성폭행을 당했던 장애아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를 냉정하게 심판해야 할 법(法)은 전혀 119 구조대 같지 않았다. 오히려 가해자인 학원 이사장의 잘못을 한 순간의 불장난이라고 하면서 물러서고 말았다. 법마저 걷잡을 수 없는 양심이 시커멓게 타들어갈 지경이니 굳이 다른 사람들을 몹쓸 인간이라고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라는 자괴감이 맴돌았다. 정말이지 “학원 이사장과 장애아의 인권이 같은 줄 알아요?”라는 뜨끔한 질문에 “예‘라고 답하지 못했다. 학원 이사장의 잘못은 분명한데 재판 결과 놀랍게도 그는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 오히려 꼼짝 못하고 갇혀버리는 것은 정의(正義)였다.

책을 읽으면서 내 마음은 몇 번이나 벼락을 치면서 꽝꽝 울렸다. 맞딱드리고 싶지 않은 현실에 불편했다. 그리고 분노했다. “재판장 당신을 고소합니다. 당신은 죽은 거나 마찬가집니다.”라고 말하면서 사람들에게 호소하고 싶었다. 이렇게까지 법정에서 소란을 일으켜야 했던 것은 작가 말대로 진실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단점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진실이 게으르다는 것’이었다. 즉 ‘진실 아닌 것들이 부단히 노력하며 모순된 점을 자고 분을 바르며 부지런을 떠는 동안 진실은 그저 누워서 감이 입에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지도 모른다.’는 절망때문이었다.

진실의 경계(境界)! 지금 이 말이 대수롭지 않게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기간제 교사로 일했던 강인호가 자애학원의 비리에 맞서 싸우다가 끝내는 패배한 짐승이 되어 도망간 것을 굳이 탓할 까닭이 없어보였다. 만약 강인호같은 막막한 상황이었다면 나또한 그랬을 것이다. 눈 한번 감으라는 아내의 바람을 외면하고 남을 위해 그토록 자신있게 할 수는 있어도 부끄러운 자신의 결점이 드러날 때 설령 어렵게 진실을 얻었다고 해도 진실을 지켜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세상은 동화도 환상도 아니었다. 세상이 자기 뜻대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소설을 헤아려보면 그 안에는 공지영 만의 뜨거운 것이 담겨져 있었다. 작가의 전작을 읽어본 사람이 아니더라도 책을 읽고 이렇게까지 불편해지는 게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더 깊게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공지영에게는 인생의 절박한 냄새가 확 풍겨왔다.『도가니』도 예외는 아니었다. 도덕적 폐허 시대에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깨닫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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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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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사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7세기 영국 시인 존 던(John Donne)은 “나는 두 가지 면에서 바보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을 하기 때문에”라고 말했습니다. 한 순간 농담 같은 문장으로 보였습니다. 사랑하면 다 괜찮은 것 아닌가요? 굳이 사랑한다고 말해야 하는지 의뭉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바보라는 말을 곱씹을수록 달짝지근했습니다. 정말이지 그가 아니라 내가 바보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지 모르며 살아왔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외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존 던의 촘촘한 감정을 와락 껴안았습니다. 따뜻한 위로도 잠시 그동안 잊고 있었던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른거렸습니다. 그리고 가슴 한 구석으로 물컹물컹한 액체가 가득 채워지면서 그들 모두들 불러보았습니다. 눈물 나게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니, 눈물 나는 사랑이었습니다. 

내일이면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신경숙의『엄마를 부탁해』를 읽었습니다. 언제가 한 번은 ‘엄마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는 작가의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이런 멜로적인 말들이 남이 듣기 좋으라고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작가는 끊임없이 독백을 쏟아내게 했습니다. ‘그랬구나…이렇게 살았구나…미안하게 살았구나…’ 무심코 펼쳐든 책 속에서 ‘엄마’라는 글자를 스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눈망울이 젖었습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닌 듯 했습니다. 그래서 인지 뒤늦은 후회가 비껴가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쨍한 사랑이었습니다. 엄마라는 존재를 이제야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은 뜻밖에도 엄마의 부재에서 시작합니다. 더구나 ‘엄마를 잃어버린 일주일째다.’라고 파문을 일으킵니다. 생각할수록 아찔했습니다. 일주일째라는 오랜 부재의 시간이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그 시간 동안 가족들이 어떻게 견뎌내는지 사뭇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엄마를 찾을 수 있을 것인지 떨리는 가슴으로 동행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엄마 집을 떠나 도시에 사는 것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도로를 가득 메운 차량들만큼이나 엄마 집이 무료하고 답답해졌습니다. 하긴 이렇게 사는 지도 어느 덧 10년도 더 지났습니다. 몇 년을 그저 삶이 바쁘고 고단하다는 이유로 엄마 집과 뜸하게 지냈습니다. 살다보면 그럴 수 있는 거야, 라고 누군가 다독거려도 엄마 집이 도시의 식구들을 위해 사시사철 뭔가 제조하는 공장이라는 고백 앞에서 차마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이런 자살한 일상 속에서 엄마의 실종을 통해 엄마의 존재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입니다. 실종이라는 말은 공중으로 흩어지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엄마에 대한 기억은 누가 부순다고 해서 부서지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럴수록 한 번이라도 더 간절하게 보고 싶어집니다.

엄마에 대한 오해를 또 하나 풀고 가자면 이 소설은 엄마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전혀 숨기지 않습니다. 설령 실종되지 않았다고 해도 엄마를 잃어버렸다고 일러줍니다. 무엇이 작가를 이렇게까지 뜨겁게 하는 걸까요? 어쩌면 엄마는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무모해보입니다. 가족들에게 엄마하면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게 사랑입니다. 우리는 엄마에게서 너무도 쉽게 사랑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가는 가족들에게 엄마는 처음부터 엄마라는 말이 왜 상처인지, 엄마는 부엌이었고 부엌이 엄마였다는 것이 왜 아름다운지, 인생을 통째로 아이들에게 왜 내 맡길 수 있어야 하는지, 가난이 힘이 되었던 시절에는 눈에 띄지 않았던 엄마의 삶이 지금에 와서는 왜 서글픈지, 애틋한 이야기를 꺼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하나 짚고 넘어가 보니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엄마의 삶인지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작가는 엄마의 부재가 일상화된 사회에서 뼛속까지 파고드는 진실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정말로 믿게 되면 자칫 ‘엄마 애호가’로 불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엄마라는 대수롭지 않은 이름에다 가족들에게 충분히 상처가 될 잃어버렸다, 를 중심으로 소설을 막힘없이 엮어내는 작가의 노고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슴이 먹먹해서 읽기가 힘들었습니다. 엄마는 늘 집에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 혹시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새삼스럽게 의심해봤습니다.

하지만 ‘엄마를 부탁해’라는 제목을 생각해보면 묘한 감정이 출렁였습니다. 가족들이 잃어버린 엄마를 찾아가는 절망 속에서 엄마의 신비로운 삶이 하나둘 밝혀집니다. 딸에게 아들에게 그리고 남편에게 엄마의 완전한 사랑은 그림자였습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자신의 마음을 들키지 않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정말로 가능한 일인가요?

지금도 그렇지만 시골을 갈 때마다 엄마는 뭘 잔뜩 안겨줍니다. 밭에서 땀 흘리며 가꾼 농산물을 차에다 실어줍니다. 가뜩이나 다리가 불편해서 여간해서는 농사짓는 것이 수월하지 않는데도 어디에서 그런 힘이 생겨나는지 해마다 창고에는 엄마의 흔적이 고스란히 쌓입니다. 이것이 엄마에게는 생전의 낙(樂)이었지만 그럴 때마다 답답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습니다. ‘제발 손에 흙 묻히지 마세요.’

그래서 엄마는 가족들에게 미안할 따름입니다. 미안함은 곧이어 가족들에게 상처가 되고 이것이 가족들이 짊어져야 할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처음에 ‘엄마를 부탁해’라는 제목이 체념처럼 들렸던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읽는 내내 심장을 두근거리게 한 것은 우리가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마지막까지 남겨두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비로소마주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등장인물들을 굳이 너, 당신으로 약간은 관심 있게 말하고 있습니다. 엄마의 아픔을 모른 채 그저 우리가 너, 당신이 된다면 무엇이 엄마를 그렇게 힘들게 하는지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삶에 지칠 뿐입니다. 가족이라는 부담감으로 삶을 똑바로 보지 못하며 이렇기 때문에 술에 취해야 겨우 마음의 문을 열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 소설의 작가처럼 지난날의 혼란한 감정들을 말끔히 치유해야 합니다. 이로 인해 ‘엄마를 부탁해.’라는 말이 ‘엄마를 사랑해’라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벅찬 감동으로 들렸습니다.

일찍이 파스칼은『팡세』에서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습니다. 또한 인간은 ‘눈 먼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즉 만약 자기가 오만과 야심과 정욕과 결함과 불의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렇다는 것입니다.『엄마를 부탁해』에서 작가는 엄마에 대해 눈을 뜨게 해줍니다. 그리고 엄마의 인생을 고통과 희생으로만 기억하는 건 우리의 죄의식 때문이라고 털어놓습니다. 죄의식을 무관심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엄마의 삶을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느끼지 못한 체 겉으로 드러난 것에만 빠르게 반응해온 탓입니다. 그런 점에서 엄마에 대한 사랑과 죄의식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죄의식을 어떻게 치유해야 할까요? 다시 파스칼은『팡세』를 읽어보면 ‘인간의 결함을 그처럼 잘 알고 있는 종교에 대한 존경의 마음으로, 그처럼 간절하게 바라는 구원을 약속하는 종교가 진실된 것이기를 갈망하는 마음 외에 무엇을 가질 수 있겠는가, 라고 묻습니다. 이 소설에서 작가 또한 마지막에 이르러 종교의 힘을 빌리고 있습니다. 엄마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엄마가 실종된 지 9개월이 지났습니다. 가족 모두 스스로 지쳤다는 것을 공감할 때 작가는 우리를 저 멀리 성 베드로 성당으로 안내합니다. 그곳에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이 있습니다. 죽은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의 모성애(母性愛)를 경건하게 구현한 작품입니다. 이것이 오히려 아픈 상처를 건드리며 을씨년스럽게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피에타상은 엄마에 대해 눈 뜬 장님으로 살아온 무심했던 자신을 반성하게 하고 참회의 눈물을 쏟아내게 합니다. 또한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엄마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성모(聖母) 앞에서 고백합니다.

신경숙의『엄마를 부탁해』를 읽으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되새겨보았습니다. 그중에서도 엄마는 매우 소중합니다. 엄마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엄마는 고향입니다. 우리는 지금 고향을 잃어버리며 허겁지겁 살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우리도 엄마가 되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일상의 안위만을 생각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앞으로 엄마가 된다고 해도 더 이상 엄마가 아닙니다. 그저 엄마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정도에서 맴돌 뿐입니다.

이 소설을 통해 각박한 일상을 파고드는 엄마의 사랑이 어제와 사뭇 다른 오늘의 풍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이 얼마나 심각한지, 왜 사람들이 이 책을 읽어야 하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엄마에 대한 탄식과 절망이 희망으로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엄마에 대한 상처와 결핍을 잘 만져주고 있습니다.

작가의 눈물이 묻어나는 메시지를 읽으면 읽을수록 서서히 그러면서도 뚜렷하게 엄마의 모습이 새겨졌습니다. “엄마를 사랑해”라고 털어 놓고 싶었습니다. 사랑스런 바보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고통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과 마주하는 엄마의 삶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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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으로 튀어! 1 오늘의 일본문학 3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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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나온『남쪽으로 튀어!』는 무척이나 이채롭다. 오쿠다 히데오는 만화 같은 상상력으로 좌충우돌 실수담을 쏟아내 웃음판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 책에 나오는 우에하라 이치로는 우스꽝스러운 이기주의자 같다, 그는 세금을 내라는 구청직원에게 국민이라는 의무를 포기하겠다면서 마치 전쟁이라고 일으키려고 한다. 곧이곧대로 듣고 있으면 황당해서 웃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이 남자는 왜 이렇게 국가라는 괴물과 싸우려는 것일까? 솔직히 어른이 되고 보면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가도 괜찮다. 누구나 젊었을 때 뜨거웠던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아련한 옛 추억으로 간직하며 하자 없이 살아도 좋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고집을 부리며 더욱 날카로운 칼날을 들이 댄다 .그에게 사회주의 학생운동했던 추억은 과거형이 아니라 묘하게도 현재진행형이다. 이러니 평범한 사람들이 보기에 그는 사회 적응에 실패한 사람으로 변해버린다.

이 책은 일상을 안전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싱거운 이야기이지만 일상을 탈출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박하사탕 맛이 날 것이다. 변화라고는 조금도 꿈꿀 수 없는 족쇄 같은 생을 그럭저럭 살아가기 보다는 희망 하나쯤 가지고 있어도 좋다. 그러나 우리는 희망만으로 힘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문제는 때로는 일상을 탈출하고자 하는 무모한(?) 도전에 있다.

누구에게나 꿈꾸는 방향이 있기 마련인데 이치로에게는 남쪽이었다. 그곳은 고향이었으며 그 보다 더 남쪽은 파이타티로아라는 유토피아였다. 국가라는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난 곳이다. 그가 끝내 그곳에 도착하는 것을 보고 그의 별난 행동과 별난 신념이 별난 감동을 일으켰다. 우리도 한 번쯤 내 멋대로 살아본다면 얼마나 좋을까?

일찍이 키에르 케고르는『현대의 비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대는 본질적으로 분별의 시대고 반성의 시대며 정열이 없는 시대다. 잠시 동안 감격에 들끓는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무감동 상태로 결말이 나는 시대이다.” 다시 말하면 감동이 없는 삶은 우리에게 정열이 없다는 것이다.

그랬구나. 그가 별나게 살고자 했던 것은 다름 아닌 열정 때문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는 탄탄한 집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해서 알콩달콩 살아가길 바란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그에게는 권태로운 일상이며 치명적인 독약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말썽만 일으키는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는 아들에게 “비겁한 어른은 되지 마. 이건 아니다 싶을 때는 철저히 싸워. 져도 좋으니까 싸워. 남하고 달라도 괜찮아. 고독을 두려워 하지 마라.”고 말하는데 알고 보면 그는 행복한 이기주의자를 꿈꾼 좀 특별한 사람이었다.

이처럼 현대인의 마음 하나를 흥미롭게 그리고 있는 오쿠다 히데오라는 작가는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우리가 늘 똑같은 사람에게 지쳤을 때 특별한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 하는데 그의 황당한 시추에이션은 안성맞춤이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웃음을 참지 못했다. 대리만족이 현실에 가까웠다. 그만큼 작가는 현대인의 자화상을 입체적으로 통쾌하게 비꼬고 조롱한다. 더욱이 간결하고 쉬운 문체로 표현된 그의 유쾌한 상상력은 읽는 재미를 충분히 맛보게 했다. 또한 간혹 허를 찌르는 문장들을 보고 있으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쿠다 히데오의 웃음과 뼈아픈 각성을 마주하는 순간 우리도 한 번 소신껏 살아보자는 희망이 팝콘처럼 부풀어 오르는 것을 만끽할 수 있었다. 비록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라고 푸슈킨이 말해더라도 이것이 삶을 잘 사는 비법이라고 하면 비법일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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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바다 - 제12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달의 바다』를 읽었다. 문학동네 작가상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솔깃했다. 더구나 아픔을 부드럽게 감싸는 긍정, 가볍게 뒤통수를 치는 반전의 통쾌함이라는 어느 평론가의 찬사를 확인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약간은 실망스러웠다. 달의 바다라는 제목이 가지고 있는 이중성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파피용』를 연상하게 했다. 그런데 정작 내용은 밋밋하였다.

그러면서도 이 소설에서 작은 대답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인생은 그런 게 아니라’는 식이다. 우리에게 현재와 미래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만약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 책을 읽어보면 은미의 고모는 누가 봐도 우주 비행사라고 말할 수 있다. 고모의 편지에는 우주 비행사의 이야기들이 매우 그럴 듯하게 들려주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고모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모는 나사 소속 우주 비행사가 아니라 우주 테마 파트의 샌드위치 매점 직원일 뿐이었다.

이것이 앞서 말했던 아픔이다. 그리고 거짓말을 통해서 삶을 더욱 긍정하게 하는 반전이 돋보인다. 이 책에서는 두 개의 거짓말이 삶의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그 하나는 은미가 어렸을 때 했던 매너 없는 거짓말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즐거움을 주는 가르침’이다. 결국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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